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요, 삼촌을 찾아서 참 다행이었겠네요.”만약 그때 정국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강이한과 이혼은커녕 어떤 보복을 당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이 말은 진심이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이유영이었지만, 정국진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없었을 테니까.잠시 후,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이유영의 회사로 향했다. “6시에 다시 데리러 올게요.”박연준이 차에서 내리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박연준의 차가 떠나자, 이유영은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강이한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눈빛에서 싸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언제부터 있었지?’그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누구라도 단번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많은 여성이 그를 힐끔거렸다.“여긴 어쩐 일이야?”이유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박연준과는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어?”정국진과 그녀의 사이를 오해했던 사건 뒤로 강이한은 섣불리 추측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유영이 외간 남자와 만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유영이 박연준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순간, 그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강이한과 달리 이유영은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무심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봤다.“어제 삼촌이랑 얘기 좀 나눴거든.”“무슨 얘기?”이유영이 정국진을 언급하며 대답을 미루자 강이한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박 대표님 가정사는 좀 복잡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남자니까 잘해보라고 하시더라고. 박 대표님이라면 절대로 날 실망하게 할 일이 없을 거라면서.”“그게 무슨 뜻이야?”강이한이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그의 태도에 이유영이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웃음을 본 강이한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모른 척하기는. 너처럼 밖에서 딴 여자랑 놀아날 일은 없을 거란 뜻이잖아!”그 말을 들은 강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상대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너 때문에 지음은 완전히 빛을 잃어버렸어.”이유영이 강이한을 지나치려던 순간 그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이유영은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지금 한지음이 맹인이 됐다는 거야?”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이유영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본 강이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남이 평생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너…!”강이한은 분노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수술하면 되지 않아?”“이유영!”“왜? 설마 내 각막을 원해?”이유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지음이 진짜로 맹인이 되었다니, 인과응보 아닌가? 묘한 희열이 속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올랐다. 반면, 점점 환해지는 이유영의 얼굴을 본 강이한은 분노에 휩싸였다.“네가 감히 비웃어?”강이한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나 이유영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왜? 비웃으면 안 돼? 인과응보지! 참, 꼴 좋다.”지난 생에 눈이 멀었던 사람은 이유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멀게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한지음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해치는 일 따위 서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저번 생엔 이유영은 죽을 때까지 어둠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만 했었다.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치고 올라왔다. 이유영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이 지속될수록 강이한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하지만 이유영은 오히려 그것이 촉진제가 되었는지, 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어젖혔다. “이유영!”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이한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이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악독할 수 있는가?강이한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도 잊은 채, 분노했다.“걱정 마, 좋은 약 많이 보내줄게. 그쪽이 빨리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이유영은 한지음이
“방금 강이한이 자기 입으로 그랬어. 한지음, 수술 실패한 것 같아!”이유영은 아주 통쾌했다.“실패했다고?”“응!”“벌받았네!”소은지는 이미 이유영한테서 그동안 한지음이 저질러온 악행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한지음은 이유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스스로 눈에 상처를 입힐 정도로 아주 악독한 여자였다. 그랬는데 진짜로 눈이 멀어버렸다니, 인과응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그지! 죗값을 받은 거지!”이유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강이한을 너무 믿었던 거지.”“맞아. 웃겨 정말!”한때 이유영이 그랬던 것처럼, 한지음은 강이한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딱 그 꼴이었다.“믿으려면 의사를 믿어야지. 바보같이 강이한을 믿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이유영이 말했다.“그래, 이제 만족해?”소은지가 물었다.“응, 아주 좋아! 정말 오랜만에 홀가분하다!"이유영은 한지음을 동정하기는커녕 아주 기뻐했다. 한지음이 처음부터 좋게 나왔다면 둘은 좋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엄연히 둘은 아빠가 같은 자매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망친 건 결국 한지음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유영이 느꼈을 지옥을 똑같이 경험해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니 죗값을 치르는 날이 오는구나!”소은지가 말했다. 그녀는 과거에 이유영이 한지음 때문에 당했던 수모를 떠올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알겠어, 너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까 남은 얘기는 내일 하자!”한지음이 그렇게 됐다는 것은 매우 통쾌한 일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업무가 더 중요했다.“잠깐!”이유영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갑자기 소은지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무슨 일인데?”“그래도 너무 방심하진 마.”“왜?”“저번에도 너한테 온갖 누명을 씌웠는데, 이번에 수술 실패까지 했으니 또 어떤 계략을 꾸밀지 누가 알아? 일이 이렇게 순순히 풀릴 것 같지 않아.”소은지는 한지음
