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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1화

“시은아, 아빠가 먼저 갈 테니까 너는 여기 남아 있어.”용찬은 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뒤따라오던 딸에게 말했다.용시은은 아버지의 뜻을 눈치챘는지 망설이며 말했다.“아빠, 그 사람은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데 제가 남아 있어 봤자 아무런 효과도 없어요. 그 사람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여자라곤 용설희, 그년밖에 없어요. 제가 얼굴이 두꺼운 편이긴 해도 계속 실패하고 계속 무시당하면 저도 창피하단 말이에요.”용시은에게도 체면이 있고 자존심이 있었다.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예용정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예용정을 사로잡으라고 밀어붙이지만 않았어도 용시은은 그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아니, 애초에 예용정 앞에 설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예용정은 이런 연회 자리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가끔 얼굴을 비칠 때도 현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았고 주변엔 경호원이 떼처럼 둘러서 있어 접근하기 너무 어려웠다.애초에 접근하기 쉬웠다면 예용정의 진짜 얼굴은 진작에 파헤쳐졌을 것이다.곁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워낙 강해서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기에 예용정이 H시에 온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 아무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가 아직 젊다는 사실이었다.검은 마스크 사이로 얼굴의 살갗이 조금 드러나 있었는데 그 드러난 살결만으로도 그가 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몇 번이고 실패해도 계속 시도해야 해. 그놈을 끊임없이 지켜봐야만 빈틈을 찾을 기회가 생기지. 설마 정말 여자를 안 밝히는 사람이겠냐.”용시은이 말을 이었다.“여자를 안 밝히는 게 아니라 곁에 좋아하는 여자가 이미 있는 거예요. 용설희라는 여자가 그 사람 곁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는데... 비주얼도 나쁘지 않고 몸매가 그리 섹시한 편은 아니어도 분명한 여자예요. 어쩌면 둘은 진작에 한 침대에서 뒹군 사이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왜 그렇게 용설희를 감싸겠어요? 제가 보기엔 그 둘은 단순히 고용주와 경호원 사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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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2화

“그건 곧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지. 너라면 어쩔래? 남들 앞에서 네 전담 경호원을 감싸지 않을 거야?”용시은은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아빠,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가 아직 처녀인 걸 아세요?”용찬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그건 신경 쓰지 말고 어쨌든 아빠가 보면 알아. 너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아빠가 먼저 들어갈 테니 너는 여기 남아서 저놈을 지켜봐. 보아하니 오늘 밤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은데 아마 그리 빨리 자리를 뜨진 않을 거다. 서둘러 자리를 뜨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에게 다가갈 기회가 생길 거야. 마스크만 벗겨 내면 그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어.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떤 모습일지 우리도 AI로 생성해 봤잖아. 거의 맞을 거야. 그 아이는 어릴 때 아버지와 아주 많이 닮았어. 자라면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아마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야. 그 아비에 그 아들이지. 어쩌면 어릴 때보다 더 닮았을지도 몰라.”용시은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예용정에게 거듭 깔보이고 모욕당해 그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질 지경이었다.그때 용찬이 진지하게 딸을 불렀다.“시은아! 네 자존심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생각해 봐. 정말 앙갚음하고 싶지 않아?”“어떻게 복수해요? 저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는데...”용시은은 풀이 죽어 말했다.그녀는 꿈에도 예용정에게 앙갚음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실력이 너무 막강했다.“그놈 마음을 갖고 놀면서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 그럼 예용정은 네 손바닥 위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용시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 예용정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고.그녀가 용씨 가문의 딸인 이상, 예용정은 애초에 그녀에게 마음을 줄 이유가 없었다.철천지원수 사이에 무슨 사랑이 오갈 수 있겠는가.그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용시은은 애초에 용씨 가문을 등질 수도 없었다.용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타이틀은 그녀의 자존심이자 생존의 밑천이었기에 그걸 내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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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3화

