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101 - Chapter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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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1화

도겸이 마침내 본 건,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정은이었다.그녀는 능숙하고 익숙한 동작으로 재석의 목을 감싸 안았다.수백 번, 수천 번은 해본 듯한 자연스러움이었다.그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너무도 환하고 빛났다.‘저런 얼굴, 나한테 보여준 적 있었던가...?’소녀 같은 그 표정이 도겸의 가슴을 콱 찔렀다....집으로 돌아온 재석과 정은은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정은은 브로콜리를 소금만 살짝 뿌려 볶았고, 직접 만든 새우 완자로 국을 끓였다.재석은 찹쌀가루를 입혀 쪄낸 돼지갈비와 간장으로 자작하게 졸인 가지 요리를 내놓았다.세 가지 반찬과 국 하나.딱 두 사람 먹기에 알맞은 양이었다.식사를 마치자, 재석은 말도 없이 식탁과 싱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정은이 손을 대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이젠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런 모습도.할 일이 없어진 정은은 과일을 손질하기로 했다.재석이 마무리할 즈음, 정은도 과일 접시를 완성했다.붉은빛, 주황빛, 그리고 뽀얀 흰빛의 세 가지 과일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접시에 곱게 담겼다.둘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켰다.국제 뉴스가 흘러나왔다.정은이 말했다.“저기 또 전쟁 났나 봐요...”재석이 바로 설명했다.“두 나라, 원래 분쟁이 잦았잖아. 시간문제였지.”“듣기로는 말라리아에 콜레라도 퍼지고 있다던데요.”“응.”“기존 치료제들이 잘 안 든다면서요?”재석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말라리아나 콜레라가 아닐 수도 있어.”‘그럼 당연히 약이 안 듣지.’정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신종 바이러스...라는 말이에요?”“확실하진 않아. 다만, 전쟁터가 된 땅에서 죽음이 자라는 건 너무 쉬워.”재석도 확실하지 않았다.화약이든, 질병이든... 삶을 가차 없이 앗아가는 도구일 뿐이다.정은은 TV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마를 찌푸렸다.그 순간,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미간을 다정히 눌렀다.재석이 다시 정은이를 위로했다. “됐어, 너무 깊이 생각 마.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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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2화

“미안해.”정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을 돌려 걸었다.하지만 도겸은 다시 따라붙었다.“따라오지 마.”정은이 날카롭게 말했다.“알았어. 안 만질게. 절대 안 건드릴게.”도겸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섰지만, 시선은 정은의 얼굴에 고정된 상태였다.그 눈엔 끝도 없이 쌓인 말들이 숨겨져 있었다.‘그만 좀 해... 왜 아직도 저런 눈으로 날 봐...’정은은 가로등 불빛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고, 도겸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랐다.“왜 찾아온 거야?”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 조재석이랑 사귀더라.”도겸의 말은 질문조차 아니었다.“응.”정은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김도, 회피도 없었다.“왜 하필... 그 사람이야?”도겸의 목소리에 억눌린 감정이 섞였다.“내가 좋아하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도겸의 눈빛이 흔들렸다.“왜 하필 조재석이어야 해?”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알잖아. 너희, 그렇게 오래 알아 왔는데도 아무 일 없었잖아... 그땐 아무 감정도 없었잖아.”정은은 한숨처럼 대답했다.“그 사람은 줄곧 날 기다렸어. 그 기다림을, 난 봤고. 그 진심이 전해졌기에 나도 응답한 거야. 그게 전부야.”도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럼 나는?! 나도 기다렸어! 나도 똑같이 간절하게 기다렸다고! 왜 난 안 되는 건데?!”“강도겸,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정은의 눈이 차갑게 식어갔다.‘말도 안 돼... 이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거야...?’“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다 정리했다고. 이제 우리 친구로만 지내자고. 너도 새 여자 만난다며? 지금 와서 이러는 거, 대체 무슨 짓이야?”정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헛소리하지 말고 술 마셨으면 집에 가서 자. 내 앞에서 이러지 마.”그렇게 말한 정은은 망설임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도겸이 정은의 팔을 붙잡아 막아섰다.“아니야!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 우리 헤어진 뒤로, 진짜로 누굴 사귄 적 없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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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3화

