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야, 그러지 마...”손을 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꽉 쥐어졌다.전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악몽을 꾸고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입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가지 마...”“싫어!”장소월은 악몽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강영수는 수척해진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겨우 숨을 쉬고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있었다. 장소월은 병실에 쳐들어가서 의사를 찾고 싶었지만 병원 전체를 뛰어다녔지만 텅 비어 있고 한 사람도 없었다.그러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강영수는 자신이 곧 죽는다고 말하면서 그녀와 작별 인사하러 왔다고 했다. 심장이 저릿해 나는 게 꼭 현실 같았다.장소월은 그를 잡고 싶었지만 아무리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강영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고 남았던 한 줄기 빛마저 사라지고 장소월도 점차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전연우의 표정은 마치 폭풍우 전의 고요함 속에서 살랑살랑 부는 찬 바람 같이 냉랭하고 어두웠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와서 깨어났는데 옆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숨을 참으며 손으로 침대를 바치고 벌떡 일어났다. 손에 쥐여 있던 책장은 찢겨 나갔다.전연우의 어두운 눈동자를 보고 장소월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눈빛은 그녀로 하여금 겁이 나 떨게 했다.그러나 전연우 눈가의 냉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장소월은 마치 자신이 방금 헛것을 본 줄 알았다.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흘러내린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악몽 꿨어?”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고 곁눈질로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 화장실 가서 세수해야겠어.”“그래.”전연우는 아무 감정도 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소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걸어갔다. 수도꼭지를 틀고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자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방금 꿨던 꿈을 돌이켜보니 왜 그렇게 현실적이었는
장소월은 하루 종일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하지만 그런데도 전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소월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다.해먹 소파는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장소월은 뒤에서 걸어오는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전연우는 그녀를 안고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장소월은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나 혼자 있고 싶어.”전연우는 정장을 벗고 검은 셔츠만 입고 있었다.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건장하고 힘 있는 팔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녀의 흰 피부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시각적으로 힘 차이가 크게 나는 듯 보였다. 장소월의 힘없어 보이는 가녀린 팔은 그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이런 연약한 모습은 남자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전연우는 고개를 떨구고 장소월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만지다가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가 오늘 몸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전연우는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욕망으로 인해 여기에서 바로 그녀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소월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기 때문에 전연우는 욕망을 억눌렀다.“오늘 기 비서더러 파티에 등장하는 액세서리들을 전부 사라고 했어. 있다가 가지고 올 거야.”장소월은 전연우가 주는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만약 정말로 가지면 두 사람이 스폰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 되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애인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장소월은 그에게 뭐라고 말할지 몰랐다. 전연우는 그녀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안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난 앞으로 몇 년 동안 유럽에 사업 중점을 둘 생각이야. 그래서 당분간 돌아갈 계획이 없는데, 넌 어디 가고 싶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자. 난 여기도 좋은데, 넌 어때? 마침 네 명의로 된 방을 구매할 계획이었어. 네가 전에 있던 곳은 기 비서더러 퇴실 처리하라고 했어.”장소월은 당황해했고 화도 난 듯했다.“오빠는 왜 항상 제멋
그녀의 아버지는 장소월이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전연우를 후계자로 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후계자가 있으니 장소월을 완전히 포기했다.전연우는 송시아의 도움으로 성세 그룹을 손에 쥐게 되었다.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었는데, 오직 장소월만이 도망치지도, 피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돌아간다고 해도 곁에 아무 가족도 없고 혼자다.가슴이 막막하고, 답답했으며 괴롭고 질식할 것 같았다...장소월은 자신도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뒤돌아보면 집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면 했다.