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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1화

그 시각, 이육진은 소우연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며 버텨왔으나, 이제는 이육진이 먼저 이 침묵을 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곳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커다란 잘못이었다는 의구심을 끝내 떨쳐낼 수 없을 터였다.용강한은 탁자 위에 놓인 땅콩 하나를 집어 누렁이에게 툭 던져주었다. “먹어라.”누렁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이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야무지게 땅콩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얌전히 구는 누렁이를 바라보는 용강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고요했다. 환상 속에 잠겨 있을 때보다 훨씬 평온해 보이는 그 얼굴은, 마치 진정으로 세상만사와 담을 쌓고 오로지 성현의 가르침에만 정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다음 날.소우연과 이육진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의 모습은 예전처럼 자연스러웠다. 다만 객줏집 직원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을 때, 두 사람은 그제야 이진과 주익선이 이미 일찍 침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우연은 진이가 자신들을 배려해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임을 금세 알아챘다.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밖으로 나갔던 이육진과 용강한이 누렁이를 앞세우고 차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조금 전 직원이 말하기를, 진이와 익선이가 먼저 침주로 출발했다 하더군요.”이육진과 소우연은 이미 소식을 나눈 터라, 이 말은 자연스레 용강한을 향한 것이었다. 용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들은 성미가 급하니, 우리도 식사를 마치는 대로 서둘러야겠구나. 가는 길에 무슨 변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이육진이 짧게 답했다. 식사를 마친 뒤, 진휘는 이미 주인에게서 받아온 비상식량을 마차에 모두 실어두고 출발 채비를 끝마친 상태였다.계주 관저.사방에 초가집이 늘어선 이 척박한 땅 위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합원들이 정교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경성의 왕부나 고관들의 저택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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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2화

“그들이 죽었다 한들 무엇이 걱정입니까. 그들의 핏줄이 남아 있고 상운국 또한 건재하지요. 게다가 용맥이 이곳 영남에 있으니, 오라버니는 반드시 대업을 이루실 것입니다!”임설이 소항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항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임설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뇌리에는 그녀의 몸 곳곳에 남은 울퉁불퉁한 상처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거머리 구덩이를 지나던 그날, 거머리 떼에 온몸을 뜯겼던 참혹한 흔적이었다.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소항 자신 또한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길이 새긴 훈장이자 증표였다.“다만, 경장명 그자는 별 쓸모가 없는 듯하구나. 그의 부친인 경성세마저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이제 상경에는 우리 손발이 되어줄 이가 없지 않으냐.”임설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굴의 흉터만 없었더라면 한때 얼마나 빼어난 미인이었을지 짐작게 하는 표정이었다. 어느덧 스물여섯 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원한은 단 한 순간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다.임설이 고개를 들어 소항을 응시했다. “경성세를 직접 이용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일가가 여전히 경성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경장명은 우리 명을 따를 수밖에 없지요. 결국 때가 되면 경성세 일가 모두가 우리를 위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설아, 네 말이 옳다.”소항이 깊은 숨을 내뱉자, 임설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올해 겨울 눈이 세 겹이나 쌓였으니, 내년에는 분명 풍년이 들겠지요.”“그래, 풍년이겠구나.”“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황량한 계주가 어느덧 계주부를 이룰 만큼 번성할 줄을요. 이제 때만 무르익으면…”때가 되면 반드시 중원으로 진격하여 이육진과 소우연의 후손들을 모조리 끌어내리리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임설이 덧붙였다. “다만 진청산의 예언이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네요.”“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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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3화

그 무렵, 소항은 어느덧 영남 일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수하에는 이미 만 명에 달하는 호위군이 포진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기세와 규모로 발전해 나간다면 훗날 군을 몰아 북상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두 사람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소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년에 진 도사께서 남기신 예언 주머니들이 하나둘씩 들어맞더니, 이제 마지막 하나만이 남았습니다.”경장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그는 분명 진청산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이번 생에서는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그런데 사 년여 전, 진청산이 홀연히 그의 꿈에 나타났고, 심지어 직접 영남까지 찾아와 소항 일족에게 몇 가지 예언을 건넸다. 그러면서 훗날 소항이 거병할 때 그를 보필하라며 은근히 유혹해 왔던 것이다.경성을 멀리 떠나온 처지에 어찌 다시 그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여야 한단 말인가.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진청산이 예언한 '여황제', ‘태상황과 태후의 실종’, ‘섭정왕의 집권’ 등이 마치 짜 맞춘 듯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갔다.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청산이 소항에게 남긴 한 폭의 그림과 화본이었다. 그 화본 속에는 소우연, 이육진, 용강한, 이영, 검오, 심초운 등이 수선의 땅에서 얽히고설키는 온갖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처음에는 그저 흔한 화본이려니 치부했다. 그러나 진청산이 남긴 산수화 속 풍경이 계절의 변화와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진청산이 맨손으로 화본 속 세상을 실제로 창조해 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 경이로움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진청산이 강력히 추천하기도 했거니와, 경장명의 부친이 경성의 승상이었기에 소항은 그가 소씨 가문의 거병에 큰 힘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현재 경장명의 유일한 아들 강이는 이미 소항 아들의 시강관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들을 좀처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이게 어찌 시강관이란 말인가. 명백한 인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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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4화

