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도성을 물들였던 붉은 노을이 산맥 너머로 잦아들고, 골짜기마다 시퍼런 어둠이 안개처럼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천기곡으로 돌아온 하륜의 발걸음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이상했다.으레 들려야 할 물 소리나 주방의 달그락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하다못해, 방 안에서라도 희미한 숨소리나 인기척이 느껴져야 마땅했건만.노을의 잔광(殘光)이 비끼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 사이로, 집안은 비정상적일 만큼 고요했다. 하륜의 눈동자에 일순 불길한 이채가 스쳤다."미옥아.”낮게 부른 목소리는 산바람에 흩어질 뿐 대답이 없었다.하륜은 다급하게 댓돌 위로 올라서며 미옥의 방문을 열어젖혔다.끼익, 쾅!문이 벽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냉기만이 감도는 빈 이부자리를 본 순간, 하륜의 심장이 발밑으로 철렁 곤두박질쳤다.“……!”‘어디로 간 것이지. 설마 그새를 못 참고 연호가 사람을 보낸 것인가? 아니면, 제 발로 나를 떠나 어디로 도망이라도 쳤단 말인가.’숨이 턱 막혀왔다.하륜은 몸을 돌려 주방과 뒤뜰까지 샅샅이 훑었으나 그 작고 가녀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던 찰나, 그는 제 방문 앞을 지나치려다 멈춰 섰다."……?“굳게 닫혀 있어야 할 자신의 방문 틈새로, 아주 옅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하륜은 멈춰 서서, 숨죽인 채 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방 안은 창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한 박명(薄明)이 내려앉아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아…….“하륜의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그의 침상 곁, 가장 어두운 구석 자리.그곳에 작고 동그란 인영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제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되는 하륜의 짙은 도포(道袍)를 이불 삼아 덮어쓴 채였다. 옷자락을 놓치면 사라질 꿈결이라도 되는 양 간절히 거머쥐고 제 옷에 얼굴을 묻고 있는
천 장군을 향한 친국이 반나절 넘게 이어지고, 마침내 북방의 호부가 황제의 손에 들어온 다음 날 밤.도성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여파로 숨죽인 듯 고요했다.연호는 주인이 바뀐 북방 군단의 명부를 검토하다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편전 내실의 등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어깨의 화상 부위를 감싼 붕대에서 쌉싸름한 약취가 배어 나왔으나, 그는 그 통증조차 즐기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달그락.서안(書案) 위, 옥으로 만든 연적 옆에 놓인 구리 호부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제국 최대의 병권을 손에 넣었으나, 연호의 눈동자에는 승리의 희열 대신 날카로운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강진.“그때,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 속에서 소리 없이 검은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강진이었다."예, 폐하.“연호는 턱을 괸 채 나직하게 명을 내렸다."하륜 그 여우 놈이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아내라.“명령을 받든 강진은 곧장 물러서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그 자가 의심스럽사옵니다.""의심?""대장군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낼 수 있는 저런 치명적인 증좌를 쥐고서도, 어째서 지금껏 입을 다물고 궐 밖에서 폐하를 관망한 것이옵니까. 충신이라 하기엔 그 속내가 너무도 오만하고 기만적이옵니다.“날카로운 경고였다.강진의 말대로, 하륜은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천 장군의 목을 옭아맬 장부를 황제의 발치에 대령할 수 있었다.그러나 연호는 화를 내는 대신, 나직하고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네 말이 옳다. 충심인지 역심인지, 가끔은 나조차 헷갈릴 때가 있지.""…….""하륜 그놈은 완벽한 나의 은인이다. 하지만 너무도 뛰어나기에…… 그놈이 나를 위해 이 황좌를 닦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가 쥐고 흔들기 편한 꼭두각시를 앉혀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때가 있어.“연호는 서안에 놓인 호부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놈이 지금껏 입을 다문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내가 과연 제 도움 없이도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도성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취홍루(醉紅樓)의 밀실.코를 찌르는 독하고 짙은 분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나으리, 이 아이들은 저희 취홍루에서도 가장…….“기생 어미가 아양을 떨며 기녀들을 하륜의 곁으로 밀어 넣었다.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기녀 하나가 은근한 교태를 부리며 하륜의 무릎 위로 슬며시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스윽—.하륜은 벌레라도 본 것처럼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며, 여인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무심히 팔을 거두어들였다.