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사내는 서화에게 무언가를 건넸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건휘는 서화의 손에 들린 서찰을 바라보았다.“그자를 언제부터 알고 지냈느냐?”서화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오래되지는 않았사옵니다. 구휼소의 곡식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사람을 보내 알아보던 중 도움을 받았사옵니다. 그 뒤로 몇 차례 소식을 주고받았을 뿐이옵니다.”건휘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서화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하고 있었다.그것이 오히려 건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는 손을 뻗었다.서화가 들고 있던 서찰을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심장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통증이 꿰뚫었다.건휘는 숨을 삼키며 손을 멈췄다.손목의 검은 문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는 서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그 여인이 너를 사랑하지 않아도 다시 만나겠느냐?'건휘는 이를 악물었다.그는 서찰을 빼앗지 않았다.대신 서화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그자를 만나게 되면 짐에게도 알리거라. 구휼소의 일이라면 짐이 직접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서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사옵니다.”건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서화는 살아 있었다.그가 되찾고 싶었던 여인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건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그는 서화의 손을 다시 잡지 않은 채 침전을 나섰다.중궁전의 문이 닫히기 직전, 안쪽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렸다.“마마, 강 공자께서는 오늘도 구휼소에 나오신다 하셨사옵니다.”건휘의 걸음이 멈췄다.곧이어 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 보아야겠구나.”건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닫혀 가는 문틈 사이로 서화의 옆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조금 전 황제를 바라보던 때와 달리 편안한 얼굴이었다.건휘의 손목에서 검은 문양이 다시 뜨거워졌다.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이번에는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
“네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한 것은 짐이다. 네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고, 네가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았지.”서화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건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러니 앞으로는 짐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네가 직접 말해 다오. 이번에는 끝까지 듣겠다.”침전 안의 궁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서화 역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입술만 달싹였다.건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날짜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이 며칠이냐?”서화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칠월 초엿새이옵니다, 폐하.”건휘의 눈빛이 흔들렸다.칠월 초엿새.그 날짜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서화가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첫 밀고가 올라오기 전이었고, 형부에서 구휼 장부를 조사하기 시작하기 전이기도 했다.그녀가 죽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건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그는 서화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오늘부터 중궁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다시 살피겠다. 네 곁에 금군도 두어야겠구나.”서화의 얼굴이 굳었다.“폐하, 중궁전에 금군을 두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갑자기 그런 명을 내리시면 궁인들이 모두 놀랄 것이옵니다.”건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짐이 너를 지키려는 것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너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다.”서화는 잠시 침묵했다.그녀는 황제의 눈빛에서 낯선 감정을 읽었다.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사람처럼 간절하면서도 다시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불안했다.서화는 조심스럽게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건휘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그 순간 심장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건휘는 얼굴을 찌푸렸다.노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네가 그 여인의 자유를 빼앗을수록
“황후는 어디 있느냐?”조덕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황후마마 말씀이시옵니까? 조금 전 중궁전에서 내명부의 문서를 살피고 계신다는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건휘의 손가락이 굳었다.“서화가…… 살아 있느냐?”조덕수는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폐하, 황후마마께 무슨 일이 있으셨사옵니까? 오늘 아침에도 평소처럼 궁녀들에게 지시를 내리셨다 하옵니다.”건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조덕수의 팔을 놓았다.중궁전.서화가 그곳에 있었다.죽은 채 차가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건휘는 곧장 회랑으로 뛰어갔다.조덕수가 뒤에서 황제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궁녀들이 놀라 무릎을 꿇고 금군들이 황급히 길을 비키는 동안에도 건휘의 시선은 오직 중궁전으로 향해 있었다.회랑을 꺾어 중궁전의 붉은 지붕이 보이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그곳에는 봉인지가 붙어 있지 않았다.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뜰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화가 아끼던 매화나무에는 푸른 잎이 돋아 있었으며, 궁녀들이 꽃병과 서책을 들고 회랑을 오가고 있었다.건휘는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침전 안쪽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그는 숨을 삼켰다.서화였다.건휘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뛰어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침전 안에는 서화가 앉아 있었다.푸른 비단 치마를 입은 그녀는 궁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서찰을 살피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 비녀를 단정하게 꽂았고, 뺨에는 따뜻한 혈색이 돌았다.건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숨을 멈췄다.서화의 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그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처형대 위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에 젖은 죄수복과 차갑게 식어 가던 손, 자신을 바라보던 마지막 눈빛이 살아 있는 서화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건휘는 비틀거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서화야…….”