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자의 배신, 이혼만이 답이다!: Chapter 981 - Chapter 990

1059 Chapters

제981화

그러나 하지율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연상진이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데도 그녀에게서는 당황이나 부축하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연상준은 평소와 달리 동생을 챙길 여유조차 잊은 듯 멍하니 하지율을 바라보았다. 이성적이고 침착한 그조차 지금의 하지율이 낯설다고 느꼈다.‘이게 정말 하지율이 맞나? 예전의 지율이는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는데...’연상준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지만, 손형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주용화를 곧장 겨냥했다.‘용화 씨가 왜 하지율 편에 서는 거지? 이 상황이면 당연히 나하고 오빠를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하지만 주용화는 손형서의 날 선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침착하고 고요한 얼굴로 하지율의 곁을 지켰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명확했다. 누군가 하지율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막아서겠다는 결의가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똑똑히 보였다.그때, 연정미가 급히 앞으로 와 무릎을 꿇은 연상진을 부축했다.“오빠, 괜찮아?”기억 속의 연상진이 하지율을 대하던 태도는 무관심에 가까웠다. 때때로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었다.그러나 지금의 연상진은 하지율을 쳐다보는 눈빛에 혐오만을 담고 있었다.연정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였지만 금세 입을 닫고 말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하지율은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폭발하거나, 혹은 더 냉혹한 말로 되받아칠 것이라는 걸.‘지금은 무슨 말을 하든 불붙은 장작 위에 기름 붓는 격이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아.’소란이 생기면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잠시 전의 소동으로 인해 뒤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고, 몇몇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까지 했다. 금세 파티장의 상당수가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연경 그룹 측근인 연재영과 연태훈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급히 다가왔다. 인파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온 두 사람은 손형원의 얼굴을 본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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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하지율.”연태훈의 얼굴에 보기 드문 표정이 스쳤다. 수십 년 동안 재계의 정점에서 흔들림 없이 군림해 온 남자는 웬만한 상황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빛에는 오래 묻어두었던 죄책감이 비늘처럼 서서히 올라오는 듯한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그때 일은... 아버지가 잘못했다. 너를 믿지 못했다. 미안하다.”그 사과는 머리를 조아린 굴종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단단한 결의였다.재벌가의 체면이 걸린 자리였고, 수많은 자식들이 보고 있었으며, 말 한마디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연태훈은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그의 목소리는 과오를 직시하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무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짧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나는 오늘 이 연회에 손형원을 초대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어떻게 여기 온 건지 모르겠어.”말을 멈춘 그는 천천히 연재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강한 신뢰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큰아들을 믿어온 세월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잠시 생각을 고르는 듯한 시간이 흘렀고, 이내 낮고 묵직한 질문이 이어졌다.“재영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손형원이 왜 이 자리에 온 거지?”오늘의 연회는 전적으로 연재영이 기획한 행사였다.더군다나 이번 모임은 하지율을 ‘공식적으로’ 연씨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미까지 담겨 있었기에, 준비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연태훈은 늘 그래왔듯 그의 큰아들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연재영은 이마에 얕은 주름을 만들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제 부주의였습니다.”여전히 전말을 알 수 없는 연상진과 연상준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표정을 굳혔다.“아버지, 형.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손형원이 연회에 오면 안 되는 거죠?”연정미도 황망한 얼굴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마치 갑자기 어두워진 방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순진했다.그 순간, 하지율은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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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네가 직접 그에게 묻겠다고? 그 말은... 손형원이 스스로를 재판하도록 하겠다는 뜻이야?”연상진의 말은 유리처럼 차가웠다. 그는 노골적으로 연정미를 향한 불쾌감을 드러냈다.“입 다물어.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조금 전 주용화에게 공개적으로 면박당한 일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듯했지만, 정작 주용화는 그런 감정에 흔들릴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 안에는 오히려 방금보다 더 절제된 냉기만 남아 있었다.“손형원의 멘탈로는 아무리 물어도 건질 게 없을 겁니다. 설령 그가 제가 했다, 고 죄를 인정해도 뭐가 달라지죠?”주용화의 시선이 방 안의 얼굴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 짧은 눈빛만으로도 휴게실의 공기는 더 깊이 가라앉았다.