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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Autor: 양순이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4-05 07:19:20

동궁전의 밤은 길고 처절했다.

“마마! 여기, 수라간 뒤뜰에서 캐왔사옵니다!”

치맛자락이 진흙투성이가 된 강 유모가 숨을 헐떡이며 한 무더기의 풀을 안고 들어왔다.

미옥은 지체 없이 다듬이 돌 위에 쇠비름과 유근피를 올려놓고 짓이기기 시작했다.

“쉬이……. 괜찮습니다, 전하. 이제 안 아플 것입니다.”

미옥은 짓이겨진 풀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점액질을 무명천에 적셔 태자의 등과 손목에 펴 발랐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잦아들 줄 몰랐다. 미옥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의는! 어의는 아직인가? 벌써 사람을 보낸 지가 언제인데!”

그 부름에 문밖을 지키던 상궁이 사색이 되어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하필 오늘 태후 마마의 오라버니 되시는 윤 대감의 회갑 잔치가 도성 근처 별장에서 크게 열려, 어국(御局)의 주치의께서 그곳에 납시어 계신다 합니다. 갑작스럽게 기력이 쇠하셨다며 붙잡아두는 통에…….”

“뭐라? 궁을 지켜야 할 어의가 잔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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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82화

    상처 입은 다리 위로 쏟아지는 하륜의 경건한 입맞춤에 미옥은 숨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꼈다.혐오스러워 피할 줄 알았던 사내가 오히려 그 흉터를 제 목숨처럼 귀히 여기는 모습은, 미옥의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하륜은 고개를 들어 눈물에 젖은 미옥의 얼굴을 한 번 더 깊게 응시하더니, 가녀린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침상 위로 조심스레 눕혔다.부드러운 요 위로 미옥의 머리칼이 흐드러지게 흩어졌다.하륜은 침상 위로 무릎을 세워 미옥의 다리 사이에 오롯이 자리를 잡았다. 한 손으로 미옥의 머리맡을 짚어 제 커다란 체구를 지탱한 채 그녀를 굽어보던 하륜의 눈동자는, 슬픔과 갈증이 뒤섞여 시리게 빛났다.그는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뻗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 안쪽 여린 살결을 따라 손끝을 훑어 내렸다.창밖의 푸른 박명이 그녀의 흰 살결 위로 매끄럽게 흘러내렸고, 온전히 제 아래에 갇힌 미옥의 상처를 훑어 내리는 하륜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나 때문이다. 이 곱디고운 살결을 형틀에 매달리게 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다짐했건만, 정작 너를 이리 만든 것은 나였구나.‘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맹렬한 소유욕과 만나 그의 안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었다."아, 주인님…….”미옥이 수치심에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으나, 다리 사이에 버티고 선 하륜의 단단한 몸과 허벅지를 쥔 커다란 손길에 가로막혀 속절없이 열리고 말았다.“숨기지 마라. 너의 상처 또한 내 것이니.”하륜은 낮게 읊조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흉터가 남아있는 허벅지 안쪽, 그 가녀린 살결에 입술을 묻었다.뜨겁고 애달픈 혀가 상처의 흔적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듯 핥아 올릴 때마다 미옥은 허리를 활처럼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그 애무는 달래듯 다정하면서도, 동시에 제 여인을 향한 갈증이 배어있었다.입술은 점차 위로,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갔다.하륜의 시선이 비단 자락 사이에 수줍게 숨겨진

