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보기에 소은지가 이런 능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대단한데요.”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닿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자신과 엔데스 현우와의 이 접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일이 곧 끝날까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품 안에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조금 더 견뎌야 할 거 같아요.”외부인의 눈에는 지금 이 둘의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고 조화로워 보일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상은... “네.”생각보다 쉽지 않네.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만찬에서 엔데스 가문 사람들을 다 봤는데 다들 보통내기가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간단히 끝나겠어?점심 식탁.지현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소은지는 일할 때만큼은 진짜 제대로였다.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엔데스 현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듯 보였다.핸드폰 알림음이 울리자 소은지는 재빨리 확인하고는 엔데스 현우를 보며 말했다. “유영이 왔나 봐요.”엔데스 현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후에 백산 별장에 갈래요.” “알았어요.”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는 편이었다.점심 식사가 끝나자 엔데스 현우는 자리를 떴다.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비록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엔데스 현우와의 호흡은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현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연미가 왔다.두 사람이 다시 다시 마주 섰다.아침보다 더 냉랭하고 무거운
느낌? 어떤 느낌이란 말인가?송연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순간 소은지의 말에 돌이켜보니 부인할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당신들.”입술을 움직여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입가까지 왔다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소은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놓아주시지?”송연미의 차갑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소은지는 그녀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송연미의 머릿속은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결국 소은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힘이 조금씩 풀어졌다. “더 이상 배웅하지 않을게.”소은지는 말을 던지고 곧바로 조용히 떠났다. 그 의연한 뒷모습은 사람에게 매우 깔끔하고 단호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마치 그녀는 영원히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원스럽고 깔끔한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송연미는 지금 소은지에 대해 바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남자라면? 그러면 지현우는? 이런 생각이 들자 송은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폭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괴로웠으며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무언가가 송연미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어떤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30분 후.소은지가 백산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유영의 문자를 받았다. 이유영은 자신이 반산월 앞에 있다고 했다.예전 같으면 이런 이웃 관계가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30분 후.소은지가 반산월에 들어섰다. 이유영은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돼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무심하고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런 애완 돼지에 대해 유독 애착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소은지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
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흔들림은 순식간에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대역은 정말 존재하는구나. 그런데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유영아.” 소은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서라...” 이유영이 비웃듯 말했다.연서란 사람 얘기가 나오자 또 와인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소은지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그 사람은 누구야?” “강이한과 박연준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지.”“그만 마셔.” “거짓말이야. 알아?”이유영이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영아.”이 순간, 그녀는 이해했다. 이유영이 이번 서주 여행에서 알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소은지는 와인병을 들려는 이유영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그만 마셔.”그동안 그녀가 아무리 잊고 무시하고 냉담하게 굴었다고 해도 그 10년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깊은 상처 때문에 그 10년을 잊으려 애썼지만 모든 것이 다시 그녀 앞에 놓이자 이유영은 전례 없는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10년이란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그런데 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모두 가짜였다니 이유영은 물론이고 소은지마저 그 소식에 크게 놀랐다. “그럼. 그 사람들 눈에는 네가 그저 연서 대역에 불과했던 거야?”거기다 강이한 이란 사람은 너무 속을 알 수 없었다. 소은지가 강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로서의 직감으로 그가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런 거였어.그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유영에게 접근했던 거였구나.돌이켜보면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10년이란 세월이 우습지 않아?” 이유영의 말투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우습다고? 이건 우스운 게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이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몰려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십 년의 감정과 십 년의 모략이라
이유영은 술에 잔뜩 취했다. 소은지는 그날 밤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유영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다. 한밤중에 이유영이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우지와 우현은 속이 타들어 갔다. 아가씨 몸이 원래 약한데... “아가씨, 우리 아가씨 좀 말려주세요. 몸도 약하신 분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요?” 원래 눈도 안 좋은데 이렇게 마시다가 큰일 날 것 같았다.소은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정리하고 나서 우율과 우선이 내려가고 소은지는 침대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이유영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기꾼들, 모두 다 사기꾼이었어.”그녀의 세계에서 강이한과 박연준 그저 사기꾼이란 존재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런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이유영이 거기에 감정을 안 쏟았을 리가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는 순간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바로 지금의 이유영은 너무 아팠다.부르르르.소은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꺼내보니 엔데스 현우의 전화였다. 소은지가 전화를 받았다. “네.”“어디예요?' “유영이가 취했어요. 오늘은 여기서 유영이를 돌봐줘야 겠어요.” 소은지는 자연스레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이 끝나자 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알았어요.” 소은지가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전화 너머의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남은 건 이유영의 작은 잠꼬대뿐이었다. “사기꾼.”“아.”소은지는 한숨을 쉬며 안쓰럽게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 도대체 얼마나 심한 상처를 받은 거야. 취해서 자면서도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은 이유영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이런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지난날의 상처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지난날의 그 일들이 대체 뭐였단 말인가?하룻밤 과음 후 이유영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한 갈증에 잠에서 깨어나니 물 한 잔이 그
