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Bab 1081 - Bab 1090

1090 Bab

제1081화

정은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다.진짜 목적은 재석이었다.정은은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품에 안겨버렸다.“자기야...”조용히 불러보는 목소리.그 속에 담긴 감정이 평소와는 달랐다.정은은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안겨 있다가, 남자의 뺨을 스치듯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생겼어요?”잠시 침묵하던 재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포기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날 믿어줄래?”정은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갑자기 이런 말... 분명 뭔가 있었구나.’단서들은 많았다.재석이 집에 다녀온 직후부터 이상했고, 이전 몇 차례 강서원과의 어색한 만남.그날의 뉘앙스들.‘재석 씨 어머니가 반대한 거구나.’정은은 그가 무슨 상황에 놓였는지 구구절절 묻지 않았다.그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제야 재석은 길게 숨을 내쉬며, 정은을 더 꽉 끌어안았다.마치 놓치기라도 할까 봐.“고마워.”남자의 숨결이 정은의 어깨를 타고 흘렀다.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다가 정은은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이제 들어가요. 진짜 쓰레기도 버려야 해요.”...정은이 다시 집에 들어왔을 때, 이미숙은 과일 접시를 거의 비워내고 있었다.문 닫히는 소리에 눈도 안 돌리고 말했다.“다녀왔어?”“네.”“조 교수는 괜찮아?”정은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왜 안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이미숙은 태연하게 말했다.“괜찮으면 네가 먼저 나갈 이유가 없지. 조 교수, 원래 잘 찾아오잖아.”정은은 속으로 인정했다.“와... 우리 엄마, 진짜 추리 소설계의 여왕이네요. 이 정도 추리는 거의 셜록 수준인데요?”“여왕?”이미숙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그건 또 무슨 소리야?”“온라인에서 엄마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근데 들으면 들을수록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이미숙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여왕’에서 ‘왕’ 같은 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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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2화

“아이를 낳는다는 건 단지 몸과 건강을 희생하는 게 아니야. 사랑과 마음까지 얽히는 일이야. 엄마는 네가 그 선택을 할 땐, 충분히 생각한 후였으면 해. 순간의 사랑이나 충동이 아니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짧게 생각 안 해요.”“그래, 그럼 됐지. 우리 간다.”이미숙은 몸을 돌려 소진헌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었다.소진헌은 바로 반응했다. 부드럽게 손을 돌려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조금 전까지 떠들던 ‘바둑’도, ‘재대결’도 싹 잊고, 발걸음을 착착 맞춰 걸어갔다.재석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역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은의 허리를 툭 감싸 안았다.“왜요?”정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아버님과 어머님이 가셨어.”“그래서요?”정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까, 본격적으로 둘만의 세계... 가능하지 않을까?”정은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좀... 어려울 듯...?”“응?”정은은 손가락을 펴며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일단 전 교수님 아직 복귀 안 하셨죠? 당신, 지금 일손이 꽉 차 있잖아요.”“그리고 민지랑 서준이도 여행 끝내고 복귀하잖아요. 며칠 안에 랩실에 다시 나올 텐데, 나도 걔들 실험 돕기도 했거든요.” 재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능청스럽게 말했다.“그럼... 지금이 골든타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나?”“네? 뭐가요?”정은이 이해하기도 전에, 재석이 갑자기 정은을 번쩍 안아 올렸다.“간다!”정은은 말 그대로 얼이 빠졌다.‘뭐지, 지금 이거 뭐야... 진짜야?’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재석의 품에 안긴 채 역 앞 큰길을 몇 걸음 지나가고 있었다.“아, 미쳤어요?! 여긴 KTX 역이잖아요!!”“그래서?”재석이 태연하게 받는다.“사람 엄청 많잖아요!! 다 보고 있어요!!”정은은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진짜 미쳤나 봐, 이 사람...’“당장 내려놔요! 빨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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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3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어느덧 해가 기울고, 창밖엔 어슴푸레한 저녁노을이 내려앉았다.정은은 얇은 잠옷을 걸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커튼을 젖히는 순간.한순간, 낯선 현실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이 모든 게, 조금 전까진 꿈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해가 지네.”정은이 창밖을 바라보다, 조용히 침대 쪽을 돌아봤다.재석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남자의 잠옷은 정은이 입고 있어서, 재석은 덩그러니 상반신만 드러낸 상태.말없이 다가온 재석은 정은의 뒤에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따뜻한 팔이 허리로, 어깨로 닿아왔다.둘은 그렇게 함께, 말없이 저녁 하늘을 바라봤다.붉게 물든 노을과, 조금씩 어두워지는 도시의 윤곽.“진짜... 예쁘다.”정은이 속삭였다.“응, 정말 예뻐.”하지만 재석은 하늘을 보지 않았다.시선은 오직, 정은만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 시간이 멈춰도 괜찮겠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은 절대 멈춰주지 않는다.아름다운 순간은 늘, 기억 속으로만 남는다.정은이 슬쩍 배를 문질렀다.“배고파요...”점심도 안 먹고 끌려와 이 ‘난리’를 겪는다면, 웬만한 철인도 쓰러질 상황이었다.재석은 민망한 듯 코를 만지며 말했다.“내가 뭐 좀 해줄까?”“하지 마요. 그냥 나가서 먹자고요.”“그래, 나가자.”대충 정리한 둘은 함께 집을 나섰다.근처에 있는 쇼핑몰까지는 걸어서도 금방이었기에, 둘은 차를 두고 나왔다.“뭐 먹고 싶어?”재석이 묻자, 정은은 바로 대답했다.“샤부샤부요.”“역시.”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정은의 입맛은 누구보다 재석이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단골 샤부샤부집으로 향했다.별도의 룸 없이 홀만 있는 구조지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테이블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그야말로 ‘진짜 삶’이 담긴 풍경이 펼쳐졌다.재석은 익숙하게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새우, 완자, 그리고 한우 소고기...”정은이 좋아하는 것들로 깔끔하게 골라낸 조합.고기 위주에, 신선한 버섯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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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4화