  • 환관의 비   81화

    도성을 물들였던 붉은 노을이 산맥 너머로 잦아들고, 골짜기마다 시퍼런 어둠이 안개처럼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천기곡으로 돌아온 하륜의 발걸음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이상했다.으레 들려야 할 물 소리나 주방의 달그락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하다못해, 방 안에서라도 희미한 숨소리나 인기척이 느껴져야 마땅했건만.노을의 잔광(殘光)이 비끼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 사이로, 집안은 비정상적일 만큼 고요했다. 하륜의 눈동자에 일순 불길한 이채가 스쳤다."미옥아.”낮게 부른 목소리는 산바람에 흩어질 뿐 대답이 없었다.하륜은 다급하게 댓돌 위로 올라서며 미옥의 방문을 열어젖혔다.끼익, 쾅!문이 벽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냉기만이 감도는 빈 이부자리를 본 순간, 하륜의 심장이 발밑으로 철렁 곤두박질쳤다.“……!”‘어디로 간 것이지. 설마 그새를 못 참고 연호가 사람을 보낸 것인가? 아니면, 제 발로 나를 떠나 어디로 도망이라도 쳤단 말인가.’숨이 턱 막혀왔다.하륜은 몸을 돌려 주방과 뒤뜰까지 샅샅이 훑었으나 그 작고 가녀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던 찰나, 그는 제 방문 앞을 지나치려다 멈춰 섰다."……?“굳게 닫혀 있어야 할 자신의 방문 틈새로, 아주 옅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하륜은 멈춰 서서, 숨죽인 채 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방 안은 창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한 박명(薄明)이 내려앉아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아…….“하륜의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그의 침상 곁, 가장 어두운 구석 자리.그곳에 작고 동그란 인영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제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되는 하륜의 짙은 도포(道袍)를 이불 삼아 덮어쓴 채였다. 옷자락을 놓치면 사라질 꿈결이라도 되는 양 간절히 거머쥐고 제 옷에 얼굴을 묻고 있는

  • 환관의 비   80화

    천 장군을 향한 친국이 반나절 넘게 이어지고, 마침내 북방의 호부가 황제의 손에 들어온 다음 날 밤.도성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여파로 숨죽인 듯 고요했다.연호는 주인이 바뀐 북방 군단의 명부를 검토하다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편전 내실의 등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어깨의 화상 부위를 감싼 붕대에서 쌉싸름한 약취가 배어 나왔으나, 그는 그 통증조차 즐기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달그락.서안(書案) 위, 옥으로 만든 연적 옆에 놓인 구리 호부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제국 최대의 병권을 손에 넣었으나, 연호의 눈동자에는 승리의 희열 대신 날카로운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강진.“그때,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 속에서 소리 없이 검은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강진이었다."예, 폐하.“연호는 턱을 괸 채 나직하게 명을 내렸다."하륜 그 여우 놈이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아내라.“명령을 받든 강진은 곧장 물러서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그 자가 의심스럽사옵니다.""의심?""대장군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낼 수 있는 저런 치명적인 증좌를 쥐고서도, 어째서 지금껏 입을 다물고 궐 밖에서 폐하를 관망한 것이옵니까. 충신이라 하기엔 그 속내가 너무도 오만하고 기만적이옵니다.“날카로운 경고였다.강진의 말대로, 하륜은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천 장군의 목을 옭아맬 장부를 황제의 발치에 대령할 수 있었다.그러나 연호는 화를 내는 대신, 나직하고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네 말이 옳다. 충심인지 역심인지, 가끔은 나조차 헷갈릴 때가 있지.""…….""하륜 그놈은 완벽한 나의 은인이다. 하지만 너무도 뛰어나기에…… 그놈이 나를 위해 이 황좌를 닦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가 쥐고 흔들기 편한 꼭두각시를 앉혀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때가 있어.“연호는 서안에 놓인 호부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놈이 지금껏 입을 다문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내가 과연 제 도움 없이도

