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331 - Chapter 340

464 Chapters

제331화

유하는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곧장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실례지만... 출국 제한은 얼마나 가는 건가요? 구체적으로 며칠쯤인지...”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군인은 묵묵히 자리를 뜨고, 방 안에는 다시 적막만이 내려앉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사령관님’이라 불린 남자가 홀로 들어왔다.뒤따르던 근무병이 문을 닫자, 공간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남자는 의자를 끌어와 유하 앞에 앉았다.굳건한 얼굴, 흔들림 없는 자세, 묵직한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까?”유하는 순간 입이 붙은 듯 굳어 버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낯익은 얼굴이었다.결혼 직후, 오씨 가문의 본가에서 한 차례 식사를 함께했을 때 스친 적 있는 사람.말 한마디 나눈 적은 없었지만, 그 압도적인 기세와 특별한 신분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다름 아닌 승현의 사촌 형인 오석현이었다.승현 같은 사람이 유일하게 고개 숙이는 상대... 바로 이 사람이었다.냉정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승현이, 제 아버지에게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석현 앞에서는 유난히 공손했다. 존경이라기보단, 거의 복종에 가까웠다.그래서 만약 누군가 승현을 말릴 수 있다면, 그건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 오직 지금 유하 앞에 있는 이 남자, 오석현이 유일할 것이다.생각해 보면 늘 이상했다.분명 사촌지간인데, 그 관계는 친형제보다 더 돈독했다.반면 승현의 친동생인 승환은 늘 외부인처럼 취급받았다. 이름조차 같은 세대의 ‘현’ 자 돌림에서 제외되었다.피보다 선명한 선 긋기가 분명했다.아마도 이유는... 석현의 아버지, 곧 승현의 작은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순직한 탓이었을 것이다.승현의 부모는 석현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게다가 나이 차가 컸고, 원래 조용하고 묵직한 성품 탓에 승현에게는 늘 형 같고, 때로는 아버지 같았다.더구나 석현은 오씨 가문의 차세대 중 가장 안정된 길을 걷고 있었다.그는 군에 들어가
Read more

제332화

석현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일정했다. 마치 부부간의 갈등을 다루는 게 아니라, 어떤 공적인 사안을 보고하는 듯했다.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거운 압박감이 짓눌렀다.하지만, 유하에게는 예상치 못한 화제였다.‘정말이지, 좋은 형님이네...’유하는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숨이 막혔다.공간 속이 고요히 얼어붙었다.잠시 후, 억지로 건넨 두어 마디의 웃음 끝에, 유하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사령관님, 차라리 동생분을 설득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혼합의서를 몇 장이나 찢어버린 건데요. 사령관님 말씀이라면... 분명 더 이상 저를 붙잡지 않을 겁니다.”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사령관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부부 7년, 굳이 원수처럼 끝낼 필요가 있냐고. 그렇다면... 좋게 헤어지면 되잖아요.”단호한 결심이 담긴 목소리였다.돌아설 여지도,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석현은 그제야 짧게 눈길을 떨구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공기는 정적에 잠식되어 숨조차 가빠질 지경이었다.‘숨 막힌다...’유하의 가슴이 조여오며 그렇게 느낄 즈음, 노크 소리가 문을 울렸다.“보고드립니다! 차량 준비 완료했습니다!”문이 열리자 석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짧게 명령했다.“해선사로 데려가라.”그 말 한마디뿐.더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는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유하는 검은 두건이 씌워진 채,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차 문이 열리고, 몸이 차에 실리자, 곧 차가 진동하며 앞으로 나아갔다....W시.푸른 새벽빛 속, 검은 차 한 대가 고즈넉한 정원주택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자, 검은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승현이 내렸다.그는 손목을 고르고, 곧은 걸음으로 서재를 향해 들어섰다.남자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기운은 무겁게 번졌다.서재 문을 막 열자...쿵!묵직한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이어진 건 오국수의 분노에 찬 호통이었다.“오승현! 너 지금 제정신이냐! W시 전부가 난리다! 겨우 여자 하나 찾겠다
Read more