전연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을 때리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그는 이미 장씨 가문을 충분히 봐줬고 언제든지 원하면 장해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십여 년을 견뎌왔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전연우는 여유로운 듯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오빠는 소월이가 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그냥 오빠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장소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왔다.전연우는 아주 쉽게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번생엔 그의 새장에 갇혀지내야 했다.“오빠가 이렇게 하면 4년 전에 오빠가 나에게 했던 짓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그럴 수 없어. 난 오빠가 나한테 한 짓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난 오빠의 소유물이 아니야. 그리고 절대 오빠에게 의지하지도 않을 거야.”전연우... 송시아가 다시 태어나서도 말 안 했지? 전생에 당신은 날 죽도록 싫어했어. 심지어 나한테 눈길 한번도 주지 않았지. 그리고... 매번 날 힘들게 했고.나를 발밑에 짓밟고,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하찮게 생각했었지.이번 생에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모두 부드러운 함정 같은 거야. 날 그 깊은 심연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겠지.“전연우... 모든 게 곧 끝날 거야.”그러나
“그거 말고 너한테 또 무슨 얘기를 했어?”장소월은 거울 속에 비친 전연우를 보며 그의 표정을 통해 마음에 찔려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그는 포커페이스에 능숙하여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시아가 장소월을 찾았을 때 이미 자신도 환생했다고 고백했다.송시아의 성격 상 전연우에게 모든 것을 말했을 게 뻔했다. 그에게 전생에 그가 어떻게 장소월을 포기하고, 어떻게 비밀리에 일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시아와 함께 했는지 말이다.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전연우는 전생처럼 이 이유만으로도 그녀와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다.“내가 뭘 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장소월은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백윤서와 송시아만이 오빠 마음속에서 중요한 존재야. 오빠는 그 두 사람만 신경 쓰면 돼. 나한테 이러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야. 난 사흘 뒤에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이미 예약했어.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오빠가 날 지켜보는 것도 소용없어. 내 집이 사라졌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 혼자여도 괜찮아. 지금의 난 스스로도 모든 걸 할 수 있어. 누구한테 의지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전연우,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장씨 가문을 벗어났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 마.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여기서 끝인지 아닌지는 네가 정할 게 아니야.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냥 견뎌야 해. 네가 떠나고 싶어도 결정권은 나한테 있어.”전연우는 장소월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돌아세웠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협박했다.“제운으로 돌아가서 다시 강영수랑 만날 망상은 하지 마. 지금의 강씨 가문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소월이 착하지? 오빠 말 잘 들어.”장소월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전연우, 영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전연우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고 악마 같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
그들 사이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미 예정된 것 같았다. 그의 곁에 있는 장소월의 신분도 마찬가지였다.그 후 보름 동안 장소월은 송시아를 보지 못했고 그녀는... 이미 프랑스를 떠난 것 같았다.장소월은 결국 어머니의 기일도 놓쳤다.이 기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장소월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숨겼다. 어젯밤 전연우는 또 밤새도록 그녀를 원했고 깨어났을 때 창 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전연우가 그녀를 돌보기 위해 고용한 하인도 그녀를 안타까워했다.장소월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마리아는 가디건을 가져다가 장소월에게 걸쳐 주며 말했다.“오늘 호텔에서 분수쇼가 있으니 꼭 보러 가세요. 방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면 병에 걸릴 거예요.”장소월은 기운 없이 어두운 밤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팠어요. 마리아, 돌아가셔도 돼요.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요.”“하지만 전 대표님은 제가 당신을 돌봐주길 원해요.”“괜찮아요. 당신을 탓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날 좀 내버려둬요.”“알았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요. 언제든지 연락 주면 올게요.”마리아가 떠난 후 장소월은 불이 켜지지 않은 발코니 소파에 앉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어둠 속에서 장소월은 환각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는데... 엄마, 나중에 죽으면 나도 별이 될까요?”“소월아, 사람이 죽으면 바람도 될 수 있고 햇빛도 될 수 있는 거란다... 마음으로 원하면 그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지금처럼 소월이가 마음속으로 엄마를 그리워할 때면 엄마는 네 곁에 나타날 거야.”“만약 언젠가... 내가 못 버티면 엄마는 날 원망할 거예요?”“너에겐 자유가 있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전연우는 파티에서 돌아와 술냄새가 몸에 배어 있었고, 기성은은 옆에서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코니쪽으로 걸어가자 밖에 홀로 앉아 허공을 바라보
