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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여운
박연휘의 별저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는데 방 안에서 야릇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 선 채 가슴 한편이 은근히 아려 왔다.

박연휘 때문이 아니라, 그를 어리석도록 사랑했던 과거의 나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정 내 것이라 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이곳의 모든 것은 박연휘가 아낌없이 돈을 써서 사 준 것들이었다.

무엇 하나 가져갈 자격이 없었다.

떠나려고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기척을 들은 박연휘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쫓아 나왔다.

눈에는 희미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서채령, 그날 의원에서 어찌 갑자기 사라진 것이냐?"

"연화를 의원에게 데려다주고 돌아왔더니 네가 없었다."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는 그저 송연화 다음에야 떠올려지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선택도, 유일한 사람도 될 수 없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저를 떠올리고도 찾으러 오시기는커녕 송연화와 동침하셨군요?"

"그리 부르지 마라."

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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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9화

    송연화를 내친 박연휘는 곧장 나를 찾아왔다.내 앞에서 조심스럽게 품속의 비단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함 안에는 객잔에서 내 손으로 깨뜨렸던 옥패가 놓여 있었다.다만 산산이 갈라졌던 옥의 표면을 이제는 가느다란 금실이 촘촘하게 잇고 있었다.옥패를 내밀며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채령, 내가 잘못했다.""이 옥패를 고치려고 도성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을 찾았다. 장인은 한 번 깨진 인연도 다시 이어질 수 있고, 금실로 이었으니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고 하더군.""사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송연화는 이미 쫓아냈으니 다시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거다.""서채령,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되겠느냐?"금실로 메운 균열이 가득한 옥패를 내려다보았지만 마음에는 작은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한 번 깨진 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다.아무리 많은 순금으로 메운다 해도 갈라진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옥패를 받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박연휘, 하나만 묻겠다."박연휘는 내 말에 영문도 모른 채 긴장한 듯했다.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물어라.""너는 송연화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박연휘의 몸이 굳었다.불과 며칠 전 침상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도 선명했다.박연휘는 송연화를 위해 내게 다른 사내를 유혹하라고까지 했다.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송연화가 너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머릿속에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서채령,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그가 말을 더 이으려 하자 내가 나직이 입을 열어 막았다."내가 언제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느냐?"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연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내 말을 믿지 않고, 내가 아직 화가 나 일부러 모진 말로 찌르는 줄 알았다."네가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를 대용품으로 삼고 상처 준 일을 원망하고 있겠지.""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다. 나와 삼 년을 함께하지 않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8화

    박연휘의 별저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려는데 방 안에서 야릇한 숨소리가 들려왔다.문밖에 선 채 가슴 한편이 은근히 아려 왔다.박연휘 때문이 아니라, 그를 어리석도록 사랑했던 과거의 나 때문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정 내 것이라 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이곳의 모든 것은 박연휘가 아낌없이 돈을 써서 사 준 것들이었다.무엇 하나 가져갈 자격이 없었다.떠나려고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기척을 들은 박연휘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쫓아 나왔다.눈에는 희미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서채령, 그날 의원에서 어찌 갑자기 사라진 것이냐?""연화를 의원에게 데려다주고 돌아왔더니 네가 없었다."우스울 따름이었다.나는 그저 송연화 다음에야 떠올려지는 사람이었다.첫 번째 선택도, 유일한 사람도 될 수 없었다.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도련님께서는 저를 떠올리고도 찾으러 오시기는커녕 송연화와 동침하셨군요?""그리 부르지 마라."미간을 찌푸렸다."송연화는 그저...""도련님의 어린 시절 첫사랑이지요. 압니다."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지만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했다."이제 마음껏 그 여인을 사랑하십시오. 대용품인 저는 물러날 때가 됐습니다."박연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누가 가도 된다고 했느냐?"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처음 맺은 계약에 분명히 적혀 있었습니다. 빚을 모두 갚기만 하면 저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요.""구진명이 네 빚을 대신 갚으면 끝날 줄 알았느냐?"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서채령.""그럼 무엇을 원하느냐? 너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의 몸이냐?"내가 되물었다."박연휘, 너는 사랑이 무엇인지 한 번도 알지 못했다."그때 송연화가 목덜미에 붉은 흔적을 가득 남긴 채 침방에서 걸어 나왔다.박연휘의 팔에 매달렸다."연휘 오라버니, 그냥 보내 줘요. 어차피 대용품일 뿐이잖아요."박연휘가 갑자기 그녀를 뿌리쳤다."입 다물라!"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7화

