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이름.”이도의 질문에 세령이 답하자 식탁 위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이도는 입안으로 몇 번 굴리듯 중얼거렸다.“세령 씨.”“응.”“이상하네.”“익숙해져.”유건이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나도 처음엔 그랬어.”이도가 바로 쳐다봤다.“형은 언제부터 자연스러웠는데.”“너보다 먼저.”“그게 자랑이야?”태겸은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고, 혜란도 더는 굳은 얼굴로 있지 않았다.세령은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과거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유건과 결혼했던 4년도, 이도가 자신을 형수라 불렀던 시간도, 태겸과 헤어져 있던 7년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다만 이제 그 과거가 오늘의 호칭까지 결정하지는 못했다.식사가 끝난 뒤 세령과 태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혜란이 현관까지 나왔지만 붙잡지는 않았다.“조심해서 가.”“네.”정혁도 거실에서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유건은 소파 옆에 서 있었다.“잘 가, 세령.”“응.”이도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일부러 고쳐 말했다.“잘 가요, 세령 씨.”세령은 웃었다.“그래.”태겸은 세령보다 반걸음 뒤에서 현관을 나왔다.대문을 지나자 밤공기가 서늘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태겸이 먼저 물었다.“괜찮았어?”세령은 잠깐 생각했다.“생각보다.”“힘들면 다음부터 안 와도 돼.”세령이 옆을 봤다.태겸이 바로 말을 고쳤다.“아니. 다음에 갈지는 네가 정해.”“이제 빨리 배우네.”“살려고.”세령이 웃었다.둘은 천천히 걸었다.태겸은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결혼 얘기도 없었고, 다시 가족이 되자는 말도 없었다.세령은 오히려 그 침묵이 좋았다.예전 같으면 미래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우리가 어디까지 갈 건지.언제 결혼할 건지.이번에는 정말 끝까지 함께할 건지.지금은 아니었다.내일의 선택까지 오늘 미리 묶어놓을 필요는 없었다.오늘 같이 걷고 싶은지.다음 주에도 만나고 싶은지.그때마다 다시 고르면 됐다.대문에서 조금 멀
몇 달 뒤, 세령은 다시 문가의 대저택 앞에 섰다.이번에는 패물을 돌려주러 온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사과를 들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태겸의 연인으로 초대받은 작은 가족 식사였다.세령은 차에서 내리기 전 잠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이 집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한때는 현관을 넘는 순간부터 며느리라는 역할을 입어야 했다.옆에 앉아 있던 태겸이 세령을 봤다.“괜찮아?”세령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확인했다.“조금 긴장돼.”“그럼 안 들어가도 돼.”세령이 그를 바라봤다.“또 대신 결정하려고?”태겸의 입이 닫혔다.세령은 웃었다.“긴장된다고 안 가고 싶은 건 아니야.”“알겠어.”“가자.”이번에는 태겸이 먼저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둘이 각자 차에서 내려 나란히 현관으로 걸었다.문을 열어준 사람은 혜란이었다.세령을 보는 순간 얼굴이 잠깐 굳었지만, 금세 한쪽으로 비켜섰다.“왔구나.”“안녕하세요.”“들어와.”그뿐이었다.돌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다시 가족이 됐다는 말도 없었다.세령은 그게 좋았다.거실에는 정혁과 유건, 이도가 먼저 와 있었다.세령이 들어오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정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고, 세령도 같은 정도로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회장님.”호칭은 그대로였다.정혁의 눈이 잠깐 움직였지만 고치라고 하지 않았다.혜란이 식탁 쪽을 가리켰다.“앉자.”자리는 예전과 달랐다.누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정해놓지 않았고, 세령 역시 태겸 옆자리를 당연하게 강요받지 않았다.그런데 세령은 스스로 태겸 옆 의자를 골랐다.유건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시선이 마주쳤다.예전 같으면 그 몇 초 안에 수많은 감정이 오갔을 것이다.원망.미련.죄책감.지금은 먼저 유건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오랜만이네, 세령.”세령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형수도 아니고.여보도 아니었다.그냥 이름이었다.“응. 오랜만이야.”
