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정 회장은 그 모든 웅성임을 조용히 받아 안는 얼굴이었다.
아주 잠깐, 눈가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가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 말이 갑작스러웠을지도 모르지.”
그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회사를 이끌 사람을,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 말에 임원 테이블 쪽에서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다.
승계. 후계자.
그 단어들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떠올리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내 딸은… 공부만 하느라,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녀석이야.”
살짝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가라앉았다.
어쩐지 그의 어조가 자랑과 안쓰러움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하지만, 회장 자리를 억지로 떠안길 수는 없네.
그렇다고 내가 애지중지 키워온 라오네트를 바깥 사람에게 통째로 맡기기도… 쉽지는 않고.”
그의 손가락이 마이크 스탠드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풀었다.
그 작은 동작 안에 계산되지 않은 솔직함이 스며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지. 내 딸의… 남자가 되어줄 사람.
그 사람이라면, 내가 떠난 뒤에도 딸과 회사를 함께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떠난 뒤. 그 단어에 아주 예민한 몇몇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나이가 드셨으니 언젠가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정 회장은 잔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조명이 잔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회사 창립기념일, 2026년 8월 16일까지.
그때까지 내 딸의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주저 말고, 라오네트에 몸을 던져보게.”
그의 말끝에, 누군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사회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더니 곧 억지 웃음을 띠려 애를 썼다.
“물론, 조건은 있어.”
정 회장은 다시 한번 시선을 쓸어내렸다.
수십, 수백 쌍의 눈동자가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 꽂혀 있었다.
“내 딸에게 진심일 것. 라오네트를 사랑할 것. 그리고, 나보다 내 딸의 편에 서줄 것.”
사람들 사이로 작은 웃음과, 알 수 없는 감탄이 섞여 나왔다.
“내 딸이 지금 어디 있냐고?”
그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긴 유학을 마치고, 올 9월에 한국에 들어왔네.
그리고 10월부터는… 이미 이 회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있어.”
이번엔 볼룸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10월 입사자…?”
“정씨 성 가진 여자, 나만 해도 둘은 아는데?”
“야, 그러면 그 신입 법무팀 정민영씨도 후보야?”
“미쳤냐, 거기가 서울대 출신이라며. 우리랑 급이 달라.”
크고 작은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그 중에는 휘파람에 가까운 탄성도 섞여 있었다.
정찬영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흥분했고, 누군가는 투덜거렸고, 누군가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란 뒤에는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이 라오네트라는 거대한 회사의 판도를 조용히 바꿔놓았다는 것.
그는 잔을 들어 올렸다.
“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8개월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해 보게.
뭐,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
농담 섞인 말에 그제야 몇몇 자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러면 우리 모두의 한 해 수고에, 그리고 각자의 내년에, 건배하도록 하지.”
그는 잔을 조금 높이 들었다.
“라오네트와… 여러분의 내일을 위하여.”
“위하여!”
수백 개의 잔이 동시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울렸다.
샹들리에의 빛이, 그 유리잔들 사이를 부서지듯 흩어졌다.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연회장은 조용히 들뜨고 있었다.
“야, 너 10월에 입사했지 않냐?”
“어, 근데 난 정씨 아니거든.”
“정씨면 다야? 나이도 20대 중후반이라며.”
“진짜야? 그럼 그, 디자인팀 정 팀장 딸도 후보인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들이었지만, 어딘가 진심이 섞여 있었다.
남자 직원들 가운데 몇몇은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눈빛이 한결 더 날카롭게 반짝였다.
연봉. 승진. 상속.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벌써 속으로 계산을 했다.
딸이 어디 소속일까. 몇 살일까. 얼마나 예쁠까.
그 중에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사랑’보다 먼저 떠오른 단어가 ‘기회’였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볼룸 뒤쪽, 기둥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하나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직원들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목에 맨 넥타이는 규정처럼 정확했고, 셔츠 소매 끝선은 주름 하나 없이 곧았다.
최강.
그는 라오네트 소속이 아닌, 라오네트 전담 사설 보안팀 소속이었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반 걸음쯤 비켜난 곳이었다.
대각선 위에서, 혹은 약간 뒤쪽에서. 무대와 출입구, VIP 테이블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제법이네.”
마치 혼잣말처럼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다.
공개 구혼. 딸. 후계자.
이 세 단어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회사에 파견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방금 무대에서 내려온 이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회사를 키워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브리핑을 이미 받았었다.
