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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예슬의 오피스텔.“씨발!”괴성을 지른 예슬이 유리컵을 거세게 집어던지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져 깨졌다.‘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그날 이후, 정한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그가 제게 그럴 순 없었다. 적어도 그가 그래선 안됐다.“그깟 진혜서, 진혜서! 진혜서!!!”소리를 거세게 지른 예슬이 머리를 쥐어짜듯 움켜잡아 괴로워했다.도대체 언제쯤. 대체 어떻게.어떻게 해야 진혜서에게서 정한을 온전히 빼앗아 가질 수 있는 걸까.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예슬이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하….”기어이 제가 움직이게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진혜서는 눈엣가시였다.늘 더러운 짓을 하게 만드는 그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단 한번도 저를 돌아봐주지 않는 정한이 야속했다.추했던 겉모습을 지우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고, 성형으로 외모를 가꿨다.진혜서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못지않게 남자들에게 대시도 받으며 자존감도 많이 올라갔었다.하지만 진혜서만 마주치면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정한과 혜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때면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어떻게 해서든 둘을 떼어내야 했다.제가 가질 수 없다면 진혜서도 영영 정한을 가지지 못해야 했다.*“와아, 너무 예쁘다….”혜서와 정한은 서울에서 열린 불꽃축제에 함께 놀러왔다. 수많은 인파속에서도 찬란히 번져 빛나는 불꽃놀이가 아름다웠다.“그러게, 예쁘네.”하늘을 올려다보는 혜서의 옆모습을 살피던 정한은 불꽃이 아닌 혜서를 바라보며 답했다.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진혜서도 아름다웠다.저처럼 예쁜 것을 좋아하고, 눈이 부신걸 동경하는 모습이 색다르기도 했다.하나부터 열까지. 아무래도 진혜서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불꽃놀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다?”“그래? 또 뭐 있어. 안 해 본거.”“너무 많은데?”“앞으로 나랑 같이 해. 차근차근 하나씩.”앞으로라는 말과
다음날, 퇴근 후 혜서는 백화점에서 나와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번화가에서 정한을 기다렸다.이윽고 그녀의 앞으로 익숙한 세단이 서자, 단번에 보조석에 몸을 실었다.“이렇게까지 해야 해?”“응. 보는 눈이 많아.”혜서의 부탁으로 정한은 더 이상 백화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둘 사이를 공공연하게 알 사람들은 알았지만 혜서는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정한은 썩 내키진 않았으나 최대한 맞춰주는 중이었다.“주말에 시간 돼?”“데이트 신청이야?”천천히 차를 출발시킨 정한이 전면의 도로 끝을 살피며 질문했다.“데이트도 하고, 우리 엄마도 뵈려고.”“아….”잊고 있던 정한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혜서에게도 친숙했던 분이었다.‘혜서 놀러 왔니?’학창시절 하교 후, 정한과 함께 집에 놀러가면 늘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시던 예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꽃을 사랑해 늘 정원에 꽃을 가꾸며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응, 당연히 되지.”“혜서 네가 오면 정말 좋아하시겠다.”“그러셨으면 좋겠다.”씁쓸한 미소를 띄운 혜서가 차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새삼 유일한 가족을 잃는다는 건 어떤 감정일지 실감이 가질 않았다.혜서 역시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혼으로 인한 이별이었다.아픔으로 생이별을 당한 정한과는 비교가 되질 않을터였다.“아줌마 꽃 좋아 하셨었는데… 꽃 사가자.”“그래.”한참을 달린 차가 정처없이 내달리다 이내 가로수 길에 다다랐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기전 단풍이 예쁘게 물든 산책로를 발견한 정한이 멈춰 세운 것이었다.“좀 걸을까.”“응.”나란히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익숙하게 손을 잡고 걸었다. 바스락바스락 걸을때마다 낙엽 소리가 나는 길을 걸어나가며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벌써 겨울이 오려나봐.”“추워?”혜서의 말에 정한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시선으로 혜서를 훑던 그가 벌어져있는 혜서의 코트 앞섬을 단정히 채워주
일주일간 혜서의 일상은 특별한 것 없이 흘러갔다. 본부장의 말대로 백화점에서는 정한과 선을 지켰고, 조일관은 출소했지만 직접적인 타격도 없었다.그저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우리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이대로라면 입점 될 거야, 그렇지?”“응. 되고나면 회식이야.”“오케이!”혜서와 새롬이 들떠 말했다. 그간 힘든일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다. 팝업 스토어들 가운데 여운은 계속해서 부동의 1위를 지켜냈고, 간혹 퇴근후에는 정한과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그저 여유롭고 감사한 나날들이었다.이대로 그저 이대로만 하루하루가 반복해서 흘러가기를 이때의 혜서는 간절히 바랐다.*“어떻게 됐어요, 지시한 일은?”한성그룹 본사 상무실.태현과 함께 앉아있던 윤미는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짧게 물었다.“두 사람 사이에 특별할 것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연인관계로 보였는데 특이할 점이라면 얼마 전 다정한 대표가 교도소에 들렀다는 겁니다.”“교도소?”윤미의 반문에 남자가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네. 한참을 그 앞에서 대기중이었는데, 조일관이란 놈이 나오자 자리를 떴습니다. 과거에 다 대표를 찔렀던 피의자였던 놈이더라구요?”“그 놈이 벌써 출소를 했다구요?”태현이 신기한 듯 웃으며 물었다. 남의 일이라 그런지 훌쩍 지나버린 10년이란 시간이 새삼 짧다 느껴졌다.“그리고요?”“그래서 그 놈을 조금 더 알아보니 교도소에서 한동안 다 대표한테 편지를 자주 보냈더라구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썩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겁니다.”처음 듣는 이야기에 윤미의 입가가 느슨히 올라섰다.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한배에 올라타 정한을 괴롭히는 자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으니까.“김상미도 알아봐요. 다정한 대표랑 절대 만나서는 안돼요.”이번엔 윤미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김상미.과거 정한이 한성에 태어나 눈이 멀기 까지. 그를 돌봐왔던 시터이자 가사도우미였다.“그 여자도 곧 출소예요.”“뭐라구요? 분명 무기징역을 받았는데?”“가석
