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그날 밤, 작업실에서 일을 마친 유하는 프린트한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이혼합의서는 이솔이 특별히 이혼 소송에 능한 로스쿨 교수님한테 문의해서 도움을 청해, 유하 케이스에 맞게 제작한 것이다. 비록 아직 더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었지만 유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오후에 승현을 포함한 세 사람이 떠난 뒤, 유하는 이솔에게 전화해 아직 채 보완하지 않은 이혼합의서를 받아와 저녁이 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집에는 도우미밖에 없었다.저녁 10시가 넘었는데 승현과 준서가 동시에 없는 걸 보면 생각하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래도 승현이 저녁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유하는 마지막으로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윤해월이 추위를 가시라며 생강차를 내왔지만 유하는 그걸 거절하고 1층 소파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사모님, 짐은...”유하가 충장이 끝나 돌아온 줄로 알았던 윤해월은 캐리어가 보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볼일 있어 잠깐 온 거예요.”대충 설명한 유하는 이어폰을 낀 채 핸드폰으로 최근 열린 국제 패션위크 영상을 봤다.이건 패션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세계적인 무대다.유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이렇게 큰 무대에 설 수 있는 건 모두 국제 유명 브랜드의 최고 디자이너로, 전 세계 패션 트랜드를 이끄는 사람들이다.영상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거실에 놓인 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유하는 자정이 되도록 남편과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없던 유하는 곧바로 승현에게 전화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연결된 전화 너머로 귀찮음이 섞인 쌀쌀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다음 순간 건너편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현아, 이 잠옷 어때?]전화는 뚝 끊겼다.유하는 아직 반응하지도 못했다. 통화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했다.몇 초 뒤에야 전화를 내려놓은 유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낮에 30분도 시간 내주지 않더니, 이제는 말할 시간도 안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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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방에 들어서자마자 유하는 은은한 차향을 맡았다.안대를 벗자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높게 얹고 비녀를 꽂은 수려한 여자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유하의 패딩을 받아 주더니 따뜻한 물이 담긴 나무 대야를 들고 왔다.유하는 물에 손을 씻은 뒤 여자에게 끌려가 검사를 받은 후에 비로소 안채로 안내받았다.안채 역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자리에 앉자 또 다른 누군가가 차를 내왔다.그 과정에 말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이곳은 지켜야 할 규칙이 무척 많았다. 그 때문에 승현 할아버지의 집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승현 할아버지의 집에 가도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기에 유하는 그나마 익숙했다.하지만 익숙한 것과 별개로 억압된 분위기에서 오는 불편함은 떨쳐낼 수 없었다.약 30분 정도 기다리자 밖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훤칠하고 미소를 띤 준수한 남자였다.남자는 유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리아 씨?”유하는 디자인 업계에서 리아로 활동하기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중하게 물었다.“혹시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두 사람은 지금껏 늘 핸드폰으로만 연락하고 정보를 주고받았기에, 유하는 이 통 큰 고객의 얼굴을 처음 본다.애초에 신체 사이즈를 받았을 때 몸매가 좋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외모마저 이토록 수려할 줄은 몰랐다.남자는 승현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이 사람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이라면, 승현은 살짝 날카로우면서 귀티 나는 스타일이다.상대는 거리를 두는 듯 싱긋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개하지 않으려는 상대방의 모습에 유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유하는 전에도 비슷한 고객을 만난 적이 있다. 