“닥쳐. 그냥 봐.”“뭐?! 방금 신호등까지 무시하고 도로를 질러와 놓고는 이제 와서 나보고 조용히 하라고?! 방금 빵빵거린 클랙슨 반은 너 때문에 나온 거고, 나머지 반은 나 때문에 나온 거야! 너 지금...”“고동건, 제발 그만 좀 떠들어. 제일 안쪽 안 보여? 저기 앉은 사람, 우리 오빠랑 정은이 맞지?”동건은 말하다가 멈칫했다.“오빠? 너 외동딸 아니었나?”수민은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사촌오빠면 안 돼?”“사촌...? 설마... 조재석 교수?”동건은 수민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2초 만에 굳어버렸다.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며 다시 확인했다.맞다.안쪽 테이블.조재석과 소정은.‘와... 진짜네. 둘이 같이 앉아있어. 웃고 있고... 분위기 장난 아닌데?’동건의 첫 마디는 의외였다.“너, 시력이 그렇게 좋았냐?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저 안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 얼굴이 보여?”수민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가끔 진심으로 벽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야.’‘사람이 아니라... 돼지랑 대화하는 느낌이랄까?’“지금 뭐 하는 건데?”동건은 수민이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켠 걸 보고 물었다.“제발... 가끔은 좀 수준 있는 질문을 해줄 순 없니? 내가 카메라 앱 켰으면, 뭐 하게 생겼냐?”이미 수민은 유리창 너머로 사진 몇 장을 빠르게 찍고 있었다.동건도 어쩔 수 없었다. ‘말이야, 방귀야. 이건 대놓고 사람 능욕이지...’“아니, 그래서 너 지금 저걸 왜 찍냐고. 둘이 그냥 밥 먹는 거야. 바람피우는 것도 아닌데, 샤브샤브 같이 먹은 게 문제냐?”“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수민이 차갑게 말했다.“하... 뭘 모르는데? 그럼 너는 알고?”“눈 좀 제대로 떠. 오빠 손이 어디에 얹혀 있는지 봐. 정은의 가방이 어디에 놓였는지 봐. 그리고... 저 둘이 앉은 위치.”동건은 다시 안을 들여다봤다.그전까진 그저 웃고 있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재석의 손은 테이블 아래로 정은 쪽으로 살짝 뻗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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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5화