“그래.”용찬은 경호원 두 명을 남겨 딸을 지키게 했고 곧 차에 올랐다.이내 여러 대의 차가 자리를 떠났다.아버지의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용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 뒤 두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안으로 돌아갔다.용시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틈틈이 예용정 쪽을 훔쳐보았다.예용정은 오늘 밤 기분이 좋은지 꽤 오래 있었음에도 자리를 뜰 기미가 없었다.그는 사장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술을 권하면 마다하지 않고 전부 받아 마셨다.‘저 사람... 경계심이 무척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밖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면 취해서 남의 계략에 넘어갈까 봐 보통 3잔을 넘기지 않았다.예용정은 평소 술이 일을 그르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누가 두어 잔 더 권하면 그 말로 상대의 입을 막곤 했다.그런데 오늘 밤은 어찌 이리 평소와 다른 건지 알고도 모를 일이었다.용시은은 잠시 지켜보다가 술잔을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예용정의 앞까지 닿지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용설희에게 막혀 버렸다.때때로 용시은은 용설희의 가죽을 벗겨 버리고 싶을 만큼 그녀가 미웠다.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이가 갈렸다.“예 대표님.”용시은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애교가 많았다.예용정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한껏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예 대표님, 제가 한잔 올릴게요. 아까 저의 아버지가 말씀을 듣기 거북하게 해서 대표님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죠? 저의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예용정이 냉랭하게 말했다.“저를 불쾌하게 만든 건 당신 아버지인데 그분은 감히 제 앞에 나타나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겁니까? 자기 딸을 앞세우다니 책임감이라는 게 전혀 없군요. 용씨 가문이 어찌하여 용찬 씨 같은 분을 대리 가주로 앉혔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전임 대리 가주분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해 보이는데요. 제가 보기엔 당신 할아버지가 밖에서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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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4화

그러나 용태호는 나이가 지긋한 데다 맏아들이 이미 대리 가주의 자리에 올라선 터였다. 자식들이 서로 헐뜯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는 혼외자들을 불러들여 가문을 잇게 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했다.용태호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아이를 찾아내 없애고 가주의 증표들을 손에 넣으면 아들보다 더 독한 손자에게 그 물건들을 물려줄 생각이었다.그러면 용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자기 혈통으로 이어질 테니까.아들이 부족하면 손자라도 훌륭하면 그만이었다.그래서 용태호는 용찬이 대리 가주 자리를 굳건히 지키도록 뒤를 봐주면서 혼외자들에게는 용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사업을 일으켜 돈을 벌어들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가 유일하게 고집한 것은 용씨 가문의 대는 반드시 자신과 정실부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결국 이는 다시 직계 혈통이 권력을 잡는 길로 되돌아간 셈이었다.다만 용찬이 바로 그 적출의 핏줄이었을 뿐.용시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예용정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용씨 가문은 원래 직계 혈통이 권력을 잡는 집안이죠. 당신 할아버지도 그런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네요.”상대를 비꼬는 말이었다.순간 용시은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이 예용정이라는 남자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콕콕 찔렀다.“여러분,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용정이 되레 사람들에게 물었다.사람들은 너도나도 용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사실 용씨 가문은 정말로 직계 혈통이 권력을 쥐어 왔고 지난 몇 대의 가주 모두 직계 혈통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직전의 진짜 가주는 일가족이 몰살당해 어린아이 하나만 행방이 묘연해졌다.용태호는 수십 년을 찾아도 그 아이를 찾지 못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진짜 가주의 후손은 그 어린아이를 찾지 못하면 대가 끊긴 셈이다.혈통이 끊기고 가주의 전용 도장과 권한 증표, 가문의 토템까지 잃어버린 탓에 용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다시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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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5화

