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기획팀 사무실 내의 불온한 기운은 김태수 대리의 좌천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팀원들의 미묘한 거리감과 질투, 그리고 연수를 향한 알 수 없는 경외감이었다. 신입 사원이 감히 회사 내의 불순한 인사를 정리할 만큼 대표의 눈에 띄었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연수는 달라진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모니터 속 글로벌 론칭 프로젝트의 성과 지표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퇴근길, 대낮처럼 밝아진 골목길과 든든하게 바뀐 보안 도어록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는 묘한 박동이 일었다. ‘도대체 누가…… 왜 나를 이렇게까지 지켜주는 걸까.’ 연수는 서늘하도록 투명한 눈동자로 어두운 골목 끝을 응시했다.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질 때마다, 문득 15년 전 파티장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던 강서준 오빠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나는 이 일에 동참하지 않겠어요.” 진경의 말이 집무실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이민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제 와서 겁이 납니까?” “겁이 나는 게 아니에요.” 진경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건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잖아요. 언론에 거짓 자료를 흘리고 내부 문서를 조작하는 건 범죄예요.” “이제 와서 법을 걱정합니까?” 이민우가 비웃듯 물었다. “하연수를 모함하고 회사 안에 거짓 소문을 퍼뜨릴 때는 괜찮았습니까?” 진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확히 가장 아픈 곳을 찌른 말이었다. 그녀는 연수를 태성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여러 번 선을 넘었다. 프로젝트 실수를 연수의 책임으로 돌렸고, 회사 안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흘렸다. 이민우에게 내부 정보를 넘긴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태성이 연수에게 실망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왔고, 지금 그녀의 앞에는 회사 전체를 무너뜨릴 문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진경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연수를 태성 곁에서 떼어놓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요?” “태성의 인생을 망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회사를 무너뜨리는 일에는 절대 동참하
늦은 밤, 이민우의 집무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빌딩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지만, 집무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이민우는 소파에 기대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조금 전 전달받은 사진들이 떠 있었다. 꽃이 만발한 정원을 나란히 걷는 태성과 연수. 사진 부스 안에서 장난스럽게 웃는 두 사람. 노을이 내려앉은 호숫가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까지. 특히 태성의 어깨에 기대어 환하게 웃는 연수의 얼굴이 이민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차갑고 경계 어린 눈빛만 보이던 여자였다. 그런데 강태성 곁에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이민우는 사진 속 연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확대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아닌 태성이 그 웃음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었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처음에는 태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약점으로 연수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연수를 태성에게서 빼앗고 싶었다. 아버지의 진실도, 사라진 회사도, 사랑도 자신만이 돌려줄 수 있다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끝내 그녀가 강태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노을빛이 호수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연수는 따뜻한 차를 마시다 태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이제 알았어?” “네.” “그러면 다음에도 내가 부르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와.” 연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다음에도 일을 핑계로 부를 거예요?” “당신이 말을 안 들으면.” “처음부터 데이트하자고 하면 되잖아요.” 태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연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설마 데이트하자는 말을 못 해서 현장 답사라고 한 거예요?” “못 한 게 아니야.” “그러면요?” “당신이 거절할까 봐.” 연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제가 오빠 데이트 신청을 왜 거절해요?” “요즘 당신은 아버지 일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태성의 말에는 서운함보다 걱정이 담겨 있었다. 연수는 그의 손을 찾아 천천히 맞잡았다. “미안해요.”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야.” “그래도 오빠까지 걱정하게 했잖아요.” 태성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걱정하는 건 내 몫이야.” “당신은 가끔 이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연수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의 모습은 노을 아래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호수 반대편 나무 그늘 아래, 긴 망원렌즈를 든 남자가
“오늘 하루만이에요.” 태성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충분해.” 그는 연수의 손을 잡은 채 꽃이 만발한 정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지금부터 하연수 PM은 퇴근이야.” “아직 아침인데요?” “그래도 퇴근.” 연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햇살과 향긋한 꽃향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오늘 하루만큼은 누구의 딸도, 누구의 후계자도, 무거운 프로젝트를 책임진 PM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마음껏 웃어도 되는 하연수였다. 그리고 태성은 오늘 하루, 그 웃음을 자신의 것으로 빌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정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 양옆에는 이름 모를 봄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따뜻한 햇살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왔다. 연수는 처음에는 몇 번이나 가방 속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혹시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는지. 진혁이 서정훈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그때마다 태성은 아무 말 없이 연수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마치 오늘만큼은 그 어떤 일도 두 사람 사이로 들어오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꾸 휴대전화 확인하면 압수할 거야.” 연수가 그를 올려다봤다. “대표님이 직원 휴대전화까지 뺏어도 되는 건가요?” “오늘은 대표도 아니고 직원도 아니라며.” “누가 그랬는데요?”
강원도에 있는 사진작가 서정훈의 행방을 확인한 뒤부터 연수의 하루는 더 바빠졌다. 낮에는 기획1팀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챙겼고, 퇴근 후에는 태성, 진혁과 함께 정우 산업의 과거 자료를 정리했다. 이민우가 보여준 조작 문서. 박성규 상무의 이름이 사라진 계약서. 그리고 2006년 8월, 아버지와 강 회장이 마지막으로 함께 준비했던 진짜 기술협약서. 확인해야 할 것은 끝없이 늘어났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연수는 잠을 줄여가며 자료를 살폈다. 퇴근 후에도 노트북을 닫지 못했고,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오래된 법인 기록과 기사, 행사 사진을 비교했다. 태성은 그런 연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피곤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도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휴대전화 속 아버지의 자료를 확인하는 모습. 가끔 아무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거나, 식사도 잊은 채 커피만 마시는 모습까지. 태성은 연수가 진실을 찾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진실을 찾기 전에 연수가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연수의 휴대전화가 침대 옆에서 짧게 진동했다. 간밤에도 자료를 살피다 늦게 잠든 연수는 겨우 눈을 뜨고 휴대전화를 찾았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태성 오빠.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피곤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연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긴 목소리에 태성이 잠시 침묵했다. —방금 일어났어? “아니요. 원래 일어나려고
호텔 복도로 나온 순간, 연수는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화려한 라운지의 문이 닫히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연수는 벽을 짚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민우가 마지막에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욕망과 집착이 뒤섞인 눈빛. 자신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지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 그에게서 벗어나고 나서야 연수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이민우의 집착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문서 안에는 거짓만 들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강 회장에게 보낸 편지는 진짜일 가능성이 컸다. 서명과 필체. 절박한 문장. 그 모든 것이 연수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문서. 그래서 더 위험했다. 연수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미리 정해놓은 메시지를 태성과 진혁에게 전송했다. 끝났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메시지를 보낸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연수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이민우가 했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