소항은 얼굴 가득 비스듬한 미소를 띤 채 경장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님, 형님 생각은 어떠십니까?”경장명이 헛웃음을 섞어 답했다. “사부님께서 이토록 대단한 수완가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설마 그 오래전부터 이런 판을 짜두셨을 줄이야.”“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아쉬운 점은, 그자들 중 일부가 이미 배신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진 도사와의 은의를 제 손으로 끊어내고 상운국의 주권을 수호하겠다며 등을 돌렸단 말이죠!”경장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나라의 우환을 걱정하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였다.더구나 지금의 상운국은 여황제와 섭정왕의 치세 아래 백성들이 굶주림 없이 등 따습고 배불리 지내고 있지 않은가.여인들에게 더없이 관대한 이 나라는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낙원과도 같았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며 아우성치는 이들은 그저 백성을 착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못해 안달 난 자들뿐이었다.소항이 다시 경장명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진 도사께서 남기신 보물들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형님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경장명의 심장이 순간 조여들었다. 도대체 진청산, 그는 무슨 연유로 이토록 조정과 끝까지 대립하려 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영남의 용맥이 솟구치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숙명입니다. 형님이나 저나 결국 이 씨 왕조에 의해 버림받아 쫓겨난 무고한 피해자들이 아닙니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던가요. 저희도 이제 한번 쟁취해봐야지요.”말을 마친 소항은 경장명에게 나무함 하나를 건넸다. 경장명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소항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형님 같은 인재가 이런 궁벽한 깡촌에서 썩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마땅히 천하를 뒤흔들 큰일을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경장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함을 받아 들었다. 소부를 나서기 직전, 그는 멀리 마당에서 아들 경풍과 소씨 가문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임설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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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5화

소항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온 경장명이 나직이 물었다.“아달아, 너는 내가 참으로 무정하다고 생각하느냐?”아달이 멈칫하며 되물었다. “주인님, 소주님을 구해오지 못하신 것입니까?”“소항이 그리 쉽게 사람을 놓아줄 리 없지.”그 말에 아달은 더는 입을 떼지 못했다. 주인님이 아들에게 부자간의 정이 아예 없다고 하기엔, 수년간 어디를 가든 늘 마음 한구석에 아들을 두고 살았다. 그렇다고 정이 깊다고 하기엔, 단 한 번도 아들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지 않은가.남들은 몰라도 아달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이 아들의 생모인 몽춘을 증오하기에,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며 이토록 괴로운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그래, 이제 나는 어찌하면 좋겠느냐?”“그것이…” 아달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주인님, 정말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말해보거라.”“제 미천한 소견으로는, 제가 결코 소씨 가문에 매수되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저희는 소항의 세력권 안에 있고,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입니다. 나으리께서 비록 소주님을 살뜰히 보살피지는 않으셨으나, 마음속으로는 아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주님이 타인의 손에 놀아나고 협박당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보실 수는 없으실 테지요.”“게다가 상운국은 주인님께 아무런 은혜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여제 폐하께서 주인님을 영남 같은 벽지로 유배 보내실 때 조금의 정도 두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주인님은 이미 경성 경씨 가문에서도 제명되었고, 상운국의 죄신일 뿐입니다. 조정은 주인님과 소주님께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겠지만, 소씨 가문 가주님은 다릅니다!”경장명은 자신을 오랫동안 보필해온 아달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아달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간청했다.“주인님, 상운국이 건재하는 한 주인님과 소주님은 영원히 영남에 유배된 죄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소씨 가문 가주님이 정말 큰 뜻을 이루신다면, 주인님은 개국공신이 되시는 것이 아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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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6화