전연우가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을 입고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가까이 걸어왔다. 장소월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바람에 어깨에 둘렀던 카디건이 바닥에 흘러 떨어졌다.“너... 다 들었어?”“전연우, 난 미치지 않았어. 나 정말 엄마를 봤단 말이야.”전연우는 허리를 굽혀 카디건을 줍고는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소파에 걸쳐놓았다. 이어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는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품에 껴안았다.“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가자. 기성은에게 이미 내일 서울로 돌아갈 항공권을 끊으라고 했어.”장소월은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의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가 왜 갑자기 결정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그의 몸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향수 향을 맡았다. 역겨움이 꿈틀거렸지만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그저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침 8시, 전연우가 잠들어있는 그녀를 안고 전용 비행기에 타 있었으니 말이다.장소월은 아직 꿈나라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고 전연우의 다리에 누워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기성은이 말했다.“최고 실력의 심리상담사를 모셨습니다. 오늘 안에 서울에 도착할 겁니다.”“알았어.”무거운 전연우의 대답이 들려왔다.귀가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함에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가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왜 비행기 안에 있단 말인가.창밖을 바라보니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 송이도 볼 수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앞에 아침 식사를 놓아주었다.“출발한 지 얼마 안 됐고 저녁 6시 전엔 도착할 거야. 일단 아침밥 먹어.”장소월은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고마워. 하지만 나 지금은 배 안 고파.”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말을 안 들으면 지금 당장 비행기를 착륙시킬 거야.”“알았어.”장소월은 정말이지 입맛이 없었지만 어쩔
엄마의 존재는 그녀에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준 것 같았다.분명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비록 허황하고 거짓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장소월은 엄마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엄마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그리고 그 우유...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장소월의 눈시울이 붉어진 눈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담겨있었다.“하지만 우유 때문에 받은 트라우마가 너무 잔인해. 마주할 수도 없고 마주해본 적도 없어. 그저 말없이 결과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거든. 예전 일어났던 모든 일들, 나 다 기억해.”“전연우, 난 널 죽여버리고 싶어! 매번 널 볼 때마다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장소월이 가감 없이 마음속의 말을 내뱉었지만 전연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눈곱만큼도 위협이 될 리가 없으니 말이다.전연우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잘 자.”그는 장소월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성은이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이 막힐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기성은이 호흡을 가다듬고 들어가 보고했다.“인시윤 씨가 대표님의 귀국 소식을 아시고는 소월 아가씨를 위해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구와 인테리어 모두 예전 그대로 맞췄다고 합니다.”“그 집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해. 나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서울에 도착하니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오랜만에 돌아오다 보니 공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가 떠났던 4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그들은 VIP 통로로 공항을 나갔다.서울에도 가을이 찾아와 밤이 되나 꽤나 쌀쌀했다. 차엔 에어컨을 틀고 있어 춥지 않았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본래의 아담했던 건축물은 모두 하늘 높이 솟은 고층 건물이 되어 있었다. 차에 타고 달린 지 어느덧 30분이 지나고 있었다.이 길... 남원 별장으로 가는 건가?
전연우는 가장 낮은 가격으로 회사를 매입했고, 그 필요한 자금은 인씨 가문에서 제공했다.당시 주식 시장은 급격히 요동쳤었다. 서울 제일 명문가인 강씨 가문도 위기를 맞아 휘청거렸으니 인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가까스로 연명해나가던 중소기업들은 파산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인씨 가문에도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2년 전.전연우는 인씨 저택에 가 인경아를 만났었다.인경아는 전연우가 상업계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씨 집안이 남원 그룹을 지지하기 전에도 그는 아름다운 성과를 냈고 서울 업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했으나 장해진의 충실한 개로 살아온 그는 유혹적인 이익 앞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야심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말이다.전연우는 장씨 가문 전체를 집어삼키고 싶어 했다.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30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장해진의 양자라는 것을 떠나 솔직히 난 자네를 좋아하네. 인하 그룹에도 자네와 비슷한 출신의 사람들이 많네. 자네 같은 성과를 이루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야. 오늘 난 시윤이의 얼굴을 봐서 한 번 자네를 만나보기로 했네.”인경아가 손을 뻗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게.”그녀는 이어 인시윤을 노려보았다.“넌 네 방에 돌아가. 오늘 일은 이후 다시 따져 물을 거야.”인시윤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전연우를 두둔했다.“엄마... 연우 씨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그 돈 인씨 가문에게도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여기저기 모아보면 충분히 도울 수 있잖아요.”그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인경아는 인시윤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어렸을 때부터 인시윤은 엄마의 손에서 애지중지 자랐다. 이렇게 뺨을 맞는 건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극히 드문 일이었다.“너 저놈한
