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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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임서율의 참을성이 강하다가도 해도 이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방금 전처럼 순순히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다.그리고 눈빛 또한 가라앉아 짙은 밤처럼 어두웠다.임서율은 천천히 임유나 앞으로 걸어갔다.몇 초간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임서율은 그대로 임유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악!”임유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틀어막더니 눈을 부릅뜨며 임서율을 노려보았다.“임서율, 네가 감히 할아버지 앞에서 날 때려?”임서율도 굴하지 않고 쏘아붙였다.“그래서 뭐 어쩔 건데? 아까 못 들었어? 하 대표님이 말씀하셨잖아. 내가 대신 때리라고. 그리고 너, 나한테 뭐라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엄마까지 끌어들이지 마. 내 엄마이기도 하니까!”임유나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그게 뭐 어때서!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건 결국 너였잖아. 난 엄연히 엄마 친딸인데도 왜 늘 네 편만 드는 거냐고! 날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날 낳은 건데? 그리고 네가 뭔데 내 앞에서 잘난 척이야!”임유나는 화가 치밀어 얼굴 근육이 떨릴 정도였다.곧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임서율의 뺨을 때리려 했다.그때 멀찍이서 나른하지만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유나 씨, 잘 생각해 봐요. 지금 손 올렸다가 다시 내리지 않으면 한 대 더 맞아야 할 텐데?제가 여자는 못 때리거든요. 그러니까 임서율 씨가 대신 때려야죠.”임유나는 하도원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았다.차오르는 분노로 몸이 덜덜 떨렸지만 결국 손을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서율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도원 같은 사람이 나서서 그녀를 두둔하는 건지.결혼까지 한 여자가 어떻게 아직 결혼도 안 한 자기보다 낫다는 건지 전혀 몰랐다.임유나는 이를 악물며 손을 내리고는 울상이 되어 임태규를 향해 돌아섰다.“할아버지, 임서율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제 편 좀 들어 주세요!”임태규도 속이 편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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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임서율은 굳이 하도원과 더 따질 생각은 없었다.사실 오늘 그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자기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을지 자신도 없었다.그렇다고 하도원이 마치 자길 위해서라도 된 듯, 스스로 착각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하도원 같은 사람은 본래 자기 일 외엔 큰 관심 없는 사람이니까.임서율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하 대표님, 오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그러자 하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그 눈빛엔 분명히 불만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고작 이게 끝입니까?”임서율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럼 하 대표님은 뭘 바라는 건데요?”“고맙다는 말만 해서 되겠어요? 감사는 행동으로 보여줘야죠.”하도원은 시계를 슬쩍 내려다봤다.“마침 야식 먹을 시간인데 제가 아는 괜찮은 고깃집이 있거든요. 거기로 가시죠.”말을 마친 그는 임서율의 손목을 휙 잡아채더니 자기 차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저... 저는 좀 이따 약속이 있는데요.”“먹고 가세요.”임서율은 하도원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하도원이란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자기가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고야 마는 사람, 하도원에게선 그런 독불장군 같은 기운이 풍겼다.결국 임서율은 그대로 차 안에 밀어 넣어졌다.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도망치려던 그녀의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혀버렸다.“아, 저 진짜...”곧 시동이 걸리자 차는 튀어 나가듯 출발했고 강한 속도감에 임서율은 본능적으로 문 쪽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차가 어느 정도 속도를 줄였을 때, 임서율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그러다 문득 오늘 하도원이 모는 차가 지난번 그 한정판 차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저기 하 대표님, 저번에 타던 그 차 아직도 수리 중이에요?”하도원이 짧게 대답했다.“네. 아직 수리 중입니다.”“정말 미안해요. 다 저 때문에 그 비싼 차가...”솔직히 그날 일은 누구도 예상 못 했다.하필이면 그 미친 사람, 한종서가 집요하게 자신과 하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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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하도원은 평소 같으면 관심도 없을 집안 이야기인데 오늘은 웬일로 조금 흥미가 생긴 듯했다.“근데 어르신은 왜 임서율 씨 엄마한테 그렇게 악감정이 심한 겁니까?”임서율은 살짝 고개를 떨궜고 목소리도 아까보다 한층 낮아졌다.“할아버지가 제가 친손녀가 아니라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때, 한동안 엄마가 첫사랑하고 바람피워서 저를 낳은 거라고 오해했었어요. 그리고 아빠도 그렇고... 아무튼 임씨 가문은 할아버지가 완전히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아빠가 반박할 수도 없었고요.”“그리고 제 계모가 원래 아빠 비서였는데 아빠 앞에서 온갖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댔거든요. 거기다가 그 계모가 뒤에서 온갖 일을 꾸며냈고... 나중에야 제가 엄마 첫사랑 자식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는데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엄마랑 그 남자 사이가 깨끗하지 않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엄마를 임씨 가문 식구로 인정하지도 않고요.”임서율은 말하면서도 어머니가 생전에 임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떠올렸다.