“내가 안 어울리면... 너 같은 전남친은 어울리냐?”재석의 한마디에,‘전남친’이라는 단어가 도겸의 목을 막아버렸다. 도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재석은 도겸의 얼굴을 흘끗 훑고 지나가며 시선을 멈췄다. 왼쪽 광대, 손톱에 긁힌 자국에서 피가 맺혀 있었다.“정은이가 다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아니었으면...”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무엇보다 날카롭게 꽂혔다.재석은 느리게 손을 거두며, 또렷하게 말했다.“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그렇게 경고를 남긴 뒤, 정은 곁으로 돌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정은은 재석에게 체중을 맡기듯 가만히 기대었다.“가자. 우리 집에 가야지.”“네.”정은은 조용히 안겨들었다.‘마치... 거센 바람 속을 오래 떠돌다 이제야 닿은 평온한 항구 같아.’도겸은 그 자리에 멈춘 채, 정은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너무도 자연스럽고, 친밀한 그 모습에 참고 있던 감정이 코끝부터 시큰하게 밀려왔다.‘가슴이... 아프다. 차라리 시원하게 베이는 게 낫지.’‘이건 무딘 칼로 천천히 도려내는 고통이야...’그리고, 터졌다.“정은아...!!!”도겸은 여전히 그 옛날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애틋하고, 간절하게.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뒤, 재석은 정은의 손을 들어 살폈다.작은 상처였지만, 눈에 띄는 핏자국에 눈썹이 찌푸려졌다.“소독약 가져올게.”“됐어요, 그냥 스친 건데...”정은은 팔을 돌려 보며 말했다.“하나도 안 아파요.”하지만 재석은 단호했다.“어디에 있어?”정은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옆에 놓인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재석은 곧장 그곳으로 가서 구급함을 꺼냈고, 정은은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재석은 한 치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상처에 약을 발랐다.그리고 고개를 숙였을 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었다. “걱정 마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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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4화

재석은 조금 전 도겸에게 한 대 제대로 날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그냥 한 방이라도 날릴걸... 생각할수록 속이 뒤집힌다.’정은은 조용히 옷자락을 내리고 재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근데... 내 요구르트는요?”재석은 순간 멍해졌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기.”정은은 그걸 받아선 몇 번 툭툭 흔든 후, 뚜껑을 열고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미녀 구출하느라 고생했잖아요. 한 입, 상 줘야죠.”“한 입? 한 병도 아니고?”정은은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그럼 난 뭐 마셔요...”사실 그가 간 편의점에는 블루베리 맛 요구르트가 딱 한 병 남아 있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병만 사 온 거였다.“진짜... 쪼잔해.”재석은 손끝으로 살짝 정은의 콧등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하는 말은 투덜거리는 듯했으나, 어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이 여자는 참...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게 해.’“그럼 안 마실 거죠? 내가 다 마실게요?” 정은은 혀를 쏙 내밀고 요구르트를 한 입 마셨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 재석이 정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여자의 입술을 사로잡았다.입술이 맞닿고, 남자의 혀가 재빠르게 정은의 치아 사이를 지나며 남은 블루베리 맛을 훑었다.입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재석이 숨을 고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안 마신대?”“뭐라고요...?”정은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재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블루베리 맛 괜찮네. 다음에도 그걸로 사자.”‘이 사람... 가끔은 진짜 반칙이다.’그날 이후, 도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정말로 안 온 걸 수도 있고, 왔지만 더는 정은 앞에 나서지 않은 걸 수도 있다.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방학도 끝을 향해 다가왔다.정은은 정식으로 대학원 2학년이 되었다.그녀의 일상은 다시 익숙한 패턴으로 돌아갔다.집, 학교, 그리고 실험실.단조롭지만 바빴고, 바쁘지만 또 충실했다.달라진 게 있다면... 전공 수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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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5화

