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적막이 내려앉은 대군저 안채, 툇마루에 멍하니 인형처럼 앉아 있는 서연의 하얀 얼굴 위로. 생기를 잃은 차가운 가을 햇살이 서글프고 무겁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돌부처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쉬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혼백은 이미 육신을 빠져나가 저 멀리 아득하고 끝없는 캄캄한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처럼. 그녀의 맑고 검었던 두 눈동자에는 더 이상 배신의 슬픔도, 분노도, 이헌을 향한 날 선 원망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아무런 초점 없이 허공을 맴도는 그 극도로 건조하고 텅 빈 눈빛. 그것은 살아 숨 쉬고 맥박이 뛰는 사람의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모든 희망과 존재 이유를 완벽하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린, 오직 얼음장처럼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만이 그녀의 가녀린 발밑부터 서서히, 짙고 무겁게 뱀처럼“전하의 지엄하신 교지이옵니다! 섭정이신 진안대군께서는 당장 어명을 받드시오!”한밤중, 죽은 듯이 고요하던 대군저의 적막을 날카롭게 찢고 당도한 궐의 다급한 파발.시뻘건 옥새가 무겁게 찍힌 누런 교지를 두 손에 치켜들고 온 승지의 앙칼진 목소리가, 차가운 마당의 공기를 매섭게 울렸다.은장도의 시퍼런 칼날을 맨손으로 미친 듯이 꽉 쥐었던 탓에 하얀 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손.피투성이가 된 붕대를 칭칭 감은 채, 굳게 닫힌 서연의 처소 문밖 흙바닥에 짐승처럼 엎드려 밤새 피눈물로 오열하던 이헌이. 승지의 부름에 비틀거리며 처참한 몰골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퀭하게 파이고 시뻘겋게 핏발 선 두 눈이, 승지가 내민 교지를 향해 독사처럼 서늘하게 향했다.“이 야심한 밤중에, 내게 교지라.”이헌은 찢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갈라진 쇳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걸어가, 승지의 떨리는 손에서 그 교지를 거칠고 무자비하게 낚아채어 홱 펼쳤다.『북방의 오랑캐 여진족이 압록강을 무참히 넘어 도성과 사직을 위협하고 있으니.조선의 안위와 군사를 책임지는 섭정, 진안대군 이헌을 당장 북방 토벌군의 최고 도원수로 임명하노라.섭정은 당장 내일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정예군을 이끌고 최전선 사지로 출정하여 오랑캐의 목을 베어 백성을 구하라.』교지에 적힌 그 끔찍하고 기만적인, 얄팍한 명분이 덕지덕지 발린 문장들을 차가운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이헌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기괴하고 잔혹하게 비틀려 올라갔다.“하, 하하…… 참으로 얄팍하고 역겨운 수작이로군. 감히 내게 이런 얕은 함정을 파다니.”“저, 전하……! 어찌 지엄하신 어명 앞에서 이리 불경한 실소를&hell
“전하! 당장 대규모 토벌군을 파병하여 북방의 적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해야 하옵니다!”“적의 기세가 너무도 흉흉하고 심상치 않사옵니다! 훈련된 정예병과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도원수(초정 사령관)를 파견하지 않으면, 평양성마저 순식간에 불타 함락될 것이옵니다!”대신들이 핏대를 세우며 피를 토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최근 이헌의 무자비한 권력 탄압에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며 웅크려 있던 훈구파 잔당들의 우두머리, 좌의정의 두 눈동자에 소름 끼치고 예리한 맹독사가 번뜩이기 시작했다.‘거대한 북방의 전쟁이라…… 참으로 하늘이 내게 내린 완벽하고 절호의 기회로구나.’좌의정은 속으로 기괴하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용상에 앉아 사색이 된 왕 이도와 은밀하게 뱀 같은 시선을 교환했다.왕 이도 역시, 바들바들 떨던 손을 멈추고 좌의정의 그 서늘한 눈빛이 담은 숨은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지금 조선 조정을 공포로 장악하고 있는 무소불위의 섭정, 진안대군 이헌.그를 이 궐 안에서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의 흑위대는 너무도 강력했고, 그의 권력은 왕인 자신조차 숨도 못 쉴 정도로 무자비하고 압도적이었으니까.하지만.그를 저 멀리, 피가 튀고 칼날이 난무하는 가장 위험한 최전선의 전쟁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지(死地)의 한가운데로 합법적으로 내몰아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그가 전장에서 눈먼 적의 화살에 맞아 뒈지든, 오랑캐의 칼에 베여 죽든, 그것은 섭정을 합법적이고 명분 있게 제거할 수 있는 하늘이 내린 가장 완벽하고 절호의 기회였다.“전하.”좌의정이 아주 무겁고 엄숙한 충신의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은장도 사건의 그 끔찍하고 참혹했던 핏빛 밤이 지난 이후.대군저 안채는 사람의 온기라곤 단 1푼도, 단 한 점도 느낄 수 없는. 마치 살아있는 자들의 거대한 무덤처럼, 완벽한 죽음의 고요와 뼈 시린 적막 속에 끝없이 잠겨들었다.서연은 스스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굳게 닫아걸어 버렸다.그녀는 이헌과의 일말의 소통조차 잔인하고 철저하게 끊어냈다.이헌이 덜덜 떨리는 핏물 젖은 손으로 문밖에서 밤새도록 애원하며 건네는 따뜻한 밥상도, 지밀상궁이 눈물을 훔치며 조심스레 밀어 넣는 맑은 미음과 탕약도. 서연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물조차 목구멍으로 넘기기를 거부했다.“…….”그녀는 그저 아무런 장식도 없는 텅 빈 벽에 등을 기댄 채.창호지 너머로 아주 느리게 비치는 흐릿한 햇살의 이동만을, 마치 혼백이 빠져나간 몽유병자처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자살하는 것조차 미치광이 사내에게 철저히 감시받고 통제당하는 이 숨 막히는 대군저 감옥 안에서. 그녀가 저 살인마 사내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끔찍한 복수는, 스스로 곡기를 완전히 끊어 자신의 육신을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이는 것뿐이었다.분노도, 원망도, 슬픔도, 심지어 절망감조차 모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살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얇은 육신으로, 그녀는 마치 생명력을 완전히 잃고 그저 기계적으로 맥박만 뛰는 비참한 ‘목각인형’처럼. 자신의 영혼과 모든 인간의 감정을 완벽히 지워버렸다.“부, 부인…… 서연아…… 제발 식사를 조금이라도…….”그날 밤.안채 마당에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이헌은 굳게