“물러가거라.”경장명은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나무 상자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달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한때 당당하고 기개 넘치던 주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그의 등은 몇 해 전보다 눈에 띄게 굽어 있었다.아달은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주인이 제 말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부딪쳐 본다면 다시 경성으로 돌아갈 여지는 있지 않겠는가. 만일 뜻을 이룬다면, 주인은 더 이상 경씨 가문의 죄인도 버려진 자식도 아니게 된다. 상운국의 죄신이 아닌, 오히려 가문을 일으킨 영웅으로 남을 터였다.서재에 들어선 경장명은 촛대에 불을 밝히고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부적 한 장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서신을 펼치자 진청산이 직접 남긴 글귀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경장명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심지어 편지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심연희와 아이를 낳고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책까지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어 내려가던 경장명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사부님, 그 방법이 정말 그리 좋았다면… 어찌하여 정작 본인은 그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까.”참으로 가련하고도 우스운 일이었다. 설마 소항이나 진청산이 아직도 자신이 심연희를 놓지 못하고 그녀와 함께 하기를 갈망한다고 믿는 것일까. 전생의 자신은 분명 혼군 같은 놈이었고, 그녀의 진심을 저버렸다. 그러나 전생의 고통과 이번 생의 절박함을 겪으며 그는 이미 깨달았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아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될 만큼 얕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심연희의 마음은 이미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천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소항의 의도는 분명했다. 만약 자신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경성에 있는 이환과 경씨 일족 전체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경장명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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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7화

이진이 허탈한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악귀니 요괴니 하는 것들은 다 허상일 뿐이야. 분명 그 뒤에 감춰진 비밀이 있겠지.”경장명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외삼촌의 소식을 천하에 퍼뜨릴 정도라면 영남이 소문처럼 그리 끔찍한 곳일 리 없었다. 주익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그렇다면 직접 그곳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우리 둘이서?”이진이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무모하게 움직였다가 자칫 적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언니와 오라버니를 협박할 인질이 될 가능성이 컸다. 영남 땅에 흔적도 없이 스며들 방법이 없다면 위험한 도박이었다.그때 주익선이 진우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내게 대담한 계획이 하나 있는데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앞선 대화를 통해 주익선이 주진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진우정은 깊은 신뢰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주익선이 이진을 돌아보며 말했다.“우리가 무턱대고 영남에 들어갔다간 금방 눈에 띄겠지만, 만약 유배를 가는 죄인 신분이라면 어떨까? 안전을 위해 우정 이와 위원 표국의 고수들이 호송관으로 위장해 우리를 데려가는 거지.”“저희가 월왕 전하와 주 대인을 압송하는 포졸 노릇을 하란 말씀이십니까?”진우정이 묻자 주익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그래. 그렇게 영남으로 들어가 그곳에 숨겨진 추악한 비밀이 무엇인지 뿌리부터 파헤치려 한다.”이진도 곧바로 찬성했다.“그 방법이 좋겠어.”“좋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진우정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주익선이 덧붙였다.“좋아. 그럼 바로 실행에 옮기자. 다만 그냥 죄인인 척 길을 떠나서는 안 될 터. 반드시 관아에 기록을 남겨야 할 거야. 작은 허점이라도 보였다간 치명적인 화가 될 수 있으니 말이지.”“익선아, 네 말이 맞아. 경장명 무리가 전국 각지에 소식을 전할 정도라면 밖에도 분명 첩자가 깔려 있을 거야. 잠입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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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8화

소우연, 이육진, 그리고 용강한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이진과 주익선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참으로 공교롭구나.”이육진의 묵직한 목소리에 소우연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그러게요. 정말 공교롭네요.”심주 태수 유 대인은 이들이 월왕 부부와 마치 오랜 지인을 대하듯 허물없이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심지어 그들은 월왕을 앞에 두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조차 않았다. 특히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좀처럼 웃음기 없는 그 중년 남성, 이육진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유 태수는 머릿속을 격렬히 헤집어야 했다.이진이 자리에 앉자 주익선도 곁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유 태수는 황급히 주방에 명해 요리 몇 가지를 더 올리게 하고 식기들을 새로 챙겨오게 했다.“유 태수, 그대도 앉아서 이야기하자구나.”이진의 말에 유 태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월왕 전하께서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증이 채 가시기도 전, 이진은 주위의 하인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사방이 정적에 잠기자 그녀는 마침내 본론을 꺼내놓았다.“뭐라 하셨습니까? 월왕 전하께서도 죄인 신분으로 영남에 가시겠다니요?”유 태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역시’라니? 이진은 그 말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외삼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우연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참으로 신통하구나. 너희와 우리의 생각이 어찌 이리도 같을꼬.”“그럼, 저희와 함께 가시는 건가요?”“좋지.”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품 안에서 밀지 한 권을 꺼냈다. 황제 이영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맡겼던 것이었다.“유 태수, 이건 폐하께서 네게 내리신 밀지다.”유 태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신, 폐하의 성지를 받드나이다.”이진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그리 거창한 예법은 필요 없으니, 어서 일어나서 읽어보거라.”비록 언니 이영과 오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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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79화

