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321 - Chapter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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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1화

하도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진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이미 평온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싸늘함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서율 씨 어머니는 저한테 은혜를 베푼 분이십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할 수 있지만 이 일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으니 그만하시죠.”순식간에 사무실은 침묵으로 뒤덮였다.한참 후, 차진만은 깊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주헌이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어쨌든 넌 이제부터 이 일에 간섭하지 마.”그 말을 끝으로 차진만은 쾅 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귀청을 찢을 듯한 요란한 소리에 하도원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나이 들수록 힘이 넘쳐나네.”그 시각 차진만의 전화를 받은 차주헌은 재빨리 물었다.“다 정리된 거죠? 삼촌은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확실하죠?”“경고는 해뒀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어. 네가 직접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임서율에 관대한 모든 기사를 내려.”“회사 일도 알아서 잘 처리하고.”차주헌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왜요? 삼촌이랑 합의 보신 거 아니에요? 설마 끝까지 이 일에 끼어든대요? 정말 서율이와 그런 관계가...”“입 다물어. 네가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오늘 같은 사태가 벌어졌겠니? 내가 이 나이를 먹고 너희들 뒤처리까지 해야 하되겠어?”차진만은 하도원에 대한 모든 분노를 차주헌에게 화풀이했다.하도원이 다루기 힘든 사람인 건 맞지만 평소에 요구를 제시하면 거의 승낙하는 편이었다.하지만 오직 이번 일만큼은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그 이유가 임서율 때문인지, 아니면 강혜수에게 받은 은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후자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전자라면 차씨 가문에 큰 후폭풍을 가져올 게 틀림없으니 그저 생각만으로도 차진만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차주헌은 결코 그 제안을 승낙할 수 없었다. 아직 회사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에 기사를 내리는 건 말도 안 된다.이번 폭로가 없었다면 차주헌은 네티즌들의 비난 속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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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화

“정설아 씨와 임유나 씨 두 분만 오셨습니다.”차주헌은 듣자마자 두 사람을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임서율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머리 위에 칼이 겨눠진 거나 다름없기에 언젠가는 그들은 맞서야만 한다.차주헌은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때마침 이혜정과 강수진이 계단에서 내려왔고 강수진의 순종적인 모습은 단번에 이혜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수진아,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편하게 지내. 나랑 주헌이가 있잖니. 게다가 임서율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잖아.”강수진은 소심하게 물었다.“아주머니, 서율 씨가 돌아오면 바로 나갈게요.”이혜정은 강수진이 나가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소리니? 임서율이 돌아온들 달라지는 건 없어. 걔는 처음부터 주헌이랑 이혼할 마음이 있었던 거야. 돌아와봤자 이혼 절차 밟으면 끝나는 거야.”“하지만... 괜히 저 때문에 불편해지지 않을까요?”강수진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고는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이혜정은 다시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그런 걱정은 하지 마. 안심하라니까.”“어머니, 임씨 가문에서 찾아왔어요.”차주헌은 강수진과 이혜정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걸 보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까지 만면에 웃음을 띠던 이혜정은 임씨 가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다들 한가한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또 찾아온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유나와 정설아가 안으로 들어왔고 자리에 앉자마자 정설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서율이는 아직 차 서방 아내야. 이 시점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과거에 불륜녀였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설아는 이런 일에 눈썰미가 타고났고 강수진을 본 순간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졌다.차주헌이 해명하기도 전에 이혜정이 나서서 말했다.“말씀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수진이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에요. 내 아들이 그쪽 딸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알죠?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이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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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화

정설아는 노골적인 질문을 받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이때 옆에 있던 임유나가 입을 열었다.“사실 형부가 밖에서 어떤 여자랑 놀아났는지 다 알고 있었어요. 이제 언니도 없어진 마당에 이 일은 당연히 정리되어야죠.”“이러다가 누가 실수로 강수진 씨와 형부의 관계를 폭로하기라도 하면 간신히 잠잠해진 여론이 다시 폭발할 거예요.”이혜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지?”정설아가 갑자기 웃으며 말을 이었다.“협박이 아니라 보상을 받겠다는 거죠. 서율이가 차씨 가문에 손주를 안겨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잖아요. 이렇게 허무할 게 끝낼 순 없죠.”“만약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면 언론에서도 이 돈을 보고 차씨 가문이 서율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거죠.”이혜정은 그들의 노골적인 갈취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인 상황에서 괜히 정설아와 대립 구도를 이루면 차씨 가문이 다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그러나 10억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에 이혜정은 다시 한번 협상을 시도했다.그녀는 찻잔을 어루만지며 여유롭게 말을 꺼냈다.“일을 해결하려는 마음만은 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10억은 저희한테도 부담이니 1억으로 하시죠.”정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이번 일로 차씨 가문이 얻은 손실은 10억이 훨씬 넘을 텐데요?”“보자 보자 하니까 점점 선을 넘네요. 약 올리려고 찾아왔어요? 전부터 얘기했잖아요. 댁 집 딸은 재수탱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일을 겪는 거죠.”이혜정은 정설아에게 화난 나머지 온몸이 떨렸고 당장 경비를 불러 두 사람을 쫓아내고 싶었다.때마침 강수진이 입을 열었다.“돈을 원하면 그냥 말씀하세요. 서율 씨를 구실로 삼지 말고요. 임씨 가문 같은 집안이 이런 추잡한 요구를 한하다니 실망스럽네요.”임유나는 비록 임서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강수진을 더 싫어했다.강수진이 차주헌과 임서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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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화