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고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단순히 할아버지가 자길 미워해서가 아니었다.임씨 가문 사람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하도원은 자신의 미간 쪽을 문질렀다가 살짝 웃으며 입을 뗐다.“이 가문 일에 저를 방패막이로 끌어들이다니... 진짜 제가 순진한 멍청이였네요.”임서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아요. 제가 많이 잘못한 거.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예요. 그때는 혹시라도 대표님이 임유나를 마음에 들어 하면 다들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표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냥 없는 일로 하려고 했고요.”임서율의 눈에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사실 자신이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음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하도원은 차를 몰아 골목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임서율은 그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매끄럽게 핸들을 돌리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정말 잘생긴 사람은 그저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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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임서율이 솔직하게 대답했다.“맛있어요. 저 여기 와본 적 있어요.”“오, 그럼 다행이네요.”하도원은 차 문을 닫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임서율 옆으로 걸어왔다.그러고는 하품을 한 번 크게 했다.임서율은 매번 하도원을 볼 때마다 늘 게으르고 잠이 덜 깬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회사에선 차갑고 무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임서율은 하도원이 온몸에 맞춘 듯 딱 맞는 정장을 입은 걸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그 옷들은 대부분 맞춤 제작일 테고 가격도 꽤 비쌀 거라고.이런 서민적인 고깃집 분위기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하도원은 주변을 둘러봤고 임서율는 그의 눈빛에 드러난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확실히 이런 데는 기름때와 연기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테이블 위도 기름으로 번들거렸고 손님이 많다 보니 사장님도 제대로 닦을 틈이 없었다.임서율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저희 다른 데 갈까요? 하 대표님 평소에 다니는 곳으로.”“차에 기름이 없어서 멀리 못 갑니다. 그냥 여기서 먹죠.”하도원은 휴지를 꺼내 테이블 위 기름때를 닦았다.그런데도 또 못마땅한 듯 휴지통에 내던졌다.그런데 테이블 하나 닦는데 벌써 절반이 넘는 휴지를 쓰는 하도원이 임서율은 영 내키지 않았다.“하 대표님, 정말 누가 강제로 데려온 건 아니죠?”하도원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리고 고깃집 사장님도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그제야 그는 냅킨을 거둬들여 자리에 앉았다.임서율는 사장님께 얼른 말했다.“죄송해요. 제 친구가 결벽증이 있어서요.”사장님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아가씨, 저희도 소규모로 장사하는 거라서... 환경이 이 정도인 거 이해해 주세요.”임서율는 서둘러 덧붙였다.“걱정 마세요, 나중에 휴지값 다 낼게요.”사장님은 그제야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그러자 하도원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휴지 한 롤 쓴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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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임서율은 옷을 벗는 하도원의 속도에 놀라 한동안 멍해 있었다.하도원은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쥐고 있던 옷을 흔들며 말했다.“멍하니 앉아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얼른 받죠? 팔 아픕니다.”그제야 임서율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어 그가 건네는 정장을 받고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옷 하나 건네는데 팔이 아프다고요? 정말 약하시네요.”“제가 약한지, 강한지... 모르겠습니까?”하도원은 컵 안에 담긴 물을 홀짝이며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그 바람에 임서율는 깜짝 놀라 동공마저 흔들렸다.“지금 제가 물 마시고 있었으면 하 대표님 셔츠까지 젖었을걸요?”“그럼 안에 입은 것도 같이 벗어 줄게요.”하도원은 거침없이 대답했다.그런데 임서율 마음속에는 이상하게도 지난번 하도원이 욕조에 하얀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던 모습과 복근이 떠올랐다.그래서일까, 임서율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호흡도 빨라져 얼른 화제를 돌리려했다.“괜찮으니까 말 좀 적게 해주세요.”그녀는 하도원이 또 깜짝 놀랄 말을 꺼낼까 봐 겁났다.그때 사장이 준비된 숯불고기를 가져다주었다.“맛있게 드세요.”그러자 하도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전 고수 안 먹는데요.”사장은 그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내 임서율이 하도원을 슬쩍 쳐다보니 그는 이미 사장에게 고수를 골라내 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사장에겐 그런 시간도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친 채 어색하게 멈춰 있었다.결국 임서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사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끼리 잘 먹을게요.”“네. 천천히 드세요.”사장은 자리를 떠나면서도 하도원을 힐끔 바라봤다.곧 임서율은 젓가락으로 고수를 하나하나 골라냈다.맞은편에 있는 하도원은 서두르지 않고 팔꿈치를 탁자에 괴고는 여유롭게 그녀를 지켜봤다.“얼굴은 안 닦아도 돼...”“서율 씨, 여기서 뭐 해요?”순간 옆에서 종소리처럼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고수를 골라내고 있던 임서율의 손도 딱 멈췄고 본능적으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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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요.”