기녀의 손이 민망하게 허공을 갈랐고,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분명, 화장을 말끔히 지운 맨얼굴로 데려오라 일렀을 텐데.“ 하륜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이리 분을 떡칠해 놓아서야, 본래의 낯바닥에 어떤 관상(觀相)이 숨어 있는지 어찌 알겠느냐."하륜은 역겨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사색이 된 기생 어미가 황급히 수건을 대령해 기녀들의 화장을 지워내기 시작했다.분내가 가시고 맨얼굴이 드러나자, 하륜은 사냥개를 감정하는 투기장의 포주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여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 내렸다.'눈꼬리가 처지고 턱결이 무른 자. 궐의 비릿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태후의 그림자만 보아도 겁에 질려 하루 만에 자진할 상이군.‘'저 계집은 입술이 얇고 눈동자에 흰자가 지나치게 많이 띠는구나. 뱀처럼 눈치를 보며, 은화 한 닢에 주인의 등짝에 칼을 꽂을 배신자의 상이다.‘하륜의 눈동자에 짙은 경멸이 스쳤다.그가 찾는 것은 황제의 눈을 가리고 태후의 목줄을 끊을 맹독(猛毒)이었다.적당히 예쁘장하기만 하거나, 어설픈 잔머리를 굴리는 계집들은 궐의 지독한 암투 속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잡아먹히거나 제 주인을 물 터.하륜이 원하는 관상은 명확했다.황궁의 독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굶주린 짐승의 상.광대뼈가 도드라져 한 번 물면 놓지 않을 아집이 있고, 재물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이 노골적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낯바닥.기꺼이 썩은 고깃덩어리를 던져주면, 주인
살을 에는 듯한 맵찬 바람이 불어 닥치는 추국장(推鞫場).횃불이 붉게 타오르는 마당 한가운데, 밧줄로 꽁꽁 묶인 천 장군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용상(龍床)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황제 연호의 입가에는 서늘한 비소가 걸려 있었다.그의 손끝에서 툭, 하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던져졌다.강진이 하륜의 사가에서 물어온 장부,그리고 붉은 주사로 그려진 혈서의 모사본이었다."어디,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연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살얼음처럼 국문장에 깔렸다.바닥에 떨어진 혈서를 확인한 천 장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폐하! 억울하옵니다! 사병을 기른 것은 잦은 북방의 오랑캐 출몰에 대비하고자 병력을 보충한 것일 뿐! 이깟 혈서는 신이 결단코 본 적도, 맹세한 적도 없는 조작된 것이옵니다!“천 장군은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사병을 모집한 것은 사실이었다.은밀히 병사들을 훈련 시킨 훈련장도, 증인들도 차고 넘쳤다.하지만 장군 개인을 황제처럼 모시겠다는 저 끔찍한 혈서만은 단연코 사실이 아니었다.누군가, 99개의 명백한 진실 속에 단 하나의 맹독을 섞어 자신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놓은 것이다."신이 정녕 역심을 품었다면, 어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같은 딸아이를 폐하의 곁에 들여보냈겠사옵니까! 천지신명께 맹세코 신은……!""금지옥엽이라.“천 장군의 절규를 싹둑 자르며, 연호가 조소했다.황제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끈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장군께선 짐을, 아주 훌륭한 씨돼지쯤으로 생각하셨나 보지.""폐, 폐하……! 그게 무슨 망극하신……!“"그 잘난 딸년이 짐의 씨를 받아 후사를 낳으면, 미련 없이 짐의 목을 치고 그 핏덩이를 황좌에 앉혀 천하를 주무를 생각 아니었나. 안 그런가, 장인?“장인이라는 단어에 끔찍한 살의가 묻어났다.연호의 눈동자를 마주한 천 장군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황제는 지금 이 혈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연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천 장군을 벼랑 끝으로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유희의 의식을 깨운 것은, 뺨을 짓누르는 기분 나쁜 압박감이었다.눈을 가린 채 얼굴 절반을 칭칭 감고 있는 서늘하고 거친 천의 감촉.유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려던 찰나였다.“아윽……!”눈을 깜빡이는 그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오른쪽 뺨에서 피부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다.혈관이 뛸 때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살갗 아래에서 펄떡이며 제 살을 파먹는 것 같았다.“폐…… 하…….”갈라진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려 입술을 달싹이자, 얼굴 반쪽이 무쇠 가면이라도 덮어쓴 것처럼 기괴하게 굳어 뻣뻣하게 땅겨왔다.신경이 죽어버린 듯 무감각한 뺨의 중심부와, 그 주위로 생살이 뜯겨나가는 듯한 지독한 작열감.숨을 들이마시자 코끝으로 독한 약초 냄새와 함께, 들숨에 섞인 매캐한 재와 제 살이 타들어 가던 비릿한 냄새가 환취처럼 밀려들었다.유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제 얼굴에, 대체 무슨 짓이 벌어진 것인가.“꺄아아아아악—!!”서궁 별전의 서늘한 정적을 찢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유희는 미친 사람처럼 협탁 위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챙그랑! 와장창!바닥에 나뒹구는 옥거울의 파편 위로, 얼굴 반쪽이 흉측하게 짓무르고 타들어 간 기괴한 괴물의 형상이 비쳤다.유희는 피가 스며나오도록 두꺼운 붕대를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조차 제 얼굴이 흉물로 변했다는 끔찍한 절망감을 덮지는 못했다.“다 죽여버릴 거야! 나를 지키지 못한 호위무사, 그리고 년놈들도, 늦게 달려온 태의 놈들도 전부 능지처참을……!”“마,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사색이 된 궁녀 하나가 바닥을 기다시피 기어 들어왔다.궁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큰일? 지금 내 얼굴이 이 꼴이 되었는데, 대체 천하에 이보다 더 큰일이
