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Chapter 61 - Chapter 70

100 Chapters

제61화

윤세현은 자신이 뭘 그렇게까지 초조해하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이경이 나가기 전에 분명히 약속했는데도 윤세현은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그녀는 적진에 들어가 대놓고 싸우진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고 다만 적군 진영에 뭔가를 두고 오는 일이라고 했다. 아침 내내 힘들게 준비했던 약을 쓸 계획인 모양이었다.그 약의 정체나 효과가 뭔지 윤세현은 알 길이 없었지만 이경의 얼굴에는 해괴할 만큼 확신이 서려 있었다. 게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약속까지 해버려서 이제 와선 도로 물릴 수도 없었다.그런데도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윤세현은 괜히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이경을 적진에 보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데 마음은 계속 조여들었다.“저하, 혹시... 미리 출병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문정수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구공주를 특별히 아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켜야 할 대상이 적진에 들어갔으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더군다나 청지까지 따라나섰으니 걱정은 배가 되었다. 청지는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나갔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일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문정수는 혹시라도 윤세현이 화낼까 눈치를 보면서도 한 번 더 말을 걸었다.“저하...”“아직 출병할 때 아니다.”윤세현은 짧게 대답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평정심을 찾은 듯 보였지만 눈길은 계속 적진 쪽을 향했다.“그 여자가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신뢰감이 어느새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전날 밤 성벽 위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 때문인지 생각보다 훨씬 믿음이 갔다.사실 정면 승부는 처음부터 그의 계획이었다. 단지, 이경이 예정보다 그 시기를 앞당겨버린 것뿐이었다.문정수 역시 멀리 반짝이는 적군의 불빛을 보며 잔뜩 긴장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과연 지금 구공주와 청지는 적진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별일 없이 잘 버텨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그 시각, 이경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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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뱀이다!”어느 병사의 갑옷 위로 어느새 살기가 번뜩이는 독사 한 마리가 휘감겨 올라오고 있었다.“가만히 있거라.”이경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손목을 재빠르게 돌렸다. 청지와 연지 외에는 아무도 그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독사는 병사의 갑옷 위에서 몸을 비틀다 이내 힘없이 축 늘어져 미끄러져 내렸다.병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뱀이 떨어지자 곧장 힘껏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갑작스러운 독사에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이곳은 오래도록 습하고 그늘져서인지 독한 벌레와 뱀이 참 많구나.”이경은 그 병사 곁에 다가가 그의 갑옷을 유심히 살폈다.“방금 약통을 만졌느냐?”병사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기억을 더듬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전, 앞서가던 형제의 약통에 실수로 부딪혔사옵니다.”그 약통이란, 아침에 여인들이 직접 달여낸 약즙이 들어 있던 통이었다. 이 병사는 원래 약통을 담당하여, 몸에도 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이 두 가지는 절대로 한데 섞어선 안 된다. 어서 갑옷을 벗거라.”이경은 단호히 명했다.병사는 잠시 청지를 바라보았고 청지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전장에 나서는 병사가 어찌 갑옷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갑옷을 벗으면 목숨을 지킬 마지막 방패조차 잃게 된다.그러나 이경은 싸늘하게 말했다.“계속 입고 있으면 독사나 해충이 또 꼬일 것이다. 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거라.”병사는 방금 전 독사에 질겁한 얼굴로, 한 번 더 청지를 바라보았다. 청지도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도 저런 독사만은 두려운 법이란 걸 알고 있었다. 청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병사는 재빨리 갑옷을 벗어 던졌다.“공주마마, 두 가지를 절대 섞어선 안 되는 것이옵니까?”청지가 물었으나, 이경은 더 설명할 시간조차 아까운 듯 짧게 답했다.“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설명할 때가 아니니라.”