동건이 ‘나도 한 컷 찍었다’ 하는 표정으로 기세등등하던 그 순간, 허리의 가장 연약한 부위, 그 살짝 말랑한 옆구리에 수민의 두 손가락이 정확히 꽂혔다.그리고... 180도 회전.“악!!”동건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수민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뭐 하겠어?”‘이 여자... 진짜... 맹수야, 맹수. 건들면 피본다.’동건이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벌리자, 수민은 단호하게 말했다.“얼른 사진 지워. 허락 없이 막 찍지 마.”“왜? 너도 찍었잖아.”“내가 너랑 같냐? 안에 앉아 있는 두 사람, 내 사촌 오빠고, 내 절친이야. 넌 뭔데, 막 찰칵찰칵 거리냐?”“나는... 네 절친의 전남친의 베프이자, 네 오빠의 사촌 여동생 남자친구... 어쨌든 관계있는 사람인데?”“그게 뭔 개소리야... 지워.”“알았어, 알았어. 지울게.”동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민 눈앞에서 앨범을 열어 사진을 하나하나 삭제했다.수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 정도면 됐지.”하지만 이내 수민의 눈에 불꽃이 피었다.“와... 진짜 대박. 우리 오빠랑 정은이 사귄다니...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철벽 조재석이 연애라니... 이건 거의 정치권 비밀 연애 급인데?’“보안 유지 상태 뭐야? 나도 몰랐다니. 이거 아주 심문 들어가야겠는데?”수민이 안으로 걸음을 떼려 하자, 동건이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야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가서 확인해야지.”“아니, 둘이 지금 데이트 중인데, 네가 거기 왜 껴? 너 아까 나랑 밥 먹기로 한 거 기억 안 나?”“설마 진짜 이 장면 보고 ‘현장 검거’라도 하겠단 거야? 그건 너무 눈치 없잖아. 네 오빠랑 정은도 체면은 차려야지.”동건의 말에 수민의 발걸음이 멈췄다.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뭐 먹고 싶어?”동건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내가 예약해 놨어. 스테이크 집이야. 가자.”그 말과 함께 그는 자연스럽게 긴 팔을 뻗어 수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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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6화

“좋아.”재석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왼쪽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트로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타는 모습이 마치 동호회 모임처럼 잘 맞춰져 있었다.오른쪽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앤티크 느낌의 액세서리를 파는 상인, 핸드폰 필름을 붙여주는 청년, 일상 잡화를 만 원 균일가로 판매하는 이동식 매장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조금 더 앞으로 가자 대형 길거리 공연이 한창이었다.“서커스인가요?”정은은 사람들 사이에 멈춰 서서 무대를 바라봤다.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남녀 한 쌍이 공중에서 서로를 날리고, 받아내며, 연속으로 공중제비까지 선보였다.재석이 설명했다.“근처에 예술인 마을이 있어. 그쪽에서 활동하는 팀들이 종종 홍대나 대학로 쪽으로 나와서 이렇게 거리 공연을 해.”“밤에는 이렇게 공연하면서 모은 돈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도 하고, 영상 찍어서 홍보에도 써.”“이제는 거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지. 매주 다른 팀이 와서 공연하는 경우도 많아.”마침 공연이 끝났고, 정은은 박수를 보냈다.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조용히 돈을 기부함에 넣었다.그런데 기부함에 자동 금액 설정이 되어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오만 원 두 장이 기부되었다는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정은을 바라봤다.공연자도, 관객도 모두 깜짝 놀란 눈치였다.“와, 정말 감사합니다!”여성 서커스 단원은 환한 미소로 정은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정은은 말없이 웃으며 손뼉을 더 크게 쳤다.‘진짜 멋졌어.’재석도 똑같이 5만 원짜리 두 장을 넣었다.정은이 놀라서 물었다.“당신도 넣게요?”“응.”“서커스 좋아해요?”정은이 물었다.“좋아한다고 하긴 뭐하고, 가끔 보면 신기하긴 하더라고. 게다가 네가 좋아하잖아.”‘정은이 좋아하는 건, 나한텐 늘 기쁜 일이니까.’서커스 공연 바로 옆에는 중년의 남자 가수가 기타를 안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흰색 긴 머리에 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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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7화