단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의 시선이 무대에서 내려와 좌석으로 돌아가는 정찬영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혹시, 몸이 더 안 좋아진 건가.
그런 추측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곧 그는 스스로 그 생각을 접었다.
자신의 역할은 회장의 건강 상태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시선을 볼룸 전체로 넓혔다.
흥분한 눈빛들, 직원들의 과한 농담, 웃음과 속삭임.
이런 분위기일수록 사소한 다툼이나 돌발 상황이 생기기 쉬웠다.
최강은 자신도 모르게 기둥에서 몸을 약간 떼며, 사람들의 동선과 표정을 한 번씩 체크했다.
그러다 시야의 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한 그림자를 포착했다.
연회장 구석, 샴페인 타워가 놓인 테이블 옆.
까만 뿔테 안경을 쓴 한 여자가 잔을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이름표가, 길게 내려오는 옅은 머리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무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잔잔한 조명 아래서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대신, 잔을 입술에 가져가려다 말고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샴페인의 금빛 거품이 유리벽을 따라 흘러내리듯 사그라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어요…?”
아주 낮은 속삭임이 입술 사이를 스쳤다.
그러나 그 말은 잔을 사이에 둔 테이블 표면에서 곧장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스스로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주변을 잠시 둘러본 뒤, 남들보다 조금 먼저 연회장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옅은 베이지 코트 자락이 샴드리에의 빛을 스치며 흔들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다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정해두었던 사람처럼 단호해 보였다.
출입문 근처,
경호 인력이 서 있는 곳을 지나치며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최강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이름표가 살짝 드러났다.
정민영.
최강은 그 이름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이 회사의 회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까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냥, 조금 창백한 얼굴로 연회장을 먼저 빠져나가는 신입 같은 여자일 뿐이었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외부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볼룸 안의 온기를 조금 훔쳐가는 듯했다.
샹들리에 아래,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욕망 가득한 표정으로 ‘회장님의 딸’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 이미 그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던져버린 거대한 선언 앞에서 혼자,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어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복도의 빈 벽과 길게 늘어선 카펫 위에서 조용히 삼켜졌다.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밤, 라오네트라는 이름 위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아주 얇게,
그러나 분명히 그어지고 있었다.
문을 나서자 아침 공기가 생각보다 차분하게 민영의 뺨을 스쳤다.차가운 듯하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온도.그 감각이 어제의 밤과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었다.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민영은 발걸음을 일부러 재촉하지 않았다.늦을 이유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는 상태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하루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확신은 이렇게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영향을 미쳤다.회사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 민영은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눈빛은 고요했고, 표정은 담담했다.그런데도 어딘가 빈자리가 없는 얼굴.어제까지는 늘 한 칸쯤 비워 두었던 마음의 자리가 오늘은 이미 채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민영은 문득 어제 나눈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확답, 하지만 고백은 아니었던 말들.그 애매함이 왜 이렇게 편안한지 조금 이상했다.보통은 불안이 따라붙어야 할 텐데지금의 민영에게 그 애매함은 기다림이 아니라 과정처럼 느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몇 명 내려왔다.그 틈 사이로 민영은 자연스럽게 그를 발견했다.최강은 이미 안쪽에 서 있었고,민영을 보자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사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동작.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마치 이미 이야기가 끝난 뒤의 정적처럼 안정적이었다.“어제”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을 꺼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천천히 정리했다.“집에 가는 길이 생각보다 조용했어요.” 최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그렇다면 필요한 말은 이미 다 오간 겁니다.”민영은 그 문장을 곱씹었다.필요한 말은 이미 다 오갔다.그 표현 속에는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관계에 대한 전제가 담겨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둘은 같은 속도로 내렸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걸으며 복도를 지나갔다.사람들의 시
문이 닫힌 뒤에도 민영은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방금까지 같은 방향을 걸어오던 기척이 아직 문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 온기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민영은 그 사실이 조금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동시에 느꼈다.말로 붙잡지 않아도 남아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아보고 있었다.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불을 켰을 때, 공간은 낯설지 않았다.늘 그래왔던 집인데도 오늘은 어딘가 조금 넓어 보였다.마음이 불필요한 짐을 하나 내려놓았을 때공간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걸 민영은 예전엔 몰랐다.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정리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강산과 나눈 말들, 최강과 오간 시선들,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선택한 태도들.'