말을 마친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육진과 용강한에게로 향했다.이육진이 먼저 입을 뗐다. “그럼 나는 총압사를 맡으마.” 이어 그는 용강한을 지긋이 바라보며 덧붙였다. “용 대인은 겉모습이 파리하고 유약해 보이니, 죄인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용강한이 그 말을 듣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좋습니다, 그리 결정하도록 합시다.”모든 계획이 세워지자, 이진이 다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 방법이 아주 좋긴 한데, 아바마마. 유 태수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이육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유 태수 집안은 대대로 충신이었느니라. 게다가 그는 곧 승진을 앞두고 있고, 가족들은 모두 경성에 머물고 있지. 그런 자가 가족의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칠 리 없다. 설령 제 목숨을 버릴지언정, 결코 적과 결탁할 위인은 아니야.”그제야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과연 언니와 오라버니가 저를 이곳 진주로 보내 유 태수의 도움을 받게 하신 이유가 있었군요.”이육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영이와 천이가 갈수록 제왕의 풍모를 갖춰가는구나. 사람을 보고 쓰는 안목이 제법 날카로워.’잠시 후, 주익선이 밖으로 나가 그들이 의논한 결과를 유 태수에게 전달했다. 유 태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말씀하신 이름들은 누구입니까?”“모두 관청의 호송관들이다.”유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인, 명심하겠나이다.”월왕과 주 장군이 직접 움직이는 데다, 수많은 사람을 죄인과 호송관으로 위장해 영남으로 보내는 것을 보니 그곳에 보통 문제가 있는 게 아님이 분명했다.……사흘 후.백성을 핍박하고 사리사욕을 채운 현령 일가가 영남으로 유배된다는 명목하에 채비가 끝났다.하지만 일행은 눈앞에 놓인 죄수 호송차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수레가 너무나 번듯했던 것이다. 결국 용강한이 나서서 도술을 부려 수레를 낡고 허름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죄수 수레가 아니라 잘 닦인 마차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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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80화

“태, 태상황 폐…”“그만.”이육진이 손을 들어 진우정의 행례를 막아 세웠다.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도 함께 가로막혔다.“태상황은 이미 붕어하였다. 지금의 나는 성이 소 씨인, 이번 호송의 우두머리일 뿐이다.”“예, 예… 소 대인.”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우연을 바라보았다.“연아, 이번 영남행에서 네 신분은 죄인이니 고생이 많겠구나.”소우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대사를 도모하는 일인데, 이 정도 고생쯤은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음.”이육진은 호위 고수들을 이끌고 유 태수에게 작별을 고한 뒤, 당당한 기세로 진주 감옥을 나섰다.보름 후, 계주부.소대가 밀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항은 촛불을 밝히고 밀지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진주의 현령이 죄를 지은 지 일 년 만에 이곳 영남으로 유배된다는구나.”“나으리,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소대는 소항의 의중을 살피지 못한 채 조심스레 물었다. 소항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뗐다.“늘 하던 대로 해라. 먼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파악하고, 만약 재능이 보인다면 우리 세력으로 거두어야지.”“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마중을 나갈까요?”“그럴 필요 없다. 제 실력으로 이곳 영남 땅까지 당도해야만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법. 오직 살아남는 자만이 쓸모가 있느니라.”소대가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명심하겠습니다.”“밀서가 도착한 시간을 보니, 지금쯤 소주 경계에 들어섰겠구나.”“아마 그럴 것입니다.”“뇌경의 죽음의 지대를 무사히 통과하거든, 그때 가서 그들을 맞이하도록 해라.”“예, 나으리.”소항이 손을 휘두르자 소대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몸을 돌려 나갔다. 소항은 책상 곁에 서서 올겨울 영남 일대에 벌어질 대규모 연회를 구상했다. 영남이 어떻게 일어섰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어떻게 진정한 제왕이 탄생하는지 만천하에 보여줄 셈이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임설이 닭백숙 한 그릇을 소중히 들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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