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화가 끊긴 뒤에도 화면은 몇 번이나 다시 켜졌다.문유건.세령은 받지 않았다.세 번째 전화까지 지나가자 이번에는 메시지가 쏟아졌다.[대답해.][형이랑 잤냐고.][키스만 한 거야?][세령아.]세령은 화면을 오래 내려다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었다.화가 나기보다 지쳤다.유건은 여전히 같은 방식이었다.자신이 묻고 싶으면 세령은 대답해야 하고, 자신이 확인하고 싶으면 세령의 사생활은 열어 보여야 했다.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왔다.세령은 이번에는 받았다.“왜.”유건이 곧바로 물었다.“왜 끊었어.”“대답할 질문이 아니니까.”“난 네 남편이야.”세령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결국 또 그 말이었다.“그래서?”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래서라니.”“남편이면 내가 누구랑 키스했는지, 누구랑 잤는지 전부 보고받을 권리가 생겨?”“당연한 거 아니야?”“우리 관계에서도?”유건의 숨이 막혔다.“우린 아직 부부야.”“서류로는.”“그게 부부지 뭐가 부부야.”세령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당신이 다른 여자랑 호텔에 있을 때도 우리가 부부였어.”유건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는 당신이 부부라는 말을 기억했어?”“그 얘기랑 지금은 다르잖아.”“뭐가 다른데.”“난 잘못했다고 인정했어.”“인정하면 없던 일이 돼?”“그런 뜻 아니야.”“그럼 내 사생활 캐물을 자격이 다시 생겨?”유건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형이잖아.”세령은 헛웃음을 흘렸다.결국 그것이었다.상대가 누구냐.태겸이냐 아니냐.유건에게 중요한 건 여전히 세령이 아니었다.“태겸이라서 더 화나는 거야?”“당연하지.”“그럼 당신은 아직도 하나도 안 변했네.”“무슨 소리야.”“내가 뭘 원하는지는 또 안 궁금하잖아.”유건이 말문을 잃었다.“당신이 묻는 건 계속 똑같아. 형이랑 어디까지 갔냐, 형을 좋아하냐, 형을 선택했냐.”“그게 중요하니까.”“당신한테는.”세령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나한테 중요한 건 다른 거야.”“뭔데.”“내가 내
“했어.”이도의 대답이 떨어지자 유건의 얼굴이 굳었다.“뭐?”“형수님이랑 큰형.”이도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유건은 몇 초 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너 지금 장난하냐?”“안 믿고 싶으면 직접 가서 물어봐.”“어디 있어.”“내가 왜 알려줘.”유건은 이도의 멱살을 잡을 듯 손을 올렸다가 멈췄다.“너도 알고 있었어?”“형수님 일은 형수님이 말할 문제야.”“근데 방금 네가 말했잖아.”“형이 계속 캐물었으니까.”유건은 더 듣지 않았다.곧장 몸을 돌렸다.이도가 뒤에서 불렀다.“둘째 형.”유건은 멈추지 않았다.“가서 또 형수님 탓하지 마.”그 말에 유건의 걸음이 잠깐 꺾였지만 결국 돌아보지 않았다.한 시간 뒤, 태겸은 전시장 지하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려다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형.”태겸이 돌아봤다.유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세령이랑 뭐 했어.”태겸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말이야.”“이도가 다 말했어.”“뭘.”“키스했다며.”태겸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만으로도 유건에게는 충분했다.“미쳤어?”유건이 태겸의 멱살을 잡았다.“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 건드려?”태겸은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세령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어떤 식으로?”“내가 건드린 사람처럼.”유건이 비웃었다.“그럼 뭐야. 형수가 먼저 달려들기라도 했어?”태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말 가려.”“왜. 사실 말하면 안 돼?”“유건아.”“아직 내 아내야.”태겸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유건을 바라봤다.“네가 계속 그 말 붙잡고 있는 이유 알아?”유건의 턱이 굳었다.“서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령 선택까지 네 거라고 믿고 싶어서야.”“형은 입 다물어.”“세령이 이혼하겠다고 몇 번을 말했어.”“그래도 끝난 건 아니잖아.”“너한테는 끝났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어렵냐.”유건이 다시 태겸을 밀쳤다.“형이 뭔데 끝났다고 해.”태겸은 밀려났다가 그대로 섰다.“내가 정하는 거
