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재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등교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준성이었다.
준성은 그날도 어김없이 재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손 더 높이.”
“……응.”
재준은 준성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한수려.
어제 매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말을 받아치던 목소리.
‘아…….’
재준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좋은 방법 없을까.’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놈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어제의 수치심보다 더 화가 나는 건 따로 있었다.
수려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는 것.
‘저 새끼를 어떻게 조져야 하지?’
재준의 머릿속에 온통 한 사람만 남았다.
그때였다.
“야, 재준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어, 선배.”
3학년 상욱이었다.
상욱은 교실 안을 대충 둘러보다가 창가 쪽에서 시선을 멈췄다.
지수였다.
등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수는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상욱의 눈이 커졌다.
“와.”
잠시 말을 잃더니 피식 웃었다.
“쟤 완전 예쁜데?”
재준은 지수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형.”
“왜?”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소개?”
“네.”
재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가 찜하긴 했는데…… 상욱 선배가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데려올게요.”
상욱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
“그럼 한번 데려와 봐.”
“네.”
재준은 기다렸다는 듯 지수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걸어가 지수의 책상 앞에 섰다.
“야, 박지수.”
지수는 책에서 눈조차 떼지 않았다.
“나와 봐.”
대답이 없었다.
“인사시켜 줄 사람 있어.”
지수는 여전히 책상 정리만 하고 있었다.
재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장난하냐?”
침묵.
“상욱이 형이 부르잖아.”
지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뭐?”
“내가 왜 가야 하는데?”
재준의 얼굴이 굳었다.
교실 안의 몇몇 아이들이 슬쩍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상욱이 보고 있었다.
“일어나.”
재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지수의 손목을 낚아챘다.
“놔.”
지수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
재준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힘을 주며 지수를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놔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준의 손목을 누군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수려였다.
“……뭐야, 너?”
“손 놓으라고.”
수려의 눈빛은 서늘했다.
재준은 잠시 버텨봤다.
하지만 손목을 파고드는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결국 재준이 손을 놓았다.
“지수한테 손대지 마.”
수려가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준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준성아.”
“응?”
“손 내려.”
준성이 얼른 손을 내렸다.
“으…… 응.”
재준은 손목을 문지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뭔데 네가 또 끼어들어?”
수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재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부딪치면 어제와 같은 꼴이 될 게 뻔했다.
재준은 이를 악물었다.
“됐다.”
몸을 돌렸다.
“재수 없게.”
그리고 상욱에게 다가갔다.
순간 재준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억울한 사람처럼 눈썹을 늘어뜨렸다.
“형.”
“왜?”
“제가 지수 데려오려고 했거든요.”
재준이 수려를 힐끗 바라봤다.
“그런데 얘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방해했어요.”
상욱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었다.
“어떤 놈이야?”
상욱이 수려를 바라봤다.
“야.”
손가락으로 수려를 가리켰다.
“네가 허락도 없이 내 여자 될 애를 막았냐?”
수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 여자?”
“그래.”
상욱이 어깨를 폈다.
“이 감도 없는 좆밥이…….”
“실수는 선배가 하신 것 같은데요.”
수려가 피식 웃었다.
상욱의 표정이 굳었다.
“뭐?”
상욱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야.”
뒤에 있던 덩치 큰 학생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저 새끼 무릎 꿇게 해.”
그때였다.
“저기요!”
준성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 때문이면 수려까지 괴롭히지 마세요!”
준성이 수려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책임질게요!”
수려가 준성을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너 때문 아니야.”
수려가 시선으로 지수를 가리켰다.
“지수 때문이야.”
“아…….”
준성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머쓱하게 한 발 물러섰다.
그 순간.
가장 덩치가 큰 선배가 수려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이 얼굴을 향해 크게 휘둘러졌다.
수려는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피할 필요가 없다는 듯 서 있었다.
주먹이 얼굴에 닿기 직전.
수려의 고개가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휘익!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수려의 주먹이 상대의 옆구리에 꽂혔다.
퍽!
“컥……!”
선배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두 번째 선배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수려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상대의 팔을 흘려보내며 몸을 돌렸다.
퍽!
팔꿈치가 명치에 꽂혔다.
“억!”
숨이 막힌 선배가 뒤로 밀려났다.
세 번째 선배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수려가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주먹이 연달아 뻗었다.
퍽!
퍽!
마지막 주먹이 턱을 스쳤다.
세 사람의 몸이 차례로 바닥에 쓰러졌다.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재준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뻔했다.
“이 새끼가……!”
재준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복싱을 배운 만큼 자세는 정확했다.
원투.
빠르고 묵직한 주먹이 수려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수려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스윽.