제333화

폭우가 하늘을 찢을 듯한 기세로 쏟아졌다.‘소유하는 절대 날 떠나지 않아.’‘소유하는 끝까지 내 곁에 있을 거야.’그래서 승현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이미 결심한 일인데도, 멀리서 들려오는 유하의 목이 터지라 우는 울음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옆으로 떨어뜨린 승현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빗물이 눈가를 따라 흘러내렸지만, 눈동자 안은 이미 죽음 같은 침묵뿐이었다.태건은 이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순간, 그는 알 수 없었다. 빗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유하와, 빗속에 서 있는 승현... 도대체 누가 더 절망스러운 건지.승현과 유하는 똑같이, 뼛속까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다....유하가 박영심이 보낸 사람들에게 안겨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승현의 단단히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은 느슨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진동했다.발신자는 박영심이었다.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전화였다.승현은 밖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태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몰게 했다.차에서 내려 막 현관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창백한 얼굴의 박영심이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다.“무릎 꿇어!!”태건은 그 순간 숨이 막혔다.늘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했던 사모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리꽂혔기 때문이다.옆에서 오광진이 아내를 달래려 했지만, 정작 눈빛에는 아내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승현은 고개를 떨군 채, 고분고분 무릎을 꿇었다.폭우는 승현을 더 초라하게 적셨다. 옷은 이미 흠뻑 젖어 몸에 들러붙었고, 박영심의 질책은 한 마디 한 마디 추상같이 승현을 찔렀다.“네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니! 반드시 책임을 져라, 승현아!”승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에 젖은 채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집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외침이 터졌다.“대표님, 사모님! 그 아가씨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순간, 빗속에서 고요히 무릎 꿇고 있던 승현이 폭발하듯 몸을 일으켰다. 곧장 안으로 뛰어들어, 소란스러운 방으로 향했
Read more

제334화

쾅!“네가 지금 누구를 아내로 삼겠다고 한 거냐!”머리가 희끗해진 오국수는 지팡이를 내리치며 노기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 주름진 얼굴엔 세월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눈빛 하나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위세가 가득했다.승현은 미동도 없이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입을 열었다.“소유하입니다.”“하! 너한테 아무 이득도 없는 여자야. 가문에 도움은커녕, 집안 배경조차 평균 이하인 여자를 네가 즐기는 건 그냥 못 본 척해줄 수 있다. 그런데 감히 그런 여자를 아내로 들이겠다고?”쾅!지팡이가 다시 한번 승현의 어깨를 후려쳤다.승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낮게,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제 배우자는 제가 정합니다. 누구도 제 인생을 이익과 맞바꿀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당장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이신다 해도, 저에게는 소유하뿐입니다.”“네가 정한다고?”오국수가 비웃으며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쳤다.“좋다. 네가 예전에 뭐라 했지? 당장 가업을 물려받긴 싫다, 네 꿈이니 뭐니 하면서 그 허튼 컴퓨터 공부에 매달리겠다 했잖아? 네 ‘꿈’을 지키고 싶다고.”“그래, 내가 기회를 줄게. 꿈이냐, 여자냐. 네가 직접 선택해라!”승현은 잠시 입을 닫았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오국수의 웃음은 차갑게 흘렀다.“대답 못 하지? 좋아. 네게 시간을 주마. 사당에 들어가 조상들 영정 앞에서 무릎 꿇고 생각해라. 어떤 선택을 할 건지.”...사당.촛불이 줄지어 타오르고 있었다.부드러운 방석도 없이, 승현은 차갑고 단단한 바닥에 곧은 자세로 무릎 꿇었다. 앞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층층이 놓여 있었고, 불빛은 승현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흔들렸다.고요한 공간.촛불이 타는 소리, 심지어는 ‘쿵쿵’ 뛰는 자기 심장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승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심장의 고동을 세어 갔다.‘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까?’‘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시간은 무한히 늘어진 듯 흘렀다. 하루, 또 하루.
Read more