가끔 일부 고객은 자기 신원을 밝히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류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남자를 보면 볼수록 유하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어디서 본 것 같은데?’다만 이건 너무 가까워지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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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유하는 이미 내뱉은 말을 도로 회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유하한테 준범은 그냥 ‘미친놈’이었으니.하지만 이곳에서 이런 미치광이와 더 다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머리에 든 게 없는 지랄같은 도련님이 갑자기 비위가 거슬려 무슨 미친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미친놈과는 도리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법이다.유하는 이곳을 당장 떠나려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준범이 유하의 팔을 덥석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팔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유하는 결국 낮게 소리쳤다.“이거 놔요!”준범은 유하를 꽉 붙잡은 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유하를 보는 그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경고하는데 또 한 번만 더 승현과 연우를 방해하면 좋은 꼴 못 볼 줄 알아요.”준범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꼬듯 웃었다.“내 수단 잘 알잖아요.”어디 알 뿐일까? 지난달 당한 모욕과 괴롭힘을 생각할수록 유하의 눈에 한기가 서렸다.유하는 더 이상 버둥대지 않고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준범 씨, 참 유치하네요.”유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고민하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음, 아마 10년은 넘었죠? 하연우를 좋아하지만 가망이 없으니 이젠 자기 친구와 짝사랑 상대를 이어주려고 아등바등하다니.”“두 사람 우정에 할 말이 없네요. 비록 사회에 감동을 안겨준 10인에는 들지 못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요. 내가 나중에 상이라도 만들어 줄게요. 난 준범 씨한테 정말 감동했거든요.”준범의 얼굴은 순간 잿빛이 되었다. 준범이 화를 내려던 순간, 유하가 갑자기 그의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난 준범 씨 이해해요. 진심이에요. 준범 씨는 이 얼굴과 돈 말고 가진 게 없어 뭐든 승현 씨한테 밀리잖아요.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을 텐데, 준범 씨한테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는 걸 보면 연우 씨도 보는 눈은 있나 봐요.”“그래도 본인 주제를 잘 아는 건 그나마 총명해 보였어요.”준범은 유하가 이렇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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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별일 아니야.”준범은 긴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우리 형이 귀국했거든. 아마 단기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 올해 계속 국내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 봐. 집에서 며칠 뒤에 축하 파티를 열 거야. 친한 친척과 친구들만 초대했으니 너희 둘도 그때 와.”준범은 한 가지 사실을 소홀히 했다. 가족 모임에서 승현을 초대한 건 사실 그와 그의 아내 유하를 초대한 거였다.‘소유하를 뭐 하러 초대해? 거슬리기나 하지. 우리 집에서 소유하를 반기는 사람은 없어.’‘차라리 승현과 연우가 오면 되겠네.’“준혁 오빠가 돌아왔어?”연우의 예쁜 눈은 살짝 멍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진작 말하지. 그럼 선물 제대로 준비했을 텐데.”“선물은 무슨. 사람만 오면 돼.”준범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더니 시선을 승현에게 돌렸다.“승현, 너도 시간 비지?”“응. 갈게.”승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승현은 사실 준혁과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게다가 그가 국내에 있는 것도 미리 알고 초대장도 진작 받아 당연히 참석할 생각이었다.대화가 끝난 뒤 승현과 친구들은 함께 떠들며 분위기를 즐기다가 헤어졌다.준범과 작별한 연우는 자연스럽게 승현의 차에 앉아 본인 집으로 향했다.한참 뒤, 차는 하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승현이 따라 내리지 않자 연우는 의아한 듯 물었다.“승현아?”“오늘은 안 돼. 낮에 이모님이 일이 있다며 전화해 왔거든. 오늘은 가봐야 해.”승현은 다정하게 설명하고 그곳을 떠났다.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던 연우는 갑자기 얼굴에 걸린 미소를 싹 거두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또 소유하네.’‘진짜 거머리 같네.’...