조민정은 이유영도 인정하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라고 평가받는 지현우라니,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거라 이유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얼른 들어오라고 하세요.”이유영이 말했다.“네!”잠시 밖으로 나갔던 직원이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이유영은 단번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눈치챘다. 지현우는 정국진이 데리고 있던 가장 능력이 출충한 비서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거대한 지사를 맡게 된 이유영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인재이기도 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비서실장으로 발령받은 지현우라고 합니다. 여긴 제 서류예요.”지현우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이력서와 발령 서류를 꺼내 이유영에게 조심히 건네주었다. 남들 보기엔 당연한 절차일지 몰라도, 이유영은 그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련함을 느꼈다. 긴 시간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히 적응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특유의 분위기였다. “네, 어서 오세요.”이유영이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간단히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솔직히 큰 회사를 경영해 본 이력이 없는 이유영으로서, 자신보다 더 노련한 경험자를 부하직원으로 둔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면 안 되었기에, 그녀는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서류를 모두 살펴본 이유영은 지현우와 함께 회사 운영과 청하시 내부 현황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슬슬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이었다.“아, 맞다!”“왜 그러세요, 대표님? 뭔가 더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한 가지 더 있어요.”“말씀해 주세요.”이유영의 머릿속에 소은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한편 병원에서, 강서희와 한지음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진영숙은 다른 치료 방법을 찾아, 강이한은 다른 일로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병실엔 강서희와 한지음,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그러게 왜 쓸데없이 싸움을 걸었어.”강서
“정국진 회장 누구인지 너도 알지?”강서희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동안 강이한 옆에서 지내게 되면서 한지음도 나름 상류사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국진은 그녀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는 파리의 최고의 부자라 알려진 대기업 회장이었다.“하! 설마 네가 뭐 정국진 회장의 잃어버린 딸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한지음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녀는 강서희가 강씨 집안의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은연중 항상 강서희를 무시해 왔었다.“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난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해.”“….”“네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이유영이야! 그 여자가 무려 정국진 회장의 조카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니까! 파리 최고의 부자가 이유영의 삼촌이라고!”강서희의 말이 이어질수록 한지음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하지만 강서희는 오히려 그 모습에 희열을 느낀 듯 더 흥분해서 말을 이어갔다.“이제 이유영은 네가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단 말이야!”“….”“정국진 회장이 든든히 뒤에서 버티고 있는데 네까짓 게 뭔 짓을 한다 해도 쓸모 없을 거야!”“….”“그렇게 불쌍한 척 굴어봤자 소용없어. 세상 모두가 널 동정한다 해도 이유영에겐 정국진 회장이 있으니까!”강서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한지음의 심장을 꿰뚫었다. 파리 최고의 부자, 정국진이 이유영의 삼촌이었다니! 한지음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그녀가 어떤 계략을 짜더라도 쉽사리 이유영을 무너뜨릴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강서희가 계속 떠들어대자, 정신이 산만해진 한지음이 입을 열었다.“그만!”“이제 이유영은….”갑작스레 울려 퍼진 한지음의 고함에 강서희는 깜짝 놀라 하던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무력감에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한지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유영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네가 그동안 한 짓거리들 보면 인과응보가 진짜
노부인은 매우 체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지음한테 감사한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하도 언론에 좋지 않은 소문들이 많이 퍼지다 보니 이제는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그래, 하지만 네 말대로 강씨 가문은 우리 오빤한테 목숨을 빚졌어! 그건 사실이잖아?”“이익!”결국 말문이 막혀 버린 강서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강서희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결국 병실엔 한지음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이유영!”한지음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이유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아름다웠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추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유영에게 가장 비참한 최후를 안겨주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눈이 멀어버렸다. 이제 한지음은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유영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그녀는 이 사실을 자각하자 너무 분했다!“내가 널 과소평가했네!”자신은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유영은 밖에서 훨훨 날아다닐 걸 생각하니, 한지음은 원통하다 못해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한지음은 당장이라도 이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스스로 일상생활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어버렸다.한편, 이유영은 한참 회의 중이었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지만 옆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지현우의 시선에 차마 전화를 받지 못했다.그러나 전화는 끊길 기색이 없이 계속해서 울렸고 보다 못한 지현우가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역시 유능한 인재답게, 아주 눈치가 빨랐다. 그제야 이유영은 마음 편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전화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한지음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유영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또 무슨 일인데?”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 “나 좀 만나러 와.”한지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소리 지르지도 않고 차분한 태도라니, 이유영은 평소답지 않
