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441 - Chapitre 1450

1465

제1441화

22년 전, 리아의 아버지 진균하가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남겨진 황정애는 어린 리아를 홀로 키워야 했다.1년 뒤, 황정애는 R국에서 온 재외 교포 유순구와 재혼했다.그해, 황정애와 유순구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고 이름은 유하린이라 지었다.하린은 리아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둘의 우애에는 전혀 문제없었다.황정애는 벤처 투자 업계에서 ‘여장군’으로 불릴 만큼 일에 매달렸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건 예사였다. 한 번 출장이라도 잡히면 보름은 기본이었다.그 사이 유순구는 무역업을 하며 황정애라는 ‘금고’를 등에 업고 순풍에 돛 단 듯 장사를 이어갔다.커다란 집에는 가사도우미와 보모가 상주했지만, 결국 자매 둘만 남겨지는 날이 잦았다.그 공백 속에서 리아는 단순한 언니가 아니라 거의 엄마 같은 존재였다.그래서인지 하린이 처음 입을 뗀 말도 ‘엄마’도, ‘아빠’도 아닌, 맑고 또렷한 목소리의 ‘언니’였다.리아는 이복동생에게 질투나 경쟁심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 깊숙이 동생을 사랑하고 아꼈다.보통의 가족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가정이었다.부모의 빈자리가 아쉽긴 했지만, 생활은 넉넉했고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다.그러나 변곡점은 아주 평범한 저녁에 찾아왔다.퇴근하던 황정애의 승용차가 대형 화물차와 정면충돌한 것이다.차량은 심하게 파손되었고, 황정애는 과다 출혈로 현장에서 의식을 잃었다.긴급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고위 마비와 장기 손상, 합병증이 연이어 덮쳤다.황정애는 병원 신세를 지며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황정애가 버팀목이 되지 못하자, 유순구의 사업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투자 실패로 회사 자금은 바닥났고, 거대한 빚만 남았다.유순구는 황정애 몰래 황정애의 혼전 재산까지 끌어다 빚을 메우려 했다.하지만 정애가 알게 됐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병원비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둘이 병원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던 그날, 리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잠깐 따뜻한 물을 뜨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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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2화

그러나 현실은 리아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유학을 떠난 직후,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설상가상, 기대했던 하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리아가 애써 찾아간 그 대학 명단에도, 또 다른 대학의 학생 기록에도, M국 전역 최근 몇 년간의 유학생 명단 어디에도 ‘유하린’은 존재하지 않았다.‘말도 안 돼... 분명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재회는 꿈처럼 멀어졌다.하지만 리아는 주저앉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사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하린의 흔적을 쫓았다.몇 해가 흐른 뒤, 리아는 결국 창업에 성공했다.그녀의 손에 쥔 건 이제 막대한 재산과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지위였다.그 힘을 바탕으로 리아는 사설탐정을 고용하고, 비밀조직을 통해 수소문했다.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늘 허망했다.하린의 행방은 그림자처럼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R국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하린이 해외 유학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왔으며, 곧 국제학술대회 바이오 유닛 분야 경시대회에 대표로 참가한다는 것이었다....“호주?”유순구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대답에 리아는 미간을 좁혔다.“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똑바로 말해.”유순구의 시선은 리아의 손에 들린 몽둥이에 고정됐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이번만큼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하린은... 본가에서 직접 데려간 거야. 그쪽에서 키우고, 그쪽에서 길렀어. 나는... 명목상 아버지일 뿐, 목적지는 정말 알 수가 없었어. 감히 묻지도 못했고.”“묻지도 못했다?”리아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응... 본가에서 처음부터 못을 박았어. 앞으로 나에게 하린이라는 자식은 없는 걸로 치라고...”리아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대가로 뭘 받았지? 본가에서 넌 뭘 얻었느냐고!”유순구의 어깨가 굳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리아의 손목이 살짝 들렸다.“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계, 계열사를 하나 넘겨줬어. 그리고... 현금, 60억.”순간 리아의 입술에서 냉소가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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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3화