강수진은 겉으로 보기엔 순진해 보여도 속으로는 다 계산하고 행동하는 여우 같은 스타일이기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차주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유나와 정설아를 힐끗 쳐다보았다.“6억. 더는 안되니 퍼뜨리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하 대표님과 한종서 씨의 일로 임씨 가문도 곤란한 상황 아닌가요?”이혜정이 맞장구를 쳤다.“댓글 안 봤어요? 아주 난리 났던데.”정설아와 임유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차주헌의 말대로 임서율의 일은 임씨 가문의 주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그래서 임규한은 차씨 가문과 이 사건을 잠재울 방법을 상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을 이곳에 보낸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임서율이 어떻게 되든 아예 관심이 없었고 차라리 이 기회에 돈이라도 뜯어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임유나는 정설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엄마, 솔직히 10억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만약 형부가 화나서 한 푼도 안 준다면 우리만 손해잖아요.”정설아는 임유나의 팔을 툭툭 치더니 그 정도는 생각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그렇게 잠깐의 논의를 마친 후 정설아는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래. 한때 가족이었던 걸 생각해서 6억으로 하자.”그러고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이 카드로 입금해 줘.”그 말을 끝으로 정설아와 임유나는 차씨 가문의 문을 나섰다.이혜정은 밖으로 나가더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별일이네. 평소에는 임서율을 챙기지도 않더니만 사람이 없어지니까 이때다 싶어 돈 뜯으러 오는 꼴 좀 봐. 하여튼 천박하다니까.”“임서율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식구를 만난 거지? 실종된 지금까지도 이용하잖니.”이혜정의 말을 듣고 있던 차주헌은 그동안 자신이 했던 만행이 떠올라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그는 이혜정의 뒷모습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우리도 나을 게 없잖아요. 이 돈은 서율에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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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화

임유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타협했다.“알겠어요.”그러자 정설아는 다시 임유나의 손을 잡고 물었다.“임서율에게 약을 주입하라고 보낸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못 찾은 거지?”임유나는 한숨을 내쉬었다.“전혀 소식이 없어요.”정설아의 표정에 아주 찰나의 근심이 스쳐 지나갔다.“차라리 죽었으면 좋을 텐데... 괜히 나중에 일만 더 커키지는 게 아닐까 싶어.”임유나는 정설아를 달래듯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임서율이 살아있다면 왜 돌아오지 않겠어요?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악플로 도배된 상황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람들한테 맞을걸요?”정설아의 불안하던 마음은 임유나에 의해 완전히 달래졌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날이 갈수록 임서율은 마치 증발한 듯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지만 그녀에 대한 여러 추측은 여전히 인터넷에 떠돌고 있었다.누군가는 임서율이 실종된 것이라 추측했고 누군가는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비록 차진만의 말대로 임서율 관련 키워드의 일부를 내렸지만 워낙 평판이 나빠진 상태였으니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별수 없었다.물론 차주헌 혼자서 이 모든 걸 정리할 수는 없었고 그 뒤에는 차진만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일이 추후 차씨 가문에 어떤 후폭풍을 가져다줄지 몰랐다.운성 사람들은 하도원이 차씨 가문 혈육인 걸 모르고 있고 물론 하도원도 항상 차씨 가문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그렇게 차주헌은 몇 년 동안 한순간도 임서율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물론 하도원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인해 동시에 회사도 점점 더 커졌다.그리고 현재. A 국의 로얄호텔.하도원은 창가에 서 있었다. 뼈마디가 드러난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고 부드럽게 돌리고 있었다. 깊은 눈빛,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훤칠한 키에 우월한 얼굴까지 더해지니 모든 움직임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이때 진승윤이 문을 열고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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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6화