    나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대리시(大理寺)로 갔다.아전의 안내를 받아 구진명의 집무실에 도착했다.내가 찾아올 줄 몰랐는지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채령 소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다가갔다."공자님, 저택에 있던 제 초상화들은 대체 무엇입니까?"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구진명은 침묵했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뜨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채령 소저,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품었습니다."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교방에서 붉은 춤옷을 입고 누구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춤을 추셨지요.""무대 아래의 모든 이가 소저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습니다."그 순간 구진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구진명은 서채령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세월이 흘러 청춘이 저물고 세상 누구도 더는 서채령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 오직 자신만은 주름 하나하나 아래에 남은 아름다운 기품을 알아보며 곁을 지키겠다고."그때 알았습니다. 소저는 빛나야 하는 사람이고, 소저의 세상은 아주 넓다는 것을요.""하지만 제 마음은 너무도 작아서, 그날 마음을 빼앗아 간 단 한 사람만 품을 수 있습니다."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박연휘는 내가 춤추는 것을 싫어했다.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희라는 내 신분을 업신여기기까지 했다.내 춤은 오직 자신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나를 새장 속에 가두고 제 소유물로 삼았다.하지만 구진명은 내가 높은 무대에 올라 마음껏 빛나기를 바랐다.성큼 다가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그리고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구진명은 처음에는 굳어 버렸지만, 이내 주도권을 가져가 입맞춤을 깊게 했다.잃었던 것을 되찾은 기쁨과 오랫동안 억눌러 온 연정이 담긴 입맞춤이었다.뜨겁고도 애틋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몰아쉬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공자님,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참 좋네요.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6화

    박연휘가 잔뜩 화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서채령!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함치며 성큼성큼 달려 들어왔다.박연휘는 쓰러진 송연화를 안타깝게 부축해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연화야, 괜찮으냐? 크게 다친 것은 아니냐?"다급한 목소리와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연화는 선의로 네 어머니를 보러 온 것인데, 어찌 이토록 모질게 해칠 수 있느냐!""그렇게까지 연화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냐?"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제가 민 게 아닙니다! 연화 소저가 스스로...""게다가 제 어머니를 죽인 사람도 연화 소저입니다!"박연휘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싸늘하게 말을 잘랐다."그만하라!""연화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실수로 약그릇을 건드렸을 뿐이다.""게다가 네 어머니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지 않았느냐.""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그렇게 따질 필요 없다. 나중에 네 어머니를 위해 풍수 좋은 묏자리를 골라 주마."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어머니의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얼어붙었다.한때 그는 내게 약속했다."내가 살아 있는 한 네 어머니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하마.""도성에서 가장 뛰어난 명의를 부르고 제일 귀한 약을 써서 반드시 낫게 하겠다."그토록 굳게 맹세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결국 그는 약속을 저버렸다.송연화가 그의 품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아프다고 칭얼거렸다.박연휘는 금세 초조해져 그녀를 안고 서둘러 의원을 찾아갔다.나는 어머니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손을 붙잡은 채 통곡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따뜻한 손 하나가 어깨 위에 놓였다.구진명이었다."제가 돕겠습니다."그 짧은 한마디에 간신히 억누르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구진명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일을 도운 뒤 나를 제 저택으로 데려갔다.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듯 지쳐 있었다.침상에 닿자마자 깊은 잠에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5화