용정이 비웃음을 흘리며 용시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웃음소리가 용시은의 마음을 콕 찔렀다.그 웃음엔 조롱과 멸시가 가득했고 어찌 된 영문인지 귓전에 맴돌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삼키며 용시은은 간신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말을 꺼냈다.“예 대표님, 제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저와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고 싶으신 거죠?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충분히 말씀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제 귀는 매우 밝아서 모깃소리처럼 작게 중얼거리지만 않으시면 다 들려요.”용정은 술잔을 가볍게 저었다. 잔 속의 술이 그의 손놀림을 따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용시은 씨가 제 곁에 바짝 붙는 걸 매우 싫어합니다. 그쪽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가 정말 코를 찌를 정도로 강렬하거든요. 설마 몸 냄새를 감추시려고 그렇게 진한 향수를 뿌리시는 건 아니시죠? 아니면... 땀 냄새라도 나시는 건가요?”주위에서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예용정이 용태호 일가를 골탕 먹이기 좋아한다는 소문은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독설을 퍼부을 줄은 다들 몰랐다.용씨 가문의 아가씨 앞에서조차 한 치의 호의도 보이지 않는다니, 오늘 밤 용시은은 예용정에게 철저히 짓밟힌 셈이었다.용시은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예용정에게 함부로 화를 낼 수 없어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예 대표님, 입이 참 독하시네요. 오늘 이 연회에 참석한 여자 중에 향수 안 쓴 사람이 어딨어요? 여기에는 향수랑 담배 연기만 가득한데 왜 하필 저만 콕 집어서 꼬집는 거예요? 그냥 제가 눈에 거슬린다는 뜻 아니에요?”그 말은 사실이었다. 자리한 여성들 모두 향수를 사용했고 다만 그녀가 뿌린 향이 유독 진했을 뿐이었다.“향수 쓰는 여자는 다 몸 냄새가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 여자들은 그냥 향을 좋아하는 건데 그게 잘못이에요? 혹시 우리 여자를 얕보는 거예요?”용정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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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6화

사실 용시은은 그룹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다.용찬이 딸을 각별히 아꼈고 일정 부분 권한을 부여하긴 했어도 애초에 용찬 자신의 권한도 제한적이라 그녀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그런 적 없으면 없는 거지, 그렇게까지 목청껏 소리칠 일이 뭐람. 시끄러워 죽겠네. 용시은 씨, 볼일 없으면 저리 비켜 줘요. 내 곁에 너무 붙지 마세요. 냄새가 정말 지독하니까.”용정의 혐오는 가감 없이 드러났다.용시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그녀는 용정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분을 겨우 억누르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아버지가 맡긴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게 이토록 버거운 줄은 몰랐다.예용정은 입이 독할 뿐 아니라 여자를 대하는 법도 모르는 놈이었다.그렇게 술을 퍼부었건만 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 보였다.마스크를 벗길 틈이라고는 없었다.예용정과 술잔을 부딪칠 만한 큰 회장들조차도 그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예용정은 술을 마실 때마다 마스크를 살짝 들어 올려 반듯한 턱선만 내비칠 뿐 얼굴은 여전히 가리고 있었다.용시은은 구석으로 물러났지만 그놈이 취기를 드러낼 그 순간을 기다리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용정은 오늘 밤 흥이 오른 탓인지 술잔을 자주 기울였다.그리고 드디어 용시은은 그가 취하는 그때를 기다려 냈다.다만 그의 곁을 지키는 경호원들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용정은 취해 걸음조차 제대로 디디지 못했고 용설희와 다른 경호원 한 명이 그를 부축해 자리를 떠났다.용시은은 구석에서 용정 일행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놈이 오늘 밤 푹 취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길목에 암살자들을 매복시켜 시도해 보세요.]예용정이 취한 지금이라면 암살자들을 마주치는 순간 경호원들이 그를 감싸느라 정신이 팔려 빈틈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공격하기 쉬울 터였다.오늘 밤 예용정을 제압하지 못하더라도 용설희와 경호원들만 없애도 큰 공을 세운 셈이다.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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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7화

