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달빛이 유난히 밝던 밤이었다.
리아는 손에 든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녀는 황궁 내 작은 도서각에서 일하는 궁녀였고, 그날 밤은 그저 평범한 심부름 중 하나였다.“폐하께 술을 올리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방 안에선 말없이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가장 깊숙한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에레본. 제국의 황제.
그리고, 냉혈한이라 불리던 존재.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 이름이 뭐지?”
리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천천히, 심지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오늘은… 혼자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 말은, 리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저… 술을 따르러 갔을 뿐이었어요.”
리아는 조용히 중얼이며, 어깨 위에서 자고 있는 엘을 내려다봤다.
아이의 숨결은 고르고 평온했다. 하지만 리아의 눈동자는 고요한 밤과는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그날 밤 이후, 그녀는 황제의 침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단 한 번, 단 하나의 밤.그날이 지나자,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자, 반역자의 죄인이 되었다.
“소문은 다 들었어. 리아는 황제를 홀렸다고.”
“아니, 리아가 폐하께 반역을 꾀했다던데?”
궁녀들의 속삭임은 그녀를 점점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지 않았고, 변호하지도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조용히, 아무 감정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그 여자를… 궁에서 내보내라.』
“그날 이후, 폐하는 날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어요.
내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요.”리아는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면, 사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이를 품었고, 그 아이는 살아 있었다.
그녀가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이자, 지금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리아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틈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황제의 부하, 세르반이 아직도 그 문 너머에 있을 것이었다.
‘내가 다시 황궁에 끌려가게 된다면…
이 아이만은 절대로…’그녀는 손으로 조용히 자신의 단검을 더듬었다.
피의 결심이 눈빛 속에 떠올랐다.이번엔, 죽더라도 뺏기지 않겠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세상이 조용해지는 밤이었지만, 리아의 가슴은 멈추지 않고 뛰었다. 바람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도망’은 끝나려 하고 있었다.엘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숨결이 리아의 어깨에 닿았고, 그 따뜻한 체온이 오히려 리아의 심장을 쥐어짰다.그녀는 엘을 부드럽게 눕혔다.
작은 몸이 깰까봐, 한 손으로 이불을 고이 덮고, 다른 손으론 단검을 천천히 품 속으로 밀어넣었다.‘계획은 단 하나.’
아이만은, 절대 눈앞에서 뺏기지 않는다.
문을 열기 전,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은 뚝뚝 울렸고, 입 안이 바짝 말라갔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땀이 맺혔다.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문이 열렸다.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어둠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가 서 있었다.검은 망토.
은색 독수리 문양. 중후한 키에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빛을 잃지 않은 은색 눈동자.“리아 님.”
그는 조용히, 너무도 예의 바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목소리에, 리아의 기억이 뒤흔들렸다.
황궁에서 그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항상 황제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그림자. 하지만 결코 존재감을 잃지 않던 자.세르반.
황궁 마법 군단의 수장. 황제의 명령이라면 목숨도 망설임 없이 내던지는 자.그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곧,
황제가 그녀를 ‘찾으라’고 명했다는 뜻이었다.“…무슨 일로 오셨죠?”
리아는 최대한 평온하게 물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단검 위에 있었다. 말끝은 떨렸고, 숨결은 고르지 못했다.세르반은 리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폐하께서… 한 아이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으셨습니다.”
그 순간, 리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르반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붉은 눈동자.
은발. 세 살. 그리고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폐하의 여인.”리아의 등골이 얼어붙었다.
그가 알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폐하께서는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세르반은 마지막으로 말했다.“그 아이가 정말 황제의 핏줄인지.”
리아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두려움은 사라졌다.