수려가 한 발 옆으로 미끄러지듯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재준의 손목을 낚아챘다.
“윽!”
팔이 비틀렸다.
재준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다음 순간.
쿵!
재준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아……!”
재준이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다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수려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싱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수려는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주짓수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움직임 자체를 묶어버렸다.
재준은 그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놓…… 놔.”
수려가 조용히 말했다.
“다음부터 지수한테 손대지 마.”
재준이 이를 악물었다.
“…….”
“알겠어?”
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려가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알겠냐고.”
“알겠어!”
그제야 수려가 손을 놓았다.
재준은 손목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때 수려의 시선이 상욱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상욱이 형.”
상욱의 표정이 굳었다.
“저예요.”
“…….”
“저 기억 못 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려가 미소를 지었다.
“한수려.”
상욱의 눈이 커졌다.
“……수려?”
“네.”
상욱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한수려…….”
2년 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등학생이었던 자신이 중학생에게 맞아 쓰러졌던 날.
그날의 수치심.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어린 수려의 얼굴.
상욱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석준이 동생…….”
“이제 기억나세요?”
수려가 웃었다.
“어떻게 사나 궁금했는데.”
상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려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학생들에게 향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여전하네요.”
상욱의 얼굴이 굳었다.
‘아…… 씨발.’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완전히 잘못 걸렸네.’
하지만 상욱은 곧 표정을 바꿨다.
“야~ 수려야!”
갑자기 목소리가 밝아졌다.
“우리 학교로 전학 왔으면 형한테 먼저 연락을 하지.”
“못 알아보셨잖아요.”
“아, 그건 미안하다.”
상욱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제대로 이야기 듣고 온 게 아니라서.”
수려가 대답하려는 순간.
상욱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 그 지수라는 애.”
“지수요?”
“소개 좀 시켜줄 수 있냐?”
수려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지수는 관심 없다던데요.”
“내가 직접 물어보면 다르지.”
상욱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마침 복도 끝에서 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란을 듣고 나온 모양이었다.
상욱은 곧장 지수에게 다가갔다.
“저기.”
지수가 걸음을 멈췄다.
“나 3학년 전상욱인데.”
지수는 상욱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
상욱의 얼굴이 굳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몇몇 학생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킥킥.”
상욱은 헛기침을 했다.
“뭐가 웃겨?”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상욱은 민망한 얼굴로 수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네?”
“근데 석준이한테는 꼭 비밀로 해줘.”
수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쪽팔리잖아.”
수려가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상욱은 재준을 따로 불러냈다.
복도 구석.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야!”
상욱이 재준을 노려봤다.
“한수려라고 진작 말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너 나 좆되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닙니다!”
상욱이 재준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내가 걔한테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재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사람 알아보고 건드려.”
“……네.”
상욱은 한참 재준을 몰아붙이다가 자리를 떠났다.
복도에 혼자 남은 재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상욱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수려…….’
손이 꽉 쥐어졌다.
‘힘으로는 안 되겠네.’
어제 매점에서 자신을 비웃던 얼굴.
오늘 자신을 무릎 꿇린 얼굴.
그리고 상욱까지 자신을 버리게 만든 얼굴.
재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지.’
잠시 생각하던 재준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그 안에는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이름 하나가 저장되어 있었다.
재준은 그 이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게 웃었다.
“형.”
잠시 침묵.
“나…… 부탁 하나만 하자.”
한편.
수려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교실로 돌아왔다.
준성이 얼른 다가왔다.
“수려야.”
“왜?”
“괜찮아?”
“내가 뭘?”
“아까 싸움.”
수려가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야.”
준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려야.”
“응?”
“고마워.”
수려가 지수를 바라봤다.
“뭐가?”
“아까.”
지수가 살짝 웃었다.
“나 도와준 거.”
수려도 웃었다.
“친구잖아.”
지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수려는 그 미소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날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수려는 몰랐다.
자신이 친구를 지켜주기 위해 내민 손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복수의 이유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재준이 걸었던 한 통의 전화가,
훗날 수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사건의 시작이 될 거라는 것도.