“그럼... 이 일을 학교 측에서 밀어붙인 거야?”“그건 아닐 수도. 조재석 교수님 본인이 연구에 집중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솔직히 말하면, 연구는 실적이 남잖아. 근데 강의는 뭐가 남아? 하나같이 교수님 얼굴 보려고 줄 서는 꽃사슴들뿐인데, 흐흐...”“야, 너네 뭘 몰라서 그래. 연구는 그냥 핑계야. 이건... 내부 사정이 꽤 크다고.”“응? 내부 사정? 너 그걸 어떻게 알아?”“야, 가까이 와봐. 진짜 빵 터질 얘기야... 내가 말해줄게. 있잖아, 그게...”“헐, 진짜야?! 장난치지 마!”“사진까지 떴어. 믿을 수밖에 없지, 이건.”“세상에... 이거 거의 드라마급인데?”“야야, 지금 학교 커뮤니티 봐봐. 방금 또 새 글 올라왔어. 폭.탄.급.”“...”개강 첫날부터, 서비대학교 커뮤니티 서버는 게시물 그대로 ‘터졌다’.[조재석 교수, 강의 중단의 진짜 이유는? 사랑이었다?!]이라는 제목의 글 하나가 올라온 지 2시간 만에 추천 수 1000을 넘기고, 메인 페이지 최상단에 박제되었다.‘HOT’ 태그는 물론, 댓글 창도 실시간으로 폭주 중.글 첫머리에 올라온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야간 캠퍼스, 정문이 아닌 외진 쪽문을 나서는 두 사람.조재석 교수와 한 여성.조명은 어두웠지만, 서로 손을 잡은 모습, 그리고 재석의 옆얼굴에 걸린 미소.딱 봐도, 이건 그냥 교수님과 제자 관계 아니었다.커뮤니티는 곧바로 난리 났고, 익명 댓글은 폭풍처럼 쏟아졌다.[미쳤다! 진짜! 조재석 교수님이 설마 연애 중?!][조재석 교수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근데 여자는 누구야? 제자? 아니겠지??][사진 찍은 사람은 누구야... 파파라치냐고... 이러다 진짜 강단 복귀 못 하는 거 아니야...?][...]그날 오후, 학생 식당과 카페, 심지어 도서관 복도까지... 온 학교가 ‘조재석 교수님’으로 들끓었다.사진 각도는 아주 기가 막혔다.재석의 옆얼굴은 분명히 보이는데, 여자의 얼굴은 각도와 머리카락, 그림자까지 겹쳐 완벽하게 가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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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6화

글이 처음 올라왔을 땐, 댓글 분위기가 꽤 뒤틀려 있었다.역시 익명 커뮤니티는 못 말렸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댓글 창엔 점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끝내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 댓글 대부분이 축하와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어쩌면 당연했다.소정은은 희귀했고, 조재석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이 둘이 붙으면?그건 단 하나의 결론.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무한 실험실.민지는 핸드폰을 끌어안고, 불난 듯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손가락이 타는 듯 아파지자, 결국 음성 입력으로 전환.‘헐, 이거 꿀인데?’서준이 옆에서 슬쩍 다가왔다.“뭐 해? 왜 아까부터 핸드폰만 보고 있어?”민지는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중대한 임무 수행 중.”민지는 화면을 쓱 들어 보였다.“봐봐. 내 유도 덕에 댓글 흐름 완전히 정리됐어.”서준이 집중해서 들여다보았다.[윗댓 적당히 해라. 조재석 교수님이랑 소정은 씨는 그냥 연애하는 거잖아. 그걸 뭔 공작처럼 몰고 가냐? 상상 자제 좀.][교칙 운운하면서 몰아가려던 사람들 어쩌냐? 이미 교수님 그만두신 건 알고 있음? 칼같이 선 긋고 나간 사람임.][조재석 X 소정은 커플 지지합니다!!][진짜 무슨 드라마 같은 사랑이네... 부럽다!][...]서준은 말을 잃었다.“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냐?”민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너 덕질 안 해봤구나? 이건 기본이야. ‘댓글 여론 컨트롤’이 팬의 예의라고.”“너... 덕질 해? 누구?”서준이 별생각 없이 물었고, 민지의 눈동자가 별로 가득 찼다.“일단 장성진 배우, 그리고 재준, 해이로, 구태우... 아! 그리고 지훈이!”서준이 살짝 찡그렸다.“전부 남자네?”“당연하지! 각자 매력이 다르다고. 예를 들어 장성진은 완전 강아지상. 그 눈, 완전 댕댕이 같고 귀엽고...”민지는 갑자기 말이 뚝 끊겼다.“왜 멈춰?”서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그게... 지금 네 표정이 좀... 무섭거든.”“그래?”서준은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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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7화