“연씨 가문에서 손형원을 죽일 겁니까? 아니면 그의 손을 똑같이 망가뜨릴 생각인가요? 아니면 손씨 가문과의 협력을 모두 끊을 건가요?”그의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연경 그룹은 상위 재벌 중에서도 구조가 견고한 편이었다. 협력 하나를 끊는다고 흔들릴 기업은 아니었지만, 손씨 가문에서 들어오는 물량은 모두 우대 단가였다. 이익 배분은 이 대 팔. 한쪽이 이, 연경 그룹이 팔.그 정도 규모는 단순한 감정싸움으로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관계였다. 어쨌든 그들의 본질은 사업가였으니까. 그때 연정미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만약 그 일이 정말 형원 오빠가 한 게 맞다면 저는 하지율 씨의 뜻을 따를게요. 하지만 하지율 씨가 오해한 거라면, 아까 일에 대해 형원 오빠에게 사과해야 해요.”겉보기엔 공정해 보였지만, 문제는 증명 방법이었다.그녀는 직접 사람을 보내 손형원을 데려왔다. 휴게실로 들어온 그의 뒤에는 손형서도 있었다. 연정미는 지체하지 않았다.“오빠, 얼마 전 하지율 씨가 납치당해 크게 다쳤던 일... 알고 있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오빠가 하지율 언니를 납치하고 손을 망가뜨린 범인이 맞아요?”모든 시선이 손형원에게 모였다.연태훈의 눈빛은 무거웠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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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손형원과 손형서는 동시에 주용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손형서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었다.손형원이 직접 인정한 적은 없었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의 성정을 보아 온 그녀로서는 하지율의 손을 망가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십중팔구, 오빠겠지.’연정미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절대로 넘기지 않는 사람. 그게 손형원이었다. 다시금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싸늘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정말로 정미 때문에 하지율을 위험 요소로 보고 제거하려 했던 거였어...’연정미는 언젠가, 주용화가 찾는 실마리의 중심에 하지율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율은 다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다. 그녀만이 재현해 낼 수 있던 연주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달리 말해, 주용화가 찾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었다.‘다시는 들킬 일이 없겠지.’그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 깊은 곳이 미묘하게 들떠 흔들렸다.손형원은 시선을 돌렸다.그날, 주용화가 단보현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듯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설마 일부러 나를 시험하려고 한 건... 아니겠지.’의심이 스쳤지만 그는 그 가능성에 자신의 운명을 걸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진성시로 건너가 하지율을 납치한 일 자체가 이미 큰 위험이었고, 그녀의 손을 망가뜨린 행위는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은 범죄였다.‘평생 원수로 남을 만한 짓이었지. 조금만 더 시간만 벌었어도 하지율을 완벽히 데려오는 데 성공했을 텐데.’Z국을 빠져나오기만 했다면 그는 마음껏 하지율을 짓밟을 수 있었다. 원한다면 끝내 정신이 무너져버릴 때까지.그러나, 그는 상대를 과소평가했다.생각이 그 지점에 닿자, 손형원은 무심하게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하지율이 손톱으로 긁어 남긴 상처는 의료진의 세심한 처치 덕분에 거의 지워졌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희미한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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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하지만 이제 지율이도 연씨 가문의 일원이고 우리의 여동생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율이를 지켜야 해.’연상진의 말은 객관적인 판단을 빙자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뒤틀린 책임감이 스며 있었다. 연씨 가문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자존심, 그리고 피로 묶인 집안 내부의 논리가 그 말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주용화는 잠시 연상진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시선을 옮기는 그의 눈빛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여유로운 침착함, 그리고 상대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확신이 섞인 미소였다.“연상진 씨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방 안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만큼 힘이 있었다. 그 한 문장만으로도 분위기가 다시 굳었다.연상진은 미동 없는 자세로 주용화를 바라봤다. 그는 흔들림 없이 고정된 눈으로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곧바로 말을 이었다.“만약 하지율이 손형원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면, 그건 인품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연경 그룹에 들여 일하게 하는 건 자리와 덕이 맞지 않는 일입니다.”말이 끝나는 순간, 홀 안의 공기가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주용화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여 보였다. 그 움직임은 느린 물결처럼 매끄러웠다.“그래서요.”그는 말의 끝을 길게 당기지도, 억지로 압박하지도 않았다. 단지 상대가 더 깊게 스스로의 논리를 발화하도록 다정하게 밀어붙이는 어투였다.연상진의 목소리가 더 단단해졌다.“하지율에게 원시 지분을 내놓게 하겠습니다.”그 순간, 하지율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숨결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만이 미묘하게 변해가는 듯 보였다.움직임 없는 사람이 풍기는 묵직한 정적. 그 고요는 말할 수 없이 깊었고, 동시에 차가웠다.주용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율 씨더러 그냥 넘기게 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돈을 내고 사들이겠다는 겁니까.”