LOGIN봄비가 그친 지 며칠이 지난 밤이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교실 안은 책장 넘기는 소리와 샤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로만 채워져 있었다.
담임이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훑어봤다.
"오늘은 야자니까 다들 튀지 말고 남아서 공부해."
일제히 표정이 굳었다.
"반장은 도망가는 애들 체크하고."
"네……"
곳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교실 뒤쪽에서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 담탱이."
김재준이었다.
"공부 안 하는 애들은 그냥 보내주지."
"넌 공부 안 할 거냐?"
"전 안 해도 되거든요."
재준이 웃으며 교실을 둘러보다, 창가에 앉은 지수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야."
성큼 다가가 지수 앞에 섰다.
"너가 박지수냐?"
지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대답이 없었다.
"난 이 학교 짱 김재준이다."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내 깔따구 해라."
그제야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내 여자친구 하라고."
지수는 잠시 재준을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해하지 마."
재준의 얼굴이 굳었다.
"하…… 어이없네."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 학교 짱이야. 3학년 석준이 형한테도 인정받은 짱이라고."
몇몇 아이들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너 내 깔따구 하면 앞으로 아무도 못 건드려."
재준이 교실 전체를 향해 소리쳤다.
"야! 박지수 앞으로 누구도 건드리지 마라. 내 거다."
정적이 흘렀다.
"왜 대답들이 없어?"
반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알겠어."
"그렇지."
재준이 만족한 듯 웃었다.
교실 뒤쪽, 수려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저런 식으로 이름을 함부로 갖다 붙이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준이 맨 뒤에서 조용히 공부하던 준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성아."
"응."
"따라와."
"왜?"
"매점. 계산 좀 해야겠다."
준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수 공부한다니까 햄버거랑 음료수 좀 사."
"……응."
그 모습을, 수려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매점 진열대 앞에서 재준이 햄버거와 음료수, 과자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그 뒤로 준성이 계산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지갑을 꺼냈다.
"다 골랐어?"
"응."
"엄마가 오늘은 2만 원밖에 안 주셔서…… 그 안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데."
재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X발새끼가."
"……"
"뒤질라고 또 야부리 까네."
재준이 준성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말대꾸하지 말고 계산이나 해. 뒤지기 싫으면 니네 엄마 직장까지 찾아갈 거야."
준성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때였다.
"계산은 내가 할게."
재준이 고개를 돌렸다. 수려가 어느새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
"니가 왜 계산을 해?"
수려가 준성의 손에 들린 돈을 내려다봤다.
"니가 살 건 니가 해."
재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는 또 어떤 신박한 새끼지?"
"너 나 몰라?"
"나야 김재준. 이 학교 짱." 재준이 가슴을 폈다. "창신고도 얼마 전에 내가 접수했다는 소식 못 들었나보네. 귀머거리야 뭐야?"
수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재준이 피식 웃었다.
"아~ 나 이 새끼가 날 코 묻은 돈이나 뜯는 양아치로 보네."
"잘 아네."
재준의 얼굴이 굳었다.
"뭐?"
"나 한수려야. 너야말로 내 소문 못 들었나 보네."
순간, 뒤에 있던 천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준아."
"왜?"
"그냥 가자."
"뭐?"
"얘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재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천용을 돌아봤다.
"얘가 그렇게 대단해?"
천용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세 명 있어. 한수려, 김진수, 강재평. 그중 한 명이야."
재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한수려? 서울과 인천을 통합한 김진수랑 같은 급이라고?'
다시 수려를 훑어봤다. 생각보다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괜히 사고를 칠 필요는 없었다.
"음…… 그래?" 재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엔 내가 바빠서 봐준다. 다음에 제대로 한번 붙자."
"언제든지." 수려가 웃었다.
재준은 잠시 수려를 바라보다, 준성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도로 갖다 놔."
"……응."
준성이 물건을 진열대에 되돌려놓는 동안, 재준은 먼저 매점을 빠져나갔다.
준성이 물건을 정리하는 옆으로 수려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준성아."