“그래도 한 번은 나도 선택지였으면 좋겠어요.”세령은 대답하지 않았다.이도는 더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붙잡아달라는 기색도, 대답을 재촉하는 말도 없었다.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세령은 손에 든 파일을 다시 끌어안았다.선택지.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좋아한다는 고백보다 훨씬 불편했다. 이도는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큰형보다 자기를 고르라고도, 기다려달라고도 하지 않았다.그저 언젠가 한 번쯤 자신도 세령이 직접 판단하는 사람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세령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지금 누구를 고를 때가 아니었다. 태겸과 입을 맞췄다고 해서 다시 연인이 된 것도 아니고, 이도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답해줄 의무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걸음을 옮기는 동안 자꾸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문유건은 자신을 아내라는 자리에 묶어두려 했다.예전의 태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물러났다.이도는 늦게나마 선택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그 차이가 마음을 흔든다고 해서 이도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싸우는 것보다, 자신에게 고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에 더 예민해진 것뿐이었다.회의실 문을 열자 태겸이 먼저 와 있었다.“왔어?”세령은 맞은편에 앉으며 자료를 꺼냈다.“응.”태겸은 세령의 얼굴을 잠깐 보더니 더 묻지 않았다.회의는 평소처럼 진행됐다. 전시장 벽면 배치를 조정하고, 작품 반입 시간과 설치 인원을 확인했다. 세령도 일부러 일에 집중했다.그런데 회의가 끝날 즈음 태겸이 물었다.“이도 만났지?”세령의 손이 멈췄다.“봤어?”“나가기 전에 복도에서 마주쳤어.”“뭐라고 하던데.”“아무 말도 안 했어.”세령은 노트북을 덮었다.“당신은 알고 있지?”“뭘.”“이도가 나 좋아하는 거.”태겸은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기분 안 나빠?”질문하고 나서 세령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태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큰형이 드디어 선 넘었네.”세령이 이도를 바라봤다.“무슨 뜻이야.”이도는 대답하지 않고 세령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같으면 입꼬리부터 올렸을 사람이었다. 일부러 한마디 더 보태 세령을 당황하게 만들고, 반응을 보며 재미있어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세령은 오히려 그게 더 불편했다.“상상하지 마.”“상상이면 좋겠는데.”“이도야.”“됐어요.”이도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안 물어볼게요.”세령은 잠깐 말을 잃었다. 캐묻거나 비꼬지 않는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이도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큰형 여기 있어요?”“그건 왜.”“그냥 물어본 거예요.”“없어.”“그럼 됐고.”세령이 한 걸음 다가갔다.“너 지금 왜 그래.”“뭘요.”“평소처럼 굴지 않잖아.”이도의 턱이 굳었다.“평소처럼 웃어야 돼요?”그 질문에 세령이 멈췄다.이도는 금방 눈을 내렸다.“미안해요. 형수님한테 화낼 일 아닌데.”이번에도 농담이 붙지 않았다.세령은 그 얼굴을 가만히 봤다.이도는 상처받아 있었다.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세령의 마음도 무거워졌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이도야.”“네.”“나는 너한테 희망 준 적 없어.”이도의 시선이 올라왔다.“알아요.”“좋아한다고 했을 때도 받아준 적 없고, 기다려달라고 한 적도 없어.”“알아요.”“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걸 너한테 미안해해야 하는 관계도 아니야.”“그것도 알아요.”대답이 너무 빨라 세령이 오히려 말을 멈췄다.이도는 벽에 기대려다 말고 바로 섰다.“형수님이 잘못했다는 말 안 해요.”“그런데 네 얼굴은 왜 그래.”“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 같으면 기분 나쁜 게 정상 아닌가.”세령의 표정이 굳었다.“그러니까 그 감정 때문에 나한테 뭘 요구하면 안 돼.”“안 해요.”“정말?”“네.”이도는 잠시 입술을 눌렀다.“내가 마음 생긴 건 내 책임이니까.”세령은 잠깐 손에 든 파일을 내려다봤다. 마음이 생겼다는 이유