그날 밤, 강지훈은 천효연의 방에서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소현아는 흐릿한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품에선 낯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고 머릿속은 아직 몽롱했다. 몇 초 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소현아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침실 문으로 달려갔다. “규영 씨, 미진 씨, 강지훈 어딨어요?” 그녀가 잠든 사이에 또 그 언니한테 갔나? 그 언니가 강지훈한테 다 말하진 않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현아는 다급함에 울음까지 터질 것 같았다. “현아 아가씨, 왜 신발도 안 신고 내려오셨어요?” 규영과 미진은 방금 전 매질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지만 소현아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소현아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가 신발을 신겨주었다. 소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강지훈 씨가 이미 내가 그 언니 화나게 했다는 거 알았겠죠? 나 때리진 않을까요? 뱃속에 아기들도 있는데.” 소현아의 애처로운 모습에 규영과 미진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아니에요. 주인님은 현아 아가씨를 제일 아끼시는데 어떻게 손을 대겠어요?” 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강지훈 씨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언니예요. 전에 내 앞에서 그 언니랑 아기도 만들었다고요!” 북경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이 본 장면이 바로 강지훈과 천효연이 침대에서 나뒹구는 모습이었다. 노원우도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녀 앞에서 잠자리를 서슴지 않고 하곤 했다. 소현아가 그 여자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내면 그는 가차 없이 그녀에게 매질을 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소현아는 당시 맞았던 곳이 욱신거렸다. 왠지 배도 다시 쥐어짜듯 아파왔다. “흑흑, 규영 씨, 미진 씨, 강지훈한테 제발 부탁해줘요. 나 때리지 말라고요. 그 언니한테 사과할게요. 뭐든 할게요...” 소현아는 배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배가 너무 아파요. 더 울면 안 되겠어요. 아기들이 불편해할
강지훈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살기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천효연을 짓눌렀다. 그 바보 때문에 강지훈이 그녀에게 손을 댔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그 바보가 이렇게나 빨리 고자질을 했다고? 천효연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허리를 배배 꼬며 요염함을 최대한 뽐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얼굴이 왜 이렇게 굳었어요? 누가 화나게 했어요?” 그녀는 손바닥을 강지훈의 가슴에 가볍게 얹고 도발적으로 쓰다듬었다. “제가 그 화 풀어줄까요?” 그녀는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흔들며 그의 바지 위 민감한 부위에 입술과 혀를 가져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 방법은 늘 효과 만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남자의 반응을 끌어내기도 전에 강지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뼈를 부술 듯 강렬한 힘이었다. “지훈 씨, 아파요...” 천효연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유혹적인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지훈은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눈으로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누가 소현아 만나라고 했어?” 천효연의 눈에 공포가 스쳤다. “지훈 씨, 저 그냥 현아 씨랑 두어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아양을 떨며 그의 욕망을 자극하려 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곁에 여자가 그토록 많았어도 저 한 번도 문제 삼은 적 없어요. 저도 제 분수를 잘 알아요. 당신이 절 찾아와만 준다면, 전 아무것도 바랄 게 없어요.” 강지훈은 서늘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천효연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애써 계속 변명을 이어갔다. “지훈 씨 전에도 저한테 경고한 적 있잖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당신 말을 거역할 수가 있겠어요?” “인정할게요. 조금 질투했어요. 현아 씨가 당신 사랑을 받으면서도 행복한 줄 모르고 자꾸 당신을 밀어내려고 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몸이 카펫 위
“대체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께서 아래층에서 운동하실 때 효연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효연 아가씨가...” 규영은 강지훈이 천효연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다 말끝을 흐렸다. 강지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계속해.” 규영은 그제야 말을 이어갔다. “효연 아가씨께서 현아 아가씨와 말 몇 마디 나눈 뒤 화를 내며 나가셨습니다. 그 일로 현아 아가씨가 겁을 좀 먹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했길래?” “그게...”규영은 또다시 망설였다. 그녀는 주인님이 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 중 누구를 더 마음에 두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퍽!” 가시 달린 채찍이 허리 옆을 세게 후려쳤다. “소현아가 너희한테 좀 잘해준다고 정말로 너희가 사람인 줄 알아?” 강지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규영은 극심한 고통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주인님!” 미진은 처참하게 매질을 당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고 그녀 곁으로 기어가 강지훈에게 애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께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언니가 잠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규영은 고통을 참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미진의 손을 꽉 잡았다. 