하도원은 서명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승윤을 노려보았다.순간 움찔한 진승윤은 고개를 뒤로 빼며 얼어붙었다.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빛이 감돌았고 위로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는 정교하게 그려 놓은 듯 섬세했다.이번엔 진승윤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하도원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속으론 여전히 임서율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그동안 전국을 뛰어다닌 게 회사 사업 확장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임서율을 찾기 위해서였다.그녀와 관련된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하도원은 곧장 현장으로 날아가 확인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번번이 실망뿐이었다. 그 이유가 임서율 어머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하도원은 속마음을 너무 깊이 감추는 이라, 오랜 세월 곁을 지켜온 진승윤조차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진승윤은 나가기 전, 책상 위에 놓인 하도원과 임서율의 계약서를 한번 바라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문을 나섰다.5년 후.운성에서 한 건의 중대 발표가 나왔고 곧바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임규한이 위중하며, 생명이 경각에 달해 있어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그가 임종 전에 이루고 싶어 하는 마지막 소망은 임씨 가문의 장녀 임서율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그러나 수년이 흐르는 동안 임서율은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듯 자취를 감췄다. 살아 있는지, 이미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사람들은 과연 임규한이 이대로 한을 품고 눈을 감게 되는 건 아닌지 입을 모았다.임규한 병실 앞.정설아와 임유나는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갓 수술실에서 나온 임규한은 창백한 얼굴에 숨이 가늘었고 아직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입술 사이로 계속 ‘임서율’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임유나는 비아냥거렸다.“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상황에서도 임서율, 임서율... 걔가 대체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거예요?”정설아 역시 고개를 저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그렇게 오래 소식이 없는데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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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7화

“엄마, 그 유산은 당연히 저랑 동생 몫이죠. 다만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제가 잠시 맡아서 관리하다가 나중에 다 크면 회사는 자연스레 동생 것이 될 거예요.”정설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게 어디 말처럼 쉬워? 네 동생이 지금은 어려도, 어쨌든 임씨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잖아. 넌 딸이니 결국 시집가게 될 테고 도원이를 못 잡아도 운성에서 아무 재력가한테 시집가면 돼.”“며느리로 들어가서 편하게 사는 게 뭐가 나빠? 굳이 네 동생하고 재산을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니?”임유나는 속으로 냉소했다. 아무리 평소엔 자기를 챙겨주는 척해도 막상 이해관계가 얽히면 결국 지킬 건 아들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엄마, 아빠가 그렇게 임서율을 사랑했는데 그 모든 걸 다 우리한테 남겨줄 거라 생각해요?”그 말에 정설아의 웃음이 딱 멈췄다.“그게 무슨 뜻이야?”“아빠는 벌써 회사 지분 30%를 임서율한테 넘겼어요. 거기다 거액을 들여 ‘임율’이라는 이름으로 자회사를 차려줬죠. 뜻밖이죠? 그 돈, 우리 몫 아니었어요.”정설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뭐라고? 제정신이야? 임서율은 애초에 친딸도 아닌데, 어떻게 재산을 그렇게 많이 줄 수가 있어?”임유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 별 수 있나요. 그러니 엄마랑 여기서 서로 다투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그 시간에 대책부터 생각하는 게 낫죠.”정설아의 시선이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임규한에게로 옮겨졌다.“그럼 차라리 이참에 유언장을 고쳐버리는 거야. 어차피 네 아버지도 오래 못 버틸 텐데 그냥 위조해서 싸인하게 만들면 되잖아.”임유나는 비스듬히 눈을 흘겼다.“그 유언 내용이 전부 동생 몫이면 저는 못 도와드려요.”정설아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임유나와 손잡지 않으면 아무도 재산을 가져갈 수 없었다.그녀는 임유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걱정 마, 다 생각해놨어.”가방에서 미리 준비해둔 유언장을 꺼내자 임유나가 놀란 눈빛을 보였다.“벌써 준비해 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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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8화