창고 안에 남자의 울부짖는 비명이 메아리쳤다.리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남은 뒤처리는 뒤에 남은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수환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리아...”남자의 눈빛은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리아는 손을 들어 보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괜찮아.”“우린 이렇게 오래 알았는데... 너한테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네.”“‘변’은 보육원 원장님 성이야. 원장님은 참 따뜻한 분이셨지. 그곳의 모든 아이가 원장님 성을 따랐어. 나도 그중 하나였고.”그러나 이름만큼은, 리아가 직접 요구해 지은 것이었다.리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리아’라는 이름만큼은 지우지 않았어. 나한테 늘 상기시켜야 했으니까. 내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지.”수환은 멀리 부두를 바라보았다. 방금 떠난 배가 검은 바다 위를 갈라내며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이제 유순구는 다시는 세상 위로 떠오르지 못하리라.“그럼... 이제 축하해야겠네. 원수를 갚았잖아.”리아는 옆에 선 수환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고마워, 친구야.”그러고는 몸을 돌려 성큼 걸음을 옮겼다.“나 저녁 비행기 타야 해서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조만간 J시에 오면 내가 제대로 대접할게.”수환은 리아의 손길이 스쳐 간 어깨를 흘끗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를 올렸다.“좋아. 며칠 안에 꼭 찾아갈게.”그 대답에 돌아온 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리아가 흔드는 손짓뿐이었다....밤 10시.J시에 도착한 리아는 미리 불러둔 차량을 찾기 위해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낯익은 롤스로이스, 차량 번호를 바로 확인했다.리아는 한 치 의심도 없이 뒷문을 열어 타버렸다.가방을 옆자리에 내려두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출발해 주세요.”하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리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강 기사님, 출발해요.”여전히 정적.‘뭐지...?’불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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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4화

지언과 리아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였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집 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성이 터져 나왔다.“대체 언제까지 난리 칠 거야?!”거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조기봉은 뒤엉킨 집안을 둘러보며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강서원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조기봉이 아끼던 다구 세트의 주전자. 순간, 조기봉이 놀라서 손을 뻗기도 전에.쾅!날카로운 파편 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찻물이 바닥을 적셨다.조기봉의 눈이 홱 뒤집혔다.“또 왜 난동을 부리는 거야?!”강서원은 이를 악물며 쏟아냈다.“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당신은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집에서 여유롭게 차나 마시고 있었지? 이제는 가장 흉내조차 내기 싫어진 거야?”“의사가 분명히 얘기했잖아. 당신 상태 안정적이라고. 입원 필요 없다고. 그런데도 억지로 병실에 눌러앉은 게 누군데? 전화도 했고, 달래기도 했어.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직접 끌어내야 속이 시원했어?”조기봉은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이 좋다면 병원이든, 달나라든, 어디 가서 살아도 돼. 난 상관 안 해. 근데, 더 뭘 어쩌라는 거야?”강서원은 씁쓸하게 웃었다.“봐, 이게 바로 답이네. 당신 눈에 난 그깟 주전자보다도 못한 존재야.”“그래, 인정해. 그 사람 죽은 이후로, 당신 마음도 따라 죽은 거 맞지?”조기봉의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답답함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여보, 우리 나이 합치면 백 살이 넘잖아. 아직도 젊은 연인인 줄 알아? 현실 좀 똑바로 보자.”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단호했다.“질투, 추궁, 사랑 타령... 그런 거 이제 그만해. 나한텐 그럴 힘도, 의지도 없어. 이 결혼 생활...”조기봉은 말끝을 잠시 삼켰다가, 낮게 내뱉었다.“할 만하면 하고, 못 하겠으면 그만두자.”강서원의 어깨가 흔들렸다. 입술은 하얗게 떨렸다.“내가 오늘 이렇게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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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5화

리아는 강서원의 흔들림 속에 깔린 ‘억울함과 부당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는, 강서원은 그저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그 ‘이들’ 안에는 조기봉은 물론, 아들 지언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어머니.”지언이 앞으로 나섰다.“생각이 정리되셨다니 다행이에요. 내일 제가 비서 보내서 퇴원 수속 밟게 하고, 짐도 다 정리해서 집으로 가져오겠습니다.”강서원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내가 언제... 퇴원하겠다고 했니?”지언은 곧장 말을 끊었다.“어머니, 어떤 말이든 곱씹어보고 하시는 게 좋아요.”그 말에 강서원은 무의식적으로 지언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 끝에는 말없이 앉아 있는 조기봉이었다.순간,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반발심이 희미하게 가라앉았다.지언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셨지만 앞으로 치료는 계속 필요할 겁니다. 아버지께서 신경 좀 더 써주셔야겠습니다.”조기봉은 미간을 좁히며 강서원을 바라봤다.“나...”그러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 미묘한 ‘인상’이 강서원의 눈에 띄었다.조기봉의 단순한 찡그림이었지만... 강서원은 그것을 ‘불편하다’, ‘보기 싫다’로 단번에 받아들였다.그 순간, 그녀는 겨우 누그러졌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됐어! 네 아버지 그 죽을상, 내가 눈에 거슬리나 보지? 그렇다면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낫겠다!”말을 끝내자마자 강서원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조기봉은 아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두 눈이 공허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흔들렸던 감정도 금세 평온 속으로 묻혀갔다.‘또 시작이군...’‘그래... 이제는 익숙하지.’...강서원은 차에 올라탔다.“사모님, 출발하시겠습니까?”운전기사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강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돌린 채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본가의 대문, 그 너머.그러나 끝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조기봉도, 지언도.‘남편도, 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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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6화