서연이 경악하며 칼자루를 쥔 손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이헌의 악력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집요했다.그녀가 칼을 빼내려 힘을 줄수록, 이헌의 손바닥에서는 끔찍하고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서어억, 서걱.칼날이 이헌의 두꺼운 손바닥 살점을 무자비하게 파고들며 썰어버리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찢었다.맨손으로 시퍼런 칼날을 틀어쥔 탓에, 그의 손바닥 피부와 근육이 끔찍하게 찢어지고 갈라졌다.“아아…… 미친놈아…… 당장 놓으란 말이다……!”서연의 파란 입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이헌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시뻘건 핏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며, 은장도의 칼자루를 타고 서연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칼날이 너무도 깊숙이 살을 파고든 나머지, 벌어진 붉은 살점 사이로 그의 하얀 손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지경이었다.그야말로 뼈가 깎이고 살이 도려내 지는 극도의 참혹한 고통.하지만.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이헌은 결코 칼날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뼈가 부서져라 더욱 꽉 틀어쥐며, 서연의 칼끝이 그녀의 목덜미로 단 1촌도 다가가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하아…… 하아…… 안 됩니다…… 부인…… 제발…….”이헌의 핏발 선 시뻘건 눈동자에서 굵은 공포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그는 뼈가 드러난 손으로 칼날을 틀어쥔 채, 그대로 서연의 발밑에 털썩, 비참하게 무릎을 꿇었다.“제발…… 제발 이것만은 아니 됩니다…&hellip
“주저하지 마라…… 더 깊이 찔러라. 내 더러운 심장이 터져버리도록 더 깊숙이 찔러, 내 비참한 숨통을 당장 완벽하게 끊어주십시오…….”은장도의 서늘한 칼날이 가슴뼈를 긁고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이헌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며, 서연의 하얀 손을 자신의 커다란 두 손으로 겹쳐 쥐고 애달프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핏발 선 시뻘건 눈동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자신을 찌른 서연을 향한 원망 따위는 단 1푼도 존재하지 않았다.오직 자신이 평생을 짊어져야 할 그 끔찍한 살인마의 죗값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의해 직접 심판받고 있다는 비참한 안도감.그 지독하고 병적인 피학(被虐)의 쾌감만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기괴하게 채우고 있었다.“…….”서연은 자신의 손을 겹쳐 쥐고, 스스로 칼날을 더 깊이 쑤셔 넣으려 발악하는 이헌의 그 비틀린 광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자신을 죽이려는 이 순간조차.자신의 심장에 칼이 박히는 이 처참한 찰나조차도.저 미치광이 사내는, 이것을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지안’에게 바치는 완벽한 속죄의 기회이자 달콤한 구원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미친놈.’서연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통제할 수 없이 떨려왔다.동귀어진을 결심했다. 내 손으로 저 살인마의 심장을 찢어발기고, 나 역시 이 구역질 나는 껍데기의 삶을 끝내려 했다.가장 잔혹한 복수를 위해 칼을 들었건만.저 사내는 내가 내리는 그 죽음의 형벌조차, 자신의 더러운 죄책감을 씻어낼 제단으로 비틀어 수용하고 있었다.내가 이대로 그의 심장을 찔러 숨통을 끊
자신이 고통에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그녀가 놀라 다칠까 봐.자신의 거대한 상체를 서연 쪽으로 더 바짝, 멍청하고 미련할 정도로 깊숙이 들이밀며 밀착시켰다.마치 기꺼이 그녀의 분노 어린 칼날을 자신의 온몸과 심장으로 전부 받아내려는 짐승처럼.“커흑…… 콜록…… 컥.”이헌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어리가 꿀럭거리며 쏟아져 나와 턱과 관복을 시커멓게 적셨다.가슴을 꿰뚫린 끔찍한 고통에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그의 짐승 같은 호흡은 찢어질 듯 가빠졌다.그런데.자신과 함께 죽기 위해 칼을 꽂아 넣은 서연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이헌의 그 저항 없는 무방비한 수용이 아니었다.“하아…… 하아…….”이헌이 끓어오르는 피 섞인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찌른 서연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극심한 살을 찢는 고통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그의 찢어진 입술 끝은, 도무지 믿을 수 없게도.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고도 애달픈, 소름 끼치는 미소를 기괴하게 짓고 있었다.“……미친놈.”서연이 경악에 차 파랗게 질린 입술로 중얼거렸다.이헌은 덜덜 떨리는 자신의 커다란 두 손을 허공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리고는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은장도 손잡이를 꽉 쥐고 파르르 떨고 있는, 서연의 하얗고 얇은 두 손을.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운 보물을 감싸듯, 자신의 핏물 젖은 손으로 크고 따뜻하게 겹쳐 쥐었다.“서…… 연아.”“이거 놔! 징그러운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