제335화

‘하지만 유하, 그 여자는 이번이 나에게 온 마지막 기회야.’‘정작 그 여자의 마음은 나한테 없으니까.’‘이번에 내가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거야.’‘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도 없어’승현은 자신이 반드시 유하를 꽉 붙잡아야 한다고 결심했다.쾅!오국수의 얼굴에 분노가 얹히고, 지팡이가 승현의 등판을 세게 내려쳤다.승현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도대체 그 여자애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냐!”‘무엇이 마음에 들까?’승현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그러나 어딘가 기묘한 미소가 번졌다.‘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설령 유하가 미천한 신분, 진흙 같은 존재라 해도, 세상에 흩날린 수많은 먼지와 다를 바 없다 해도, 승현에겐 달랐다.승현에겐 그 먼지가, 그 진흙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했다.‘괜찮아. 진흙이어도 좋아. 흙탕물이어도 좋아.’‘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함에 담아 매일 내 눈앞에 둘 거야.’‘그러면 그게 곧 보물이지. 유하는 나한테 그런 존재다.’승현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가, 또렷하게 벌어졌다.“저는... 소유하만 원합니다.”단호하고,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였다.오국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손자의 고집이 어떤지.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괜히 조부와 손자 사이의 정을 끊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승현이 한 사안을 두고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자신에게 맞선 건 처음이었다.억센 놈 앞에서 결국 물러서는 건, 늘 어른 쪽이었다.오국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승현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간절하고도 애절했다.“할아버님... 유하가 제 아이를 가졌습니다. 저는 소유하와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승현의 눈빛에는 간청이 어려 있었다.그 순간, 오국수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는, 결국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갔다. 햇살이 비치는 문턱 위, 곧은 줄만 같던 오국수의 허리가 휘청이며 무
Read more

제336화

“안 돼요!”“형수님한테 분명 무슨 일 있는 거예요!”해선사가 있는 R시.새벽 햇살이 막 비추기 시작한 시각, 현지 경찰서 안은 어수선했다.그 중심엔, 벌게진 얼굴로 경찰과 맞서고 있는 주성이 있었다.그는 이미 거의 미쳐 있었다.유하가 밤새 절 근처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 자취를 감췄다.남은 건 숲으로 향한 발자국뿐.게다가 중간에 합류했던 젊은 남자 둘도 사라졌다.주성은 당장이라도 찾으러 가겠다고 나섰지만, ‘지금은 위험하다’라는 이유로 제지당했다.곧 구조대가 도착했지만, 구조대 역시 주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모든 사람을 강제로 R시의 제일 큰 경찰서로 데려가, 한 명씩 조사를 반복했다.주성은 답답함 끝에 직접 신고까지 했지만, 구조대 쪽에서는 그날 온 두 남자가 밀수 혐의로 수사 중이라며, 유하의 실종에 대해서는 ‘수색 중’이라 답했다.기다리라니... 주성이 어떻게 기다릴 수 있을까?‘형수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냥 끝이지.’‘집에서도 날 죽일 거고, 나도 이렇게는 못 살아.’‘겨우 마음이 맞고 죽을 고비까지 함께 넘긴 ‘친구’를 찾았는데...’‘어떻게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어?’주성은 결국 폭발했다.“기다리라니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예요! 사람이 실종됐는데 조사만 하고, 우릴 가둬 놓고 뭐 하자는 겁니까! 우리가 범죄자라도 됩니까!”“진정하세요, 그리고...”“안 되겠어요. 저 혼자라도 찾으러 갑니다. 무슨 일 나도 상관없어요. 책임 안 물을 테니까 그냥 놔둬요!”그는 그대로 문 쪽으로 향했다.“이봐요, 지금 장난합니까!”경찰 몇 명이 달려와 주성을 붙잡았다.몸싸움이 벌어지려는 그때, 조용하지만 단호한, 그리고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주성아?”그 한마디에 주성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붙잡고 있던 경찰의 손이 미끄러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 주성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는 곧장 일어나, 먼지를 털 생각도 없이 문가에 서 있는 유하에게 달려갔다.“형수님..
Read more