놀란 지언은 순간 멍해지더니 되묻듯 말했다.“아니면 어쩌라고요?”“가요.”...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더워졌고, 녹음이 점점 짙어졌다.하지만 정은은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느라 계절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어느 날 아침, 문을 나서던 순간, 불어오는 뜨거운 열기에 정은은 비로소 여름이 이미 와 있음을 실감했다. 잠깐 걸었을 뿐인데 금세 이마에 땀이 맺혔다.요즘 남진일은 실험실에 없었다. 탁재민을 데리고 학술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평소라면 그런 자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이 아니지만, 이번에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재민에게 견문을 넓히게 해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민지와 서준은 남아서 논문 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해가 기울 무렵, 정은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실험을 마치고 실험대를 정리한 뒤 가운을 벗었다.문을 나서자마자 정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한 달 새 세 번째로 불쑥 나타난 강도겸.정은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도겸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가는 정은을 보며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정은아.”그가 따라붙었다.“마지막으로 말할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도겸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정은이 냉정하게 잘랐다.“이유가 뭐가 됐든 상관없어. 다시는 오지 마.”도겸은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정은은 비웃듯 발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기회? 애초에 없었어. 지금이라고 다를 게 있겠어?”‘후회된다. 가슴 아프고...’ 도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정은은 이미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 버렸다.멀어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도겸은 다른 차량의 경적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리고 천천히 자기 차로 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앉았다.의자에 몸을 던지듯 기대어, 두 눈을 감았다.얼굴에는 고통과 체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정은아... 어떻게 해야 날 용서해 줄 거야.’‘나더러 포기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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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7화

미진은 정은을 한번 흘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태민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조 교수님은? 왜 안 오셨어?”“글쎄요. 어제 밤늦게까지 실험실에서 일하시던데... 혹시 늦잠 주무실까요?”말이 끝나자마자, 문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바쁘게 들어섰다.“죄송합니다. 늦었네요.”재석이었다.어깨가 넓고 허리가 곧게 잡힌 정장 차림, 그 모습만으로도 진욱과 미연 부부의 체면을 세워주는 듯했다.“교수님, 여기 앉으세요!”미진은 얼른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그 자리는 하필 정은 바로 옆이었다.재석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곤 자리에 앉았다.정은도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이런 자리에 전 교수님이 이 사람을 안 부를 리가 없지.’ ‘그리고 전 교수님 일이라면, 이 사람도 아무리 바빠도 빠지진 않을 거야.’‘결국 우리가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하지만... 재석이 옆에 앉는 순간, 은은하게 풍기는 익숙한 향기에 정은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무대에서 진욱이 마이크를 잡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저희 부부의 자리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아는 사이니까 굳이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예전에 저희는 작은 오해로 갈라져서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다행히 인연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제가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이렇게 미연이의 손을 다시 잡게 됐습니다.”말을 마치며 진욱은 미연의 손목을 잡아 높이 들어 올리더니, 환하게 웃었다.“앞으로는 이 손 절대로 놓지 않을 겁니다.”솔직하고 꾸밈없는 말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전 교수님, 이제 조심하세요! 미연 누나 인기 많거든요!”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그럼 그럼! 누가 뺏으려 들면 바로 쏴버릴 거니까!”진욱이 받아치며 손가락 총을 겨누자 웃음소리가 한층 커졌다.마이크를 이어받은 미연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짧게 말했다.“만남은 인연의 서막이고, 재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다음 장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정성껏 써 내려가겠습니다.”정은은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향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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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8화