"난 괴롭힘 당하는 거 익숙해서 괜찮아. 그런데 너는 왜 그랬어?"
"너도 학교생활 힘들어질 거야. 다음에 이런 일 생기면 나 혼자 감당할게."
준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재준이가 얼마나 악랄하고 무서운 애인지 너는 몰라.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야. 뒤에 형들도 어마어마하고 얼마나 악랄한지 유명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준성이 진열대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괴롭힘 당하는 동안에는 다른 애들이 안 당하잖아. 난 그걸로 좋아."
수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고 있는 준성의 얼굴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그 순간, 소매 사이로 언뜻 드러난 준성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남은 상처 자국. 수려의 표정이 굳었다.
"준성아. 손목."
준성이 황급히 소매를 끌어내렸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수려는 한동안 말없이 준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한 친구 하자. 너 괴롭힘 당하면 나도 괴로운 걸로 하자. 누가 나 괴롭히면 네가 도와주고, 너 괴롭히면 내가 도와주고. 그렇게 지내자."
준성이 멍하니 그 손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난 도와줄 게 없는데. 딱히 컴퓨터 잘 만지는 거 빼고는."
"그래? 나 스타크래프트 좋아하는데."
"진짜?"
"같이 하면 되잖아. 너 이제 내 친구다."
준성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언제나 프로토스지. 제일 재밌어!" 수려가 당당하게 말했다.
"프로토스로 저그 조지는 게 제일 재밌는데." 준성이 피식 웃었다.
"야! 당장 한판 뜨자!"
몇 시간 뒤, PC방에서 나온 두 사람.
"거의 이길 수 있었는데!" 수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역시 프로토스로 저그 조지는 게 제일 재밌어." 준성이 웃었다.
"너 진짜 얄밉다."
"사람은 전략이 있어야 돼."
"전략이 있어서 재준이라는 애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냐?"
준성이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그것도 한 전략이야. 난 엄청난 전략가거든. 내 전략은 10년짜리야."
수려가 웃음을 터뜨리며 준성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준성아, 우리 내일도 같이 놀자."
"좋아."
"내일모레도."
"좋지." 수려가 활짝 웃었다. "나 너 좋은가 봐."
"나도 좋아." 준성도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그렇게 친구가 됐다.
체크인 시간이 시작되기 전.료칸 정문에는 수려와 타쿠야가 나란히 서 있었다.손님을 기다리며 수려는 몇 번이나 타쿠야를 힐끗 바라봤다.‘말을 걸고 싶은데…….’이상하게 어려웠다.타쿠야에게는 묘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아이돌 시절 TV에서 봤을 때도 그랬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수려가 몇 번이나 말을 걸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수려.”타쿠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응?”“KKB…… 나 좋아했었어.”수려의 눈이 커졌다.“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타쿠야가 피식 웃었다.“활동하기 전부터 좋아했어. 사실 너를 만나는 게 내 목표였거든.”“나를?”“응.”타쿠야는 잠시 수려를 바라봤다.“그리고 결국 만났고…… 가수로서도 널 넘어섰지.”“뛰어넘었다니…… 나를?”수려가 손을 내저었다.“아니야. 그건 아니지.”“왜?”“내가 어떻게 너한테…….”“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른 거니까.”타쿠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래도 내가 목표로 삼았던 사람을 넘어섰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어.”수려는 잠시 타쿠야를 바라봤다.그리고 평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야?”타쿠야가 작게 웃었다.“나, 다시 컴백한다.”“뭐?”수려의 눈이 동그래졌다.“다시 아이돌로 돌아간다고?”“응.”“진짜?”타쿠야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부러워하는 것 봐.”“…….”“농담이야.”“아, 진짜!”수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깜짝 놀랐잖아.”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진심으로 말했다.“그래도 난 네가 진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타쿠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오래전부터……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타쿠야가 조용히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수려가 고개를 갸웃했다.“그게 누군데?”타쿠야가 미소를 지었다.“여기까지만.”“뭐야.”궁금했지만 수려는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수려도 따라 웃었다.잠시 후, 수려가 다시 입을 열었