누군가 장난스럽게 환호성을 질렀고, 여기저기서 박수도 터졌다.재석과 정은은 눈을 마주쳤다.그리고 동시에 외쳤다.“뛰자!”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린 뒤에야, 두 사람은 어느 벤치 앞에서 멈춰 섰다.정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다음부터는 불시에 그런 짓 하지 마요!”재석이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불시는 아니지. 눈 감으라고 했잖아.”“거의 바로 키스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차라리 말도 하지 말고 그냥 해요!” “오케이, 다음엔 말 안 하고 바로 할게.”정은은 그런 대답을 받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지금 문제의 핵심이야?!’‘그걸... 진짜로 받아들인 거야?’둘은 손을 꼭 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오늘의 데이트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길을 걷다 보니, 어딘가에서 모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작은 노점 앞에 인파가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정은은 무심코 지나가려다 들려오는 말에 발을 멈췄다.“너 그거 맞췄어?”“응, 그거 뭐더라? 난센스 퀴즈! 그 정도는 껌이지!!”“뭐 나왔는데?”“숲속에 뱀이 한 마리 있는데 절대 사람을 안 물어. 왜일까?”“왜... 왜?”“숲에 사람이 없거든!”“와! 너 진짜 잘한다. 마지막 문제도 한 번 도전해 봐.”“어떤 건데?”“이번엔 숫자야. 마지막 문제니까 어려워.”“헐, 숫자? 무슨 숫잔데?”“220! 숫자를 맞히는 거야.”‘220?’정은과 재석 둘 다 발걸음을 멈췄다.‘이건 좀 궁금한데?’둘은 호기심에 사람들 틈을 헤치고 맨 앞으로 나아갔다.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아주 어린 남자아이였다.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청으로 된 멜빵바지에 반짝거리는 작은 구두, 그리고 눈에 띄는 노란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그 아이 옆에는 휠체어에 앉은 중년 남자가 있었다.깔끔한 차림에 평범한 얼굴이었으나, 아주 단정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아주머니가 아이에게 물었다.“얘야, 이 아저씨는 누구야?”아이는 아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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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8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좋아. 너로 바꾸는 건 어때?”현우는 깜짝 놀란 눈으로 정은을 올려다봤다.“누, 누나가 나를... 원해요?”“응.”“안 돼요! 사람을 사고파는 건 불법이에요!”정은이 웃으며 말했다.“사고파는 게 아니라, 상품이니까 그냥 받는 거지! 돈은 안 들잖아?” 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안 돼요!”“왜?”현우는 또렷한 발음으로, 또렷한 논리를 펼쳤다.“상품을 바꾸려면 가치가 같아야 해요! 근데 저는 인형 세 개보다 훨씬 비싸요! 그러니까 교환 불가예요!”‘얘 뭐야... 너무 논리 정연한 거 아니야? 진짜 어른들보다 똑 부러지네.’정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그렇게 좋으면... 포옹으로 바꿀래요?” 현우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정은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좋아, 그럼 220은...”현우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284.”“우와! 누나 진짜 똑똑하다! 정답이에요!”현우가 손뼉을 짝짝 치며 외쳤다.주변 사람들이 술렁였다.“220이 왜 284야? 저 숫자들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데?”“설마 아무 말 대잔치 아냐?”“설정된 사람 아니야?”“아니겠지, 인형 몇 개 걸고 무슨 설정까지... 게다가 저 누나, 인형도 안 받잖아.”“...”여기저기서 궁금해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어떤 남자가 물었다.“아가씨, 왜 284가 정답이에요? 설명 좀 해줘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말했다.“220이랑 284는 인류가 처음 발견한, 그리고 가장 작은 친화수(amicable numbers)예요.”“친화수...? 그게 뭐예요?”“어떤 두 숫자 a와 b가 있을 때, a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이 b가 되고, b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이 a가 되는 거예요. 그런 관계의 수를 ‘친화수’라고 해요.”“헐, 그런 게 있었어?”“아놔... 난 또 난센스 퀴즈인 줄 알았는데, 수학 문제였네?”“수학 석사인데 친화수 처음 들어본 나, 조용히 뒤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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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9화