임서율의 목소리는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수진이 조금 전 던진 그 말 때문에라도 차주헌이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이 상황에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건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우스웠다.‘자신이 강수진과의 관계를 가장 잘 알 텐데,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걸 알면서 나한테 이러는 건가?’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지금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오직 하도원뿐이었다.“질문 하나 해도 돼요?”그는 식사가 불편했는지 천천히 셔츠 소매를 걷었다. 소매 끝으로 드러난 그의 팔뚝이 조명 아래 더욱 단단하게 빛났다.임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요즘 왜 이러지? 하 대표의 손만 봐도 심장이 뛰는 이유가 뭐야? 너무 오래 혼자였기 때문인가?’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들을 털어냈다.“네, 뭔데요?”“남자들은 다 그런가요? 자기는 되면서 남은 안 되는, 자기만 허용하는 그런 이중 잣대 말이에요. 소위 말하는 내로남불.”하도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에요.”그는 테이블 위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마실 게 부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음료수를 꺼낸 그가 뒤돌아 임서율에게도 예의 바르게 물었다.“서율 씨도 마실래요?”“좋아요.”그는 음료수 두 병을 한 손에 쥐고 돌아와 그녀 앞에 한 병을 내려놓았다.임서율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하 대표님은 어떤 사람인데요?”하도원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정말 궁금해요?”“네.”임서율은 하도원처럼 자유롭고 무심해 보이는 남자가 연애할 때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했다.하도원이 병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냥 마셔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잔을 꺼내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사랑할 때는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죠. 그래서 상대방에게도 양다리는 허락하지 않아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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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임서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회사가 함께 야유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야유회가 열리면 당연히 차주헌과 강수진도 참석할 테고, 그러면 회사 안에서 또 어떤 소문들이 떠돌지 불 보듯 뻔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참석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고민까지 하도원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한 임서율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느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그녀가 차에 오르자 하도원이 부드럽게 물었다.“집까지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저는 그냥...”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죄송해요, 전화 좀 받을게요.”임서율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지우야, 나 이제 곧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어.”수화기 너머로 양지우의 미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애가 갑자기 열이 나서 지금 병원이야. 그래서 미안한데, 오늘은 호텔에서 묵으면 안 될까?”임서율은 양지우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녀를 다독였다.“애는 괜찮아? 내가 도와줄 일은 없고?”양지우는 민망했는지 황급히 말을 끊었다.“아니야, 내가 지금 병원에서 꼼짝을 못 해서 그런 거야. 나 때문에 신경 쓰지 마. 미리 약속까지 해놓고 정말 미안해...”“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전화를 끊자마자 임서율은 급히 계획을 수정했다.“하 대표님, 죄송한데 엘리제 호텔로 가 주실 수 있을까요?”“네.”하도원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이런 그의 깔끔한 성격이 오히려 임서율은 마음에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궁금증에 꼬치꼬치 캐묻기 마련이니까.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감사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려던 순간 핸드백을 아무리 뒤져도 신분증이 보이지 않았다. 임서율은 난감한 표정으로 프런트 직원에게 부탁했다.“저기, 제가 신분증을 깜빡했는데 이번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 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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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임서율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리 밑에서 노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휴대폰 화면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봤지만 차주헌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분노와 충격, 실망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서율은 전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고작 하도원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운성을 떠난 뒤 그의 얼굴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아마 그때쯤 되면 강수진과 함께 있을 기회를 준 내게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르지.’“그럴 리가요.”하도원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가볍게 말했다.“좋아요, 타세요.”임서율은 다시 차에 올라탔고 하도원은 곧바로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낯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이 서렸다.