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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겨울 복도에서 스친 숨결

작가: 데이지
last update 게시일: 2026-03-04 14:34:48

호텔 최상층 복도는 볼룸의 화려함과 달리 조명이 한 톤 낮아 조용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민영은 그 복도로 거의 숨을 몰아쉬며 빠져나왔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해서 등을 찌르는 듯한 기분이었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흔들렸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예상보다 더 깊게 폐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덟 달…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가 나의 ‘남자’가 되라고?

민영은 손끝을 벽에 댔다.

대리석 표면이 의외로 매끄러웠다.

그 차가움 위에서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정말 왜 그러셨어요.”

혼잣말이 흘러나온 순간,

마치 목구멍에서 잠겨 있던 감정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늘 자신의 세상을 딸에게 직접 내어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수백 명 앞에서 딸의 미래를 ‘선언’해버릴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민영에게 충격에 가까웠다.

그녀는 숨을 정리하려 잠시 벽에 등을 기대려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 그녀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톡… 톡… 톡…

복도 특유의 잔향이 섞인 발소리였다.

민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서, 기둥의 그림자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정장. 단단한 구두. 동요 없는 시선.

최강.

라오네트 전담 사설 보안팀.

그의 존재는 볼룸 안에서 사람들 사이를 흐르던 소란과 반대로 조용했고 묵직했다.

그는 민영을 향해 성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했다.

경호 인력 특유의 배려였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복도에 울리지 않도록 적당히 눌러져 있었다.

차갑지도, 또 과하게 다정하지도 않은 중립에 가까운 톤.

그러나 그 중립성 속에 미묘한 온도가 숨어 있었다.

민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네. 괜찮아요. 그냥 잠깐… 공기 좀 쐬려고요.”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얇게 들려서, 민영은 그 사실에 더 놀랐다.

최강은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주변을 살폈다.

출입구 방향, CCTV 각도,

복도 양쪽의 시야 확보 여부,

가능한 위험 요소들.

그는 평소처럼 일이 몸에 배어 있었다.

확인할 것을 모두 확인한 뒤,

그제야 민영 쪽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행사가… 많이 부담스러우셨습니까.”

부담스럽다는 표현이 너무 정확해서, 민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네. 조금… 아니요, 많이요.”

그녀의 그 솔직한 대답에 최강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단정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갑작스러운 발표였습니다.

누구라도 당황했을 겁니다.”

민영은 그 말이 주문처럼 부드럽게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느 순간 문득 떠올랐다.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최강은 의외라는 듯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보안팀은 신입 직원들의 출입증 정보와 프로필을 사전에 확인합니다.”

그는 과장 없이 이어 말했다.

“사진, 이름, 부서 정도만요. 법무팀 신입 정민영 사원.”

민영은 그 순간 놀란 듯하다가도, 곧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죠. 그렇겠네요.”

그제야 그녀의 표정에서 의아함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안전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시기엔 조금… 힘드신 표정입니다.”

그의 조심스러운 진단에 민영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 정도로 티가 나나요?”

“눈이 많이 흔들립니다.”

“……”

민영은 숨을 삼켰다.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의 말은 너무 정확했다.

“잠깐… 좀 더 있을게요. 조금만 혼자 있고 싶어서요.”

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시면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났지만 시야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 거리감은 민영에게 이상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민영은 복도 끝, 창문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울 밤 서울의 빛이 창문 너머로 넓게 번지고 있었다.

하늘은 어둡지만 도시의 불빛은 오히려 더 밝아 보이는 그런 밤.

민영은 창문틀에 손을 얹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마음속에서 다시 울리는 말. 그 말 위로 아버지의 표정이 겹쳐졌다.

잔을 들어 올리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그 뒤에 숨겨진 마음.

잠시 후, 복도 저쪽에서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 발소리는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가벼웠다.

강산.

볼룸의 소란을 뚫고 나온 그는 복도 끝에 서 있는 민영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미묘한 ‘확신’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이 온다.

정 회장이 숨긴 딸… 혹시…. 그의 시선이 최강.

그리고 그 너머의 민영으로 조용히 옮겨갔다.

그 밤.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은 조금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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