나는 누군가를 밀어낸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정확한 자리에 놓았을 뿐이야.'그 생각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오히려 사실에 가까웠다.그래서 마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이번에도 민영은 급하게 집어 들지 않았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천천히 화면을 켰다.-오늘 많이 무겁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짧은 문장. 부연도, 확인도 없는 말.그럼에도 그 안에는 민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었다.-괜찮아요. 오늘은 생각보다 잘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보내고 나서 민영은 잠시 휴대폰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더 이어가도 되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그 선택지들 중에서 지금의 민영은 침묵을 택했다.그 침묵이 불안에서 오는 게 아니라 확신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창가로 가 커튼을 반쯤 열자 도시의 불빛이 조용히 거실 안으로 스며들었다.그 불빛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켜져 있을 텐데 그 수많은 이유들
복도로 돌아온 뒤에도 민영의 발걸음은 한동안 제 속도를 찾지 못했다.아까 강산과 나눈 대화가말 그대로 등 뒤에 남아 천천히 따라오는 느낌이었다.지나간 말인데, 이미 끝난 문장인데 그 무게만큼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어깨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도 화면 속 글자들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민영은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방금 전의 선택이몸에 완전히 닿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말은 끝났는데 감정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하네.그 생각이 스치자 민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후회는 아니었다.다만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 방향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다시 한 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책상 옆에 서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분한 표정.그러나 민영은 그의 시선이 아까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종류의 변화였다.“잠깐 괜찮으십니까.”민영은 의자를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그는 굳이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 선택 자체가 지금의 민영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대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까 강산 씨와 이야기하신 것 같습니다.”질문은 확인이 아니라 맥락을 잇기 위한 출발점 같았다.민영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정리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정리.”최강은 그 단어를 되풀이하지 않았다.그저 잠시 민영을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이 오히려 민영을 편하게 만들었다.“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 같았고,힘들었다고 말하기엔 지금의 마음이 그렇게 무너지지도 않았다.“…조금요.”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그래도 필요한 과정이었어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였다.설득도, 위로
잠은 깊지 않았다.그렇다고 뒤척임으로 밤을 흩뜨린 것도 아니었다.민영은 눈을 감은 채 의식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떠다녔다.꿈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마치 새벽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시간처럼.창밖에서는 아직 첫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시는 숨을 죽인 채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고,민영의 마음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무언가를 결론내려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대답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까.그 생각이 떠오르자, 민영은 오히려 안도했다.선택은 항상 즉각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던 자신에게이제야 조금의 여지를 허락하는 느낌이었다.이불 속에서 몸을 아주 조금 뒤척이며 민영은 어제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현관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말을 잇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짧은 정적.그 안에는 미완의 문장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지만,그 문장들이 불완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말이 되기 전에도 의미는 이미 있었어.'그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심장은 괜히 조급해지지 않았다.조금 늦게 알아도 되는 답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민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빛이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커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침대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며 민영은 창가에 섰다.도시는 이제 막 호흡을 바꾸려는 중이었다.몇 개의 창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들은 각자의 이유로 잠들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처럼 보였다.'어쩌면 그도 이 시간에 깨어 있을까.'그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지만, 민영은 그 상상을 붙잡지 않았다.지금의 감정은 상대의 행동으로 확인받지 않아도충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기며 민영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베개에 닿은 뺨이 조금 차가웠다.그 차가움은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머릿속을 정리해 주는 감
