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건휘는 서안 위에 놓인 명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열두 명이나 필요하지 않다. 짐이 원하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조덕수는 잠시 머뭇거렸다.“폐하, 간택은 황실의 중대한 예법이옵니다. 후보를 한 사람만 남기시면 대신들이 그 이유를 묻게 될 것이고, 윤 대감의 집안에도 지나친 관심이 쏠릴 수 있사옵니다.”건휘는 고개를 들었다.“짐이 누구를 황후로 삼을지 결정하는 일에 대신들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느냐?”조덕수는 곧장 엎드렸다.“그런 뜻으로 아뢴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법도에 따른 심사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어야 훗날 황후마마께서도 불필요한 비난을 받지 않으실 것이옵니다.”황후마마.그 호칭이 건휘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아직 서화는 황후가 아니었다.그런데 조덕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건휘는 마치 오래 잃어버렸던 자리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명부를 다시 펼쳤다.“예조의 절차는 짐이 알아서 정리하겠다. 후보들의 신원 기록은 남겨 두되, 이번 간택에 올릴 명부는 새로 작성하라.”조덕수가 고개를 들었다.“폐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후보를 다시 정하시려는 것이옵니까?”건휘는 윤서화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윤정록의 장녀만 남겨라.”승정전 안이 조용해졌다.조덕수는 황제의 손끝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그렇게 하시면 간택을 시작하기 전부터 황후를 정하셨다는 사실이 드러나옵니다. 윤 소저께서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아뢰지 않으셨사옵니까?”건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 아이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고 짐이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을 수는 없지 않느냐.”“소신이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윤 소저께 시간을 주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옵니다.”건휘는 조덕수를 바라보았다.“시간을 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그동안 다른 집안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윤 대감이 다른 사내와 약조라도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조덕수는
윤정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조항이 있다고 하여 황제께서 내리신 명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가 전날 종묘에서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잊었느냐?”서화는 대답하기 전에 손목을 감췄다.“잊지 않았사옵니다. 소녀는 제 혼사를 다른 분의 뜻만으로 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고, 폐하께서는 그 말을 듣고도 저를 나무라지 않으셨사옵니다.”“폐하께서 너그럽게 넘어가신 것이다. 그 일을 허락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윤정록은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오늘 아침 칙서를 받는 순간부터 이 집안의 운명이 네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되었다. 네가 황실의 뜻을 거스르면 너 혼자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서화는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종이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그녀는 그제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단순히 체면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윤정록은 딸의 혼인보다 황제의 노여움이 집안 전체에 미칠 결과를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아버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절차가 있는지 알아야 하옵니다. 저희가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기만 한다면, 나중에 잘못된 일이 생겨도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지 않겠사옵니까?”윤정록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딸이 적어 놓은 조항들을 살폈다.서화의 글씨는 반듯했고, 서로 다른 법전에서 찾아낸 조문 옆에는 책의 이름과 해당 쪽수까지 적혀 있었다.“네가 직접 찾은 것이냐?”“그러하옵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규정도 있어 예조의 최신 법전을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가문에서 의견을 올릴 수 있는 절차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였사옵니다.”윤정록은 종이를 접으려다가 멈췄다.“이 문서는 당분간 밖으로 내놓지 마라. 내가 먼저 살펴보고 예조에 확인할 것이니, 너는 더는 사람들 앞에서 혼사를 거절한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서화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소녀의 뜻을 물으신다면 거짓으로 대답하지는 않겠사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예조에 확
보자기 안에는 작은 떡 몇 개와 축하의 뜻을 적은 짧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서화가 쪽지를 펼치자 곧바로 또 다른 하녀가 다가왔다.“아씨, 정씨 댁에서 사람이 다녀갔사옵니다. 오늘 함께 서책을 보시기로 한 약속은 사정이 생겨 미루어야겠다고 하셨사옵니다.”서화는 쪽지를 내려놓았다.정씨 댁의 여식과는 오래전부터 서책을 빌려 읽고 서로의 글을 보여 주던 사이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오늘 오후에 새로 구한 책을 함께 살펴보기로 약속했는데, 황실의 칙서가 내려오자 그 약속마저 사라졌다.“사정이 생겼다고만 하였느냐?”“그러하옵니다. 다만 댁의 어른께서 지금은 윤가에 드나드는 일을 삼가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다 하옵니다.”서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축하의 떡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그러나 함께 책을 읽던 친구는 오지 않겠다고 했다.“아씨, 오늘은 서책을 빌리러 가시기로 하셨는데 어찌하실 것이옵니까?”곁에 있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화는 잠시 대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나가지 않겠어요. 대신 아버님 서고에 있는 법전부터 찾아보아야겠어요.”시녀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씨, 황명에 관한 일을 알아보시려는 것이옵니까? 괜히 대감마님께 꾸중을 들으실까 걱정되옵니다.”“아버님께서도 그 문서의 내용을 모두 알고 계신 것 같지는 않아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알아야 앞으로 집안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우선 기록을 살펴보겠어요.”서화는 손목의 소매를 정리했다.전날 황제가 붙잡았던 자리가 아직 조금 아팠다.그때도 그는 자신을 걱정한다고 했고, 오늘도 자신을 위해 혼인을 살펴보겠다고 했다.그러나 그 말들이 이어질 때마다 서화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그녀는 서고로 향했다.***윤정록의 서고에는 오래된 법전과 예조의 의례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서화는 서책을 한 권씩 꺼내 목차를 살폈다. 황실 혼인에 관한 조항은 여러 문서에 흩어져 있었고, 일부는 오래전에 개정되어 현재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대청 안쪽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윤서화였다.