    "서채령!"박연휘의 고함에는 배신당했다는 분노가 가득했다."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나는 느릿하게 침상에서 일어나 이불을 끌어다 대충 몸에 둘렀다."도련님께서 무슨 일로 그리 노하십니까?"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채 태연히 물었다."맡기신 일을 해냈으니 상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박연휘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송연화가 옆에서 빈정거리며 불을 지폈다."어머나, 채령 소저는 정말 대단하시네요.""벌써 탐화랑을 사로잡다니요.""연휘 오라버니, 저렇게 능숙한 걸 보면 분명 수많은 사내를 모셔 봤다니까요!"송연화의 말이 이어질수록 박연휘의 안색은 더욱 험악해졌다.그때 구진명이 두 개의 찬합을 들고 문을 열어 들어왔다.알고 보니 떠난 것이 아니었다.방 안의 박연휘와 송연화를 본 구진명은 잠시 멈칫했다.그러더니 찬합을 탁자에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레 나를 품에 안았다."채령 소저, 배고프지요? 우선 뭐라도 좀 드세요."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그 광경을 본 박연휘는 분노가 더욱 치밀었다."서채령, 그리도 사내가 고프냐?"박연휘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저자는 널 가지고 놀 뿐이다. 네가 탐화랑의 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적어도 저분은 저를 대용품으로 여기지 않습니다!"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고집스레 턱을 들었다.박연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내 팔을 난폭하게 잡아끌었다.나를 데려가려는 것이었다.구진명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놓아라!"박연휘가 비웃었다."왜, 하룻밤을 보냈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나를 놓더니 구진명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다니! 네가 어찌 감히!"구진명도 물러서지 않고 곧장 맞섰다."네 여자라니? 박연휘,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두 사람은 순식간에 뒤엉켜 주먹다짐을 벌였다.결국 객잔의 점소이들이 달려와 두 사람 모두 의원에게 데려갔다.의원의 처소.박연휘는 이마에 고약을 붙이고 입가가 퍼렇게 부은

  • 한 번의 춤, 평생 단 그 사람   제4화

    박연휘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려 손을 들었다.고개를 돌려 피하자 박연휘는 허공에서 손을 멈춘 채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이윽고 힘없이 침상에서 내려가 등을 돌린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가거라."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무 겉옷이나 걸쳤다.문 앞에서 돌아보았지만 박연휘는 고개만 숙인 채 나를 보지 않았다.자조적으로 입꼬리를 당긴 뒤,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가랑비가 내리는 깊은 밤, 넋을 잃은 채 긴 거리를 걸었다.우산도 없이 차가운 빗물이 온몸을 적시도록 내버려 두었다.얼마나 걸었을까.걸음을 멈추고 줄곧 뒤따라온 구진명을 돌아보았다.멀지 않은 곳에 서서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왜 따라오시는 겁니까?"쉰 목소리로 물었다.구진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참이나 말을 더듬었다.차갑고 고고한 탐화랑의 모습 아래로 수줍음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내 앞까지 다가와 겉옷을 벗어 다정하게 둘러 주었다."걱정돼서요."낮게 답한 그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복수에서 오는 쾌감이 가슴 한편에서 솟구쳤다.고개를 들어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공자님."조용히 입을 열었다."저와 하룻밤을 보내시겠습니까?"허름한 객잔에서, 차갑기만 해 보이던 탐화랑이 귀까지 새빨개질 만큼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진명이 옷고름을 풀던 내 손을 붙잡았다."이러지 않아도 됩니다."나는 냉소했다."제가 더러워서 싫으신가요?"하지만 구진명은 그저 다정히 내 옷깃을 여며 주었다."그저...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잠시 멈칫했다가 먼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천천히 이끌었다.손끝이 그의 살갗을 누빌 때마다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방 안에는 뜨겁고 야릇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그렇게 하룻밤을 보냈다.다음 날 아침, 피로에 잠긴 몸으로 눈을 떴다.옆자리는 비어 있었다.구진명은 이미 떠난 뒤였다.공기에는 지난밤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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