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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름표 아래 숨겨진 온기

作者: 데이지
last update 公開日: 2026-03-04 14:35:18

연회장 문이 다시 닫히자, 안의 소란스러운 열기와 바깥의 차가운 복도 공기 사이에는 얇은 막 하나가 생긴 듯했다.

민영은 그 문턱을 넘어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느꼈다.

'아무도 날 모를 텐데.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가빠지지.'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손끝은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특히 오른손 아버지의 말이 뇌리에 박혔을 때 자기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그 손은 아직도 굳게 말린 채였다.

테이블은 의외로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편할 만큼.

같은 법무팀 입사 동기 나연이 콕 찌르듯 민영을 바라보다가,

부드럽지만 어딘가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도망친 줄 알았네.”

말은 가볍게 던져진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묘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도시적인 분위기,

또렷한 콧대 위로 내려온 조명 아래 나연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민영은 짧게 미소 지었다.

“그냥… 잠깐 공기 좀 쐬고 왔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음. 너처럼 조용한 타입은 이런 행사 힘들지.”

말투는 친절했지만 말끝은 매끄럽지 않았다.

민영은 그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잔에 남아 있던 샴페인이 조명에 반사되어 담금질된 듯 반짝였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그녀에게 기대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행사 스태프가 테이블을 옮기다 큰 쟁반을 놓치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잔이 두 개 깨져나갔고 그 소리는 사람들의 대화를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민영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갑작스런 소리에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 순간 자신 쪽으로 떨어지는 유리 파편 하나. 민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파편은 다리 근처까지 오지 못했다.

‘탁.’

짧고 단단한 소리.

누군가가 신속하게 쟁반 모서리를 발로 밀어 파편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민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가벼운 동작으로 파편을 막아낸 최강을.

그의 눈빛은 이미 다음 위험이 없는지 자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저 경호팀 사람, 방금 봤어? 진짜 빠르더라.”

“그래, 아까부터 계속 주변 보고 다니던데.”

민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을 불러올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저 ‘법무팀 신입 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영은 시선만 조심스럽게 돌려 그에게 아주 작은 눈인사를 했다.

최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말이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걱정하지 마라.'

'괜찮아질 때까지… 내가 지킨다.'

그러나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이동 경로를 다시 체크하기 위해서.

민영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보면 마음이 또 흔들릴 것 같아서.

그때 테이블 맞은편에서 낯선 무게감이 조용히 시선을 밀고 들어왔다.

강산.

그는 마치 ‘방금 상황까지 모두 관찰했다’는 듯한 얼굴로 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사원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의 결이 너무 꾸며져 있어 오히려 더 불안했다.

“혹시 다친 데는 없죠?”

민영은 놀랐다.

아까 자신이 움찔하는 것까지 봤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강산은 잔을 기울이며 소리 나지 않을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회사 안팎으로 위험한 일들이 많으니까.”

민영은 그 말에 순간 눈을 깜박였다.

“위험한 일…이요?”

“아, 뭐 신입들이 모르는 건 당연하죠. 나중에 들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 말은 평범한 농담인 듯했지만 어딘가 의도된 ‘흘림’이었다.

저 사람… 나를 왜 이렇게 지켜보지?

민영의 심장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그때 나연이 끼어들었다.

“강 과장님, 법무팀 신입 하나 때문에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새침하게 던진 말이었다.

민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연씨. 그냥 걱정해주신 것뿐이니까.”

그러나 나연의 시선은 민영보다 강산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그 눈빛 속에는 경계와 호기심,  그리고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행사는 다시 이어졌지만 이제 분위기는 처음과 달랐다.

직원들은 계속해서 ‘회장의 딸’을 찾기 위한 은밀한 농담들을 던졌다.

“야, 10월 입사자 중에 누가 정씨더라?”

“법무팀에도 있대.”

“아까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온 애? 그 안경 쓴?”

“아니야, 너무 평범하잖아.”

“그래도 그런 애가 더 위험하지. 세상엔 원래 평범한 척 숨는 사람이”

민영은 그 대화를 엿듣고 있는 자기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숨겨온 정체가 지금은 오히려 가장 큰 불안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잔 위로 샴페인의 기포가 잔잔히 올라왔다가 금방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작은 소멸이 마치 자신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연회장이 조금 잠잠해지는 순간,

밖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문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민영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했다.

최강이었다.