말이 끝나자마자 연상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이 방 안을 간단히 긁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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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연상진은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주용화의 제안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거친 비아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그가 보기엔 주용화는 허풍도 유분수였다. 경호원 신분으로 이 정도 규모의 거래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였다.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몇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연정미, 손형서, 손형원은 주용화라면 실제로 그 약속을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집안들은 단번에 거액의 자금을 동원할 수 없을 테지만, 주씨 가문은 예외였다. 세계 최고 부호 집안이라는 사실은 허울뿐인 명찰이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연정미가 말끝을 부드럽게 잘라내며 조용히 끼어들었다.“오빠들, 형원 오빠랑 하지율 씨가 이야기하고 있었잖아.”그녀는 말하면서도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만약 이 내기가 정말 성사된다면, 두 오빠가 질 건 불 보듯 뻔해.’그 생각을 떠올리자, 연정미의 시선에 묘한 의심이 스며들었다.그녀는 무심한 듯 손형원을 바라봤고, 손형원 역시 시선을 천천히 그녀에게 돌렸다.두 사람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눈빛은 길지 않았지만, 그 안에 얽혀 있는 의미는 복잡했다.마치 서로가 이미 같은 결론을 품고 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교차하는 눈빛이었다.연정미는 예전부터 한 가지 의문을 안고 있었다.바로 주용화가 왜 하지율 곁에 머물러 있는가, 였다.손형서가 하지율을 대신해 그의 첫사랑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하지율 가까이에 머물고 있었다.연정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하지율을 좋아하게 되었다고도 보지 않았다.그녀는 현실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는 편이었다.‘하지율은 이혼 경력이 있고 아이도 있는 여자야. 주용화 같은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여자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데, 굳이 하지율일 이유가 있을까? 그의 행동엔 반드시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그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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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저희 오빠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정말로 사실처럼 굳어져 버릴 수도 있잖아요.”손형서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조용했지만 말끝이 서늘하게 떨렸다.연태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하지율을 바라보았다.“지율아, 혹시... 손형원 씨가 너를 다치게 했다는 정황을 보여줄 만한 증거가 있니?”그 질문은 방 안을 순간 정적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하지율은 고개를 들었지만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만약 증거가 있었다면 그녀가 손형원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게 내버려둘 리 없었다.잠시 망설임이 스친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하지율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옆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용화였다. 연태훈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우리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연경 그룹은 손씨 가문과의 모든 협력을 취소할 생각입니까?”담담했지만 말투에 일순 방안에 단단한 긴장이 퍼졌다.주용화는 연경 그룹과 손씨 가문이 이어놓은 협력 관계가 하지율에게 얼마나 거대한 족쇄가 되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협력이 유지되는 한, 손형원은 언제든 새로운 방식으로 하지율을 다시 옥죄어 올 수 있었다.살인범이 벌 받아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가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주씨 가문이 앞서 겪어낸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하지율이 진짜로 권력을 잡고자 한다면, 잔혹한 방식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연태훈은 주저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이토록 자신만만한 태도라니... 정말로 뭔가를 쥐고 있는 건가.’연정미 역시 눈길을 손형원 쪽으로 돌렸다.그녀 역시 그가 하지율을 납치했는지 단정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를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손형원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누가 봐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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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하지율은 손형원과 합의서에 서명한 뒤, 주용화와 함께 천천히 방을 나섰다.방 안에서 쏟아지던 시선들은 이제 전부 뒤로 밀려났다. 연씨 가문 사람들과 손형원 일행은 이번만큼은 그들을 따로 막지도, 따라붙지도 않았다.복도는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붉은 카펫 위로 하이힐의 가벼운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그 울림은 텅 빈 복도의 공기와 섞여 묘하게 차분한 여운을 남겼다.주용화는 하지율의 보폭에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며 입을 열었다.“그들이 전에도 이렇게 당신을 대했습니까?”하지율은 그가 말한 ‘그들’ 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연씨 가문, 예전부터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던 사람들.“비슷했죠.”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속에는 감정의 기복도, 억울함도 없었다.어릴 적 연상준, 연상진, 그리고 하지율은 모두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말은 거칠고 직설적이었으며, 잔인한 표현이 서슴없이 튀어나오곤 했다.지금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만 조금 달라졌을 뿐, 속에 있는 본질은 변한 것이 없었다.그저 위선이 더 두툼하게 쌓였을 뿐이었다.잠시 걸음을 이어가던 하지율이 갑작스레 고개를 돌렸다.“화야 씨, 정말로 증거가 있어요?”