“너한테 정국진이라는 삼촌이 있을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어. 하지만 그래봤자 너도 결국 그의 보호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그래서 뭐? 너는 뭐가 있는데?”이유영이 비죽대며 물었다. 한지음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고 이런 말들을 내뱉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나한텐 이한 오빠가 있지!”한지음이 증오를 듬뿍 담아 말했다. 이건 그녀에게 현재 남은 마지막이자 유일한 패였다. 한지음은 눈까지 잃고 나니, 생각보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이유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난 또 뭐 대단할 걸 가졌다고.”차갑고도 스산한 목소리가 이유영의 입에서 나왔다. 저번생이었으면 모를까, 이번 생엔 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사사건건 강이한의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을 조리며 슬퍼하던 그녀는 없었다. “너나 네 엄마나, 정말 똑같네. 남의 것을 탐하는 그런 더러운 족속!”“이유영,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그 말을 들은 한지음은 이성을 놓아버렸다. 엄마는 그녀에게 있어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길길이 날뛰는 한지음의 목소리에 이유영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야.”이유영이 계속해서 한지음을 자극했다.“그 입 다물어!”“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너의 엄마가 남의 남자를 탐낸 건 맞잖아! 불륜녀 엄마에 불륜녀 딸이네!”“입다물라고!”“분륜도 유전인가 봐.”이유영은 전에 진영숙한테 모욕당할 때를 떠올리며 그대로 흉내 냈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독한 말들이 이유영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그녀는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가해자는 한지음의 엄마인데, 뻔뻔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며 이유영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던 건 한지음이었다. 그러니 봐줄 이유가 없었다.“이유영! 내가 맹세하는데, 넌 반드시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절대로!”한지음은 자신을 조롱하는 이유영을 절대로
과거, 이유영도 어쩌면 다른 결말을 맺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강이한에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굳이 회귀하지 않았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이유영은 이제부터라도 강이한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기로 했다.한편, 병원에서.한지음은 완전히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이유영, 이 망할 년! 감히 우리 엄마를 모욕해! 네까짓 게 뭔데, 감히!”쾅, 쨍그랑, 병실에 온갖 것이 날아다니며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때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다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가 처참한 병실 모습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유영 씨, 왜 이러세요?”“나가!”“….”“당장 나가라고!”평소에 온화하기만 했던 한지음이 갑작스레 돌변하자 간호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얼른 강이한에게 이 사태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이유영 앞에서만 들어내던 본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아악! 악!”분노에 가득한 한지음의 비명이 병실에서 울려 퍼졌다. 조금만 참으면, 조금만 참으면 다시 광명을 찾게 될 것이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유영에게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만든 다음,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잠시가 평생이 될 거라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지음은 정국진의 비호 아래 여왕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사는 이유영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반대로 병실에 붕대를 감은 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도 떠올렸다. 그녀는 도무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때, 강이한이 병실에 도착했다.“지음아, 왜 그래?”“저 이제 정말 가망 없나요?”한지음이 강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는 분명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어둠뿐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강력한 무력감이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누
이유영이 백산 별장에 돌아왔을 때, 정국진은 이미 나가고 임소미만이 집에 남아 있었다.이른 아침만 해도 괜찮았던 그녀의 표정은 지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엄마, 무슨 일 있어요?”임소미의 얼굴을 보고 이유영은 다급히 다가갔다.임소미는 딸의 눈앞에서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이내 힘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숨을 몇 번이나 고르며 마음속의 울분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무슨 일인데요, 엄마?”임소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유영은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유영이 소파에 앉자마자 임소미는 이유영을 끌어안았고 묵직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전해졌다.‘늘 이성적이던 엄마가 이토록 감정을 드러낼 정도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이유영은 임소미의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잠시 후, 임소미가 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진영숙의 변호사가 왔어.”“...”그 말에 이유영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변호사라니?’“무슨 일로?”질문은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었다.진영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어젯밤, 이유영은 진영숙이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들이닥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강이한이 줬던 상처를 견디기 위해 여태 했던 노력을 생각하면 화가 나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강이한이 저질렀던 짓들로 하여 그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진영숙은 그런 그녀를 통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뿐만 아니라 이유영도 강이한이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어제 진영숙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려는 찰나 임소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 여자가... 월이를 데려가려고 해.”역시 예상대로였다.진영숙이 정씨 가문에 변호사를 보낸 이유는 그녀에겐 지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이한조차 사라진 상황에서 진영숙은 결국 남아있는 유일한 핏줄에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아무리 이유영을 미워해도 월이만큼은 그녀의