그는 테이블 주변을 한번 확인한 뒤 민영이 있는 자리와 강산,

나연이 있는 구역을 또렷하게 가늠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잠시 민영에게 닿았다.

언뜻 보기엔 경호팀의 평범한 시선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당신 괜찮은가’라는 의미가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민영의 가슴이 조용히 떨렸다.

그 떨림은 아무도 모른다.

나연도, 강산도, 아버지도 모른다.

그저 민영의 안쪽에서 아주 조용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 순간 강산의 시선이 민영 → 최강 → 민영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강산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의심에 가까운 곡선이 그려졌다.

'그래… 뭔가 이상하긴 했지.'

'정사원… 당신은 대체 누구지?'

겨울밤의 호텔 연회장. 사람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실선 하나가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그어지고 있었다.

민영과, 최강과, 강산.

세 사람의 시선이 비로소 처음으로 한 지점에서 겹쳐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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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END. 질문이 사라진 자리

    오후의 빛은 유리창을 통과하며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같은 사무실, 같은 자리였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공기의 결은 조금씩 달라졌다.민영은 문서를 넘기다 말고 손끝을 잠시 멈췄다.집중이 흐트러진 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고요해서 스스로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질문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옳은지,지금의 감정이 잠깐 스쳐 가는 건 아닌지.하지만 오늘은 그 질문들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대신 이상할 정도로 분명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부담 없이 자리를 잡았다.민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확답을 요구받지 않는 상태.그 여유가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오히려 이런 여백이 있어야 다음 걸음을 정확히 내딛을 수 있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회의실에서 바로 나온 듯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민영은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잠깐 괜찮으십니까.”그 말투에는 언제나처럼 강요가 없었다.민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복도를 따라 함께 걸으며 둘은 나란히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누가 맞추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 있었다.그 사실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 민영에게는 작은 안정으로 다가왔다.“아까 말씀드린 외부 일정 말입니다.”최강이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정 사원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민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머릿속에서 일정과 감정이 빠르게 정리되었고,그 과정에 망설임은 없었다.“동행할게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지금은 피할 이유가 없어요.”최강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표정에는 안도도, 놀람도 없었다.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알겠습니다.”그는 차분하게 말했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30화. 마음이 먼저 도착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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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9화. 비어 있던 시간의 결

    집 안의 불을 켜지 않은 채 민영은 현관에 잠시 서 있었다.밖에서 따라온 밤의 공기가 아직 코트 자락에 남아 있었고,그 공기 속에는 카페의 온도와 골목의 조용함이 겹겹이 묻어 있었다.문을 닫는 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들렸다는 사실이오늘 하루가 부드럽게 끝났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자 집은 늘 그래왔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이 오늘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 한 번 사람의 체온을 기억해 둔 자리처럼.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채 민영은 천장을 바라보았다.아까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 흘러갔다.결론을 미룬다는 말,서두르지 않겠다는 선택,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받았다는 감각.어느 하나 크게 울리지 않았는데도마음의 한쪽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비어 있는 시간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천천히 모양을 갖추는 중일지도 모른다.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마음에 내려앉았다.민영은 이제야 왜 요즘의 일상이 지루하지 않은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건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매일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따르며 민영은 유리컵 속의 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아주 미세한 진동이 표면에 남아 있다가 곧 고요해졌다.그 모습이 지금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안정된 상태.휴대폰이 탁자 위에서 가볍게 울렸다.민영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지금은 확인이 아니라 여운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화면을 켰다.-오늘 무리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었습니다.짧은 문장. 그러나 그 안에는 오늘 하루를 같이 건넜다는 확인이 담겨 있었다.민영은 답장을 길게 쓰지 않았다.대신 이렇게 적었다.-덕분에요. 오늘은 편하게 머물렀어요.전송 버튼을 누르자 이상하게도 어깨의 힘이 조금 더 풀렸다.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기댈 수 있다는 감각은 설명보다 훨씬 따뜻했다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8화. 서두르지 않는 선택