“전 교수님, 이렇게까지 하시면 제가 좀 부담스러운데요.”정은이 웃으며 말했다.잔을 든 진욱이 눈을 반짝였다.“봐라, 우리 벌써 몇 년을 같이 지냈잖아. 자네가 처음 실험실에 들어왔을 때, 사실 속으로 그랬다. ‘저런 어린애가 뭘 할 수 있을까?’ 이 말,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맞아요.”미연이 서둘러 말을 보탰다.“저도 정은 씨 처음 봤을 때도 놀랐어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어떻게 학문의 길을 걸을까 싶었죠. 그래서 제가 전 교수님한테 뭐라고 했잖아요.”“아니에요, 전혀요.”정은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진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잔을 높이 들었다.“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요. 인생에서 진짜 친구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정은이 너는 내 ‘어린 선생님’이지 않냐. 이 잔, 내가 원샷한다!”진욱은 호탕하게 잔을 비웠다.정은도 체면상 진욱을 따라 잔을 비워야 했다. 잔을 들어 고개를 젖히고 단숨에 들이켰다.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번엔 미연이 잔을 들고 다가왔다.“정은 씨, 저도 한잔해야죠.”정은은 다시 잔을 비웠다. 자리에 앉고 나니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다행히 아까 그녀는 음식을 조금 먹어둬서 빈속은 아니었지만,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너무 빨리 마셨나 봐... 몸이 뜨겁고 답답해.’몇 입 더 뜨고 나자 정은이 더 이상 먹히지도 않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는 배부르네요. 다들 천천히 드세요. 전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호텔 정원.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정은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얼굴에 맺힌 열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안녕하세요.”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은 고개를 돌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저... 저 말씀이세요?”“네. 안녕하세요, 저는 서진환이라고 합니다. 신부 사촌 동생이에요.”흰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무테안경을 낀 남자.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균형 잡힌 체격과 단정한 인상에서 사회적 엘리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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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9화

손을 거두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도 동시에 흩어졌다.서진환은 정은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기회 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네.”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은은 시선을 거두었다.그런데 다음 순간, 바로 앞에서 마주한 건 재석의 깊고 그윽한 눈이었다.순간 정은의 몸이 굳었다.“서진환이랑... 친한 사이야?”재석이 낮게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늘 처음 봤어요.”“그럼 방금 알게 된 거네?”“응. 교수님도 방금 알게 됐잖아요.”입술을 달싹이다 멈춘 재석.정은은 목이 조금 타는 듯해 작은 숨을 내쉬었다.“안으로 들어가죠.”“정은아...”재석이 부드럽게 불렀다.정은의 발걸음이 멈췄다.재석은 조심스럽게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그 사람이... 다시 연락하자고 하던데, 정말 연락할 거야?”정은은 재석의 노골적인 질투와, 차마 눈을 들지 못하는 모습에 가슴 한쪽이 불시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왜 이렇게... 서늘하면서도 아픈 기분이지.’“안 해요.”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재석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근데... 너... 그 사람한테 웃어줬잖아.”“그걸 봤어요?”“응...”“거절하기 전에 한번 웃는 게 예의잖아요. 속담에도 있잖아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재석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거절했다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연락처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솔직하게 말했죠. 공부가 바빠서 당분간은 연애 생각 없다고.”순간, 재석의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그러나 곧 그 설렘은 다시 가라앉았다.‘연애 생각이 없는 거라면... 그 속엔 나도 포함되는 거잖아.’다른 남자에게 기회가 없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없는 거였다.“새집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재석은 원래 ‘다시 돌아올 수 없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자 평범한 말로 바뀌어 나왔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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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0화

휴게실 안은 조명이 약간 어둑했다.재석의 눈빛엔 술기운이 옅게 번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선명치 않은 아련함이 서려 있었다.정은이 무심코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서 재석의 시선과 마주쳤다.재석이 다가와 휴지를 집어 들었다.“내가 해줄게.”정은은 곧장 몸을 돌려 피했다.“아니에요. 다 됐어요.”그녀는 손에 쥔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을 이었다.“이제 전 내려가 볼게요.”끝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뜨겁고 큰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그리고 이어진 건,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입맞춤이었다.정은은 반사적으로 밀쳐냈다.재석의 입술은 스치듯 목덜미를 스쳐 갔고, 결국 허공에 머물렀다.재석은 쓴웃음을 흘렸다.“정은아.”정은의 눈빛이 단단히 굳어졌다.“조 교수님, 우리 둘 다 사회적으로 체면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미 끝났으면... 깔끔하게 끝내야죠. 이도 저도 아닌 채 얽히는 건, 서로한테 좋을 게 없어요.”그 말은 사실, 정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했다.그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움직이지 못한 채, 한참 동안.그리고 입술 사이로 자신을 비웃는 듯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체면...? 하...”‘내게 정말 그게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겠지.’‘설사 와도, 뒤따라 올라오지 않았을 거고.’‘올라왔다 해도...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재석이? 아직도 여기 있었어?”손님을 다 배웅하고 올라온 진욱이, 2층에서 내려오는 재석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재석은 짧게, 낮게 대답했다.“응...”진욱은 그의 뒤를 흘끗 보며 말을 잇다가...“정은이는? 너희...”그 순간, 옆에 있던 미연이 팔을 붙잡으며 말을 끊었다.“조 교수님, 괜찮으세요? 제가 기사님 불러 드릴까요?”그녀는 정은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재석은 손을 내저었다.“아니요, 괜찮습니다.”말을 남기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낯선 공기와 취기가 섞인 로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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