“수려상! 이것 좀 봐요!”프런트에서 들려온 유코의 다급한 목소리에 수려가 고개를 돌렸다.유코는 컴퓨터 앞에 서 있었다. 화면에는 료칸 공식 홈페이지의 예약 문의 게시판과 후기란이 떠 있었다.수려가 무심코 다가갔다.그리고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게시판 곳곳에 비슷한 내용의 글이 반복해서 올라와 있었다.〈여기 미성년자랑 놀아난 직원 있다면서요? 애 있는 집은 절대 예약하지 마세요.〉〈진짜예요? 사진도 있다던데 왜 아무 조치도 없나요?〉〈이런 곳에 가족 여행을 어떻게 보내요?〉댓글은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다.수려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이거…… 언제부터 이랬어요?”“어젯밤부터인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예약 문의도 세 건이나 취소됐어요.”유코의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수려는 마우스를 잡고 게시판을 아래로 내렸다.끝이 없었다.비슷한 문장.비슷한 표현.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몰려 있는 작성 시간.그 순간, 수려의 머릿속에 재준의 말이 떠올랐다.‘곧 뉴스가 나올 거야.’수려의 얼굴이 굳었다.“……시작됐구나.”그때 프런트 쪽으로 오카미상이 다가왔다.오카미상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빠르네요.”“심각한가요?”수려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오카미상은 고개를 저었다.“한사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누군가 일부러 일을 키우고 있어요.”오카미상은 게시판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이 정도면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그러다 수려를 돌아봤다.“혹시 주변에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은 없나요?”수려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준성.’어릴 때부터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친구.특히 인터넷 보안이나 프로그램 분석에 관해서라면 수려가 아는 사람 중 준성을 따라갈 사람은 거의 없었다.“한 명 있어요.”수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연락해 볼게요.”수려는 곧바로 준성에게 전화
웅크린 채 절망에 빠져 있던 수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타쿠야, 유코, 그리고 아베였다.타쿠야가 수려 앞에 쪼그려 앉았다.“왜 이러고 있어?”수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나…… 갈 곳이 없어.”“그게 무슨 뜻이야?”“난 이제 한국에도, 일본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어.”수려의 목소리가 떨렸다.타쿠야가 수려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있을 곳이 왜 없어.”그리고 수려의 어깨를 잡았다.“수려가 있을 곳은 여기야.”“…….”“우린 너 믿어. 아베도, 유코도, 그리고 나도.”유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까는 미안했어요.”수려가 고개를 들었다.“소문을 듣고…… 혹시나 했어요. 하지만 역시 수려상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유코는 수려의 눈을 바라봤다.“눈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아베도 한마디 거들었다.“나는 그딴 소문, 처음부터 안 믿었어.”아베가 손을 내밀었다.“그러니까 일어나.”수려는 잠시 그 손을 바라봤다.그리고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웅크려 있던 수려를 타쿠야와 아베, 유코가 함께 일으켜 세웠다.‘그래…… 이번엔 혼자가 아니야.’그 생각이 조금씩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혼자라고 생각했다.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니었다.적어도 지금 이곳에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수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오카미상, 계세요?”아베가 방문을 향해 말했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오카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오카미상은 수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많이 속상하죠, 수려상.”수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유명하게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구설수에 휘말릴 때가 있어요. 타쿠야도 예전에 그랬고요.”오카미상이 부드럽게 웃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해결 방법은 우리 함께 찾아봐요.”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모토무라와 신스케였다.두 사람 역
다음 날 아침, 수려가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하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가 이내 하나둘 피하는 것을 보며 수려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평소라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던 동료들도 슬쩍 자리를 옮겼고,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거나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한수려, 쟤 소문 진짜예요?”“모르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어떻게 알아.”“여기 앉기 전에 가자.”당황한 수려가 소리쳤다.“다들 왜 이래? 그런 황당한 소문을 다들 믿는 거야?”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업무가 시작된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결국 수려는 유코상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직도 그 소문 때문이에요?”유코상은 잠시 수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나도 수려상을 믿고 싶어.”“저 정말 그런 일 안 했어요.”“알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하지만 유코상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점심시간이 되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수려가 식당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웠고, 결국 수려는 혼자 남아 조용히 식사를 해야 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준은 속으로 통쾌해했다.‘그래. 한수려는 일본에서도 이래야지.’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소문을 믿었다.수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이번에도 내가 이겼어.’그날 저녁, 업무가 끝난 뒤에도 수려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료칸 뒤편의 작은 정원에 혼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재준은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수려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나는 잘 살면 안 되는 존재인가.”“누군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사실이 되는 건가.”한국에서 느꼈던 절망을 일본에 와서 다시 느끼고 있었다.그 순간, 재준은 수려를 보며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과 마주했다.동정이었다.