이유영의 말은 박연준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이유영이 이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국진이었다.그렇다.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그는 이유영이 이혼하고 가장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하지만 정씨 가문의 딸이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딸과 함께 가장 조용하고 가장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그러나 그것은 정씨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박연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강이한이 떠나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용성시에서 돌아온 후, 아니, 우천시에서 돌아온 그날 이후로 이유영은 단 한 번도 강이한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서주에서 큰일이 있었을 때조차 강이한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박연준 역시 그녀 앞에서 강이한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그들의 사랑이 철저히 부서져 가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기에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깊이 미워하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그것이 박연준이 바라왔던 결말이었다.하지만 정작 그 끝을 마주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특히 요즘의 이유영은 마치 타락해 버린 사람처럼 때때로 낯설만큼 달라졌다.“...”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나기 전 가장 두려워했던 건, 정씨 가문과 엔데스 가문의 악연이 너한테까지 얽히는 거였어. 그래서…”“그래서, 너더러 나랑 결혼하라고 한 거지?”이유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날카롭고 차가운 말에 박연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렇다고 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어? 겉으론 싸우는 척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운 줄 난 몰랐네.”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섰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본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어딘가
이유영이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하자 순간 손목에 닿는 남자의 힘이 느껴졌다.더는 박연준과 어떤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쯤 되었으면 둘 사이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유영아.”박연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차가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박연준의 가슴엔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래, 이 모든 건 나 때문이야.’그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내지만 않았더라면 연서의 대역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고 이유영과 강이한은 지금쯤 행복했을 것이다.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영과 강이한의 인생 전반 부분을 철저히 망쳐 놓은 건 바로 박윤준이었다.그래서 이유여도 이렇게 변해버린 것이다.박연준의 가슴에 거센 통증이 밀려왔다.“지금 우리 사이에 더 말할 게 있다고 생각해?”“걱정되지도 않아? 엔데스 가문 쪽에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연준은 입을 다물었다.자기 모습이 너무 비겁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 여자를 붙잡기 위해 이런 말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는 언제나 예민한 화두였다. 특히 최근 이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의 여섯째 도련님, 이제는 셋째 도련님까지 나서서 정씨 가문을 노리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파리에서 정씨 가문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마어마했다.흩어진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다시 권력을 갈망했고 그들에게 정씨 가문은 꼭 붙잡아야 할 대상이었다.그리고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이유영이었다.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유영에게 접근하고 있었다.“박연준, 너도 알고 있지? 너 참 비참해 보여.”그녀는 박연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그는 누구와 함께 있든 결국 불행하기만 했다. 그게 연서든 이유영이든.“네가 강이한을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는 예전에 연서도 강이한을 사랑했기 때문이지?”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그의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엄격해졌다.“무슨 말 할지 알아. 하지만 너도 내 대답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우리 이혼하자.”그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단호하게 돌아섰다.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 차가운 태도엔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냉정하기만 했다.강이한이 우려했던 일이 결국 발생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는 이이유영 서주에 가는 걸 반대했다.이유영이 연서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이 숨겨온 모든 음모가 들통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강이한도 박연준도 이유영의 인생에서 다시는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과거에 아무리 찬란한 기억이라 해도 연서라는 이름 하나로 이유영의 마음은 완전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과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오며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래서 이유영이 연서를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이해와 애절도 모두 단절될 거라는 걸 더욱 확신했다.그녀가 이혼을 선언하자 박연준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박연준은 쉰 목소리로 이유영에게 물었다.“내가 그렇게 미워?”그의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이유영의 최근 행동은 박연준에게 마치 조롱처럼 느껴졌다.밖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그는 마치 아내의 외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대낮에 서재욱과 함께 있더니 엔데스 신우와의 관계도 애매하게 얽혀 있었다.결국 그것들은 이유영이 결혼 생활을 견디며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였다.만약 지금 이혼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추측해 온 모든 소문이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미워하는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이유영은 그저 박연준과 아무 관계도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손목을 빼려 했지만 박연준은 오히려 더 강하게
진영숙에 관해서 정국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품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악인은 악하게 다스려야 했다. 진영숙에게야말로 딱 맞는 말이었다.“그러니까 박연준과 이혼해.”정국진은 이 한마디만을 반복했다.지금 정씨 가문 입장에서 보면 이유영과 박연준의 결혼이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하지만 그는 이유영이 두 남자에 관해 이미 증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눈을 잃은 이유를 아무도 선뜻 이유영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설령 강이한이 자신을 위해 그토록 희생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존재였다.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박연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진은 아버지로서 이유영이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이유영만이 아니라 정국진조차도 박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알았어요.”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서 쉬어.”“응.”큰 소동이 지나갔으니 이유영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진영숙은 여전히 파리에 있다. 이미 시작된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앞으로 어떤 소란을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다.그러니 이유영은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야 했다.임소미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을 알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이유영은 샤워를 마친 뒤, 월이를 품에 안았다.강이한을 빼다 박은 옆모습을 보며 이유영의 가슴에는 잔잔한 아픔이 스며들었다.결국, 그녀는 잘못 생각했다.자기 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너무나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문제였다.월이를 낳을 때만 해도 그녀는 아이의 삶에 진영숙 같은 인물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이유영은 밤새 잠들지 못했