제337화

주성이 크게 웃어버렸다.열아홉, 한창 혈기 넘치는 나이라 그럴까?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한복판에서 주성은 주저함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가슴 속 깊은 데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기운이 그대로 퍼져나갔다.유하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행인 몇이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봤지만, 대부분은 그냥 지나쳤다.이곳의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만큼 다양했고, 누구보다 자유로웠다.자유로운 영혼과 극단의 낭만이 공존하는 도시.그래서일까,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한참을 웃던 두 사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눈이 마주치자 둘 다 피식 웃었다.“야, 뭐 먹을래?”“글쎄요,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거짓말. 또 그 이상한 거 먹을 거잖아.”“이상한 거라뇨, 그거 맛있어요.”둘이 티격태격하며 골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온몸을 두툼히 감싼 여행자가 둘을 막아섰다. 그는 손에는 묵직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까맣게 탔다. 하지만 눈빛은 맑고 반짝였다.사진가였다.“방금 두 분 사진을 찍었는데요, 전시에 써도 될까요? 소정의 사례금은 드리겠습니다.”“사진이요?”유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보여주세요!” 주성이 목소리를 높였다.화면 속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유하의 긴 까만 머리, 그리고 검은 머리를 살짝 길게 늘어뜨린 주성이 있었다.둘은 사람들 틈 속에서 마주 서 있었다.뒤로는 황금빛으로 물든 웅장한 산맥.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오롯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웃음이 너무나도 환하고, 자유로웠다.거의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생기였다.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그리고 또 동시에 웃었다.“맘대로 하세요.”“네, 저도 괜찮습니다.”그렇게 말하곤, 사진작가가 멍하니 서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다시 웃으며 지나쳤다.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흔들고, 둘의 말은 바람결에 흩어졌다.멀리서 들리는 건, 아침 메뉴를 두고 실랑이하는 듯한 웃음
Read more

제338화

하얀 눈으로 덮인 산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붉은 패딩을 입은 유하, 그리고 노란색 점퍼를 입은 주성.두 사람은 새로 준비한 두툼한 옷을 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차를 빌려 이곳까지 올라왔다.충분히 쉬고 나선 터라,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갑시다.”주성이 먼저 한 계단 올라섰다.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이 번졌다.“가자.”유하가 미소로 답했다.4월이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산의 정상 근처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눈발이 흩날리는 사이, 두 사람은 천천히 돌계단을 올랐다.그 끝에는 해선사가 있었다.유하는 R시 내에 있는 수많은 사찰 대신, 산 깊숙이 숨어 있는 해선사를 택했다.처음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던 곳이었다.처음엔 둘 다 떠드느라 정신없었다.여행 중에 일어났던 일들, 웃겼던 일들.하지만 점점 말이 줄었다.고지대까지 차로 올라온 덕에 그다지 숨이 차진 않았지만, 바람은 살을 베듯 매서웠다.얼굴에 닿는 공기가 차갑고, 입이 금세 마르는 느낌이었다.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이 바람 속에서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얼마쯤 올랐을까... 주성이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저 멀리, 눈보라 사이로 해선사의 금빛 지붕이 보였다.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그 순간, 주성이 걸음을 멈췄다.유하도 멈춰 서서 물었다.“왜?”“형수님, 제가 왜 꼭 같이 오겠다고 한 건지... 기억하시죠?”주성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유하는 알고 있었다.그건 주성이 좋아하던 만화 때문이었다. 즉, .그는 유하를 그 만화의 작가, ‘드림’이라고 믿었다.빨간 중절모를 쓴 로봇이 끝내 달을 향해 날아오르는 해피엔딩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따라왔다고 했었다.유하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주성이 먼저 말을 이었다.“이젠 중요하지 않아요.”유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주성은 유하를 바라봤다. 평소엔 장난기만 가득하던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달랐다
Read more