“후회는 내 몫이야. 대신 또 대신 결정하지 마.”태겸은 세령을 오래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가까웠던 거리가 다시 생겼지만 이번에는 억지로 좁히지 않았다. 손도 내려놓고, 한 걸음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알겠어.”세령은 그 대답을 듣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정말?”“응.”“내가 후회한다고 해도?”태겸의 눈빛이 움직였다.“그때 네가 후회하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그럼 지금 왜 안 막았어.”“네가 원했으니까.”세령은 입술을 다물었다.그 말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네가 원했으니까.누군가의 판단도 아니고, 집안의 뜻도 아니고, 형제들 사이의 경쟁도 아니었다.방금 입맞춤은 자신이 먼저 선택했다.그 사실이 선명해질수록 가슴 한쪽에는 죄책감도 같이 올라왔다.아직 이혼은 끝나지 않았다.유건과 별거 중이고 이혼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였다.세령은 손끝으로 입술을 한번 만졌다.태겸이 그 움직임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나 지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그걸 내가 정할 일은 아니야.”세령이 고개를 들었다.태겸은 그대로 서 있었다.“예전 같으면 당신이 먼저 말렸겠지.”“그랬을 거야.”“동생 아내니까 안 된다고.”“응.”“이번에는 왜 안 그랬어.”태겸은 잠시 생각했다.“네가 싫다고 할까 봐 겁나서 멈추는 거랑, 네 선택까지 내가 대신 정해서 멈추는 건 다르니까.”세령의 눈이 흔들렸다.“그 차이를 이제야 알겠어.”태겸은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세령을 편하게 했다.방금까지 입을 맞췄던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없었다.“오늘 일은.”세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없던 일로 하지 않을 거야.”태겸의 표정이 굳었다.“그렇다고 이걸로 우리가 다시 시작했다고 생각하지도 마.”“안 해.”“나 아직 정리할 게 많아.”“알아.”“유건이랑 이혼도 끝내야 하고.”“응.”“당신한테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겠어.”태겸
며칠 뒤, 전시장 창고에는 세령과 태겸만 남았다.회의가 끝난 뒤 도착한 작품 수량을 다시 확인하려다 시간이 늦어졌다. 직원들은 먼저 퇴근했고, 넓은 창고 안에는 포장된 작품들과 이동식 조명만 남아 있었다.세령은 목록을 들고 상자 번호를 하나씩 확인했다.“이건 3전시장으로.”태겸이 상자 옆에 표시를 붙였다.“이쪽 두 개는?”“내일 작가 확인받고 옮겨. 지금 뜯으면 안 돼.”“알겠어.”일 얘기만 오가니 오히려 편했다.며칠 전 식당 앞에서 유건을 본 뒤 둘은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았다. 태겸도 그날 있었던 일을 꺼내지 않았고, 세령 역시 묻지 않았다.그게 지금 둘 사이에 가장 필요한 거리라고 생각했다.마지막 상자를 확인한 세령이 허리를 폈다.“끝났다.”“내가 문 잠글게.”태겸이 창고 안쪽으로 걸어가던 순간 오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누군가 전원을 끄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세령의 손이 멈췄다.익숙한 전주였다.7년 전 해외 전시 준비를 하면서 자주 들었던 노래.밤늦게까지 설치를 끝내지 못해 둘만 남았던 날, 태겸이 휴대전화로 틀어놓았던 곡이었다.세령은 스피커를 봤다.“이 노래.”태겸도 멈췄다.“기억나?”“응.”짧은 대답 뒤에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그때도 둘은 비슷한 공간에 있었다. 포장재 냄새와 먼지, 벽에 기대둔 작품, 늦은 시간의 조용한 전시장.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서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지금은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세령은 괜히 목록을 다시 접었다.“그때 당신 여기서 내 손 처음 잡았어.”태겸의 시선이 세령에게 왔다.“과거 얘기 안 하기로 했는데.”“오늘은 내가 먼저 했네.”“그러네.”세령은 웃지 못했다.노래가 계속 흘렀다.기억은 생각보다 정확했다.태겸이 손을 잡고도 한참 놓지 못했던 순간. 자신이 먼저 손가락을 맞물렸을 때 그가 놀란 얼굴. 그리고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세령의 표정을 확인하던 습관.그 사람은 지금도 비슷했다.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