모든 것이 뒤엉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뒤틀려버렸다.이전엔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고려해 본 적도 없던 문제들이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질문을 들은 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너 정말 모르겠어?”“뭘?”“아직도 강이한과 박연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이유영은 당황하며 말했다.“그게...”“아니면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소은지가 생각하기엔 그랬다.이유영은 어릴 때부터 늘 차분하고 냉정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평소와 달랐다.결국, 모든 이유는 결국 강이한에게 있었다.강이한을 만난 뒤로 이유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가 이유영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가슴이 약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야!”이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단순히 떠나보낸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한지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모든 소식은 이유영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작고 여린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너라면,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모조리 빼앗아버리겠어.”소은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태연하게 들렸다.하지만, 이 여유로움은 아마도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관계가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증오로 엮인 관계였다. 엔데스 명우가 조은지를 붙잡았을 때, 조은지에게 안긴 건 증오와 고통뿐이었다.그렇기에 소은지는 복수할 기회를 잡자마자 기꺼이 그 고통을 되갚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의 상황은 달랐다.“은지야!”“너와 나는 달라. 강이한... 그 사람은!”지금 이 순간에도, 소은지가 강이한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이유영은 멈칫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지금 상
그렇다.이유영은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소은지는 이유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믿기 어렵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체념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 선물을 강이한에게 줄 수 있다면, 이제 내가 더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그 선물은 신지수와 신씨 가문이었다.서주에서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서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파리 지역 사람들조차 다 알 정도였다.그러니 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기 전부터 강이한에게 조금의 사정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유영은 신씨 가문이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그러므로 지금… 이유영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단지 그 십 년의 시간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그게 소은지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 십 년이 만약 소은지의 인생에 일어났더라면 소은지도 이유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그렇게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결국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소은지도 마찬가지다.시간은 이미 침전되었고 그 속에 얽매이다 보면 박연준이든 강이한이든 결국 마주할 것은 더 거센 파도일 뿐이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유영의 평온함을 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결국 그들 손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었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준 거야?”소은지는 호기심에 이유영에게 물었다. 이유영이 도대체 신씨 가문에게 뭘 주었는지 너무 궁금했다.강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소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지금껏 신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일은 피해 왔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었다.그래서 소은지는 더욱 궁금해졌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줬길래 강이한이
벤츠 옆에 서 있던 배천명이 깊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소은지는 배천명의 공손한 태도에 잠시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엔데스 명우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일곱째 사모님...”“비켜.”소은지는 차갑게 두 글자를 뱉었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려던 순간, 배천명이 공손하게 다가와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소은지의 화를 돋웠다.“여섯째 도련님께서 이미 한 시간째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천명의 목소리는 공손하면서도 냉정했다.한 시간? 소은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현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두 알게 됐을 터였다.결국, 소은지는 체념한 듯 엔데스 명우의 차에 올랐다.겉보기에도 웅장했던 차량 내부는 기대 이상으로 널찍하고 화려했다.차에 올라탄 순간, 소은지는 목덜미에 닿는 강한 힘을 느꼈다. 곧이어 소은지의 시야가 휘청거리더니 뒷좌석에 강하게 눌렸다.남성 특유의 날카롭고 위협적인 기운이 소은지를 완전히 에워쌌다. 소은지는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엔데스 명우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잔혹함을 마주하며 소은지의 입가에는 도발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여섯째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지? 얼마나 바람둥이인지 파리 사람들한테 더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은 거야?”“소은지.”엔데스 명우는 이를 악물며 무겁게 소은지의 이름을 불렀다.소은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응수했다.“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잘 생각해.”“어떻게 다르다는 거지?”평소도 차갑던 엔데스 명우의 기운은 소은지의 말을 들은 뒤 더욱 서늘해졌다.“난 네... 제수씨야.”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에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폭발할 듯 피가 서린 눈빛으로 소은지를 노려보았다.그 말은 엔데스 명우의 신경을 강하게 건드렸다.“너... 현우랑 잤어?”그의 목소리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쾅!”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박연준이 탁자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박연준의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서 유영이를 백산 별장으로 데려가.”이유영은 미친 게 분명했다.‘감히 엔데스 셋째 도련님 같은 인물과 술집에 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정국진이라면 이유영이 엔데스 신우와 가까워지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특히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엔 더욱 반대가 심할 것이다. 박연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고 남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문기원이 급히 박연준을 따라나섰다.“네!”위험한 박연준의 모습에 용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대답했다.강이한이 각막을 이유영에게 이식해 주려고 할 때 왜 박연준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지금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과거의 그녀는 마치 강이한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천사 같았다. 하지만 혼란을 겪은 이후 그녀는 변했다.거만하고 방탕하게 아무하고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지금 박연준이 생각했을 때, 이유영은 더 이상 고상하고 단정한 명문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그저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최근 그녀는 서재욱과 엔데스 신우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박연준이 차에 타기 전, 문기원이 그를 붙들었다.“선생님, 선생님!”“비켜.”“오늘 정말 중요한 회의입니다.”문기원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서주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유영을 생각하면 문기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박연준 곁에 있는 문기원조차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박연준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박연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눈을 감은 순간, 그의 눈빛 속 날카로움은 잠시 가려졌지만 몸 전체에서 풍겨 나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이런 방식을 택했다.하지만 결국 이런 방식은 오히려 고민에 잠긴 마음을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한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그녀의 몸은 항상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고 어렵게 다시 찾은 시력인 만큼 그녀는 술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하지만 오늘 진영숙이 백산 별장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다.남자는 그 말을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깜빡했네요.”남자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괜찮아요.”“...”“이제 가도 될까요?”“술을 마시지 않아도 즐길 수 있잖아요.”“...”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많이 노출된 옷을 입은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녀를 향락의 세계로 이끌었다....한편 박연준은 서주에서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용준의 전화를 받은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그쪽은 괜찮아?”진영숙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이유영이 인정사정없을 거라는 걸 박연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을 때의 이유영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적어도 강이한에게 만큼은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었다.그래서 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을 괴롭혀도 그녀는 어떻게든 참고 견뎠다.지금은 성격이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참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용준은 진영숙의 현재 상황을 박연준에게 설명했고 이미 좋지 않았던 박연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회의 끝나고 바로 갈게. 일단 진정시켜.”박연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과연 내가 진정시킬 수 있을까?’“네!”“유영이는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