남은 건 단 하나 결심이었다.‘도망칠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각오로, 아이를 지켜내야 할 시간이었다.“불편하진 않아?”카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리아는 한참을 뜸 들인 뒤,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노쇠한 난로에 불씨가 피어오르며 방 안에 따뜻한 공기가 조금씩 감돌고 있었다.짧은 침묵.불꽃이 작게 튀는 소리.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두 사람.그 침묵은 마치 어떤 감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보호막처럼,불안정하면서도 애써 유지되는 조용함이었다.엘은 이불 속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머리를 리아의 무릎에 기대어 잔잔히 숨 쉬고 있는 아이.그 모습이 평화로워서일까.리아는 이번만큼은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여기 있었구나.”카일은 작게 웃었다.“나야말로.너무 늦게 알았지.네가 살아 있었다는 것조차.”그의 말에 리아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살아 있었다.그 단어는 늘, 숨 죽여 살아가던 그녀에게무겁고 차가운 진실로 다가왔다.“그날… 기억나?”리아의 목소리는 낮았고,불빛이 흔들릴 만큼 작았다.카일의 시선이 불꽃에서 그녀로 천천히 옮겨졌다.“…너무 생생하게.”그녀가 마지막으로 황궁을 빠져나가던 날.모두가 그녀를 외면했을 때,그저 말없이 복도 끝에 서서,한 장의 봉투와 열쇠를 건네던 사람.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는그 뒤로도 줄곧 그녀의 안부를 그리워하며이 폐허에 머물러 있었다.“난 그날 이후로, 누군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어.너일 줄은… 몰랐지만.”카일은 손에 쥔 찻잔을 놓았다.그 작은 소리마저 방 안에 울렸다.“저 아이가…”카일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내 아이야.”리아는 그의 말을 막았다.하지만 말투엔 어떤 변명도 없었다.“황제의 피를 가졌고,그걸로 목숨을 위협받는 아이.…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카일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눈동자는 흔들렸다.그녀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이그 말 몇 마디 속에 스며 있었다.“지킬 수 있을까.”리아가, 아니라 그녀
밤은 깊어졌다.숲 아래 작은 오두막엔 이제 더 이상 불빛이 남아있지 않았다.리아는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문을 나섰다.달빛이 희미하게 땅을 비추고 있었다.그 빛 아래, 리아의 그림자가 조용히 흔들렸다.걸음을 내딛는 발끝에, 마른 낙엽이 바삭 소리를 냈다.그 사소한 소음마저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워 삼켰다.아이 엘은 그녀의 등 뒤에 조용히 업혀 있었다.고요한 숨결. 따스한 체온.그것은 리아에게 있어, 세상 모든 소리보다 뚜렷한 실감이었다.그녀는 숲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이미 머릿속엔 수십 번 되뇌었던 루트.황궁에서 얻은 오래된 지도를 수없이 복기하며 기억해낸 ‘그 길’이었다.바위를 돌아, 낙엽 아래 덮인 작은 징검다리.그리고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지하 경로의 입구.모든 것은 리아가 이 날을 위해 준비해온 결과였다.‘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이제부터는 도피가 아닌 ‘이동’이었다.단순히 쫓기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아이와 살아남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이었다.반면, 황궁.에레본은 단정하게 정장을 갈아입고 있었다.황제가 새벽에 궁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그것도, 호위병조차 없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더더욱.카시안이 조심스레 물었다.“폐하, 정말 직접 나가시겠습니까?”“그래야겠다.”그의 대답은 간결했다.하지만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그 아이의 눈을,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니.”황제는 말을 타고, 어두운 궁의 뒷문을 빠져나갔다.달빛이 검은 망토 자락을 스쳤고,그의 붉은 눈동자는 밤 속에서 고요히 빛났다.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3년 전.그녀를 놓고도, 찾지 않았던 이유.정확히는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그에게 ‘사소하지 않은’ 감정이었다.처음으로 잊고 싶지 않았던 여자.하지만 동시에… 기억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후회를 불러오는 사람이었다.말굽 소리가 어둠 속을 내달렸다.황제는
문이 천천히 닫히고,그 조용한 ‘찰칵’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을 때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숨을 내쉬었다.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하지만 그 숨은 목 끝에서 막힌 것처럼,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세르반.그는 돌아가지 않았다.문 너머 어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그의 존재는 마치 밤공기처럼 느껴졌다.눈에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체감되는.리아는 등 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단검을 쥔 손이 떨렸다.쥐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하얀 손등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그 안에서 심장이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작은 이불 속에 잠든 아이.깊은 숨결.세상 물정 모른 채 평온히 잠든 얼굴.그 얼굴을 보는 순간,그녀의 눈동자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그동안 숨어 살며 수없이 준비했던 도망 계획들.만약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만약 쫓기게 된다면 어디로 갈지.하지만… 이상했다.막상 그 상황이 눈앞에 닥치고 나니,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도망치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대신, 문을 닫고 아이를 바라보았다.그 이유가 뭘까.리아는 천천히, 스스로에게 물었다.‘왜… 나는 아직 이 안에 있는 거지?’답은 간단했다.단순히 ‘두려워서’가 아니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건그녀에겐 또 다른 버림이었다.한 번은 자신이 버림받았다.황제로부터, 황궁으로부터, 황제의 아이를 품은 여인으로서.그리고 이번엔,자신이 아이를 다시 ‘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외롭게 만든다면,그건 리아 스스로 또 한 번 ‘이 아이를 버리는 것’이었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단검보다 더 날카롭게.리아는 천천히 일어섰다.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다.책상 위엔 오래된 장부 하나와지도, 봉투, 그리고 글이 적힌 작은 메모들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봉투를 꺼냈다