임유나가 펜을 들고 돌아오자 정설아는 그걸 받아들고 미리 준비해둔 유언장을 꺼냈다.“여보, 비서가 그러는데 여기 서명이 필요한 서류가 있다고 했어요. 회사 쪽에서 당신 서명이 있어야야 자금을 풀 수 있다고 해요.”임규한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가져와, 내가 서명하지.”정설아는 펜과 유언장을 함께 건네주며 마지막 장으로 넘겼다.임규한이 바로 사인하려는 순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종이를 세게 내던졌다.“감히 날 속이려고 해? 이게 무슨 회사 서류야, 이건 유언장이잖아! 당신들이 날 속여서 가문의 재산을 다 가져가려는 거지!”임유나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임규한이 이 상태인데도 머리가 이렇게 또렷할 줄은 몰랐다.정설아도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어차피 당신 시간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 유언장, 오늘 안 써도 결국엔 쓰게 돼요. 임서율은 죽었는데 왜 아직도 걔 생각만 하는 거예요? 나랑 아들, 그리고 유나 생각은 왜 안 해요?”임규한은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당신한테 안 나눠준 것도 아니야. 서율이 몫은 설령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꼭 남겨줄 거야.”“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임서율은 벌써 죽었을 텐데, 왜 죽은 사람한테 재산을 남기려고 해요!”정설아는 진짜 임규한이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의심했다.임서율이 없어진 뒤로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늘 강혜수에게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임서율은 친딸도 아닌데, 그렇게 오래 키웠다 해도 이렇게까지 정신이 흐트러질 이유가 없었다.임규한은 몸부림치며 힘을 짜냈다.“이런 일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 재산은 우리 가문의 거고 당신은 그럴 자격 없어. 유언장은 이미 썼으니 싫다면 어쩔 수 없고.”임규한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기운이 빠져 다시 쓰러졌다.정설아는 아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그 년한테 다 줄 생각이면 나도 이십 년 넘게 쌓아온 부부 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그리고는 자리를 지키던 임유나에게 소리쳤다.“왜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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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9화

임유나와 정설아는 그 목소리를 듣자 등골이 오싹했고 손에 쥐고 있던 동작도 멈췄다.임규한은 병실 문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임유나와 정설아는 목이 뻣뻣하게 돌아가 서로를 마주봤다.“방금 무슨 소리 들은 거예요?”임유나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정설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목소리마저 떨렸다.“너, 너도 들었어?”곧 두 사람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문쪽을 쳐다봤다.임유나가 문 앞의 그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정설아는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임서율? 어떻게 네가.... 너 죽은 거 아니었어?”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이 봤으니 헛것을 본 건 아니었다.임서율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회색 수트 차림의 그녀는 단정하고 날렵해 보였고 노란빛이 도는 중간 길이의 웨이브 머리카락은 원래도 정교했던 이목구비를 더 세련되게 만들었다.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온몸에서 무심한 듯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냉소했고 눈빛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보아하니, 내가 죽길 참 바랐던 모양인데. 미안하네, 네 바람대로 안 돼서.”임서율은 임유나와 정설아 앞을 지나 임규한의 병상 곁에 섰다.그 순간, 눈매 속의 날이 조금 누그러졌다.“아빠,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임규한은 그녀를 보는 순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그 눈빛은 말보다 더 많은 걸 담고 있었다.임유나는 당황해 눈동자가 흔들렸고 어깨까지 떨렸다.“너,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거야?”임규한은 손을 뻗으려 했지만 임서율은 그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임유나를 바라봤다.“왜? 네가 보낸 그 사람이 날 이미 죽였을 거라 생각했어?”사실 그녀는 그때 정말 죽을 뻔했다. 독이 든 약물이 서서히 몸속으로 들어오던 순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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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화

임서율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자신이 떠날 때만 해도 임규한의 건강은 멀쩡했는데, 어쩌다 몇 년 만에 이렇게 달라져 버린 걸까. 혹시 정설아가 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걸까.그때 의사가 한마디 덧붙였다.“환자분은 마음에 큰 응어리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간호사 얘길 들어보니, 예전에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 계속 ‘임서율’이라고 부르셨다네요. 아마 그게 평생의 한이었나 봅니다.”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임서율 씨가 혹시 아내분이신가요?”임서율은 살짝 민망해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아무튼 지금은 목숨은 부지하셨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진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현재로선 없습니다.”“...감사합니다.”임서율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혹시 모를 방법을 알아보려고 해외에 있는 의사 지인들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고개를 숙인 채 화면을 켜고 번호를 찾으며 걸어가던 그녀는 누구와 부딪혔다.“죄송해요.”“서율 씨.”상대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 기색과 어쩐지 확신하지 못하는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얼굴을 들자 병원 한복판에서 마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현우였다.이곳에서, 그것도 이런 상황에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하지만 인사는 해야 했다.“조 선생님, 오랜만이네요.”조현우도 예전 임서율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얘기, 남자와 함께 떠났다는 얘기, 그리고 이미 세상에 없을 거라는 얘기까지. 당시 그녀는 식물인간 상태였다.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아직 살아 있었군요.”임서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답했다.“네.”“하지만 그동안 왜...”“조 선생님, 아버지 상태가 위중해서요. 지금은 먼저 실례할게요.”그녀는 당장의 사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막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그가 다시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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