처음엔 소현아를 다른 아가씨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겼었다. 그녀를 열심히 보살핀 것 또한 단지 주인님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현아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점차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북경 감옥이라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소현아는 그야말로 빛을 내뿜는 작은 태양 같았다. 미진은 깊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강지훈에게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전했다. “현아가 천효연한테 내 아이를 낳으라고 했다고?” 강지훈은 서늘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단시간 안에 너무 큰 감정 기복을 겪어 자궁 수축이 일어난 겁니다.” 의사가 말했다. “임산부는 감정이 예민한 편입니다. 특히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라 반드시 안정적인 정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강지훈은 얼굴을 굳혔다. “어떻게 유지하지?”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됩니다.” “알았어. 또 주의할 점은?” “현아 아가씨의 신체 상태는 건강한 편입니다. 유일하게 주의해야 할 점은 정서적 안정입니다. 자극받을 만한 일은 피해야 합니다.” 강지훈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의사를 보내고 강지훈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현아는 또다시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강지훈이 눈에 들어오자 동그란 눈동자에 불안이 가득 차올랐다. “배는 좀 어때?” 강지훈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문가에 서서 말했다. 소현아는 여전히 약간 아팠지만 강지훈의 표정이 무서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현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지훈 씨,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주면 안 돼요?” 아빠 엄마는 아기를 임신했다는 걸 아시면 조금 화내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계속 여기에 남는다면, 언젠간 소현아가 그 언니를 화나게 했다는 걸 강지훈이 알게 됐을 때 경을 치를지도 모른다...소현아는 생각할수록 더더욱 큰 두려움이 엄습했고 배도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다. 잔뜩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에 강지훈은 그녀의 입에선 진실을 알아낼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하여 곧바로 규영과 미진을 찾으려 몸을 돌렸다. “강지훈 씨...” 소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베개 뒤에서 머뭇거리며 고개를 내밀고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그가 떠나는 건 더 무서워하는 듯했다.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다. 일이 자신의 통제 밖으로 벗어난 것 같다는 불쾌감이 들었다. “말해.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지금 말하면 용서해 줄 수도 있어.” 그는 성큼 침대 앞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소
소현아는 당근 베개를 꽉 끌어안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 “뭐 잘못했어?”강지훈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현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다 잘못했어요. 화내지 말아요. 얌전히 말 잘 들을게요.” 강지훈은 그녀가 안고 있는 베개를 빼내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말해. 솔직하게 제대로 말하면 화 안 낼게.” 소현아는 베개의 다른 쪽 끝을 꽉 잡은 채 몸을 베개 밑으로 파묻으려 했다. 강지훈은 얼굴을 굳히며 손아귀에 힘을 더 가했다. 결국 소현아는 베개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곧바로 창백해진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배를 부여잡았다.“배가 너무 아파요. 강지훈 씨, 화내지 말고 일단 제 배 좀 봐줘요. 아까 자면서도 아팠단 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보였다. 눈가가 살짝 붉어진 것이 몹시 아파 보였다. 강지훈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는 베개를 던져버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출혈은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침대에 돌아온 강지훈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배를 문질렀다. “강지훈 씨, 화 안 난 거 맞죠?” 소현아는 뒤늦게 그의 반응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가 났다면 지금 이렇게 배를 문질러 주지 않았을 거다. 강지훈은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사고 쳤어?” 소현아는 죄책감에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당신이 화내면서 저 때리는 꿈을 꿨어요. 깨어났는데 당신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보아하니 강지훈은 아직 자신이 효연 아가씨의 심기를 건드린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소현아는 몰래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훈은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이 어리석은 여자는 거짓말할 때 모든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강지훈 씨, 저 소월이한테 전화했었어요.” 소현아는 그의 주의를 돌리려 주제를 바꾸었다. 강지훈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주었