차가워진 밤바람을 피해 따스한 집안으로 두 사람이 함께 들어섰다.정한은 오늘은 혜서의 집에 들를 생각이 없었다. 오늘 밤에 중요한 볼일이 생겨 가 봐야했으니까.게다가 함께 한 공간에 있을 때면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해 계속해서 혜서를 건드리게 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려 했다.“잠깐만, 불 좀 킬게.”“…….”“몸만 녹이고 가.”반면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혜서를 보고 있자니 계속해서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순수하다 해야 할지….“아…!”혜서가 스위치로 손을 뻗을 때였다. 가녀린 손목을 정한이 낚아채 현관 벽으로 몰아넣었다. 어둠속에서 서로의 얼굴만이 겨우 보이는 조도였다.“자, 잠깐만… 읍!”놀란 혜서의 입술을 그가 겹쳐 키스했다. 뜨거운 혀가 물밀 듯 안으로 들어와 헤집었다. 혜서는 신발도 벗지 못한 채 그에게 매달려 쏟아지는 키스를 전부 받아내야 했다.“집으로 불러들였으면 책임져야지.”“무, 무슨 책임….”“다신 피하지마.”하루 종일 연락을 피한 혜서가 괘씸해진 정한이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이내 다시 입술을 겹친 그가 혀끝으로 혜서의 입안 곳곳을 누볐다.미끄럽고
앞으로 다가온 정한에게서 그만의 향과 선선한 밤공기 냄새가 훅 끼쳤다.“일이… 좀 많았어.”“그래?”그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혜서의 손끝으로 향했다. 반면 혜서는 그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연락은 왜 피했어.”“피하다니. 못 본 거야.”“…….”손톱 끝을 탁탁 뜯는 혜서를 보며 정한이 작은 실소를 내쉬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늘 이렇게 절 속이려 드는 게 괘씸하기도 했지만 귀엽기도 했다.“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아?”정한이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먼저 말했지만 혜서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서 은숙의 일을 아직 풀어내지 못했다.“내가… 내가 널 볼 면목이 없어, 정한아.”하루 종일 그의 연락을 피한 이유에는 은숙의 일이 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정한이 그간 제 앞에 나타나지 못한 이유에 은숙이 끼어있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적 없었다.그만큼 10년 전엔 은숙이 정한을 참 좋아했고, 아꼈으니까.“정말… 정말 우리 엄마가 그런 거야? 너한테 그렇게 모질게 하고, 편지를 없애라고 하고…!”그녀가 다그치며 고개를 들었다. 결국 혜서의 눈가가 눈물로 붉어졌다.그런 그녀를 품에 안은 정한이 더욱 흐느껴 우는 혜서를 토닥였다.“아줌마 마음도 이해는 가.”“내가…! 내가 미안해서 널 어떻게 봐… 어떻게… 흑….”정한의 품안에서 혜서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그간 혼자서 감당해내느라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반갑게 달려와 설레는 마음을 품고 문을 두드렸을텐데.마주한 사람들마다 날카롭게 대하며 마음을 모조리 베어놨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정한을 생각하며 혜서가 더욱 크게 울었다.나쁜 마음과 감정이라면 모조리 끌어다 정한에게 퍼부었다.원망, 미움, 분노, 실망….나타나지 않는 그를, 편지도 하지 않는 그가 매정하다며 욕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준비했다.“너 이럴까봐 얘기 못했어. 자책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나 밀어낼까봐.”“그래도! 그래도 얘기를 해줬어야지.”“하
“앉아요.”퇴근 후, 본부장실을 찾은 혜서는 그의 지시에 응접용 소파에 앉았다. 본부장 실은 대표실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차 마셔요?”“아니요, 괜찮습니다.”“일은 어때요?”그녀의 물음에 혜서가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본부장이 차갑다거나 어려운 느낌의 사람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편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어렵게 얻은 소중한 기회인만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정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꼭 백화점 입점까지 노려볼 생각입니다.”“다행이네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요. 내가 질문이 좀 많죠?”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지만 혜서는 계속해서 이 자리가 불편했다.“아닙니다.”“입점까지 노린다니 내가 꼭 진혜서 씨 한테 확인할 문제가 있습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해요.”“어떤 질문일까요.”긴장감속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다정한 대표님과는 무슨 사이입니까?”“네? 그건 왜….”“이곳이 다정한 대표님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니까요.”정적을 먼저 깬 건 여지원 본부장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정한의 일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저희 여운은 정말 부정으로 입점한 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