정확히 학교의 약점을 찔렀다.그제야 송영한 총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실험실이 학교 안에 있는 한, 재석이 서비대학교 소속이든 아니든 성과는 학교 이름으로 남는다.하지만 실험실이 철수된다면?그 순간부터 조재석 팀은 서비대와 완전히 무관한 독립체가 된다.송영한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이 인간... 진짜로 그렇게 할 놈이야.’협상이 틀어지면, 망설임 없이 학교를 완전히 떠날 사람이었다.“여자 하나 때문에, 이 정도까지 하는 것도 참... 대단하군!”재석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전,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뿐입니다.”“아주 내가 돌아버리길 바라는구먼!”송영한이 거의 소리치듯 말했고, 재석은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총장님,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건강에 해롭습니다.”“고맙군, 진짜 고마워.”‘이젠 누가 누구한테 조언하는 거야, 어?’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부총장 한중기가 들어섰다.“총장님, 찾아냈습니다. 글 올린 학생, 대학원 2학년생입니다. 방금 불러서 얘기했는데, 본인이 시인했어요.”재석이 물었다.“진짜 학생이었습니까?”“그래, 조 교수가 우려한 그 방향도 확인했지만, 외부 개입은 없었어. 그냥 학생 개인의 행동이야.”한중기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마침 그 학생이 여름방학 내내 실험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조 교수가 소정은 학생이랑 손잡고 정문이 아닌 쪽문으로 나가는 걸 봤어. 그걸 찍은 거지.”‘정은이가 도시락 들고 실험실에 왔던 그날이구나.’재석은 문득 그 밤을 떠올렸다.“조 교수, 이번 개강 첫날, 주변에서 조 교수의 강의 중단 얘기를 듣고... 혼자만 아는 이 ‘대박 정보’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다 같이 알고 싶어서 터뜨린 것 같아.” 한중기는 계속 설명했다.재석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하긴, 요즘 학생들 반응이 빠르긴 하지...’송영한이 물었다.“지금 여론은 어떤가?”한중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부분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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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8화

“여긴 어떻게 왔어요?”정은이 회의실에서 남진일 교수와 함께 나오는 순간, 복도 끝에 서 있는 재석이 눈에 들어왔다.재석은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왜, 오면 안 돼?”장난기 어린, 의미심장한 웃음.“그게 아니고... 나 오늘 차 가지고 왔는데요?”‘굳이 데리러 안 와도 됐는데...’재석은 짧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래서 택시 타고 왔어.”“그럼 당신이 이겼네요. 또 내가 할 말없게 만들었어요...”정은은 속으로 혀를 찼다.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진일은 처음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반짝였다.‘오...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 기억해 둬야지.’“언니! 벌써 퇴근해요?”민지가 고글을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정은은 실험대를 정리 중이었고, 그 옆에 재석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응, 민지 너희는?”민지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으며 절규했다.“못 가요... 오늘 데이터 아직 안 끝났단 말이에요...”‘진짜, 나도 정은 언니처럼 연애하면서 일 효율 유지하는 법 좀 배우고 싶다...’민지는 요즘 진심으로 궁금했다.‘어떻게 연애를 해도 아침에 말짱하게 출근할 수 있지...?’연애 전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큰일도 아니었다.밤에 푹 자고 일어나면 됐으니까.그런데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 밤마다 서준의 체력이 광폭 모드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도대체 저 마른 남자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야...?’민지는 항상 속으로 이 의심을 품고 있었다.서준은 밤에 에너지 분출을 끝내고도, 샤워하고 빨래 돌리고, 집 청소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는 여전히 반듯하게 일어나 민지를 품에 안고 한 번 더 체력을 쓰고, 아침밥을 차리고, 나가서 조깅까지 했다.집으로 돌아올 땐 피부에 윤기까지 도는 그야말로 ‘빛나는 남자’.그에 반해 민지는 움직이지 않았다.웅얼거리며 자거나, 자면서 웅얼거리거나.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을 땐 눈 감고 기도부터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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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9화