서화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건휘의 귓가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고, 눈앞에는 자신이 지나온 궁궐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처형대 위에서 무릎을 꿇은 서화가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뒤이어 형부의 심문실이 모습을 드러냈다.서화는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목에는 굵은 밧줄이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깊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건휘는 심문실 안으로 뛰어들었다.“그만두어라! 황후에게 손대지 마라!”그러나 누구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형부의 관리가 서화에게 문서를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장부를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분명 누군가 기록을 바꾸었을 것입니다.'건휘는 관리의 손에서 문서를 빼앗으려 했지만 손끝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서화가 고개를 들자 그는 황급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서화야, 짐이 듣고 있다. 이번에는 네 말을 끝까지 듣겠다.”하지만 서화의 시선은 그를 지나쳐 닫힌 문을 향했다.'폐하께서 제 말을 들어 주신다면…….'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심문실이 어둠 속으로 무너졌다.다음에 나타난 곳은 한겨울의 중궁전이었다.서화는 침전 앞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회랑을 휘감고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이 들려 있었다.건휘는 그날을 기억했다.유채령이 몸이 아프다며 사람을 보냈던 밤이었다. 그는 서화와 함께 저녁을 들기로 약속했지만, 귀비의 처소에 들렀다가 끝내 중궁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서화는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기다렸다.건휘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서화야, 그만 기다려라. 오늘은 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 쉬어라.”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끝은 다시 허공을 지나갔다. 서화는 식어 버린 차를 바라보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오늘도 오시지 않는구나.'그 작은 중얼거림이 건휘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그는 서화가 자신
건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처형대 위에서는 끝내 볼 수 없었던 웃음이었다. 살아 있는 서화가 웃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기뻤지만, 그 웃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심장을 뒤틀었다.“저자가 누구냐?”건휘는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사내가 서화에게 조금 더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대답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건휘는 손바닥으로 거울을 내리쳤다.“짐이 묻지 않았느냐. 저 사내가 누구인지 말하라!”그 순간 심장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건휘는 숨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거울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노파는 그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그 여인을 의심하는 것이냐?”“짐은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화에게 접근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건휘는 고통을 참으며 거울을 노려보았다.“저자가 감히 황후에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말이다.”노파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네가 삼킨 저주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구나.”그 말과 함께 거울 속 서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그녀의 목덜미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건휘는 놀라 거울에 손을 뻗었다.서화가 손끝으로 목을 만지자 검붉은 피가 묻어났다. 상처는 순식간에 깊어졌고, 그녀의 푸른 비단 치마에도 붉은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안 된다! 서화야, 물러서라!”건휘가 소리쳤지만 거울 속의 서화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황제가 서 있는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폐하께서는 이번에도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요.'건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이번에는 믿겠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끝까지 듣고 믿겠다!”그러나 서화는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제단을 내려왔다. 낡은 옷자락이 바닥을 스쳤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 여인이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도 다시 만나겠느냐? 네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그 여인은 너를 미워할 수 있고, 네가 목숨을 걸고 구해도 다른 사내의 손을 잡을 수 있다. 네가 눈앞에서 무릎을 꿇어도 끝내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건휘의 얼굴이 굳어졌다.“서화는 짐을 사랑했다. 십 년 동안 한결같이 짐만 바라보았던 여인이다.”“죽기 전까지는 그랬겠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너를 저주하지 않았느냐?”건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노파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더욱 견딜 수 없었다.노파는 그의 가슴에 손가락을 올렸다.“네가 사랑할수록 그 저주는 심장을 파고들 것이다. 네가 그 여인의 자유를 빼앗을수록 천명은 무너질 것이며, 다시 그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면 같은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건휘는 노파의 손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렇다면 서화를 죽이지 않으면 될 일이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 여인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노파는 그 말에 서글픈 듯 웃었다.“황제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사람은 칼로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것도, 가두는 것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숨통을 조이는 것도 때로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그 말이 건휘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서화가 자신을 바라보던 마지막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죽음이 두려워서 울지 않았다. 자신이 끝내 믿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한 얼굴이었다.건휘는 검을 거두었다.“다시는 서화를 죽이지 않겠다. 그 여인이 원한다면 황후의 자리도 내려놓게 하겠다. 다만 살아 있는 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다오.”노파는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청동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그렇다면 네가 죽인 황후의 이름을 불러라. 그 여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주까지 네 입으로 다시 말해야 한다.”건휘는 거울 앞에 섰다.“윤서화.”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검게 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