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미옥이 애써 경계심을 누르며 대답하자, 유희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걸렸다.“허나, 저는 다과회 같은 것은 어찌 주관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여……. 우선 아이들을 시켜 차와 간식을 내오라 명하겠습니다.”미옥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 유희가 우아한 손짓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어허. 내명부의 으뜸이 되실 분이 어찌 친히 다과 따위를 챙기려 하십니까. 아우님은 그저 방에 들어 손님 맞을 단장이나 곱게 하고 계세요. 바깥 준비는 명색이 언니인 내가 섭섭지 않게 다 알아서 할 터이니.”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희가 데려온 수 명의 궁녀들이 미옥을 에워싸고 안쪽 내실로 밀어 넣듯 이끌었다.내실의 문이 굳게 닫히고, 궁녀들의 분주한 손길이 미옥의 몸 위로 쏟아졌다.최고급 분가루와 붉은 연지가 미옥의 얼굴에 덧입혀졌고, 묵직하고 화려한 금은보패가 땋아 올린 머리 위로 아낌없이 꽂혔다.거울 앞에 앉은 미옥은 어느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필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청동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바닥을 기며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던 노비가 아니었다.하늘거리는 오색 비단 치마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장신구.연지를 발라 붉게 달아오른 입술과 곱게 다듬어진 눈매.미옥은 홀린 듯 제 뺨을 쓰다듬었다.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눈부신 허상에, 본능적인 여인의 허영심이 속절없이 고개를 들었다.‘아…… 이 모습으로, 그분을 다시 뵙고 싶다.’지금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떤 눈빛을 할까.조금은 내게 흔들려 주실까.그 아득하고도 붉은 연심에 흠뻑 취해, 미옥은 바깥의 소란스러운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거울 속 제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귀인 마마,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궁녀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미옥이 달콤한 상상에서 깨어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파스락거리는 값비싼 비단자락이 유려하게 바닥을 끌었다.‘그래. 이만하면 후궁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가벼운
연회의 소란이 잦아든 지 오래인, 깊은 밤의 정적.하륜은 제 처소의 희미한 호롱불 아래,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단상 위에서 미옥이 제 손바닥에 쥐여주고 간, 조악한 무명 장명루.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부서질 듯 연약한 그 실타래를 아주 느리게 쓸어내렸다.“내게 진심을 내어주었어.”정적을 깨고 흘러나온 그 낯설고도 쉰 목소리에, 방구석의 짙은 어둠 속에서 사혁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고작 무명실 한 가닥에, 십수 년을 갈아 온 칼끝이 이리도 쉽게 무뎌지는 겝니까.”사혁의 서늘한 조소에도 하륜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는 일렁이는 호롱불 너머의 아득한 허상을 좇고 있었다.‘당장 그 자의 목을 베어버릴까.’황제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내는 상상.손을 적시는 뜨거운 선혈의 감각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쳤다.그 후엔 미옥의 손을 쥐고 이 끔찍한 궐담을 넘는,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핏빛 복수.허나 그 달콤한 살의의 끝은 처참한 파국이었다.피 묻은 손으로 그녀를 끌고 궐담을 넘기도 전에, 사방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칼날이 비 오듯 쏟아지겠지.거친 산길을 구르며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진흙과 피로 얼룩지고, 결국 사방을 포위한 군사들의 화살이 그녀의 숨통마저 끊어놓을 것이다.“허튼 상상은 그만두시지요. 섣부른 살의로, 그 계집의 손을 잡고 쥐새끼처럼 평생 쫓겨 다니기라도 할 작정입니까.”사혁의 날카로운 일침이 하륜의 끔찍한 환상을 무참히 깨부수었다.사방이 막힌 절망이었다.황제를 단숨에 죽여 복수하는 일은 아주 쉬웠으나, 이 지옥에서 그녀를 온전히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했다.그 끔찍한 결말이 하륜의 이성을 차갑게 얼렸다.섣부른 살의로는 그녀를 가질 수 없다.다만……, 조금 더 계획의 완성을 앞당길 수는 있으리라.그러려면 황제를 철저히 고립시켜야만 했다.“……강진.”갑작스러운 이름의 등장에 사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허, 이제 제국 제일 검과 싸우기라도 하시려고요?”“왜? 못할 것 같으