특히 과거와 얽힌 일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나서기 어려웠다.“유영아.”“네?”“월이는 여기에서 아무도 데려갈 수 없어.”그 말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뜨겁게 끓어올랐다.진영숙 앞에서 아무리 강해 보였던 그녀도 정국진의 이 짧은 한마디에 모든 긴장이 풀려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네.”가족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만약 지금 혼자였다면 진영숙의 횡포를 어떻게 감당했을지 이유영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랬다면 어땠을까?’그녀는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다.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진영숙이 다시 예전처럼 그녀를 억누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다른 일은 네 마음대로 처리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이런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짧은 말 한마디가 이유영에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였다.부서지고 흔들리던 세상 속에서 그녀는 드디어 위안과 버팀목을 얻었다.“고마워요, 아빠.”“박연준과는 이혼해.”“...”그 말에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물론 그녀도 박연준과의 이혼을 원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너무나 복잡했다.엔데스 가문이 얽혀 있었기에 이유영은 자신의 이혼이 정씨 가문에 피해가 갈까 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정국진은 담담히 말했다.“증오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야.”정국진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받아왔다.그때마다 그에게 복수로 응수했다면 지금의 정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가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아버지...”정국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그 사람을 증오하는 건 알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이라면 네 마음속에서 이미 중요하지 않은 존재야. 그런데 왜 그런 사람 때문에 아직도 마음 쓰는 거야?”증오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 증오가 마음을 잠식한다면 그건 결국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일이었다.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이유영은 강이한과
위험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신우 씨가 정씨 가문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이유영의 말끝이 흐려졌다.차는 이미 백산 별장에 도착해 있었고 이유영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하지만 곧장 들어가지 않고 등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 순간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밀려왔다.강이한과 함께했던 너무나 찬란하고 아팠던 순간들 말이다.한지음 이후로 그녀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었다.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무거움을 억눌렀다. 이 밤하늘 속 별빛조차 오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고 있다면 저한테서 멀리 떨어져 계세요.”“...”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이미 저 멀리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지만 그녀의 등에는 증오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엔데스 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이 변했다.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날카롭고 위험한 기운이었다.“민성아.”“네, 도련님.”“예전 강씨 집안에 있을 때 교양 있고 품위 있었다는 사실, 확실해?”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지금의 이유영은 '교양'이나 '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자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조사 결과대로라면 그녀의 내면에는 아마 맹수가 숨어 있는 거라고 신우는 생각했다.겉모습은 순진해 보였지만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조사 결과를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후회돼.”“뭐가요?”운전석의 윤민성이 놀라서 물었다.그가 생각한 셋째 도련님의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다.그렇기에 후회된다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곧 엔데스 신우는 짧게 덧붙였다.“로한에게 서둘러 진행하라고 해. 난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놔줘요.”그러자 엔데스 신우가 조용히 말했다.“늦었어요. 제가 바래다줄게요.”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오늘 그의 차에 타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유영은 급히 대답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예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지금은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이유영을 자연스럽게 차에 태웠다.“제가 말했잖아요...”“늦었어요. 여자 혼자 집에 가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죠.”“엔데스 가문에 신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이유영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엔데스 가문에 대한 반감은 소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 눈앞의 엔데스 신우까지 더해져 이유영의 마음속 엔데스 가문 남자들은 모두 막무가내로 보였다.특히 그녀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다섯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엔데스 예준의 강렬한 기운은 단번에 각인되었다.“제 차가 싫다면 택시를 불러드릴게요. 그럼 좀 안심이 되겠어요?”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는 듯 말했다.“...”그런 굴욕적인 제안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시력은 되찾은 그녀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결국 그녀는 남자의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남자는 조용히 서류를 꺼내 펼쳤다.좁은 공간에 정적이 흘렀고 백산 별장이 가까워질 즈음, 이유영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엔데스 신우가 옆자리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꼭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할까요?”“아직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요.”그 말투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아직 마음이 있냐는 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