달빛이 유난히 밝던 밤이었다.리아는 손에 든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그녀는 황궁 내 작은 도서각에서 일하는 궁녀였고,그날 밤은 그저 평범한 심부름 중 하나였다.“폐하께 술을 올리라 하셨습니다.”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방 안에선 말없이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가장 깊숙한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에레본. 제국의 황제.그리고, 냉혈한이라 불리던 존재.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 이름이 뭐지?”리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황제는 천천히, 심지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오늘은… 혼자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그 말은, 리아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그저… 술을 따르러 갔을 뿐이었어요.”리아는 조용히 중얼이며, 어깨 위에서 자고 있는 엘을 내려다봤다.아이의 숨결은 고르고 평온했다.하지만 리아의 눈동자는 고요한 밤과는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그날 밤 이후, 그녀는 황제의 침실로 불려갔다.그리고 단 한 번, 단 하나의 밤.그날이 지나자,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자, 반역자의 죄인이 되었다.“소문은 다 들었어. 리아는 황제를 홀렸다고.”“아니, 리아가 폐하께 반역을 꾀했다던데?”궁녀들의 속삭임은 그녀를 점점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를 지키지 않았고, 변호하지도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그는 조용히, 아무 감정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그 여자를… 궁에서 내보내라.』“그날 이후, 폐하는 날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어요.내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요.”리아는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돌이켜보면, 사랑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그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그날 밤 이후로 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그녀는 아이를 품었고, 그 아이는 살아 있었다.그녀가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이자,지금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리아는 다시 몸을 일으켰
“엘, 조용히. 오늘은 목소리를 낮춰야 해.”리아는 다시 한 번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하지만 붉은 눈동자의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치만, 아까 봤어요! 숲속에서 누가… 우릴 보고 있었어요!”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리아는 곧장 아이를 품에 안고 주변을 살폈다.숲은 고요했고, 새소리조차 잦아들어 있었다.‘설마… 벌써?’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작은 오두막, 숲 너머에 자리한 그들의 은신처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공간이었다.정체불명의 시선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다.리아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벽장 안에서 낡은 검은 가방을 꺼냈다.그 안엔 가짜 신분증, 돈, 도피용 경로 지도가 들어 있었다.“엘, 이제 우리가 이 집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또요…?”작은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리아는 잠시 말없이 그를 안고,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무서운 사람들한테 들키면… 엄마랑 엘, 같이 있을 수 없게 되니까.”“그럼, 도망가요. 엄마랑 같이 있을래요.”작고 여린 목소리.리아는 아이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그 순간, 눈동자 한쪽 구석에 고인 눈물을 그가 모르게 훔쳤다.반면, 황궁.에레본은 깊은 침묵 속에 보고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그림 한 장.불길하게 붉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아이.그 그림 속 존재는 그의 피를 지닌 자였다.“그 아이를… 찾을 수 있는가?”황궁 정보국의 수장 ‘카시안’이 무릎을 꿇었다.“조사 중입니다. 유력한 정보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정보가 아니라 아이를 데려와라.”황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그 여자가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그날 밤.리아는 엘을 재운 후, 홀로 바깥 계단에 앉아 달을 올려다봤다.붉은 달이, 피처럼 둥글게 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였다.“에레본… 넌 날 잊었겠지.하지만, 난… 널 매일 잊고 싶었어.”눈을 감은 순간, 기억이 스며들었다.그날 밤.황제의 침실에서 그녀는 그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창문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방 안의 촛불을 흔들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 여인은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짚었다.배 아래에서 터질 듯한 통증이 물결처럼 밀려왔다.“부인, 이제 곧이에요!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산파의 다급한 외침에도 그녀는 입을 악물 뿐이었다.바스락, 땀에 젖은 은발이 뺨에 붙었고, 이불 위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안 돼.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이 아이까지…’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움켜쥐었다.눈앞이 까마득해질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단 하나, 배 속의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그 아이는 황제의 아이였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황제가 가장 죽이길 바라는 존재이기도 했다.“으아아…!”피를 토하듯 울부짖은 끝에, 드디어 방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붉은 천 위로, 작고 여린 생명이 태어났다.“아아… 눈이… 저 눈이…”산파가 중얼였다.아이의 두 눈은 불길한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아버지인 황제, 에레본과 같은 눈동자였다.그 순간, 리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하지만 곧 다시 떴다.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도망쳐야 했다.3일 후.밤이 깊었다.“폐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부디 이대로 조용히 떠나십시오.”산파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아이의 옷, 젖병, 그리고 가짜 신분증.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품에 안았다.리아는 마지막으로 황궁을 돌아봤다.3년 전,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그가 원한 건 단지 ‘하룻밤의 흥미’였고,그 밤 이후 그녀는 계략에 말려든 희생양이었다.‘아이를 안고 있단 걸 들키면… 나뿐 아니라 이 아이도 죽는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몰았다.허리에 칼을 찬 경비병들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고, 그녀는 밤의 틈을 뚫고 황궁을 빠져나왔다.3년 후.“엄마, 저기 별이 보여요!”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들판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그 눈동자엔 여전히 선명한 붉은 빛이 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