저녁 공기는 막 식기 시작한 도로의 열기를 아직 완전히 놓지 못한 채 천천히 흘렀다.민영은 그 공기 속을 걸으며 자신의 호흡이 아주 조금 바뀌어 있다는 걸 느꼈다.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누군가의 속도와 겹치기 쉬운 리듬.최강은 민영의 옆에서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어느 쪽이 먼저 맞췄다고 말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간격.그 거리 안에는 말이 없어도 충분한 정보가 오가고 있었다.“오늘” 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게 내려앉았다.“조금 많이 걸은 것 같아요.”“그렇습니까.”최강은 짧게 대답했다.“그래도 속도가 무리하진 않았습니다.”민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속도를 무리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이상하게도 하루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요즘은”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걷는 게 예전보다 덜 어렵게 느껴져요.”“길이 바뀌었습니까.”“아니요.”민영은 고개를 저었다.“길은 그대로인데 제가 멈추지 않게 된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해석하지 않았다.대신 몇 걸음 더 같이 걸은 뒤 낮게 말했다.“멈추지 않는다는 건 도망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민영은 그 문장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걸 느꼈다.예전의 자신은 결정을 미루며 자주 멈췄고, 멈춘 채로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곤 했다.지금은 그와 달랐다.완전히 들어서지 않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집 근처에 다다르자 가로등의 빛이 둘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민영은 그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았다.두 개의 선이 나란히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겹쳐 보이는 지점.그 지점이 괜히 눈에 남았다.“정 사원님.”최강이 조용히 불렀다.“네.”“오늘 강산 씨와 이야기하신 것.”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괜히 마음에 남아 있지는 않으십니까.”질문은 조심스러웠다.질투도, 확인도 아닌 상태를 묻는 순수한 물음.민영은 그 태도가 고마웠다.“…조금은요.”그녀는 솔직하게
아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분명했다.커튼을 밀어내는 빛이 망설이지 않았고,방 안의 공기도 밤의 잔여를 깔끔하게 걷어낸 얼굴이었다.민영은 눈을 뜬 채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서두르지 않아도 하루는 자기 속도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며 민영은 손목에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을 잠시 느꼈다.정신을 깨우기엔 충분했고, 어제의 고요를 지우기엔 과하지 않았다.거울 속의 자신은 단정했고, 어딘가 여유가 있었다.확신을 들고 나온 얼굴이라기보다, 확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얼굴에 가까웠다.출근길의 풍경은 늘 같았지만, 민영의 시선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사람들의 표정, 발걸음의 간격,정류장에 서 있는 침묵의 밀도까지 괜히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그것들은 자신의 하루를 방해하지 않았고,오히려 지금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 주는 배경처럼 느껴졌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회의가 많은 날 특유의 긴장도, 분주함도 아직 위로 올라가지 않은 시간.민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한 발짝 물러섰다.“정 사원님.”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민영은 고개를 돌려 최강을 보았다.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미세하게 밝아 보였다.“좋은 아침이에요.”“네.”민영은 미소로 답했다.“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회의 준비가 조금 있어서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오늘의 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의식하지 않아도 서로의 호흡이 겹치지 않는 위치.문이 닫히자, 민영은 자신의 손이 가방 끈을 가볍게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그 손끝에서 긴장이 빠져나간다는 건,마음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였다.“…어제,”최강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잘 주무셨습니까.”“네.”민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요.”그 답에는 과장이 없었고, 부연도 없었다
복도 끝 전등이 깜빡이며 빛의 끝자락을 흔들어 놓은 순간,민영은 자신의 발밑으로 낯선 기척이 스며드는 듯한 감각을 선명히 느꼈다.그림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또다시 길게 늘어나 사라지는 흐름은 마치 누군가 민영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민영은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긴장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 떨림은 더 이상 ‘깜빡이는 공포’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이번에는 알 수 없는 기척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스스로를 흔들림 밖으로 꺼내려는 결심에 가까웠다.“…대리님.”민영이 조심스럽게 숨을
정 회장의 몸이 최강의 팔 위에서 완전히 힘을 잃어가는 그 순간, 복도는 더 이상 침입자와 경호 인력이 대치하던 공간이 아니었다.그곳은 이제 한 사람의 생이 흔들리고,한 사람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겹쳐진조용한 비극의 현장이었다.정 회장의 무게가 순식간에 두 배로 느껴졌다.그건 체중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힘 자체가최강의 팔로 그대로 옮겨오는 느낌이었다.“회장님!!”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정 회장의 어깨를 받쳐 들었다.평소라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그의 팔이 이번만큼은 떨리고 있
복도 끝을 향해 뛰는 동안 민영은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발걸음보다 먼저 앞으로 쏟아져버릴 것만 같았다.최강의 손은 민영의 손을 꽉 잡은 채 절대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단단했고,그 단단함 속에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된다’는 감각을 느꼈다.그러나, 그 감각은 복도 저편에서 스치는 한 줄의 그림자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질 뻔했다.“…방금… 봤어요…?”민영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보지 마십시오. 앞만 보세요.”최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더 짧고, 더 단호했
민영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바깥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공기 속에서 잠시 숨을 머금었다.회의실은 넓었지만, 그 공간의 차분함이나 밝음을 느끼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자신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조용히 머물고 있던 시선의 잔향이었다.테이블 끝에 앉아 있던 상무가 고개를 들었고,그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팀장이 민영을 맞이했지만,민영의 시선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한 사람을 향해 멈추게 되었다.그 사람은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어깨와 팔의 긴장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