어젯밤 밤새도록 작품집을 만들고 오늘 아침 일찍 출근해 연달아 세 명이나 면접을 보고 나니, 유하는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다. ‘계속 이렇게 쳇바퀴처럼 일할 순 없어.’‘회사 일은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어.’점심을 대충 때운 유하는 혼자 사무실에서 잠깐 휴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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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전화를 건 지 얼마 되지 않아 통화는 연결되었다.[리아 씨.]전화 건너편에서 준혁의 온화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냇물처럼 깨끗하고 맑은소리에 유하는 잠깐 넋을 잃었다.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저기, 보내신 초대장은 받았지만 이해가 잘 안돼서요.”유하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정중히 거절했다.“저희 협력 관계는 옷을 완성한 그때 끝난 거로 아는데요.”상대가 태씨 가문 장남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유하는 그른 더 피하고 싶었다.그날 상대한테서 나던 피비린내 때문이든, 아니면 그의 문제아 동생 태준범 때문이든, 유하는 되도록 준혁을 멀리하고 싶었다.태씨 가문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전화기 너머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은 유하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모양이었다.[소유하 씨.]준혁은 이번에 유하의 본명을 부르며 다정하게 웃었다.[유하 씨가 만든 옷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건 단지 가족 모임일 뿐이에요. 답례하고 싶어서 초대한 거니 내 체면 봐줄 수 있어요?]상대는 자신의 신분을 완전히 오픈했다.비록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말투였다.유하는 문득 태씨 가문 두 형제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혁과 준범은 모두 강압적이다. 다만 형이 동생보다 조금 더 능수능란할 뿐.상대가 이런 태도로 나오니 유하는 거절하기 힘들었다.다만...유하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태준혁 씨, 우리의 유일한 접점이라고는 양복뿐이잖아요. 가족 모임 같은 특수한 자리에 저 같은 외부인이 참석해도 괜찮은가요?”승현과의 결혼 사실은 외부에 비밀인지라 유하는 애초에 자기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외부에서도 단지 승현이 결혼한 것만 알고 있지 아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단지 오씨 가문과 친하게 지내는 친척과 친구들만 유하의 존재를 안다. 게다가 승현은 공개적인 행사에 유하를 거의 데리고 다니지 않기에, 승현의 아내라는 신분은 오히려 그녀에게도 낯설었다.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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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얼마 뒤, 차는 오씨 가문 본가에 들어섰다.커다란 꽃무늬 철문이 열리자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겨울이지만 정원 안에는 푸른 나무와 풀들이 가득했으며, 작은 다리 아래로 냇물까지 흘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넘쳤다.차는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만 열면 바로 따뜻한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차가 멈춰 서자마자 시아버지 오광진이 얼른 나와 아내를 맞이했다. 그는 다정하게 박영심의 얼굴을 문질러 보더니 따뜻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다만 잇따라 차에서 내리는 유하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오씨 가문에서 유하를 예뻐하는 건 박영심뿐이다.승현과 오광진은 모두 유하를 싫어한다, 다만 아내 때문에 오광진은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아버님...”유하는 나지막하게 시아버지를 불렀다.오광진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박영심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하는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승현한테서 전화 왔는데 오늘 못 온다고 하더구나. 승현과 준서는 기다릴 필요 없다.”오광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영심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는 유하에게 다가가 손을 꼭 잡더니 걱정하는 한편 분노했다.“유하야, 화 풀어. 내일! 그 자식이 내일 집에 오면 내가 제대로 혼내줄게! 남편 노릇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어떻게 아이를 데리고 홀라당 가버리고 가정을 돌보지 않을 수가 있어?”“어머님, 괜찮아요. 저랑 같이 식사해요.”유하는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속상하지도 않았다. ‘오승현이 나 버리고 가버린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이젠 기대도 안 해.’