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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회장님의 딸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ernière mise à jour: 2026-03-04 14:34:32

정 회장은 그 모든 웅성임을 조용히 받아 안는 얼굴이었다.

아주 잠깐, 눈가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가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 말이 갑작스러웠을지도 모르지.”

그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회사를 이끌 사람을, 

이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 말에 임원 테이블 쪽에서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다.

승계. 후계자.

그 단어들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떠올리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내 딸은… 공부만 하느라,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녀석이야.”

살짝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가라앉았다.

어쩐지 그의 어조가 자랑과 안쓰러움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하지만, 회장 자리를 억지로 떠안길 수는 없네.

그렇다고 내가 애지중지 키워온 라오네트를

바깥 사람에게 통째로 맡기기도… 쉽지는 않고.”

그의 손가락이 마이크 스탠드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풀었다.

그 작은 동작 안에 계산되지 않은 솔직함이 스며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지. 내 딸의… 남자가 되어줄 사람.

그 사람이라면, 내가 떠난 뒤에도

딸과 회사를 함께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떠난 뒤. 그 단어에 아주 예민한 몇몇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나이가 드셨으니 언젠가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정 회장은 잔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조명이 잔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회사 창립기념일, 2026년 8월 16일까지.

그때까지 내 딸의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주저 말고, 라오네트에 몸을 던져보게.”

그의 말끝에, 누군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사회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더니

곧 억지 웃음을 띠려 애를 썼다.

“물론, 조건은 있어.”

정 회장은 다시 한번 시선을 쓸어내렸다.

수십, 수백 쌍의 눈동자가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 꽂혀 있었다.

“내 딸에게 진심일 것. 라오네트를 사랑할 것.

그리고, 나보다 내 딸의 편에 서줄 것.”

사람들 사이로 작은 웃음과, 알 수 없는 감탄이 섞여 나왔다.

“내 딸이 지금 어디 있냐고?”

그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긴 유학을 마치고, 올 9월에 한국에 들어왔네.

그리고 10월부터는… 이미 이 회사에서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있어.”

이번엔 볼룸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10월 입사자…?”

“정씨 성 가진 여자, 나만 해도 둘은 아는데?”

“야, 그러면 그 신입 법무팀 정민영씨도 후보야?”

“미쳤냐, 거기가 서울대 출신이라며. 우리랑 급이 달라.”

크고 작은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그 중에는 휘파람에 가까운 탄성도 섞여 있었다.

정찬영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흥분했고, 누군가는 투덜거렸고, 

누군가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란 뒤에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이 라오네트라는 거대한 회사의 판도를

조용히 바꿔놓았다는 것.

그는 잔을 들어 올렸다.

“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8개월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해 보게.

뭐,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

농담 섞인 말에 그제야 몇몇 자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러면 우리 모두의 한 해 수고에, 

그리고 각자의 내년에, 건배하도록 하지.”

그는 잔을 조금 높이 들었다.

“라오네트와… 여러분의 내일을 위하여.”

“위하여!”

수백 개의 잔이 동시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울렸다.

샹들리에의 빛이, 그 유리잔들 사이를 부서지듯 흩어졌다.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연회장은 조용히 들뜨고 있었다.

“야, 너 10월에 입사했지 않냐?”

“어, 근데 난 정씨 아니거든.”

“정씨면 다야? 나이도 20대 중후반이라며.”

“진짜야? 그럼 그, 디자인팀 정 팀장 딸도 후보인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들이었지만, 

어딘가 진심이 섞여 있었다.

남자 직원들 가운데 몇몇은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눈빛이 한결 더 날카롭게 반짝였다.

연봉. 승진. 상속.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벌써 속으로 계산을 했다.

딸이 어디 소속일까. 몇 살일까. 얼마나 예쁠까.

그 중에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사랑’보다 먼저 떠오른 단어가

‘기회’였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볼룸 뒤쪽, 기둥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하나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었지만,

직원들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목에 맨 넥타이는 규정처럼 정확했고,

셔츠 소매 끝선은 주름 하나 없이 곧았다.

최강.

그는 라오네트 소속이 아닌,

라오네트 전담 사설 보안팀 소속이었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반 걸음쯤 비켜난 곳이었다.

대각선 위에서, 혹은 약간 뒤쪽에서.

무대와 출입구, VIP 테이블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제법이네.”

마치 혼잣말처럼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다.

공개 구혼. 딸. 후계자.

이 세 단어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회사에 파견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방금 무대에서 내려온 이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회사를 키워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브리핑을 이미 받았었다.

단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의 시선이 무대에서 내려와 좌석으로 

돌아가는 정찬영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혹시, 몸이 더 안 좋아진 건가.

그런 추측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곧 그는 스스로 그 생각을 접었다.

자신의 역할은 회장의 건강 상태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시선을 볼룸 전체로 넓혔다.

흥분한 눈빛들, 직원들의 과한 농담, 웃음과 속삭임.

이런 분위기일수록

사소한 다툼이나 돌발 상황이 생기기 쉬웠다.

최강은 자신도 모르게 기둥에서 몸을 약간 떼며,

사람들의 동선과 표정을 한 번씩 체크했다.

그러다 시야의 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한 그림자를 포착했다.

연회장 구석, 샴페인 타워가 놓인 테이블 옆.

까만 뿔테 안경을 쓴 한 여자가

잔을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이름표가, 길게 내려오는 옅은 머리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무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잔잔한 조명 아래서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대신, 잔을 입술에 가져가려다 말고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샴페인의 금빛 거품이 유리벽을 따라 

흘러내리듯 사그라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어요…?”

아주 낮은 속삭임이 입술 사이를 스쳤다.

그러나 그 말은 잔을 사이에 둔 테이블 표면에서

곧장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스스로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주변을 잠시 둘러본 뒤, 남들보다 조금 먼저

연회장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옅은 베이지 코트 자락이

샴드리에의 빛을 스치며 흔들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다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정해두었던 

사람처럼 단호해 보였다.

출입문 근처,

경호 인력이 서 있는 곳을 지나치며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최강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이름표가 살짝 드러났다.

정민영.

최강은 그 이름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이 회사의 회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까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냥, 조금 창백한 얼굴로 연회장을 먼저 빠져나가는 

신입 같은 여자일 뿐이었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외부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볼룸 안의 온기를 조금 훔쳐가는 듯했다.

샹들리에 아래,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욕망 가득한 표정으로

‘회장님의 딸’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 이미 그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던져버린 거대한 선언 앞에서

혼자,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어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복도의 빈 벽과

길게 늘어선 카펫 위에서 조용히 삼켜졌다.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밤, 라오네트라는 이름 위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아주 얇게, 그러나 분명히

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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