깊은 밤,천기곡(天機谷)의 서늘한 바람 소리만이 창호를 스치고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안, 하륜은 얇은 침의만 걸친 채 어둠 속에 우두커니 누워 있었다. 평온해야 할 그의 미간에 짙은 번민의 골이 파여 있었다.“……그녀가 나를 피하는군.”마치 혼잣말처럼 어둠 속으로 낮게 흩어진 음성.하지만 곧바로 방 한구석, 짙은 그림자 속에서 삐딱한 대답이 날아들었다.“얼씨구. 평생 엮어낸 수들을 제 손으로 다 물리고 내려와서, 하시는 게 고작 계집 마음 하나 몰라 밤잠 설치는 겁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지금이라도 옆방에 가보시던가요.”사혁의 핀잔에도 하륜은 그저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안 돼.”“어째서요. 일전에 품에 안겼을 땐, 분명 미옥, 그 계집도 싫지 않은 눈치였는데.”하륜은 제 뜨거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당장이라도 그 가녀린 몸을 안고, 제 숨결을 불어넣고 싶은 욕망이 목끝까지 차올랐다.“지금 들어가면 내가 못 참을 것 같아서. 게다가…….”하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그녀는 날 내치지도 않을 테니까.”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옆얼굴이 서글픈 배려로 짙게 그늘져 있었다.“아직 성치 못한 몸이 고통스러워도, 한사코 괜찮은 척 하겠지.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계집이니까.”하륜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낮게 가라앉았다.“허……, 참.”사혁은 말문이 막힌 듯 어둠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짓누르던 그때, 하륜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혁. 미옥의 다리…… 예전처럼 낫게 해줄 방법은 정녕 없는 거냐.”“그건 이미 곡의 의원들이 백방으로 수를 써보았지만…….”“정녕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단 말이냐.”하륜의 목소리에 평소의 냉정함 대신, 짙은 절박함이 묻어났다.사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툭 던지듯 대답했다.“……있기야 하죠. 주군.”사혁이 처음으로 내뱉은 그 무거운 호칭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부서진 뼈를 도로 붙이고 죽은 신경을 살려낸다는 전설 속
정전의 촛불이 음산하게 흔들렸다.인기척도 없이 침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하륜은, 침상에 누운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싹 말라가는 제국의 국모를 내려다볼 뿐이었다.“……그대인가.”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으나, 하륜은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차가운 음성을 흘려보냈다.“어찌하여 문을 열어주셨습니까.”단 한 줄의 질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황후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천 귀인의 손길이 황자에게 닿는 것을 어찌 허락하셨냔 말입니다.
궁전 모퉁이를 돌려던 미옥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성한 동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기 때문이다."그거 알아? 천 귀인이 황후 마마께 완전 납작 엎드렸다고 하더라.""어머머, 어째서? 그 콧대 높은 천 귀인이?""왜긴. 폐하와 첫날밤을 그리 치렀으니, 제 몸으론 후사를 보지 못할까 두려운 게지. 불쌍히 여겨달라며 어찌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모른대. 아무튼 앞으론 자기가 황자 마마를 잘 모시겠다며, 지금 곧장 경현당으로 갔다는구나.“경현당. 황자의 처소.그 단어들이 뇌리에 꽂히
태후전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자수가 놓인 병풍 뒤에서 태후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유희의 정수리에 꽂혔다.“폐하께 씻김을 당했다지? 첫날밤부터 그런 수모를 겪어서야, 내 네게서 이 나라의 후사를 볼 수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구나.”바닥에 납작 엎드린 유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사향탕에 몸을 씻어내며 느꼈던 그 지독한 멸시가 다시금 상처를 헤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차분한 목소리를 골라냈다.“신첩이 자만하였습니다, 태후 마마. 폐하의 성심을 얻으려다 오히려 심기를 어지럽혔사옵니다. 하오나 밤은
순간, 연호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신의 모순을 그 발칙한 입술이 정확히 찔러들어온 것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제 품에 안겨오는 나신의 아찔한 열기에 이성이 마비되는 듯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저를 내려다보는 주인이 아니라, 제 열기를 삼켜줄 사내입니다. 제 몸이 싫으시다면…… 지금 당장 물러가라, 내치시면 됩니다.”툭-.연호의 이성을 꼿꼿하게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속절없이 끊어지는 소리였다.와장창-!연호가 짐승처럼 팔을 휘두르자, 탁상 위의 화려한 주안상과 백자 호리병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방바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