“지난번엔 여기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하도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외투를 벗어 소파 위로 던지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지난번 그곳은 이미 차 대표한테 들켜버렸으니까요.”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마치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그 열기가 귀 끝까지 빠르게 번졌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하도원이 바로 그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묵직한 나무 향과 담배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평소라면 역겹게 느꼈을 법한 그 향기가 이상하게도 기분 좋게 다가왔다.입술 끝을 살짝 끌어올린 그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왜 얼굴이 빨개졌죠?”임서율은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 방이 좀 덥네요.”그녀는 급히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와 거리를 두었다.“평소에 커튼을 열어두지 않나 봐요?”“너무 밝은 건 싫어서요.”주위를 둘러보던 임서율은 곧 민망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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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가 싶더니, 손에 들고 있던 액자가 순식간에 빼앗겼다.“사진 말고 실물을 보면 더 좋지 않아요?”임서율은 순간 당황해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하도원의 장난스러운 말투 덕에 금세 태연함을 되찾았다.“내가 뭐 당신 사진 끌어안고 좋아서 본 줄 알아요? 그냥 이불 정리하다가 실수로 건드린 거예요.”“겉과 속이 다른 게 인생 신조였나 봐요?”임서율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살짝 흘기며 품에 든 이불을 끌어안고 그의 곁을 지나쳤다.“자기애가 하 대표님 인생 신조겠죠.”하도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그는 이불을 들고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곧이어 그는 시선을 내려 액자 속 어린 시절의 자신을 응시했다. 한때는 앳된 소년이었던 자신의 눈빛을 바라보자 날카로운 기운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자 이내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거슬려.”짜증스러운 듯 탁 소리를 내며 그는 액자를 침대 옆 탁자 위에 뒤집어 놓았다.한편, 거실로 돌아온 임서율은 이불을 펼쳐 소파 위에 깔았다. 처음엔 사진 액자에 대해 하도원에게 물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금세 마음을 바꿨다. 남의 사생활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그냥 우연히 찍힌 사진일 수도 있으니까.’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 익숙한 하도원의 향기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낯선 곳에선 잠을 설치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깊고 편안한 잠에 금방 빠져들었다.얼마 후 하도원이 거실로 내려왔을 때, 임서율은 이미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평온한 얼굴 위로 긴 속눈썹이 간혹 미세하게 떨렸다. 창백하리만큼 하얗고 매끄러운 그녀의 피부 위로 그의 손끝이 조심스레 스쳐 지나갔다.“이 무정한 여자 같으니. 어떻게 날 이렇게 빨리 잊을 수가 있지.”결국 그는 그녀의 콧잔등을 가볍게 톡 건드리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잘 자.”다음 날 아침.조깅을 마친 하도원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도로 한편에 서 있는 낯선 차량을 발견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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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그... 강수진 씨요.”하도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꽤 솔직하네. 그 여자가 또 뭐라고 하던가?”“만약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장면을 찍어오면 돈을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하도원이 비웃듯 입술을 비틀었다.“우리 집에 들어올래? 지금 들어와서 내가 포즈라도 잡아줄까?”“아, 아뇨... 아닙니다.”이미 현장에서 들킨 마당에 그에게 직접 자극적인 장면을 부탁할 용기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청년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강수진이 큰돈을 내건 이유는 하도원의 남다른 신분 때문이리라. 만약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액수를 제시할 리 없었다.하도원이 다시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가 얼마를 준다고 했어?”“천만 원입니다...”청년은 손가락 하나를 떨리는 듯 들어 보였다. 하도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삼천만 원 줄 테니까, 가서 그 여자를 찍어와.”청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삼... 삼천만 원이요?”그에게 있어 삼천만 원이라는 돈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금액이었다. 평소 이런 일을 맡아도 기껏해야 몇십만 원이 고작이었다.“그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삼천만 원을 줄게. 그리고 당신 본래 수입에도 지장이 없도록 사진 몇 장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보고용으로 가져가.”“네, 네! 말씀만 하시면 뭐든 찍겠습니다!”하도원이 손짓하며 청년을 가까이 불렀다.한편, 잠에서 깬 임서율은 서둘러 방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 두었다. 몇 번이나 하도원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막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으려던 찰나, 하도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임서율은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익숙한 멜로디였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분명히 어린 애들이나 부를 법한 애니메이션 주제가였다.임서율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하 대표에게 이렇게 천진난만한 면이 있었던가?'늘 냉정하고 무심한 남자가 동요를 흥얼거리는 모습이라니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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