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대표실의 적막은 깊었다. 진혁과의 술자리 이후, 태성의 가슴 속에 똬리를 튼 불안감은 맹독처럼 퍼져 나갔다. 연수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강태성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았다.
'더 이상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태성은 결심했다. 연수가 그저 '회사원 하연수'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자신이 보호해주던 그 눈부신 아이로서의 자존감을 되찾게 하겠다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연수를 자신의 세상, 가장 높은 곳으로 다시 끌어올리겠다고 다짐했다. 그 첫걸음은 상류층의 사교계, CEO들의 연례 자선 파티였다. 그날 저녁, 태성은 본가를 찾았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응접실,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부모님은 이미 차가운 정색을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성아, 언제까지 일에만 파묻혀 살 거니? 네 나이가 서른다섯이다. 이제 슬슬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태성기획 사옥의 창문을 쉼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회색빛 구름이 도심 위를 낮게 덮은 탓에 아직 오전인데도 대표실 안은 어둑했다. 태성은 책상 앞에 앉아 전날 진혁이 전달한 조사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강원도에 있다는 사진작가 서정훈의 행방은 아직 완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박성규 상무의 과거 기록도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정우 산업이 무너진 시기에 작성된 계약서와 자금 내역은 여러 차례 수정된 흔적만 남아 있었고, 이민우가 연수에게 보여준 문서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많았다. 태성은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다가 미간을 짚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전날 밤 도착한 메시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할 말이 있어. 당신과 하연수 씨에게 꼭 보여줘야 할 자료도 있어. 보낸 사람은 이진경이었다. 태성은 메시지를 받은 직후 짧은 답장을 보냈다. 내일 오전 열 시. 대표실로 와. 그 뒤로 진경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태성이 시계를 확인한 순간, 대표실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이진경이었다. 평소의 화려한 정장과 빈틈없이 꾸민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짙은 색 코트 안에는 수수한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눈가에는 밤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태성은 그녀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이었지만, 오늘의 진경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진경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창밖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끝없이 빛나는 도시 한가운데 자신만 홀로 버려진 듯했다. 진경은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의 서류를 다시 펼쳤다. 태성의 이름이 적힌 결재란. 그가 밤낮없이 준비했던 프로젝트. 수많은 직원의 생계가 걸린 사업 자료. 진경은 태성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대표 자리에 올라 비웃음과 견제를 견디며 버텨온 시간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하연수만 사라지면 태성이 언젠가 자신을 돌아봐줄 것이라 믿었다. 연수의 자리에 자신이 서면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태성이 연수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을 사랑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사랑은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이유로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자신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진경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억눌러왔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마음은 언제부터 이렇게 뒤틀려버린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이민우 같은 사람의 손을 잡고 태성을 위협하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녀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그러다 문득 탁자 한쪽에 놓인 또 다른
“나는 이 일에 동참하지 않겠어요.” 진경의 말이 집무실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이민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제 와서 겁이 납니까?” “겁이 나는 게 아니에요.” 진경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건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잖아요. 언론에 거짓 자료를 흘리고 내부 문서를 조작하는 건 범죄예요.” “이제 와서 법을 걱정합니까?” 이민우가 비웃듯 물었다. “하연수를 모함하고 회사 안에 거짓 소문을 퍼뜨릴 때는 괜찮았습니까?” 진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확히 가장 아픈 곳을 찌른 말이었다. 그녀는 연수를 태성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여러 번 선을 넘었다. 프로젝트 실수를 연수의 책임으로 돌렸고, 회사 안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흘렸다. 이민우에게 내부 정보를 넘긴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태성이 연수에게 실망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왔고, 지금 그녀의 앞에는 회사 전체를 무너뜨릴 문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진경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연수를 태성 곁에서 떼어놓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요?” “태성의 인생을 망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회사를 무너뜨리는 일에는 절대 동참하
늦은 밤, 이민우의 집무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빌딩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지만, 집무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이민우는 소파에 기대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조금 전 전달받은 사진들이 떠 있었다. 꽃이 만발한 정원을 나란히 걷는 태성과 연수. 사진 부스 안에서 장난스럽게 웃는 두 사람. 노을이 내려앉은 호숫가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까지. 특히 태성의 어깨에 기대어 환하게 웃는 연수의 얼굴이 이민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자신 앞에서는 언제나 차갑고 경계 어린 눈빛만 보이던 여자였다. 그런데 강태성 곁에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이민우는 사진 속 연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확대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아닌 태성이 그 웃음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었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처음에는 태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약점으로 연수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연수를 태성에게서 빼앗고 싶었다. 아버지의 진실도, 사라진 회사도, 사랑도 자신만이 돌려줄 수 있다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끝내 그녀가 강태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기울 무렵 두 사람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노을빛이 호수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연수는 따뜻한 차를 마시다 태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이제 알았어?” “네.” “그러면 다음에도 내가 부르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와.” 연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다음에도 일을 핑계로 부를 거예요?” “당신이 말을 안 들으면.” “처음부터 데이트하자고 하면 되잖아요.” 태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연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설마 데이트하자는 말을 못 해서 현장 답사라고 한 거예요?” “못 한 게 아니야.” “그러면요?” “당신이 거절할까 봐.” 연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제가 오빠 데이트 신청을 왜 거절해요?” “요즘 당신은 아버지 일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태성의 말에는 서운함보다 걱정이 담겨 있었다. 연수는 그의 손을 찾아 천천히 맞잡았다. “미안해요.”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야.” “그래도 오빠까지 걱정하게 했잖아요.” 태성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걱정하는 건 내 몫이야.” “당신은 가끔 이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연수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의 모습은 노을 아래 한 폭의 그림처럼 평온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호수 반대편 나무 그늘 아래, 긴 망원렌즈를 든 남자가
“오늘 하루만이에요.” 태성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충분해.” 그는 연수의 손을 잡은 채 꽃이 만발한 정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지금부터 하연수 PM은 퇴근이야.” “아직 아침인데요?” “그래도 퇴근.” 연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햇살과 향긋한 꽃향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오늘 하루만큼은 누구의 딸도, 누구의 후계자도, 무거운 프로젝트를 책임진 PM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마음껏 웃어도 되는 하연수였다. 그리고 태성은 오늘 하루, 그 웃음을 자신의 것으로 빌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정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 양옆에는 이름 모를 봄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따뜻한 햇살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왔다. 연수는 처음에는 몇 번이나 가방 속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혹시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는지. 진혁이 서정훈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그때마다 태성은 아무 말 없이 연수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마치 오늘만큼은 그 어떤 일도 두 사람 사이로 들어오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꾸 휴대전화 확인하면 압수할 거야.” 연수가 그를 올려다봤다. “대표님이 직원 휴대전화까지 뺏어도 되는 건가요?” “오늘은 대표도 아니고 직원도 아니라며.” “누가 그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