“응. 이번엔 네가 싫다고 할 때까지.”세령은 태겸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예전 같았으면 그 말 하나로 충분했을지도 몰랐다.좋아한다는 확인.다시 만나고 싶다는 고백.자신이 밀어내지만 않으면 곁에 있겠다는 약속.그런데 이제는 그것만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세령은 손끝으로 잔의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그럼 나도 조건 있어.”태겸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말해.”“첫 번째.”세령은 망설이지 않았다.“가족 허락 안 구할 것.”태겸의 눈이 멈췄다.“당신 아버지든 어머니든.”세령은 말을 이었다.“우리 다시 만나는 거 허락받으려고 하지 마.”“안 해.”태겸의 대답은 빨랐다.세령은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바로 대답하지 말고 제대로 들어.”태겸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다시는 문가가 우리 관계를 판단하는 거 싫어.”“알아.”“반대하든 찬성하든 똑같아.”태겸의 시선이 깊어졌다.“우리 만나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도 싫어.”“응.”“안 된다고 막는 건 더 싫고.”세령은 잠깐 숨을 골랐다.“우리가 만날지는 우리 둘이 정했으면 좋겠어.”태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할게.”이번에는 세령도 고개를 끄덕였다.“두 번째.”태겸은 말없이 기다렸다.“나 대신 결정하지 마.”그 말에 태겸의 얼굴이 굳었다.세령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내가 힘들 것 같다고 당신이 먼저 물러나지 말고.”“응.”“내가 더 행복할 것 같다고 혼자 정하지도 말고.”태겸은 시선을 떨구지 않았다.“알겠어.”“당신이 사라지는 게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지도 마.”태겸의 손가락이 천천히 맞물렸다.7년 동안 가장 많이 했던 일이었다.상대가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물러나고.자신이 없어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고.묻지도 않은 채 결과를 정하는 것.“그거는 나도 고치려고 해.”“고치려고 하지 말고.”세령이 바로 말을 받았다.“물어.”태겸의 눈이 세령에게 향했다.“내가 힘들어 보여도 물어보고.”세령은 손가락으
“대문까지만 같이 걸어.”“응.”태겸은 그대로 세령 옆에 섰다.둘은 대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이면 끝날 거리였는데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세령은 앞만 봤다.대문에 닿으면 헤어질 생각이었다.적어도 그렇게 말했으니까.그런데 막상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발이 멈추지 않았다.세령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태겸도 아무 말 없이 옆을 걸었다.몇 걸음이 더 이어졌다.세령은 그가 왜 안 묻는지 궁금했다.대문까지만 아니었냐고.이제 어디 가는 거냐고.하지만 태겸은 묻지 않았다.세령이 걷고 있으니 그냥 같이 걸었다.그게 이상하게 편했다.세령은 힐끗 옆을 봤다.“안 물어봐?”태겸도 그녀를 봤다.“뭘.”“대문까지만이라며.”“네가 계속 걷잖아.”“그러니까 어디까지 갈 건지 궁금하지 않아?”태겸이 잠깐 생각했다.“궁금하긴 해.”“근데 왜 안 물어.”“네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겠지.”세령은 웃음이 나왔다.“정말 많이 변했네.”“너 때문에?”태겸이 물었다가 곧 말을 고쳤다.“아니. 그건 아니지.”세령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이제 학습했네.”“늦게.”둘은 골목 끝까지 걸었다.저택이 점점 멀어졌다.세령은 뒤돌아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그 안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던 과거를 모두 꺼내놓고 왔다.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지만, 더 알아낼 것도 없었다.앞으로 남은 건 자신이 고르는 일이었다.길모퉁이를 돌자 작은 카페 하나가 보였다.세령이 걸음을 멈췄다.태겸도 따라 멈췄다.“커피 마실래?”태겸의 눈이 세령에게 향했다.“지금?”“응.”“괜찮아?”세령이 눈썹을 올렸다.“내가 마시자는데 왜 또 물어.”태겸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확인하는 거야.”“그럼 확인됐지?”“응.”세령은 카페 문을 가리켰다.“커피까지.”태겸은 더 묻지 않았다.둘은 안으로 들어갔다.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세령은 아메리카노를, 태겸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둘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런데 어