“도와줘!”아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재준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 손을 뻗었다.그 순간이었다.“지금 당장 그 손 치워.”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복도를 갈랐다.재준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복도 끝에 수려가 서 있었다.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수려?”수려가 천천히 걸어왔다.“너 진짜 끝까지 가는구나.”재준의 얼굴이 굳었다.“놔. 아베가 겁먹었잖아.”짧고 낮은 한마디였다.재준은 잠시 수려를 바라보다 아베의 팔을 놓았다.수려의 시선이 재준에게 고정됐다.예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주먹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수려의 얼굴에는 폭발적인 분노 대신 차갑게 가라앉은 무언가가 있었다.“이번에는 내가 직접 보고 들었어.”수려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화면에는 녹음기가 켜져 있었다.“방금 네가 한 말, 처음부터 전부 녹음했어.”재준의 낯빛이 변했다.“녹음……?”“그리고 아베상은 CCTV도 가지고 있어. 네가 객실에 들어간 시간부터 나온 시간까지 전부 남아 있고.”수려가 한 발 다가섰다.“네가 돈을 훔친 건 아직 내가 직접 못 봤어. 하지만 나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일부러 유카타를 가져다 놓게 한 건 지금 이 안에 다 들어 있어.”휴대폰을 가볍게 흔들었다.“전부
오후 3시.체크인이 시작되자 료칸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됐다.“어서 오세요!”“객실은 이쪽입니다.”“짐은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스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수려도 예외는 아니었다.객실을 안내하고, 비품을 확인하고, 다시 로비로 뛰어왔다.그때였다.“수려야.”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재준이었다.“왜?”재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좀 도와줘.”“뭔데?”“304호 손님이 유카타 사이즈가 안 맞는다고 하네. 엑스라지 하나만 객실에 갖다 놔줄래?”수려는 잠시 재준을 바라봤다.‘꺼림칙한데.’하지만 지금은 체크인 시간이었다.동료끼리 일을 미룰 여유도 없었다.“처음이니까 도와줄게.”“고마워.”재준이 웃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혹시 너 나 아직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나 이제 안 그래. 걱정 마.”수려는 잠시 재준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그래. 한 번 믿어보자.’여기선 너나 나나 똑같은 직원이니까.“알았어.”수려는 창고에서 유카타를 챙겨 304호로 향했다.그 뒤에서 재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는 사실을 수려는 알지 못했다.304호 앞에 도착한 수려는 조용히 노크했다.대답이 없었다.“실례하겠습니다.”문을 열고 들어갔다.객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수려는 기존 유카타 옆에 새 유카타를 가지런히 놓았다.그리고 곧바로 객실을 나왔다.문이 닫혔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쾅!무언가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료칸 전체에 울려 퍼졌다.“누구야!”로비가 순간 조용해졌다.304호 손님이었다.“누가 내 객실에 들어갔어?!”유코가 다급히 다가갔다.“손님, 무슨 일이세요?”“들어오지 말라고 걸어놨는데!”손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304호! 당장 들어간 사람 찾아내!”수려가 앞으로 나섰다.“제가 들어갔습니다.”모두의 시선이 수려에게 향했다.“유카타 사이즈를 바꿔달라고 하셔서 가져다 놓았습니다.”“뭐?”손님의 목소리가 갈라
그날 학교를 나선 수려는 계속 박지수라는 이름을 되뇌었다.우산을 같이 쓰겠느냐고 한마디 건넨 게 전부였는데도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설마…… 그 박지수?’어릴 적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이름.그때였다.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야!”수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조금 전 교실에서 봤던 여자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너!”수려는 눈을 크게 떴다.“나?”여자아이는 숨을 고르면서도 수려를 빤히 바라봤다.“너 나 기억 못 해?”“응?”그 말에 여자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역시.”“뭐가?”“그때도 머리가 나빠 보였는데…… 지금도 똑같네.”“뭐?”수려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여자아이가 피식 웃었다.“너하고 너희 엄마,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잖아.”“……뭐?”여자아이는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너 어릴 때 나한테 드라큘라 이빨 들고 달려들었던 것도 기억 안 나?”그 순간이었다.희미했던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작은 여자아이를 쫓아다니며 가짜 드라큘라 이빨을 들이대던 자신.자신을 피해 도망 다니던 여자아이.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석준.“……아.”수려의 눈이 커졌다.“설마…….”눈앞의 얼굴과 오래전 기억 속 얼굴이 조금씩 겹쳐졌다.“진짜 박지수 맞네!”“이제야 알아보네.”수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야, 네가 이렇게 변했는데 어떻게 바로 알아봐.”“너도 많이 변했거든?”“나는 원래 이랬어.”“허세는 그대로네.”“야.”지수가 웃었다.수려도 따라 웃었다.그제야 수려는 알았다.자신이 계속 마음에 두었던 그 여자아이가 정말 박지수였다는 것을.“진짜 오랜만이다.”수려가 손을 내밀었다.“반갑다.”지수는 내민 손을 잠시 바라봤다.그러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수려의 손을 잡았다.“나도.”손끝이 닿는 순간이었다.수려는 이상하게 손을 놓기가 싫었다.하지만 괜히 의식하는 것 같아 금