태자 책봉의 막바지, 정전 앞마당에 베풀어진 연회장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도 평화로웠다.궁중 악사들이 타악을 울리고 무희들이 비단자락을 흩날렸으나, 연회장 한구석에는 묘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황후와 내명부의 실세인 천 귀인이 불참한 상석 아래로,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후궁들이 서열대로 늘어앉아 곁눈질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무리의 끄트머리.말석에 가까운 자리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앉은 무 숙원, 미옥의 존재감은 그 화려함 속에서 유독 이질적이고도 위태로워 보였다.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무료한 눈으로 후궁들과 무희들을 내려다보던 연호가 불쑥 손을 들어 올렸다.음악이 일순간 멎고,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쏠렸다. 연호는 곁에 선 하륜에게서 건네받은 술잔을 입가에 축이며, 나직하고도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오늘 제국의 후계인 태자를 세웠으니, 이 기쁜 날 내명부에도 경사를 하나 더하고자 한다.”연호의 시선이 화려한 윗선의 후궁들을 모조리 지나쳐, 무리 끝에 앉은 미옥에게 곧장 가닿았다.“무 숙원(淑媛)을 정1품, 귀인(貴人)으로 봉하노라.”챙그랑-!누군가의 손에서 옥배가 굴러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화려했던 연회장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황실에 이토록 큰 경사가 있을 때면, 으레 내명부 여인들의 품계를 차례로 한 단계씩 올려주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당연히 자신들의 서열이 오를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윗선의 후궁들은, 그 모든 관례를 비웃듯 말석의 숙원을 단숨에 정1품으로 끌어올린 황제의 파격에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당황한 대신들 틈에서 천씨 가문과 결탁한 예부상서가 파리해진 얼굴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폐,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실의 지엄한 법도가 있사온데, 어찌 출신조차 불분명한 여인을 단숨에 내명부의 으뜸인 귀인의 자리에 올리려 하시옵니까!”“그러하옵니다, 폐하! 무 숙원은 성씨조차 없는 천한 신분이옵니다. 근본도 없는 여인을 귀인으로 삼으심은 조상들 보기에도
책봉식의 번잡함이 한풀 꺾인 황제의 처소.무거운 조복(朝服)과 익선관을 벗어낸 연호의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이 무색할 만큼 나른하고 여유로운 기색이 완연했다.그의 시선이 제 수발을 드는 하륜의 정갈한 얼굴에 가닿았다. 평소라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있을 사내의 낯빛에 묘한 온기와 생기가 돌고 있었다.마치 어젯밤, 누군가와 지독한 열기를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연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오늘따라 얼굴이 썩 보기 좋군. 남몰래 정분(情分)이라도 난 게냐?”짓궂은 농담에 하륜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환관의 몸으로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사옵니까.”“하. 누가 자네를 흔해 빠진 환관 따위로 보겠나.”연호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게다가 환관이라 한들 궐 밖 사가에 번듯하게 처(妻)를 들이고 혼인을 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 않은가. 뭐, 고자(鼓子)인 그들의 은밀한 밤 사정까지야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하륜의 눈동자가 일순간 가라앉았다.간밤, 미옥의 여린 살갗을 헤집고 헐떡이던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을 황제가 알 리 만무했다.꼬투리 잡힐 만한 흔적 따위는 결코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허나,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행여 내가 놓친 것이 있던가. 아침나절 침향각을 찾았다 하더니, 미처 지워내지 못한 내 흔적을 기어이 눈치채었나.’찰나의 시간 동안 맹렬하게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속이 타들어 가는 하륜과 달리, 속도 모르는 연호는 기분 좋게 차를 한 모금 넘기며 호탕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 혹여라도 마음에 두는 여인이 있거든 망설이지 말고 내게 말하라. 설령 그게 궁 안이더라도 말이지. 자네가 원한다면 그깟 여인 한둘쯤이야, 내 기꺼이 내어줄 수 있으니.”여인 한둘쯤이야 기꺼이 내어주겠다.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선언에 하륜은 굳게 닫혀 있던 숨을 아주 느리게 내쉬었다.‘그저 기분이 좋아 던져본 허언이군. 그런데 뭐