주용화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살며시 눈웃음 짓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장난스러웠다.“이제야 그걸 묻네요.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늦지 않았어요.”그 말에 주용화의 눈썹이 가볍게 올라갔다.“만약 내게 증거가 없고, 그들을 그냥 속여본 거라면요? 정말로 원시 주식을 넘길 생각이었습니까?”하지율은 피식 웃었다.차갑고 가벼운 웃음이었다.“그럴 리 없죠. 화야 씨에게 증거가 없다면... 그냥 모르는 척하면 돼요.”주용화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율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그녀의 말뜻을 곱씹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모르는 척한다고요?”“네.”하지율은 숨김없이 덧붙였다.“손형원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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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하지율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주용화를 바라보았다. 시선에는 얇은 의심과 미묘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화야 씨,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아니죠?”그녀의 물음에 그가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이런 일로 어떻게 하지율 씨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지율이 더 캐묻기 위해 숨을 고르는 순간, 복도 저편에서 급한 숨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드니 유소린이 헐떡이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스듬히 떨어진 연한 조명이 유소린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하지율! 너 괜찮아?”“괜찮아.”유소린 옆에는 강병주, 정기석, 고지후가 나란히 서 있었다.갑작스럽게 불려 온 듯, 모두 들뜬 호흡을 정리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곧장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정기석이 가장 먼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하지율 씨.”“감사합니다.”강병주는 묵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율아, 무슨 일 있으면 절대 혼자 감당하지 마.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게.”“고마워요, 선배.”옆에 서 있던 고지후는 한동안 말없이 하지율을 바라보았다.익숙한 듯하면서도 멀어진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여러 문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듯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하지율은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이내 담담히 시선을 거두었다.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태도, 마치 오래전 누군가를 대하던 기억에서 모든 온도를 걷어낸 듯한 반응이었다.그 순간, 고지후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움츠러졌다.그는 속으로 조용히 문장을 되뇌었다.진정한 무관심은 차갑게 굴거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진동도 남기지 않고 일상의 소소한 장면처럼 흘려보낼 수 있는 태도라는 것.‘하지율은... 정말 모든 걸 내려놓았구나.’그때, 정기석이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연씨 가문으로 돌아온 걸 축하해요, 하지율 씨. 이건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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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곁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주용화가 불쑥 말을 얹었다.“하지율 씨더러 사과하라고 요구했죠.”그 말에 유소린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터뜨렸다.“뻔뻔한 자식...”손형원에게 제대로 복수하려면 그만 겨냥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손형원을 건드리기 전에 손씨 가문의 내부 구조부터 흔들어야 했다.그들이 드디어 M국에 도착한 만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때가 왔다.최근 유소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손여준의 흔적을 추적했고, 끝내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바로, 추적할 만한 흔적 자체가 없다는 것. 손여준은 장애를 앓고 있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만 보냈다.그런데 유소린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추가로 밝혀냈다. 손여준은 절름발이일 뿐 아니라, 이미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손형원의 뒤틀린 성향을 생각하면, 그의 비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굳이 따져볼 필요조차 없었다.두 눈이 먼 절름발이가 가주 자리를 되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잠시 다른 사람을 밀어 올릴까 고민했지만, 그 후보들은 손형원과 깊은 원한을 공유하지 않았다.그러나 생각을 전환하니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점은 오히려 유리한 요소가 되었다.첫째는 다루기 수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상업 기밀을 빼내는 상황이 와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문제는 그의 주변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던 중, 무언가를 떠올린 유소린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래! 그거야! 고용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하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내가 거기로 들어가면 지율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그 순간의 머뭇거림을 읽어낸 하지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소인에게 물었다. “소린아, 왜 그래?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갑작스러운 걱정에 놀란 유소린은 마음을 추스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냐. 그냥... 화야 씨가 확보한 증거가 어떤 건지 생각했어.”주용화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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