용정은 용설희를 응시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까.그러나 그는 차마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용정은 몸을 바로 세웠다.“결혼은 아직 일러. 원수를 갚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때 연루된 자들과 가담자들은 거의 다 죽었어. 살아남은 놈들도 입이 무거워서 쉽사리 열지를 않아. 게다가 사건이 터진 지 수십 년이 지나서 증거를 모은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용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천매 스승님은 왜 증거라도 좀 건져 주시지 않는 걸까.”용설희가 조용히 대답했다.“이건 도련님의 원수지, 그분들의 원수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도련님을 키우고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자체로도 이미 큰 은혜입니다.”용찬의 아버지는 일을 처리할 때마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많은 이가 그가 저지른 짓임을 알면서도 그가 직계 혈통을 해쳤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가담자들은 모두 용정의 원수들인데 그들이 과거의 일을, 더욱이 은밀히 간직한 증거를 용정에게 순순히 넘겨줄 리가 없었다.그것은 스스로 목을 내미는 꼴이었으니까.그러나 이미 더 많은 관계자와 가담자들은 세상을 떠났다.이미 병으로, 혹은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용정은 사고사한 자들은 용태호가 입막음용으로 처리한 것으로 확신했고 병사한 자들까지도 약물로 제거한 것으로 의심했다.살아남은 관계자들은 대부분 용찬의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그들은 용찬 일가와 한배를 탄 자들이니 배신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용정이 H시에 발을 들인 지도 몇 년이나 되었지만 증거 수집은 달팽이 걸음처럼 더디기만 했다.무엇보다 그 참사가 벌어진 지 30여 년이 흐른 탓이 컸다.원수를 법정에 세울 만한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용정은 어쩔 수 없이 용진 그룹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그리고 때가 되면 가주 증표들을 꺼내 진짜 가주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속셈이었다.용진 그룹의 보스라는 지위 덕분에 용정의 능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주 자리에 오르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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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8화

용설희는 기사에게 길을 바꾸라고 일렀다.도련님이 부딪치고 싶지 않다니 오늘 밤은 부딪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었다.용찬이 용정이 집에 가는 길목에 매복시켜 둔 암살자들은 손을 쓰려고 밤새 숨어 있어 봤자 허탕이었다.용정은 용설희를 데리고 새로 사들인 별장으로 향했다. 그 별장은 평소 살던 저택보다 훨씬 작았고 마당이 있긴 해도 매우 아담했다.집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자 용정은 소파에 몸을 던지듯 누우며 손에 잡히는 대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역시 집이 최고야.”큰 저택에 익숙한 용정이었지만 이 작은 별장은 그가 직접 꾸민 공간이었다. 그의 세상은 자신과 용설희뿐이라 넓은 곳은 오히려 허전하게만 느껴졌다.용설희는 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해장국을 끓였다.용정은 그녀가 해장국을 준비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술을 많이 마셔서 몸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채 여러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어느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걸 느꼈다.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대로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곁에는 용설희가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있기에 용정은 아무런 의심 없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누구라도 그를 배신할지 모르지만 오직 용설희만은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의 틈을 노리지도, 그의 침대를 넘보지도 않았다.용정은 알고 있었다. 용설희의 마음 한쪽에 자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다만 그녀는 지나치게 고지식해 늘 자신을 하인의 경계 안에 가두고 그 마음을 깊이 감춰 두었을 뿐이었다.그도 마찬가지였다.용정 또한 용설희를 사랑했지만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아 감히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다.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내비치지도 못한 채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해장국을 다 끓인 용설희는 그릇을 들고나와 식탁에 내려놓은 뒤 고개를 내밀어 소파 위의 용정에게 말했다.“도련님, 해장국이 다 됐어요. 얼른 와서 드세요.”용정은 소파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용설희가 걸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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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9화