“태후전의 차 상시께서, 마마를 뵙기를 청하시옵니다.”나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희는 움켜쥐고 있던 치맛자락을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수치심과 갈증이 뒤섞인 기묘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들이라.”문이 열리고,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온 차 상시는 여느 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다.유희는 가느다란 열기가 섞인 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녀를 마주한 차 상시의 눈가에는 음험하고 기괴한 조소가 매달려 있었다.“마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소인이 드린 연고가…… 입에, 아니 몸에 맞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사내 특유의 탁함이 전혀 섞이지 않은, 소년처럼 가늘고 매끄러운 미성이었다. 도리어 그 나긋나긋한 음색이 유희의 등골을 오싹하게 긁어내렸다.그녀는 화끈거리는 아래를 감추려 다리에 힘을 주며 짐짓 위엄을 차리려 애썼다.“네놈이 준 연고가 이상하다. 상처는 나았으나……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 대체 그 안에 무엇을 섞은 것이냐!”날카로운 질책에도 차 상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락도 없이 유희의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그 굽혀진 허리의 곡선이, 마치 먹잇감을 향해 튀어 나가기 직전의 사나운 승냥이처럼 위협적이었다.“상처가 나았으니 이제 새로운 살이 차오르고, 피가 뜨겁게 도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사옵니까.”차 상시가 불쑥 손을 뻗어,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유희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흣……!”일개 상시(常侍)의 불경한 손길이었으나, 사내의 차가운 체온이 닿는 순간 유희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억눌린 교성이 튀어나왔다. 소름이 끼칠 만큼 노골적인 몸의 반응에 유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하얗게 질렸다.차 상시의 손아귀가 발목을 타고 아주 천천히, 치맛자락 안쪽을 향해 미끄러져 올라오기 시작했다.“무, 무엄하다……! 어딜 감히……!”유희가 파르르 떨며 발을 빼내려 했으나, 춘약의 열기에 절어버린 몸은 끔찍하게도 그 서늘한 손길을 애타게
침향각의 아침은 묘하게 들떠 있으면서도 무거웠다.미옥은 거울 앞에 앉아 빗질을 하면서도 자꾸만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아무리 씻어내도, 제 안을 파고들던 하륜의 뜨거운 숨결과 체온이 살갗에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특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제 안으로 처음 밀고 들어오던 순간 멈칫하던 하륜의 생경한 몸짓이었다.빗을 쥔 미옥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찰나의 망설임은.’혹시 주인님께서도 여인을 품어본 것이 처음이셨던 걸까.평생을 환관이라는 가면을 쓰고 지내오셨으니, 그간 다른 여인을 안았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하지만 미옥은 이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곧이어 뒤이어진 맹렬하게 몰아치던, 지독하리만치 노련했던 허리놀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아니지. 처음이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어찌 나를 그리 완벽하게 길들이셨겠어. 나의 벌거벗은 몸을 샅샅이 훑어보시던 수많은 밤에도, 어찌 그리 서늘하고 이성적이실 수 있었겠어.’그렇다면 그가, 제 안을 파고들다 숨을 삼키며 멈칫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내가…… 다른 사내에게도 몸을 대는 여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망설임이었겠지.’무엇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안은 것 또한 계획의 일부가 변경된 것 뿐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미옥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자괴감에 휩싸여 파르르 입술을 깨물던, 바로 그때였다.“장명루는 어찌 되었나 보러 왔다.”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며 연호가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앗…… 폐, 폐하.”화들짝 놀란 미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하륜의 거친 악력이 닿았던 허리와 귓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행여 다른 사내의 체향이 풍길까 싶어 꾹 쥐어 짠 미옥의 두 손이 하얗게 질린 채 파르르 떨려왔다.짐짓 굳은 얼굴로 그 미세한 떨림을 내려다보던 연호의 귓가가, 아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수줍어하는군.’평생 여인에게 다정히 다가가 본 적 없는 서툰 사내의 완벽한 착각이었다.갑작스러운 제 방문에 놀라 어찌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