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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7 17:11:17

정전의 촛불이 음산하게 흔들렸다.

인기척도 없이 침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하륜은, 침상에 누운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싹 말라가는 제국의 국모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대인가.”

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으나, 하륜은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차가운 음성을 흘려보냈다.

“어찌하여 문을 열어주셨습니까.”

단 한 줄의 질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

황후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

“천 귀인의 손길이 황자에게 닿는 것을 어찌 허락하셨냔 말입니다. 마마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하셨던 핏줄을, 제 발로 독사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연유가 무엇입니까.”

“……가문을, 조씨 가문을 살리겠다 하지 않았더냐. 천 장군의 약정서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내 핏줄을 지키기 위한 어미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하륜이 황후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냈다.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나직하고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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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47화

    연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편전을 뒤흔들 만큼 강압적이었다.“짐이 이 옥좌에 앉기 위해 어찌했는지 잊었느냐. 아비가 다른 형제들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밟고 올라선 자리다. 권력을 쥔 외척들이 제 핏줄을 황제로 만들겠다며 이 궁을 어떻게 피로 물들였는지, 네놈이 똑똑히 보지 않았더냐!”연호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챙그랑, 파열음이 편전을 갈랐다.“황실의 적통은 오직 황후의 소생뿐이다. 후궁의 몸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머리가 깎여 평생을 산사(山寺)에 갇혀 지내게 될 것이다.”연호의 턱관절이 서늘하게 튀어나왔다.“내 핏줄이 권력에 눈이 멀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니.”“신의 식견이 짧았사옵니다”그러나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묻은 하륜의 입가에는 서늘한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여전히 확고하시군.’어릴 적 겪은 골육상쟁의 지옥.황제의 그 마음을 하륜이 모를 리 없었다.오늘 짐짓 그 상처를 헤집어 본 것은, 그 오만한 철칙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황후가 어리석게도 천 귀인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판은 하륜의 뜻대로 굴러갔다.미옥은 죽어가는 황후의 유지를 받들어 ‘유일한 적통’의 양모로서 옥좌 뒤에 서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공들여 빚어낸 그 완벽한 비수의 몸에, 원수의 추잡한 씨가 잉태되는 꼴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되는 가장 깔끔한 복수였다.하지만 천 유희가 황자에게 손을 뻗은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만에 하나, 비천한 노비 출신인 미옥이 권력 싸움에서 밀려 황자를 빼앗긴다면?‘후궁의 자식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 하셨지.’그렇다면 미옥에게는 두 번째 패가 없다.숙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황자를 잃는 순간 그녀는 언제든 버려질 물건에 불과했다.하륜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천 유희를 밟아 죽이고 저 오만한 황제의 목줄을 온전히 쥐고 흔들려면, 이제 애매한 후궁의 자리로는 부족하다.‘미옥아. 네가, 이 제국의 황후가 되

  • 환관의 비   46화

    정전의 촛불이 음산하게 흔들렸다.인기척도 없이 침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하륜은, 침상에 누운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싹 말라가는 제국의 국모를 내려다볼 뿐이었다.“……그대인가.”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으나, 하륜은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차가운 음성을 흘려보냈다.“어찌하여 문을 열어주셨습니까.”단 한 줄의 질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황후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천 귀인의 손길이 황자에게 닿는 것을 어찌 허락하셨냔 말입니다. 마마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하셨던 핏줄을, 제 발로 독사의 아가리에 밀어 넣은 연유가 무엇입니까.”“……가문을, 조씨 가문을 살리겠다 하지 않았더냐. 천 장군의 약정서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내 핏줄을 지키기 위한 어미의 어쩔 수 없는…….”“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하륜이 황후의 변명을 단칼에 잘라냈다.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나직하고 평온했다.“한낱 종잇장 따위에 마마의 눈이 멀어버린 탓에, 이제 황자의 목숨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무, 무슨 소리냐! 미옥이가 있지 않느냐! 네가 빚은 그 아이가 내 아들을 지킬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황후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지만, 하륜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황후의 침상 앞까지 다가갔다.“마마께서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하륜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전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제가 부귀영화를 탐해, 핏덩이 황자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려 한 줄 아셨습니까? 십상시의 수장인 제게 이 궐 안의 재물과 권력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제가 아쉬울 것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황후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저는 그저 완벽하게 짜인 판을 즐기고 싶었을 뿐입니다. 헌데 마마께서 한순간의 어리석은 미련으로 그 판을 먼저 깨어버리셨지요. 천 귀인의 얕은수 때문에 제 계획에 티끌만 한 위협이라도 가해진다면…… 저는 언제든 사냥개