“왜 자꾸 머리를 만져요?”아파트 동 앞에 도착하자, 정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재석은 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꼬마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머리카락 몇 가닥은 빠진 것 같아.”“잡아당겼다고요?”정은이 눈을 찡그렸다.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일부러 그런 느낌도 있었어.”정은은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말했다.“그 얘기 들으니까 생각났어요. 그 애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낯익다 했거든요. 얼굴 윤곽이 자꾸 누굴 떠올리게 했어요.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누굴 닮았는지...”“누구?”재석이 긴장된 얼굴로 묻자, 정은은이 천천히 재석을 바라봤다.재석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설마, 나?!”“네! 요즘 유행하는 웹드라마 안 봐요? ‘재벌 2세와 하룻밤, 그리고 남겨진 아이가 수년 후 엄마와 함께 화려하게 컴백’ 이런 거...”“하지 마!”재석이 급히 손사래 쳤다.“일단, 나 재벌 아니거든.”“둘째, 하룻밤 그런 거 한 적 없고. 억지로 끼워 맞춘다면... 너랑은 ‘하룻밤’이 아니라 ‘여러 밤’이었지.”“그리고... 나, 처음이었잖아. 너도 알잖아...”‘아, 이 얘긴 왜 꺼낸 거야...’재석은 끝내 얼굴까지 붉혔다.정은은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그건 인정. 그런 건 연기 못하죠.”재석이 말문이 막혔다.‘이 여자, 너무 잘 알고 있어...’귀여운 농담은 그걸로 끝났다. 둘 다 웃어넘기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집 앞에 도착하자, 재석은 정은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자기야...”정은이 가볍게 재석에게 입을 맞췄다.“여자 친구의 말을 좀 들어요. 오늘 밤은 진짜 안 돼요.”“왜...”재석은 눈망울까지 촉촉하게 만들며 애처롭게 물었다.“내일 실험실 가야 하잖아요. 오늘 좀 정리해 둬야 해요.”자료는 아직 정리도 안 됐고, 이전 실험도 복기해야 했으며, 내일은 다음 단계 실험 계획까지 논의해야 했다.할 일이 너무 많던 정은은 자기 머릿속 정리부터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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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0화

수민은 결국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아... 뭐야 이 기분...’침대에 드러누운 수민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찜찜했다.그리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혼잣말.“나... 당한 거 아니야?”‘분명히 내가 따지려고 전화했는데, 왜 내가 심문당한 거지...?’한편, 전화를 끊은 정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정은은 컴퓨터 앞에 앉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새벽 1시.‘헐, 벌써 이렇게 됐어?’할 일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라, 정은은 곧바로 침대로 향했다. 잠시 후, 이불을 덮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몸에 밴 생체 리듬 덕분이었다.세수하고 간단히 아침을 준비한 정은은, 재석과 집 앞에서 만날 때 주먹밥을 내밀었다.“오늘은 베이컨 주먹밥이랑 따뜻한 우유예요.”재석은 두 손으로 받으며 활짝 웃었다.“오늘도 행복 시작이네.”둘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고 이동했다.서비대학교 앞에 도착하자, 정은이 먼저 내렸다.“몇 걸음 안 돼요. 이쯤이면 내려도 돼요.”“너랑 더 있고 싶어서. 단 1초라도.”재석이 진심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정은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진짜, 이런 데서 설레게 하긴...’...실험실에 도착한 재석은 마침 조미진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교수님, 잘 오셨어요.”“무슨 일 있어?”“네, 채용 공고 나가고 나서 이력서가 많이 들어왔거든요. 태민이랑 1차로 검토했어요.”“조건에 맞는 7개는 교수님 메일로 보냈어요. 괜찮은 분들 몇 명은 따로 표시해 뒀어요. 눈여겨보셔도 될 것 같아요.”“알겠어. 수고했어.”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내내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자, 재석은 핸드폰을 꺼내 이메일을 확인했다. 미진이 말한 ‘표시된’ 서류는 두 개.그중 하나를 무심코 눌렀는데, 익숙한 이름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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