제339화

연꽃은 축복이자, 바람이었다.주성은 흰 눈 속 그 붉은 빛을 올려다봤다. 손을 천천히 내려 눈가를 가렸다.붉게 물든 눈을 감추듯, 그 위로 손을 얹었다.하지만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19년 동안 살면서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다.이렇게 가슴을 뒤흔드는 순간도 처음이었다.‘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주성의 손바닥 아래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눈물이 흘러내렸다.그 물방울이 하얀 눈 위에 떨어져 번졌다. 순식간에 스며들고, 이내 다시 눈에 덮였다.바람과 눈이 잠시 멈췄다.세상은 조용했고, 그 고요 속에서 모든 게 조금씩 멀어졌다....산 정상, 해선사.유하는 법당 앞에 서 있었다.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한 번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왔구나.”열려 있는 법당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지만, 깊고 멀리 울렸다.유하가 멈춰 섰다.“스님, 제가 올 줄 아셨어요?”“모릅니다.”스님의 말투는 담담했다.“그저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뿐이지요.길이 험했을 텐데, 들어와 따뜻한 차 한잔하세요.”유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그녀는 무거운 다리를 들어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스님 앞에는 낮은 나무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엔 김이 나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유하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절을 한 뒤, 탁자 맞은편의 방석에 앉았다.“감사합니다.”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을 데웠다.스님은 다시 주전자를 들어 유하의 잔을 채웠다.유하는 사양하느라 서둘러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었다.“아, 제가... 감사합니다.”석 잔째를 다 마시자, 몸이 서서히 풀렸다. 얼어붙었던 손끝이 다시 감각을 찾았다.그때, 스님이 조용히 일어섰다. 눈매가 온화했고, 말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시주는 이미
Read more

제340화

짝!돌계단에서 주성이 고개를 홱 돌렸다.뺨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눈앞엔 아버지 박학경이 서 있었다.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아버지, 왜 때리세요!”“왜 때리냐고? 이놈아, 네가 한 짓을 봐! 형수 데리고 며칠째 잠적해? 나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했냐!”박학경의 목소리가 터졌다. 수십 년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아버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주성이 몸을 돌렸다.계단 위 절 쪽으로 뛰려 했다.승현과 태건이 방금 위로 올라갔다.승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형이 형수한테 또 무슨 짓을...’그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두 발짝도 못 갔다. 경호원들이 달려와 팔을 붙잡았다.주성의 몸이 공중에 들렸다.“놔요! 아버지! 이러지 마세요!”주성이 발버둥 치며 외쳤다.“형 미쳤어요! 형수님한테 또... 그 짓을 한다고요!”박학경의 표정이 굳었다. 눈빛은 차가웠다.“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이제 너는 국내에 있을 생각도 하지 마. 유학 준비해. 당장 나가.”“아버지! 아버지, 제 말 좀... 윽...!”주성의 입이 막혔고, 목소리가 바람에 삼켜졌다....법당 문이 거세게 열렸다.눈보라가 폭풍처럼 밀려들었다.바닥에 엎드려 있던 유하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찬 바람이 살을 베었다.아무런 예고도 없었다.거센 힘이 유하의 팔을 낚아챘다.여자의 몸이 공중으로 들리듯 당겨졌다.그 품 안으로, 얼음 같은 입술이 쏟아졌다.얼굴에, 입술에, 거칠고 숨 막히게.유하는 순간 얼어붙었다.‘뭐야... 이게...’상황을 이해하는 데 단 한 순간도 걸리지 않았다.그리고 곧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머리를 밀쳤다. 주먹으로 내리치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그리고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유하는 겨우 몸을 빼내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이어서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하... 윽... 윽...”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유하의 속이 울
Read more
PREV
1
...
3233343536
...
4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