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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회장의 딸은 과연 누구일까?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3-04 14:35:04

복도는 여전히 잔잔했고, 창문 밖 겨울밤의 바람은 그 너머에서 얇게 흐르는 것처럼 들렸다.

민영은 창문 아래 난 좁은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볼룸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 소리는 이 거리까지 닿지 못하고 단지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정도로만 존재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버지의 말이 해리처럼 번졌다.

“여덟 달 동안 스스로를 증명해보게.”

그 문장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민영은 완벽히 알지 못했지만,

알아서는 안 되는 느낌도 같이 있었다.

“……그러니까요, 아버지… 왜 이런 선택을….”

민영은 이마에 손을 댄 채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귀에는 아버지의 발표 뒤로 퍼져 나가던 직원들의 웅성임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정씨 성 가진 신입만 몇인데?’

‘우리 부서에도 두 명 있어.’

‘진짜라면… 인생 바뀌는 거 아냐?’

‘라오네트의 후계자라고?’

‘야, 그 신입 법무팀 정민영씨, 혹시…’

민영의 심장이 그 기억만으로도 살짝 조여드는 듯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보면 그 순간 들킬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들이 입에 올리는 ‘그 딸’이라는 사실을.

정 회장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정보를 숨겨왔는지 민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모든 사람 앞에서 갑자기 이토록 큰 ‘제안’을 할 줄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의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까.'

이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민영의 눈가가 얇게 젖었다.

그러나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그때였다.

복도 끝, 볼룸에서부터 들려오는 낮은 말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산.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의 눈빛은 단정한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타고난 관찰자, 모든 것을 분석하려 드는 남자.

그는 복도에 서 있는 최강을 먼저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보안팀…?

그럼 저쪽 끝에 있는 사람은….

그의 시야 끝에 민영의 실루엣이 작게 걸려 있었다.

강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정 회장의 말… 그리고 사라지듯 나간 여자… 법무팀 신입 정민영….

조각이 하나로 모여가는 순간이었다.

최강은 복도에 들어서는 강산을 발견하자 조용히 몸의 중심을 바로 세웠다.

경호 인력의 ‘각성’은 공격성 대신 중립적 긴장으로 표현됐다.

“직원분이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제되어 있었다.

강산은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정돈된 얼굴이었다.

“네. 관리팀 강산입니다.”

“행사장은 저쪽입니다.”

최강은 짧게 방향을 가리켰다.

말투는 예의 바르지만 '더 이상 접근시키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이 분명했다.

그러나 강산은 그 선 위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듯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 네. 행사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바람 좀 쐬려고요.”

그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민영이 있는 창가 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최강은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았다.

“…저쪽은 직원 분들이 쉬는 공간입니다.”

최강은 고요하게 단서를 붙였다.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분들이 계십니다.”

강산의 미소가 아주 얇게 변했다.

“아… 그렇군요.”

그는 한 번 더 민영 쪽을 흘깃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반발심을 감춘 표정을 띠었다.

보안팀이… 굳이 저렇게 말릴 필요가 있을까?

그럼 더더욱… 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지네.

강산의 눈빛 속에는 계산과 호기심이 고요하게 번지고 있었다.

민영은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눈치챘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무언가 쓸데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에 급히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괜찮아요.”

그녀의 말은 너무 갑작스럽게 복도에 튀어나왔다.

최강과 강산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영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아, 저는… 그냥 잠깐 좀… 생각 정리하려고 나왔던 거예요.

조금만 아니, 이젠 괜찮아요.”

말꼬리가 자꾸 꼬였지만 지금은 두 시선 사이에 서 있는 상황이 더 민망했다.

강산이 먼저 부드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민영씨었군요. 저, 관리팀 강산이라고 합니다. 아까 행사장에서 살짝 뵈었죠?”

그는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미묘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걸 최강은 단번에 읽어냈다.

민영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강 과장님… 맞죠?”

“오,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강산은 미소를 띠었지만  그 미소의 방향은 민영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강산은 조용히 최강을 흘겨보았다.

'이 경호팀 직원… 정민영씨를 왜 이렇게 가까이서 지키고 있지?'

'그냥 신입 사원 하나 때문에 저 정도 태세를 갖추진 않을 텐데….'

의심은 그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씨앗이 되었다.

민영은 두 남자 사이의 공기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분, 저는 이제 그냥… 다시 들어갈게요.”

최강은 아주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가시죠. 앞쪽은 안전합니다.”

그 말은 일반적인 안내였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당신을 책임지겠다’는  조용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강산은 그 말투를 듣고 조용히 눈썹을 아주 약하게 찌푸렸다.

'저건… 그냥 보안팀 직원의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표정을 순식간에 다시 미소로 덮었다.

“정 민영씨, 연회장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혹시 자리 힘들면 저쪽에 괜찮은 공간 많이 있으니까요.”

그의 말은 어투로만 보면 친절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미묘하게 ‘접근’을 시도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민영은 예의상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강산은 마지막으로 최강과 아주 짧은 눈맞춤을 하고 볼룸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묘한 흥미와 계산이 섞여 있었다.

새로운 퍼즐 조각을 주운 사람의 걸음이었다.

강산이 사라지고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을 때, 민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복잡한 하루가 된 거죠.”

그녀가 읊조리듯 말하자 최강은 아주 잠시, 정말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풀었다.

그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말했다.

“돌아가시죠. 차가운 곳에 오래 계시면 감기 듭니다.”

그 말은 평범하고 단단했다.

그렇지만 민영의 가슴 한쪽에서는 조용한 무언가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볼룸으로 돌아가는 복도를 향해 걸었다.

그녀의 뒤를 동일한 속도로 조용히 따라오는 발소리.

최강.

그 발소리는 어쩐지 ‘지켜주겠다’는 약속처럼 들렸다.

민영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꾸 흔들릴 것 같아서.

볼룸 문 앞에 다다르자 내부의 소란한 열기가 복도 쪽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새로운 소문이 벌써 연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회장의 딸 찾는 게임 시작이래.”

“벌써 후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던데?”

“정씨 성 가진 애들은 지금 난리 났다더라.”

“야, 10월 입사자 중엔 누구누구 있지?”

민영은 그 소리들을 모두 듣지 못한 척 조용히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속에서는 방금 복도에서 일어난 세 사람의 시선이 아직도 가늘게 겹쳐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라오네트의 겨울은, 더 깊은 파동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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