시어머니를 달랜 뒤 유하는 두 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했다.저녁 식사는 아주 풍성했다. 하지만 저녁을 먹는 사람은 오직 세 명뿐이었다. 승현과 준서뿐만 아니라 승현의 동생 오승환도 집에 오지 않았다.다만 이런 광경이 유하는 익숙했다.승현의 동생은 식구들과 사이가 조금 묘했다. 설날 같은 큰 명절을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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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날 저녁 유하는 시어머니의 만류에 본가에서 밤을 보냈다.그리고 승현과 준서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본가가 회사와 거리가 먼 탓에, 유하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는 서둘러 떠났다.그러고는 예정된 아침 회의를 한 뒤 또 면접을 봤다.오늘은 그나마 운이 좋아 하루 종일 면접한 끝에 드디어 적합한 후임을 찾았다. 상대는 역시 모든 면에서 효율이 높은지라 신속하게 급여를 협상하고 입사 날짜까지 확정 지었다.그 덕에 유하는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새로 온 후임에게 인수인계하고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면, 유하는 이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다만... 이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며칠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은 거야?’‘대체 이혼 합의서를 본 거야, 만 거야?’‘어머님이 제대로 설득했나 모르겠네. 이번이 가장 가까운 기회인데.’그날 밤, 유하는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식사 초대였다. 다만 이번에는 유하와 승현더러 내일 본가에서 함께 출발해 태씨 저택으로 가게 하겠다는 핑계로 승현까지 집에 불러들였다고 했다.그 말을 듣자 유하는 바로 동의했다.‘오늘 저녁에는 무조건 이혼 합의하고 만다.’...그날 저녁 유하는 퇴근하자마자 데리러 오겠다는 승현의 연락을 받았다.하지만 유하는 단번에 거절했다.비록 승현에게 더 기대할 것도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또다시 버려지는 걸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이제는 집안 어른들 앞에서 승현과 금슬 좋은 부부인 척 연기하고 싶지도 않았다.유하는 직접 운전해서 오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정원을 지나 보일러실에 들어서서 차 문을 열자마자 시어머니의 분노 섞인 목소리와 몽둥이 소리가 들려왔다.박영심은 보일러실 안에서 승현에게 몽둥이질하며 화를 냈다.“네가 이러고도 남편이야? 어? 와이프는 데리러 가지도 않고 혼자 와? 내가 너 이렇게 가르쳤어? 넌 맞아도 싸!”승현은 키도 훤칠하면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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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오광진과 오승현이 서재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유하는 알지 못했다.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박영심도 어느 정도 휴식한 뒤에 다섯 식구는 함께 주방에서 식사했다.승현의 동생 승환은 역시나 오지 않았다.긴 테이블에서 오광진과 박영심은 상석을 차지했고, 승현과 오준서는 오광진과 가까운 쪽에 앉았다. 하지만 유하는 예전처럼 승현과 가까운 쪽에 앉는 대신 박영심 쪽에 앉았다.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유하에게 집중되었다.박영심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짚어 그릇에 담아주고는 웃으며 말했다.“요즘 본가에 오는 횟수가 너무 뜸해 어머님과 더 친해지려고 그래요.”솔직히 승현 곁에 앉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하지만 박영심은 그 대답에 기분 좋아 더 이상 유하와 승현더러 함께 앉으라고 닦달하지 않았다.승현은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분위기는 따뜻하고 평화로웠다.오기 전에 이미 본가에서 태씨 가문 저택으로 출발하기로 약속했기에 유하네 세 식구는 본가에서 밤을 보냈다....본가 저택에서 유하와 승현은 같은 침실, 준서는 그 옆방을 차지하게 되었다.“엄마, 샤워할래요.”본인 침실에서 연우와 인터넷 게임을 즐기던 준서는 게임에 흥미를 잃자마자 옆방으로 알려와 유하를 불렀다.준서는 이제 더 이상 엄마한테 화 나지 않았다.‘엄마가 연우 이모를 싫어한다면 앞으로 엄마 앞에서 이모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그만이야.’‘앞으로는 엄마 몰래 연우 이모를 찾아가 놀아야겠어.’엄마가 요즘 자기한테 연락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을 보니, 준서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준서는 사실 엄마가 목욕시켜 주고, 목욕을 다 하고 나면 잠자기 전 이야기를 해주기를 원했다. ‘이번에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면서 화해도 하려고 했는데...’‘어떻게 내가 게임을 한참 동안 했는데도 안 찾아오지?’결국 준서는 마지못해 본인이 직접 찾아왔다.문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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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서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승현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마침내 한 가지 문제를 인식했다.