세령은 대문을 지나 몇 걸음 더 걷다가 멈췄다.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태겸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발이 더 나가지 않았다.세령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대저택 현관은 아직 닫히지 않은 채였고, 그 안에 태겸이 서 있었다.정말 그대로였다.자신이 나갈 때 있던 자리에서 한 발도 나오지 않았다.세령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예전의 태겸이라면 어땠을까.세령이 먼저 나가버리면 따라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물러나는 게 맞다고 결론 내렸을지도 몰랐다.지금도 결과만 보면 비슷했다.따라오지 않았다.그런데 세령은 그 이유를 이제 다르게 알 수 있었다.오라고 하지 않았으니까.자기가 먼저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세령은 입술 끝을 아주 조금 깨물었다.저 사람은 정말 끝까지 기다릴 모양이었다.기다리는 것조차 욕심일 수 있다고 써놓고, 먼저 오지 않겠다고 했던 마지막 메모처럼.세령은 현관 안의 태겸을 향해 손을 들었다.작게 한 번 까딱였다.오라는 뜻이었다.태겸의 표정이 바뀌었다.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확신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세령은 이번에는 손짓을 한 번 더 했다.그제야 태겸이 움직였다.현관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빠르게 뛰지도 않았다.세령이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두르는 사람처럼 굴지도 않았다.한 걸음씩 걸어왔다.세령은 그걸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거리 하나를 두고 서로 바라보던 7년 전의 자신들이 떠올랐다.그때는 누가 먼저 와야 하는지 끝내 정하지 못했다.태겸은 가족 때문에 멈췄고, 세령은 버림받았다고 믿은 채 돌아섰다.그 뒤의 모든 시간은 오지 못한 사람과 기다리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꼬여버렸다.이번에는 달랐다.세령이 불렀고.태겸이 왔다.그 사실 하나가 이상할 만큼 크게 느껴졌다.태겸이 세령 앞에서 멈췄다.“왜.”세령은 잠깐 웃을 뻔했다.“왜라니.”“불렀잖아.”“응.”“그래서 왔어.”너무 단순한 대답이었다.세령은
“고백했다고 용서받는 건 아니에요.”세령의 말 뒤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유건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이도는 손끝만 내려다봤다. 태겸도 세령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세령은 세 사람을 차례로 봤다.이제는 알고 있었다.유건이 왜 처음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어떤 식으로 메시지를 조작했는지, 결혼 뒤 무엇을 숨겼는지.이도가 편지를 보고도 왜 입을 다물었는지, 태겸의 귀국 정보를 누구에게 넘겼는지.태겸이 왜 돌아왔으면서도 자신을 만나지 않았는지까지.모든 이유가 드러났다.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하지는 않았다.“저 아직 아무도 용서 못 해요.”혜란의 눈이 흔들렸다.세령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어머니도요.”혜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회장님도.”정혁의 얼굴이 굳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유건 씨도, 이도도.”유건과 이도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세령은 마지막으로 태겸을 봤다.“당신도.”태겸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답했다.“알아.”그 한마디가 오히려 세령을 편하게 했다.누구도 이제 용서를 재촉하지 않았다.사과했으니 받아줘야 한다고도, 진심을 고백했으니 마음을 열어달라고도 하지 않았다.세령은 한동안 숨을 고른 뒤 말했다.“그런데 하나는 끝난 것 같아요.”정혁이 눈썹을 좁혔다.“뭐가.”“과거요.”세령은 거실 안을 둘러봤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 잘 보였다.닫힌 문 뒤에서 오간 결정들.자신을 빼놓고 이루어진 판단들.누군가 숨긴 편지와 지운 메시지, 누군가 외면한 순간들.그 모든 게 한동안 세령을 끌고 다녔다.무엇을 몰랐는지 알아야 했고, 누가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사실 하나가 드러날 때마다 또 다른 의심이 생겼고, 그 의심을 붙잡고 계속 뒤를 돌아봤다.이제는 아니었다.“더 나올 게 없는 거죠?”세령이 물었다.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세령의 눈빛이 굳었다.“또 숨긴 거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유건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