  • 환관의 비   79화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도성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취홍루(醉紅樓)의 밀실.코를 찌르는 독하고 짙은 분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나으리, 이 아이들은 저희 취홍루에서도 가장…….“기생 어미가 아양을 떨며 기녀들을 하륜의 곁으로 밀어 넣었다.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기녀 하나가 은근한 교태를 부리며 하륜의 무릎 위로 슬며시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스윽—.하륜은 벌레라도 본 것처럼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며, 여인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무심히 팔을 거두어들였다.기녀의 손이 민망하게 허공을 갈랐고,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분명, 화장을 말끔히 지운 맨얼굴로 데려오라 일렀을 텐데.“ 하륜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이리 분을 떡칠해 놓아서야, 본래의 낯바닥에 어떤 관상(觀相)이 숨어 있는지 어찌 알겠느냐."하륜은 역겨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사색이 된 기생 어미가 황급히 수건을 대령해 기녀들의 화장을 지워내기 시작했다.분내가 가시고 맨얼굴이 드러나자, 하륜은 사냥개를 감정하는 투기장의 포주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여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 내렸다.'눈꼬리가 처지고 턱결이 무른 자. 궐의 비릿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태후의 그림자만 보아도 겁에 질려 하루 만에 자진할 상이군.‘'저 계집은 입술이 얇고 눈동자에 흰자가 지나치게 많이 띠는구나. 뱀처럼 눈치를 보며, 은화 한 닢에 주인의 등짝에 칼을 꽂을 배신자의 상이다.‘하륜의 눈동자에 짙은 경멸이 스쳤다.그가 찾는 것은 황제의 눈을 가리고 태후의 목줄을 끊을 맹독(猛毒)이었다.적당히 예쁘장하기만 하거나, 어설픈 잔머리를 굴리는 계집들은 궐의 지독한 암투 속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잡아먹히거나 제 주인을 물 터.하륜이 원하는 관상은 명확했다.황궁의 독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굶주린 짐승의 상.광대뼈가 도드라져 한 번 물면 놓지 않을 아집이 있고, 재물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이 노골적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낯바닥.기꺼이 썩은 고깃덩어리를 던져주면, 주인

  • 환관의 비   78화

    살을 에는 듯한 맵찬 바람이 불어 닥치는 추국장(推鞫場).횃불이 붉게 타오르는 마당 한가운데, 밧줄로 꽁꽁 묶인 천 장군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용상(龍床)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황제 연호의 입가에는 서늘한 비소가 걸려 있었다.그의 손끝에서 툭, 하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던져졌다.강진이 하륜의 사가에서 물어온 장부,그리고 붉은 주사로 그려진 혈서의 모사본이었다."어디,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연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살얼음처럼 국문장에 깔렸다.바닥에 떨어진 혈서를 확인한 천 장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폐하! 억울하옵니다! 사병을 기른 것은 잦은 북방의 오랑캐 출몰에 대비하고자 병력을 보충한 것일 뿐! 이깟 혈서는 신이 결단코 본 적도, 맹세한 적도 없는 조작된 것이옵니다!“천 장군은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사병을 모집한 것은 사실이었다.은밀히 병사들을 훈련 시킨 훈련장도, 증인들도 차고 넘쳤다.하지만 장군 개인을 황제처럼 모시겠다는 저 끔찍한 혈서만은 단연코 사실이 아니었다.누군가, 99개의 명백한 진실 속에 단 하나의 맹독을 섞어 자신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놓은 것이다."신이 정녕 역심을 품었다면, 어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같은 딸아이를 폐하의 곁에 들여보냈겠사옵니까! 천지신명께 맹세코 신은……!""금지옥엽이라.“천 장군의 절규를 싹둑 자르며, 연호가 조소했다.황제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끈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장군께선 짐을, 아주 훌륭한 씨돼지쯤으로 생각하셨나 보지.""폐, 폐하……! 그게 무슨 망극하신……!“"그 잘난 딸년이 짐의 씨를 받아 후사를 낳으면, 미련 없이 짐의 목을 치고 그 핏덩이를 황좌에 앉혀 천하를 주무를 생각 아니었나. 안 그런가, 장인?“장인이라는 단어에 끔찍한 살의가 묻어났다.연호의 눈동자를 마주한 천 장군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황제는 지금 이 혈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연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천 장군을 벼랑 끝으로