  • 환관의 비   45화

    궁전 모퉁이를 돌려던 미옥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성한 동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기 때문이다."그거 알아? 천 귀인이 황후 마마께 완전 납작 엎드렸다고 하더라.""어머머, 어째서? 그 콧대 높은 천 귀인이?""왜긴. 폐하와 첫날밤을 그리 치렀으니, 제 몸으론 후사를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게지. 불쌍히 여겨달라며 어찌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모른대. 아무튼 앞으론 자기가 황자 마마를 잘 모시겠다며, 지금 곧장 경현당으로 갔다는구나.“경현당. 황자의 처소.그 단어들이 뇌리에 꽂히는 순간, 미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천 유희가 후사를 걱정해 고개를 숙였다고?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제 아비의 군세를 등에 업고 황후마저 겁박하던 요물이었다.그런 독사가 이빨을 숨기고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미옥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허억, 헉……!“경현당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미옥의 두 눈이 매섭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이미 유희가 갓난 황자를 품에 안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머, 숙원 아니냐. 어찌 이리 급하게 오느냐.“유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미옥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희의 품에 안긴 황자를 살피며 단숨에 그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는 귀인 마마께서 어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황후 마마께서 허락하셨단다. 내가 후사를 보기 힘든 처지이니, 황자 마마라도 제 자식처럼 품으며 정을 붙이라시더구나.“유희는 품에 안은 황자의 포대기를 고쳐 안으며, 비어있는 한 손으로 당황한 미옥의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그녀의 넓은 소매 자락에서 묘하게 짙고 달큰한 향내가 훅 끼쳐왔다."다행이다, 미옥아. 네가 곁에 있어 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유희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다정하고 나긋했다."나는 귀하게만 자라 누군가를 돌보거나 시중을 드는 일에는 참으로 서툴지 않니. 행

  • 환관의 비   44화

    태후전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자수가 놓인 병풍 뒤에서 태후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유희의 정수리에 꽂혔다.“폐하께 씻김을 당했다지? 첫날밤부터 그런 수모를 겪어서야, 내 네게서 이 나라의 후사를 볼 수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구나.”바닥에 납작 엎드린 유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사향탕에 몸을 씻어내며 느꼈던 그 지독한 멸시가 다시금 상처를 헤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차분한 목소리를 골라냈다.“신첩이 자만하였습니다, 태후 마마. 폐하의 성심을 얻으려다 오히려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하오나 밤은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이 남지 않았사옵니까.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그 밤이 백 번, 천 번 온다 한들 어제와 같다면 아무 소용도 없거늘!”태후의 매서운 질책에 유희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설령…… 제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다 해도, 지금 계신 황자 마마를 제가 친자식처럼 품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마마를 위하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후께 머리라도 조아려 제 진심을 보이겠나이다.”죽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황자를 차지하겠다는 유희의 가증스러운 집념에, 태후의 눈매가 그제야 조금 부드러워졌다.“황후의 친정인 조(趙)씨 일가가 두 눈을 뜨고 살아있거늘. 내 사람인 줄 뻔히 아는 네게, 그들이 순순히 황자를 넘겨줄 성싶으냐?”태후의 비웃음 어린 질책에 유희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대꾸했다.“폐하께서는 황후가 서거하는 즉시, 그 일가를 모조리 숙청하실 것이옵니다. 어린 황자를 등에 업은 외척을 살려두어 훗날의 화근을 만드실 분이 아니시니까요.”유희의 단호한 확신에 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걸 네가 어찌 장담하느냐.”“폐하의 서늘한 정(情)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지 않았사옵니까. 지금 조씨 일가는 제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몰라 숨죽인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을 것이옵니다.”유희는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을 바짝 세우며 말을 이었다.“그들이 살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황자를 제게 넘기고,