밥을 먹을 때도 소현아는 기분이 축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화나게 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게다가 그 사람은 강지훈이 아주 아끼는 사람이다. 그 나쁜 놈이 때리면 어떻게 하지? 소현아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배도 은근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규영 씨, 미진 씨, 나 배불러요. 방에 가서 자고 싶어요.” 규영과 미진은 음식을 치우고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오자 소현아는 눈만 내놓은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강지훈 씨 오면 저 잔다고 말해줘요.” 그녀가 겁을 먹었음을 눈치챈 규영과 미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효연 아가씨가 아가씨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효연 아가씨가 먼저 말을 걸어온 건가요, 아니면...”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효연 씨가 자신을 기억하냐고 물었어요. 근데 그 여자한테서 나는 냄새가 너무 역해서 대답하지 못했어요.” “내가 말을 안 해서 화난 거겠죠?” 그녀가 예전 반응이 느려 바로 대답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화를 내곤 했었다.규영과 미진이 말했다. “아닙니다. 효연 아가씨가 화난 건 아가씨 때문이 아니에요. 또 무슨 말 했어요? 그것만 물었나요?”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렸어요. 아기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내가 토할까 봐 계속 바닥만 보고 있은 바람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별다른 일 없었던 듯한 그녀의 말에 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불 속, 소현아는 배가 쥐어짜듯 아파왔다. “괜찮아. 아기들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너희 지켜줄게.” 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커다란 당근 베개를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안고 자는 걸 좋아
한참 고민하던 소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천효연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럼 아가씨도 강지훈 씨의 아기를 가져요. 그럼 자꾸 나한테 와서 자지 않을 거잖아요!”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은빛 치아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주변 도우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바보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인님과 효연 아가씨의 잠자리 빈도를 생각하면, 주인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그들의 아이는 이미 몇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바보는 입만 열면 효연 아가씨의 급소를 찌르곤 한다! 규영과 미진도 소현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효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자 규영이 황급히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 “효연 아가씨, 저희 현아 아가씨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라 이런 걸 잘 모르십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현아는 긴장감에 옷자락을 꽉 말아 쥐며 말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좀 멍청해서 그래요. 혹시 제 말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말해주세요. 사과할게요.” 그녀는 자신이 조금 떨어지는 지능 때문에 자주 말실수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이것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한때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상황을 알아차린 엄마가 말해주셨다. 마음속에 말을 담아두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냥 용감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릇된 말을 했을 땐 제대로 사과해서 용서를 빌면 된다고도 하셨다. “맛있는 거 줄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네?” 한참을 기다려도 천효연이 대답하지 않자, 소현아는 탁자 위의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천효연의 불쾌한 향수 냄새가 또다시 코를 찔렀다.소현아는 즉시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또다시 천효연을 화나게 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아냈다. 천효연은 자신 앞에 내밀
잔뜩 일그러지는 소현아의 얼굴을 본 천효연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 바보가 먼저 선수를 친다고? 천효연은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소현아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만지려 했다. “현아 씨, 아기 태어나려면 몇 달 남았어요? 나도 아이 정말 좋아해요. 전에 현아 씨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강지훈 씨가 그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요.”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소현아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엔 독사 같은 살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현아는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자신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고 생각한 천효연은 득의양양하게 아래턱을 들어 올렸다. 소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눈동자를 사방으로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안하고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아 아가씨!” 규영과 미진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처롭게 서 있는 소현아를 본 그들은 급히 달려왔다. 소현아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규영은 곧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현아를 1층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천효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효연 아가씨, 죄송합니다. 요즘 현아 아가씨의 입덧이 좀 심해요. 임산부라 요즘 많이 예민하십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현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주인님 성격 아시죠?” 미진은 느긋하게 가져온 음식을 펼쳐놓으며 경고를 담아 공손하게 말했다. 천효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고작 도우미 주제에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미진은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천효연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구역질 소리가 멈췄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