  • 환관의 비   77화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유희의 의식을 깨운 것은, 뺨을 짓누르는 기분 나쁜 압박감이었다.눈을 가린 채 얼굴 절반을 칭칭 감고 있는 서늘하고 거친 천의 감촉.유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려던 찰나였다.“아윽……!”눈을 깜빡이는 그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오른쪽 뺨에서 피부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다.혈관이 뛸 때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살갗 아래에서 펄떡이며 제 살을 파먹는 것 같았다.“폐…… 하…….”갈라진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려 입술을 달싹이자, 얼굴 반쪽이 무쇠 가면이라도 덮어쓴 것처럼 기괴하게 굳어 뻣뻣하게 땅겨왔다.신경이 죽어버린 듯 무감각한 뺨의 중심부와, 그 주위로 생살이 뜯겨나가는 듯한 지독한 작열감.숨을 들이마시자 코끝으로 독한 약초 냄새와 함께, 들숨에 섞인 매캐한 재와 제 살이 타들어 가던 비릿한 냄새가 환취처럼 밀려들었다.유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제 얼굴에, 대체 무슨 짓이 벌어진 것인가.“꺄아아아아악—!!”서궁 별전의 서늘한 정적을 찢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유희는 미친 사람처럼 협탁 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챙그랑! 와장창!바닥에 나뒹구는 옥거울의 파편 위로, 얼굴 반쪽이 흉측하게 짓무르고 타들어 간 기괴한 괴물의 형상이 비쳤다.유희는 피가 스며나오도록 두꺼운 붕대를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조차 제 얼굴이 흉물로 변했다는 끔찍한 절망감을 덮지는 못했다.“다 죽여버릴 거야! 나를 지키지 못한 호위무사, 그리고 년놈들도, 늦게 달려온 태의 놈들도 전부 능지처참을……!”“마,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사색이 된 궁녀 하나가 바닥을 기다시피 기어 들어왔다.궁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큰일? 지금 내 얼굴이 이 꼴이 되었는데, 대체 천하에 이보다 더 큰일이

  • 환관의 비   60화

    창백하게 질린 한낮의 뙤약볕 아래, 중궁전 마당을 가득 채운 백색의 물결은 흡사 거대한 수의(壽衣)를 펼쳐놓은 듯했다. 수백 명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곡소리(哭聲)가 비수처럼 허공을 가를 때, 그 비릿하고 무거운 공기를 뚫고 이질적인 악취가 스며들었다.달큰하고도 역한 독주의 향.그 불길한 냄새가 닿는 곳마다, 바닥에 이마를 찧던 이들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들려 올라왔다.백색의 바다 한가운데, 기괴할 정도로 붉은 핏빛 점 하나가 찍혔다.하얀 소복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진 붉은 연지와 짙은 분내.미옥은 제 무릎이

  • 환관의 비   59화

    미옥이 애써 경계심을 누르며 대답하자, 유희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걸렸다.“허나, 저는 다과회 같은 것은 어찌 주관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여……. 우선 아이들을 시켜 차와 간식을 내오라 명하겠습니다.”미옥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 유희가 우아한 손짓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어허. 내명부의 으뜸이 되실 분이 어찌 친히 다과 따위를 챙기려 하십니까. 아우님은 그저 방에 들어 손님 맞을 단장이나 곱게 하고 계세요. 바깥 준비는 명색이 언니인 내가 섭섭지 않게 다 알아서 할 터이니.”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 환관의 비   58화

    연회의 소란이 잦아든 지 오래인, 깊은 밤의 정적.하륜은 제 처소의 희미한 호롱불 아래,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단상 위에서 미옥이 제 손바닥에 쥐여주고 간, 조악한 무명 장명루.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실타래를 아주 느리게 쓸어내렸다.“내게 진심을 내어주었어.”정적을 깨고 흘러나온 그 낯설고도 쉰 목소리에, 방구석의 짙은 어둠 속에서 사혁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고작 무명실 한 가닥에, 십수 년을 갈아 온 칼끝이 이리도 쉽게 무뎌지는 겝니까.”사혁의 서늘한 조소에

  • 환관의 비   57화

    태자 책봉의 막바지, 정전 앞마당에 베풀어진 연회장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도 평화로웠다.궁중 악사들이 타악을 울리고 무희들이 비단자락을 흩날렸으나, 연회장 한구석에는 묘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황후와 내명부의 실세인 천 귀인이 불참한 상석 아래로,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후궁들이 서열대로 늘어앉아 곁눈질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무리의 끄트머리.말석에 가까운 자리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은 무 숙원, 미옥의 존재감은 그 화려함 속에서 유독 이질적이고도 위태로워 보였다.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무료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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