민지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서준은 민지의 실험대 위를 훑어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말해봐. 뭐가 얼마나 남았어?”그 말에 민지의 눈이 번쩍 빛났다.“그 말... 그 말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서준은 무표정하게 받아쳤다.“필요 없다면 안 도와줘도 되는데?”“아니야 아니야! 완전 필요해!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전부 데이터 부족이야!”‘이런 날도 있어야지.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무조건 붙잡고 써야 해.’민지는 재빨리 목록을 정리해 보여줬다.서준은 슬쩍 들여다보다가, 점점 미간을 좁히더니 물었다.“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다고? 오늘 하루 종일 뭐 한 거야?”민지는 당당했다.“오전엔 커뮤니티 여론 조절하느라 바빴고,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거든?”“그래도 오후 내내 했으면 이 정도는 끝냈어야지.”“어젯밤에 못 자서 계속 졸았단 말이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본인이 가장 잘 알잖아?”서준은 말문이 막혔다.‘그래, 내 탓 맞지... 뭐.’결국 조용히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일하자.”그 말을 들은 민지는 잽싸게 또 하나 요구를 더 했다.“그 대신 오늘 밤엔 너희 집으로 가. 각자 자기 집에서 자기.”“응.”서준은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또 보니까... 하루 정도는 양보해 줄게.’...한편, 재석과 정은은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 전 사둔 식재료가 아직 남아 있었다.서로 눈을 마주친 두 사람.굳이 말 안 해도 동시에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금세 반찬 세 가지와 국 한 가지가 상에 차려졌다.두 사람이 각자 두 가지씩 만들었는데, 모두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식사 중, 자연스레 화제는 커뮤니티 글로 옮겨갔다.재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총장님이 직접 확인했어. 실제로 학생이 올린 글이고, 뒤에 다른 누가 있는 건 아니래.”정은은 그 말을 듣고도, 정작 폭로자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신경 쓴 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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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0화

정은은 통통한 오리에서 뼈를 바르고, 등 쪽을 조심스레 가른 뒤 그 안에 재료들을 채워 넣고 큰 사기그릇에 엎어 넣은 채로 쪘다.하지만 도겸은 까다로웠다. 훈제 햄 특유의 향을 싫어했고, 닭똥집 특유의 비릿함도 먹는 것을 꺼렸다.그래서 정은은 햄 대신 신선한 소갈빗살을 넣고, 닭똥집 대신 잘게 찢은 닭가슴살을 넣었다.그렇게 바꿔 만든 오리찜, 그게 바로 도겸이 유일하게 ‘맛있다’고 말했던 버전이었다.지금 눈앞에 놓인 이 오리찜이 아무리 정통이고, 아무리 유명한 셰프가 직접 만든 거라고 해도 정은이 해줬던 그 맛... 그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강서정이 피식 웃었다.“엄마 같으면 그런 식으로 정성 낭비 안 해.”“어떤 사람은 말이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묵묵히 먹으라고 해. 먼저 챙겨주면 괜히 까다롭게 굴고, ‘입에 안 맞다’, ‘싫다’ 등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반년 넘는 시간 동안, 서정은 나름의 회복기를 거쳤다.한때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던 그녀는,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자신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석사 학위 하나 없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스펙 하나쯤은 없어도 돼.’‘왜냐고? 난 예쁘고, 돈 많고, 배경도 탄탄하니까! 소정은한테 밀려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생 자체가 끝나는 건 아니잖아?’ ‘엄마가 너무 학벌에 집착해서 나도 같이 휘말린 걸지도 몰라. 아니면... 정은한테 진 게 그냥... 너무 싫었을지도.’이유가 뭐든, 이제는 상관없었다.중요한 건... 학위가 없어도, 자신의 앞날이 여전히 반짝인다는 사실이었다.딸이 다시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기 시작하니 서영숙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서영숙의 유일한 고민이 있다면... 바로 무기력한 큰아들, 도겸이었다.“아, 맞다. 너희 일재 삼촌 딸, 유란이가 내일 입국이래. 삼촌은 출장 중이라 공항에 못 간다는데... 네가 대신 마중 좀 나가 줄래?”도겸의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사람 마중은 기사님이 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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