  • 환관의 비   43화

    순간, 연호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신의 모순을 그 발칙한 입술이 정확히 찔러들어온 것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제 품에 안겨오는 나신의 아찔한 열기에 이성이 마비되는 듯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저를 내려다보는 주인이 아니라, 제 열기를 삼켜줄 사내입니다. 제 몸이 싫으시다면…… 지금 당장 물러가라, 내치시면 됩니다.”툭-.연호의 이성을 꼿꼿하게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속절없이 끊어지는 소리였다.와장창-!연호가 짐승처럼 팔을 휘두르자, 탁상 위의 화려한 주안상과 백자 호리병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방바닥으로 처박혔다.그는 단숨에 탁자 위를 기어오던 미옥의 허리를 낚아채듯 들어 올려 거칠게 침상으로 몰아넣었다.“하아, 읏……!”미옥의 등이 차가운 침구 위로 닿는 순간, 연호의 뜨거운 육체가 그 위를 집어삼키듯 덮쳐왔다. 그는전희 따위는 생략한 채, 미옥의 다리를 거칠게 벌려 당장이라도 그 사이를 파고들 듯 거세게 몰아붙였다.그러나 그 짐승 같은 폭력이 미옥을 꿰뚫으려던 찰나.미옥은 상체를 유연하게 비틀어 연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을 뒤집어, 당황한 연호의 골반 위로 대담하게 올라탔다.“……무슨 짓이지.”“저와의 잠자리에서 주인 노릇은 그만두십시오.”미옥이 흐트러진 흑룡포 사이로 드러난 연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내리누르며 나른하게 속삭였다.“오늘은 제가 당신을 취할 겁니다.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세요.”황제를 제 아래에 깔아뭉갠, 불경하고도 아찔한 역전이었다.미옥은 제 안으로 당장 그를 받아들이는 대신, 꼿꼿하게 달아오른 사내의 중심 위로 제 젖은 아래를 천천히 비벼대기 시작했다.질척, 찌억-.노골적이고도 음탕한 마찰음이 고요한 침향각의 공기를 때렸다. 연호의 단단한 복근이 터질 듯 수축했고, 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짐승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미옥은 황제를 한낱 쾌락에 허덕이는 수컷으로 전락시켰다는 기묘한 승리감에 젖어 들었다. 그녀는 위에서 연호를 내려다보며, 달아오른 그의 귓가에 조

  • 환관의 비   42화

    밤이 깊어지자, 침향각의 묵직한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싸늘한 밤공기와 함께 연호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숨을 죽인 내관들이 쟁반을 받쳐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방 한가운데 놓인 검은 목재 탁자 위로 황제를 위한 야회상(夜會床)을 차려냈다.얇게 저며 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말아낸 육포와 꿀에 재워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연근 정과, 그리고 속을 호두로 꽉 채워 정갈하게 썰어낸 곶감쌈이 담긴 청자 찬합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 곁으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향의 곡차가 든 백자 호리병이 자리를 잡았다.내관들은 방 안쪽, 침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옥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며 침향각에는 완벽한 고립과 정적이 내려앉았다.미옥은 얇은 침의 하나만을 걸친 채 단정히 앉아있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든 사내든 기꺼이 취해버리겠다는 그 오만한 낯빛 그대로였다.연호는 미옥에게 다가가는 대신, 탁자 앞에 놓인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여유롭게 몸을 묻었다.“…….”그는 미옥을 투명 인간 취급하듯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붉은 육포 한 점을 입에 물고는 스스로 술잔을 채웠다. 쪼르륵, 맑은 액체가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높게 천장을 울렸다. 쌉싸름한 곡차의 향과 달큰한 정과의 향이 묘하게 뒤섞여 방 안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가까이 오라.”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연호가 나직하게 명했다.미옥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연호의 앞,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그는 술을 한 모금 삼키고는, 나른하고도 서늘한 눈동자로 미옥을 내려다보았다.“벗어라.”“……예?”“못 들었느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전부 벗으라 명했다.”미옥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당장이라도 짐승처럼 달려들어 제 몸을 유린하며 분노를 토해낼 줄 알았건만. 연호는 그저 질 좋은 구경거리를 산 귀족처럼 나른하게 등받이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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