“사실…… 나 수려 아버지를 알아.”아베의 말에 수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우리 아버지를……?”“응.”아베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수려 아버지는 네가 여기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정말?”연락조차 되지 않는 아버지였다.그런 아버지의 소식을 아베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수려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그것만 일단 알아둬.”아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지금은 내가 전부 말할 수 없는 입장이야. 그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나도 연락이 안 되는 아버지를…… 아베가 알고 있다고?”수려는 한동안 아베를 바라봤다.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알겠어.”수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오키나와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료칸으로 돌아온 수려에게 재준이 말을 걸었다.“오키나와는 잘 다녀왔어?”수려가 재준을 바라봤다.“왜?”“그냥. 갔다 왔으니까 물어본 거야.”“잘 다녀왔어.”“그래?”재준이 가볍게 웃었다.“재밌었나 보네.”수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무슨 뜻이야?”“아무 뜻 없어.”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래…… 실컷 즐겼겠지.’재준은 더 이상 수려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수려가 믿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흔드는 것.그리고 결국 수려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며칠이 지나자 수려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료칸 사람들의 시선이 전과 달랐다.눈이 마주치면 슬쩍 피했고, 자신이 지나가면 나누던 대화를 멈췄다.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자 확신할 수 있었다.무언가 있었다.‘……뭐지?’수려는 결국 유코를 붙잡았다.“유코상.”“응?”“혹시…… 무슨 일 있어요?”유코가 잠시 수려의 표정을 살폈다.“왜 그렇게 생각해?”“사람들이 자꾸 저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서요.”
오키나와의 밤무대가 끝난 밤 10시.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수려와 타쿠야는 로비 한쪽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는 유코와 아베가 마주 앉아 있었다.유코가 한참 동안 아베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아베상은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제가 원래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혹시…… 저도 불편해요?”“아니요.”아베가 고개를 저었다.“유코상은 편해요. 겉모습보다 그 사람 자체를 먼저 보는 것 같아서.”“그런가?”“그리고…… 부러워요.”아베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유코가 고개를 갸웃했다.“뭐가요?”“자신을 숨기지 않는 거.”아베는 순간 말을 멈췄다.“……그냥 부럽다는 뜻이에요.”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아베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타쿠야상은 유코상한테 잘해주죠?”유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수려상도 아베상한테 잘해주잖아요.”아베가 수려 쪽을 바라봤다.수려는 타쿠야와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네. 수려는…… 제가 어떤 사람이든 편하게 대해줘요.”유코가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수려상한테는 아직 말 안 했죠.”아베의 어깨가 움찔했다.“……알고 있었어요?”“그냥……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요.”유코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잠시 말을 멈춘 유코가 아베를 바라봤다.“수려상이 더 깊이 빠지기 전에.”아베가 씁쓸하게 웃었다.“알아요. 저도.”“그런데……?”아베의 시선이 다시 수려에게 향했다.“조금만 더…….”목소리가 낮아졌다.“조금만 더 이 행복을 누리고 싶어요.”아베가 잔을 내려다봤다.“모두가 이기적이라고 해도.”짧은 침묵이 흘렀다.“처음이거든요.”아베가 힘없이 웃었다.“이런 마음도…… 이런 시간도.”유코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대신 아베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오키나와 호텔 연회장 / 오후 6시호텔 연회장.다다미 위에 스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모두 유카타 차림이었다. 평소 료칸에서 입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색감도 화려했고, 저마다 고른 무늬도 제각각이었다.수려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가이세키 요리를 바라봤다.작은 상 위에 회, 구이, 조림, 식사와 국, 디저트까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료칸에서 손님들에게 내어드리던 가이세키를, 내가 손님 입장에서 먹게 되네.’수려가 피식 웃었다.‘이런 서비스는 H호텔에서도 한번 접목해볼 만한데…….’옆에서 모토무라가 눈을 반짝였다.“드디어 내가 이걸 먹어본다!”“너 가이세키 처음이야?”“응. 매번 대접만 했지, 먹어볼 기회는 없었거든.”모토무라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봤다.“손님들은 나 모르게 이런 행복을 즐기고 있었구나.”“뭐야, 그게.”수려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때였다.코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자!!! 오늘은 달빛 료칸의 최고 인기 가수, 코즈키의 특별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또 시작이네.”누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곧이어 오키나와 전통 음악이 흘러나왔다.조리팀 후배들이 뒤에서 손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웠다.“히야사사! 아이야!”코즈키가 흥겹게 노래를 시작하자 연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빠른 리듬 위로 삼선(三線)의 경쾌한 소리가 얹혔다.코즈키가 어깨를 들썩이며 발을 구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히야사사!”후렴이 나올 때마다 연회장 절반이 함께 소리쳤다.코즈키는 즉석에서 가사까지 바꿔 불렀다.“코즈키가 우마레따~!”억지로 끼워 넣은 가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역시 코즈키 선배!”코즈키는 노래를 이어가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나 결혼은 세 번이나 한 남자야. 인생 경험이 많다는 거지.”“그걸 왜 지금 자랑해!”또다시 웃음이 터졌다.마지막 소절에서 코즈키가 마이크를 하늘로 치켜들자, 근처에 있던 몇몇이 젓가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