그녀는 전날 종묘에서 입었던 청색 저고리 대신 수수한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나,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에는 아직 옅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서화는 대문에 붙은 황색 문서를 바라보았다.“아버님, 무슨 일이옵니까?”윤정록은 딸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안으로 들어가거라. 황명을 받드는 자리이니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서화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물러서지 않았다.내관이 그녀를 알아보고 허리를 숙였다.“윤 소저께서는 이제 황실 간택의 대상이 되셨소. 폐하께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계시니 몸가짐과 출입에 각별히 유의하셔야 할 것이오.”서화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대문을 바라보았다.어제 자신이 처음 만난 황제가 오늘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칙서를 보내왔다.그녀가 혼인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고 말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소녀가 그 문서를 직접 읽어 보아도 되겠사옵니까?”내관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이미 대감께 뜻을 전하였으니 윤 소저께서는 따르시면 되오.”“소녀의 이름으로 내려온 명이라면, 어떤 의무가 생기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글을 읽을 줄 아오니 잠시 살펴보게 해 주시옵소서.”내관은 대답 대신 윤정록을 바라보았다.윤정록이 황급히 딸에게 다가갔다.“서화야, 황명 앞에서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네게 내려진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서화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평소라면 자신이 맡은 일에 관해 설명을 요구해도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제지하지는 않던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딸이 문서를 읽어 보겠다는 말조차 황제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아버님의 말씀을 알겠사옵니다. 다만 나중에라도 해당 법도를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윤정록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서화는 대문 앞에 서 있는 군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황제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유
새벽부터 윤가의 대문 앞에 낯선 군사들이 모여들었다.아직 아침 수라를 준비하던 부엌에서는 솥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고, 마당을 쓸던 하인은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멈추자 빗자루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이른 시각에 찾아온 손님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겠지만, 붉은 관복을 입은 내관이 황색 비단으로 감싼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윤정록 대감께서는 황명을 받들 준비를 하시오.”내관의 목소리가 대문 안으로 울려 퍼졌다.장터로 향하던 행인들이 걸음을 늦추고, 황색 비단을 발견한 이웃집 하인이 주인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담장 아래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문을 지키던 하인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함부로 문을 닫지 못했다.“윤 대감 댁에 무슨 경사가 난 모양이오.”“황실에서 직접 내관을 보냈다니, 혹 혼사와 관련된 일은 아니겠소?”낮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담장 너머로 흘러들었다.잠시 뒤 윤정록이 관복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대청에서 내려왔다. 그는 내관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보고 얼굴빛이 달라졌으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기 전에 먼저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집안의 하인들과 시녀들도 뒤따라 엎드렸다.내관은 모두가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뒤 두루마리를 펼쳤다.황실의 간택 절차를 개시한다는 칙명이었다.혼인하지 않은 양가의 여식들을 대상으로 예조에서 신원과 가문을 심사하고, 심사가 끝날 때까지 간택 대상 가문에서는 사사로운 혼인 약조를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이 이어졌다.그 아래에는 이번 절차에 우선 포함된 여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정록의 장녀 윤서화.윤정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전날 종묘에서 황제가 딸의 혼사를 물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은 들었으나, 설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황명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폐하께서 소신의 여식을 간택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이옵니까?”내관은 두루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윤 대감께서는 이미
제8화. 윤정록은 딸과 함께 종묘의 대문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건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조덕수가 가져온 보고를 통해 윤정록이 곧장 가마에 올랐고 서화가 그 뒤를 따랐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는 그 짧은 보고를 몇 번이나 읽었으며, 서화가 무사히 귀가했다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야 종이를 내려놓았다.그때 조덕수가 다시 들어왔다.“폐하, 윤 대감께서 사람을 보내셨사옵니다. 오늘 별청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사죄의 뜻을 전하시며, 여식이 황제 앞에서 감히 혼사에 관한 의견을 아뢴 것이 무례하였다 하셨사옵니다. 집안에서 엄히 가르치겠다는 말씀도 함께 전하셨사옵니다.”건휘의 얼굴이 굳어졌다.서화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먼저 손목을 붙잡고 허락도 없이 끌어안았다.그런데 윤정록은 딸을 꾸짖겠다고 했다.“당장 사람을 보내어 윤 대감에게 전하라. 오늘 일은 모두 짐의 잘못이었으니 윤서화에게 어떠한 벌도 내리지 말라고.”조덕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폐하의 뜻을 그대로 전하겠사옵니다.”“그 아이가 한 말은 옳았다. 제 혼사를 스스로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겠느냐. 윤 대감이 짐의 뜻을 오해하여 딸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분명히 일러라.”조덕수가 물러나자 건휘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가슴이 아팠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른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조금 전까지 자신은 서화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혼사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고 말하자 가장 먼저 그 가능성을 없애고 싶어졌다.건휘는 눈을 감았다.전생의 서화가 떠올랐다.그녀는 황후가 된 뒤에도 몇 번이나 자신에게 부탁했다.친정에 다녀오고 싶다고.구휼소의 백성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자신의 말을 한 번만 믿어 달라고.건휘는 그때마다 허락하거나 거절했다.마치 서화의 삶이 자신의 손안에 있는 물건인 것처럼.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그녀는 죽었다.자신의 명령으로.건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