료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수려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봤다.이상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다시 만난 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수려야.”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응?”“너 또 멍때린다.”수려가 고개를 돌리자 친구가 피식 웃었다.“요즘 연습 때문에 정신없지?”“좀.”“이번에 진짜 데뷔하는 거 아니야?”“몰라.”“거짓말. 네버그린에서 데려갔다며.”“아직 결정된 거 없어.”수려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속은 늘 조마조마했다. 중학교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고, 지금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 네버그린에서 정식 스카우트까지 받은 상태였다. 누군가는 이미 데뷔가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했지만, 수려에게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오늘도 연습실로 돌아가면 평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언제든 기회가 사라질 수 있었다.그래서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좋았다. 연습생도 아니고, 가수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도 아닌,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있을 수 있었으니까.“자, 조용!”담임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렸다.“올해도 사고 치지 말고 잘 지내자. 특히 수려.”“왜 저만요?”교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연예인 된다고 학교 대충 나오면 안 돼.”“제가 나중에 엄청 유명해져도요?”“네가 성공하면 내가 제일 먼저 자랑할 거다.”“진짜요?”“대신 사고 치면 모른 척한다.”“너무하시네.”다시 웃음이 터졌다.그때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다.톡.또 하나.톡.수려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 시선을 멈췄다.창가에 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주변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에도 그 아이만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운동장과 흐린 하늘, 창문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예쁘다.’수려는 자신
‘이쁜 사람이면 좋겠는데…….’수려는 괜히 입구 쪽을 바라봤다.“자, 들어오세요!”오카미상이 문을 열었다.문이 활짝 열리고 한 남자가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수려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대로 멈췄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저 얼굴을 잊을 리 없었다.일본으로 오기 전.자신의 인생이 무너지는 시작점에 서 있던 얼굴이었다.숨이 턱 막혔다.그런데 남자 역시 수려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자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그리고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오랜만이다, 수려야.”수려의 얼굴이 굳었다.그 목소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하지만 재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메마시떼. 재준 데쓰.”능청스러운 일본어가 로비에 울렸다.“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수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준은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이어갔다.“제가 일본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 많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그러고는 한쪽 눈을 살짝 찡긋했다.“아, 그리고 여기 먼저 일하고 있는 수려와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직원들의 시선이 수려에게 향했다.재준은 웃으며 말했다.“아주 오래된 친구예요.”수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친구.그 단어가 귀에 박혔다.“수려야, 잘 지냈어?”재준이 다시 한번 웃었다.“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진짜 반갑다.”수려는 대답하지 않았다.“수려 친구래.”“둘이 같은 학교였구나.”직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수려는 그 시선들을 견디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재준은 그런 수려의 반응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제 취미는 건담이랑 세일러 문 커스텀 모으기입니다.”직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재준도 따라 웃었다.“그리고 이번 기회에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해서…….”재준이 아베를 바라봤다.“일본 여자친구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하하하!”로비에 웃음소리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