“지금 연우 때문에 그래?”승현은 이제야 유하가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고 하는지 알았다. 순간 눈을 가늘게 접으며 얼굴에 혐오감을 드러냈다.“소유하, 질투도 적당히 해야지. 계속 이러면 오 사모님으로 살 생각 하지 마. 이거 가지고 나가!”승현은 책상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집어 유하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유하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승현은 이혼 합의서를 단지 그녀가 질투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어디서 수작이야.’자신이 예전에 그렇게도 빠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지만, 유하의 마음속에 남은 건 여한뿐이었다. 곧이어 커다란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소귀에 경 읽는 것도 이것보다는 무력감이 덜 들겠네.’‘우리 결혼 생활이 이렇게 된 게, 정말 하연우 한 사람 때문일까?’연우는 단지 도화선에 불과하다. 지뢰는 진작 땅속에 묻힌 지 오래다.유하는 이혼 합의서를 힘껏 움켜쥐고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토해냈다.“나 이제 힘들어요. 더 이상 승현 씨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냥 이쯤에서 끝내요. 서로 이제 좀 놓아줘요.”유하의 말투가 너무 무거워서 승현은 어렴풋이 그녀가 정말 진지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 멍해 있다가 뭔가 말하려던 찰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연우의 전화였다.유하는 마침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어 전화 온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봤다.승현이 전화를 받기 전 유하는 이혼 합의서를 책상 위에 탕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사인만 하면 당장 떠나줄게요. 그럼 당신도 좋아하는 사람과 당당하게...”쫙!종이는 갈기갈기 찢어졌다.유하 손끝에는 고작 이혼합의서의 귀퉁이만 남았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하얀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귓가에 승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게. 방에 돌아가서 진정 좀 해. 이왕 오 사모님이 됐으니 얌전하게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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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걱정하지 마.]두 사람은 잡다한 수다를 떨다 전화를 끊었다....유하는 리아 작업실에 곧바로 도착했다.숲을 지나 작업실 별장 앞에 차를 세웠더니, 맞은편 별장 앞에 차 몇 대가 줄을 서 있고, 사람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누가 이사하나?’그때 사람들에게 짐을 나르도록 지휘하던 젊은 여자가 멀리서 유하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다.“리아 씨, 오랜만이네요. 요즘 잘 지냈어요?”유하는 이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근처 사람들과는 리아라는 이름으로 왕래했기에, 친한 이웃들은 모두 그녀를 ‘리아’라고 불렀다.예의 있게 인사를 건넨 유하는 이내 물었다.“혹시 이사하세요?”“네.”이사를 언급하자 여자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여기가 너무 외진 곳이라 생활하기 불편해서요. 그동안 마땅한 구매처를 찾지 못해 계속 미뤘었는데 얼마 전에 귀국한 박사가 높은 가격으로 이 별장을 구매했지 뭐예요. 요즘 바로 들어올 거라고 해서 얼른 짐 빼는 중이에요.”귀국한 박사라는 단어에 유하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유하는 요즘 그 단어만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제 막 귀국한 하연우도 박사니까.‘에이, W시에 설마 하연우 살 곳이 없을까?’‘하씨 가문에서 설마 하연우 살 곳도 안 마련해 줬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뭐 하러 이렇게 외진 곳에 큰돈을 드려 별장을 사?’유하가 처음에 이곳에서 별장을 산 건 저렴하고 조용해 작업실로 쓰기 좋아서다. 하지만 생활하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있다.머리를 쳐든 생각을 억누른 뒤, 유하는 웃으며 이웃에게 축하를 건넸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흩어져 각자 일을 했다....오후 내내 작품집에 매달렸더니 태씨 가문 가족 모임 시간이 거의 다가왔다.유하는 얼른 시어머니가 맞춰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태씨 가문이 가족 모임을 하는 곳은 유하도 익숙한 곳이었다.마침 유하가 준혁에게 양복을 갖다주던 곳 근처였으니까. 그때는 산꼭대기였지만, 이번 목적지는 산 아래에 있는 온천 호텔이었다.유하가 도착했을 때 연회장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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