그날 밤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이튿날, 용정이 눈을 떴을 때 용설희는 이미 깨어 있었다.아침까지 차려 놓고 어젯밤 누웠던 소파에 앉아 용정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용정이 눈을 뜨자 용설희는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가더니 소파 가장자리에 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도련님, 머리는 안 아프세요?”용정은 눈을 깜빡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에게 물었다.“나 어젯밤에 여기서 잤어?”“네. 어젯밤 소파에서 잠드셨어요. 깨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뒀어요. 이 소파는 침대로 써도 괜찮아요. 도련님, 혹시 불편하셨어요?”용설희는 도련님이 불편해하면 즉시 집사에게 2인용 소파로 바꾸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침대처럼 푹신하게 잘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아니, 방에 들어가 잔 줄 알았는데 소파에서 잠들었네. 너도 어젯밤 소파에서 잤어?”용정은 몸을 일으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심하진 않아. 꿀물 한 잔만 타 주면 돼.”“도련님이 소파에서 주무시는데 제가 어찌 방에 들어가겠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모르잖아요. 그건 실책입니다. 네, 꿀물을 타 드릴게요.”용설희는 자리를 떠나 이내 꿀물을 타왔다. 그녀는 꿀물이 들어있는 잔을 용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용정이 그녀를 타박했다.“집 안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어. 여기 보안도 철저하고 마당에도 사람이 지키고 있어서 바람만 스쳐도 다 알아. 나는 사내놈이고 몸도 튼튼해서 소파에서 좀 자도 괜찮아. 너는 여자니까 소파에서 자지 마. 아무래도 침대보다 불편하잖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나 신경 쓰지 말고 이불만 덮어 주고 네 방에 가서 자.”용설희는 대꾸하지 않았다.“설희야, 내 말 들었어?”“들었습니다.”하지만 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들었으면 실행해.”“저는 전담 경호원입니다.”용설희가 짧게 한마디 툭 내뱉자, 용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용설희는 그의 노려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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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80화

예지연이 서슴없이 말했다.[설희 언니랑 관련된 일이 아니면 오빠는 나를 안 찾잖아. 설희 언니 때문에 꼼짝 못 하는 일 빼고 오빠는 해결 못 할 일 없잖아. 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 봐. 오늘 설희 언니가 오빠랑 같이 밥 먹기를 거부한 거야? 아니면 뭐야?]용정이 말했다.[아니야, 오빠가 진짜 네가 보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그냥 네 근황이 궁금해서 문자 보낸 것뿐이고. 내가 오빠로서 동생 걱정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예지연은 콧방귀를 뀌었다.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콧방귀는 용정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분명했다.용정은 예지연과 함께 자라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고 지낸 지는 수십 년이 된 터라 어떤 성격인지 예지연은 훤히 꿰고 있었다.H시에서 신비롭고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용정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놀기 좋아하고 신나게 떠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시간 되면 놀러 와.]용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한마디 던질 수밖에 없었다.예지연이 말했다.[시간 없어.]용정이 말했다.[하연이도 휴가 와 있잖아. 너희도 오래 못 봤지? 놀러 오면 다 같이 모일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예지연이 음성 메시지로 회답했다.[하연이가 어젯밤에 나랑 통화했어. 일주일만 더 놀고 우리 회사에 출근해서 나 따라서 좀 배우겠대. 우리 한두 달은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굳이 그 먼 데까지 날아갈 필요 없어.]용정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물었다.[하연이가 네 회사에 출근한대? 자기가 알아서 찾겠다던데? 내가 자리 마련해 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했고 여섯째 삼촌이 소개해 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했는데.][자기가 직접 이력서를 냈어. 그걸 우리 회사가 뽑았고. 방학 알바로 하는 거야. 한동안 일해 보고 잘하면 졸업하고 언제든 우리 회사에 들어올 수 있지. 나는 뒷문 열어 준 적 없어.]예지연은 원래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라 전하연과 아무리 자매처럼 지내도 뒷문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전하연이 예진 그룹에서 일하고 싶다면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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