    “아직”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모든 문장을 끝내지는 않았어요.”그리고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떤 문장을 남겨두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서두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그 문장”그가 낮게 말했다.“제가 옆에서 지켜봐도 괜찮겠습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가 멀어졌다.세상은 여전히 자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 거리면 괜찮을 것 같아요.”그 대답은 허락이면서도 선언이었다.누군가를 곁에 두겠다는 선택.그러나 아직 완전히 이름 붙이지 않은 선택.카페의 불빛 아래에서 둘은 말을 아꼈다.아껴진 말들은 공기 속에 겹겹이 쌓여 다음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영은 그 여백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지금은 이 정도의 온도가 가장 정직했기 때문이다.남겨둔 문장은 언젠가 이어질 문장을 위해 존재한다.민영은 그 생각을 가슴에 담고 컵을 내려놓았다.오늘 밤은 결론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카페의 음악은 조금 전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사람들의 말소리는 유리잔에 부딪혀 둔해졌고,시간은 벽에 걸린 시계보다 느리게 흘렀다.민영은 컵 가장자리에 손끝을 얹은 채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이 자리에 더 오래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최강은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나가는 사람들 위를 따라가지 않았고, 어딘가 머물러 있었다.마치 지금 이 시간 자체를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민영은 그 침묵이 자신을 재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았다.“이런 시간”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전엔 조금 불안했어요.”최강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서요.”민영은 말을 끝내고 잠시 자신의 숨을 들여다보았다.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7화. 비워둔 자리의 선택

    퇴근 시간이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도착하는 건 아니었다.민영에게 저녁은 시계보다 먼저 몸의 안쪽에서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다.하루의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접히는 느낌.아직 끝내지 않은 문장들이 마음의 여백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서류를 정리하며 민영은 마우스를 한 번 더 천천히 움직였다.급할 이유가 없었다.오늘의 일은 이미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컴퓨터를 끄자 모니터에 비친 얼굴이 짧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 순간, 자신이 오늘을 잘 건너왔다는 확신이 작게 남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사람들의 말이 겹쳐졌다가 흩어졌다.민영은 그 소리들 속에서 유독 한 사람의 침묵을 떠올렸다.말이 적어서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자리하던 그 방식.그가 자주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특별하지 않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은 몰랐다.회사 앞에서 잠시 멈춰 섰을 때, 바람이 옷깃을 살짝 건드렸다.민영은 고개를 들었다.해는 이미 건물 뒤로 사라졌고, 도시는 자기 빛을 켜고 있었다.그 빛들 사이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야 자각했다.“정 사원.”낮고 차분한 목소리.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민영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웃었다.“오늘은 조금 늦으셨어요.”“확인할 게 하나 남아서요.”최강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섰다.둘 사이의 간격은 늘 그렇듯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그 거리감이 오늘은 유난히 편안했다.“집으로 바로 가세요?”그가 물었다.민영은 잠시 생각했다.집이라는 단어가 오늘은 목적지가 아니라 선택처럼 느껴졌다.“조금 걸어도 될 것 같아요.”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질문도, 확인도 더하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민영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빈 자리를 그대로 남겨두는 사람.둘은 나란히 보도를 걸었다.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민영은 자신의 팔이 걷는 동안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의식하지 않았다.그저 지금의 리

  •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226화. 머무는 쪽의 그림자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지만 민영은 곧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초록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번져 있었고,그 위를 먼저 건너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루의 끝을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그 와중에 그녀는 아주 잠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무게를 느꼈다.“안 가십니까.”최강의 목소리가 곁에서 낮게 울렸다.재촉은 아니었다.그저 같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에 가까웠다.“네.”민영은 짧게 답하며 그제야 한 발을 내디뎠다.신호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길을 건너는 동안 민영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자신의 시야 한편에 겹쳐지는 장면을 막을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던 강산의 눈빛,그 안에 섞여 있던 체념과 계산,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미.그것은 과거처럼 그녀를 흔들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도 않았다.길을 다 건넌 뒤 둘은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췄다.민영은 발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두 사람의 발걸음이 같은 리듬으로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귀에 남았다.이상하게도 그 리듬은 안정적이었다.“아까”최강이 말을 꺼냈다가 잠시 멈췄다.민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서두르지 않는 침묵은 이제 둘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강산 씨와 같이 계셨죠.”민영은 그 질문에 놀라지 않았다.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잠깐요.”최강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대신 한 박자 늦춰 말을 이었다.“그분은 여전히 많이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그 말에는 질투도, 경계도 뚜렷하지 않았다.그러나 아무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민영은 그 미묘한 온도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도 알고 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더더욱 제가 어디에 머무는지를 헷갈리지 않으려고요.”최강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늦춰졌다.그러나 그는 곧바로 다시 같은 속도를 되찾았다.“그 말”그가 말했다.“저는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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