이경은 달빛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이 시각이면 윤세현이 이미 대군을 정비하고 있을 테니, 더 이상 지체할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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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연지는 이경의 사람이었기에 무조건 그녀를 지지했다.이번에 이경이 청지와 용기군의 병사들을 직접 데리고 나선 일에 병사들 마음속에는 분명 불만이 일렁이고 있었고 연지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혹여 전장에서 형제들 가운데 누가 변을 당한다면 사람들은 그 모든 책임을 전투 경험도 없는 이경에게 뒤집어씌울 게 뻔했다.더구나 청지는 용기군 중에서도 으뜸가는 실력자라, 만에 하나 그에게까지 일이 생긴다면 연지는 감히 윤세현이 무엇이라 말할지 앞이 막막했다.그때가 되면 이경과 윤세현 사이의 모순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허나 이경은 그 모든 우려를 아랑곳하지 않았다.“전장을 누비는 자라면 누구나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누가 다쳤다고 무조건 장수만 탓한다면 누가 앞장설 수 있겠느냐?”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호했고 주위에 있던 용기군 형제들 모두 또렷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옳은 말이긴 했으나, 만일 그 말이 윤세현의 입에서 나왔다면 병사 누구라도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하지만 힘없는 여자 장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지난밤 이경이 보여준 용맹함에 잠시 품었던 신뢰와 호감마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모두 산등성이에 엎드린 채, 긴장 속에 꼼짝없이 향 두 대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청지는 본래 빠른 몸놀림을 자랑했으나 이경이 정한 시간도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향이 다 탈 무렵, 청지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산을 뛰어 올라왔다. 그 얼굴에는 뜨거운 열기와 등줄기로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열다섯이 나갔으나, 돌아온 이는 열둘뿐이었다. 남은 세 명이 어디에 있는지, 굳이 묻는 이도 없었다. 연지는 여전히 근심을 감추지 못하고 이경을 바라보았다. 청지 또한 분노에 찬 듯했지만 이미 출정 전부터 이만한 손실은 각오한 터였다.오히려 열둘이라도 돌아왔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공주마마, 이제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청지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병사들은 이미 목숨 걸고 약 가루를 적진 곳곳에 뿌려 두었고 이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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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산꼭대기에는 거센 바람이 미친 듯 몰아쳤다.이경이 가장 먼저 약 가루를 꺼내 한껏 뿌렸다. 가루는 워낙 가벼워 손을 떠나자마자 거센 바람에 실려 한순간에 사라졌다.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가루가 죄다 북진군 진영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뿌려.”이경이 단호하게 말하자, 연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들고 있던 약 가루 두 봉지도 따라 뿌렸다. 가루는 뿌리는 족족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이렇게 깊은 밤에는 그게 어디까지 퍼졌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람 방향만 봐도 분명 북진군 진영을 향하고 있을 터였다.청지는 더 이상 불만을 보이지 않고 병사들에게서 약 가루를 받아 들어 묵묵히 흩뿌렸다. 나머지 병사들도 일제히 이경의 명령을 따라 산 아래로 가루를 뿌렸고 미리 준비한 수십 자루의 가루는 금세 동났다.이윽고 산등성이에는 죽은 듯한 고요가 다시 감돌았다.이경은 몸을 낮추어 산 아래 북진군 진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연지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조용히 머물렀고 청지와 병사들도 모두 잠자코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바로 그때, 청지가 갑자기 뭔가를 들어 던졌다.“이게 뭐지?”그의 팔 위를 타고 올라오던 커다란 지네였다.이경은 바로 표정이 달라지며 청지의 갑옷을 세차게 잡아당겼다.“네 몸에 약즙이 묻었어. 어서 갑옷 벗어.”“공주마마, 예의를 좀...”청지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쳤지만 그 순간 그의 발 아래에도 독사가 슬금슬금 기어 오고 있었다. 청지가 단번에 내공을 실어 뱀을 내리치자 그 자리에서 뱀은 산산조각이 났다.확실히 무공이 깊은 사내였으나 이경은 감탄할 겨를도 없이 다그쳤다.“어서 갑옷 벗으라니까. 약즙이랑 약 가루가 섞이면 그 냄새가 독물들을 모조리 끌어당겨.”“네?”청지는 순간 얼굴이 굳더니 이내 병사들을 둘러보았다.그러고는 명령을 내렸다.“모두 갑옷 벗어서 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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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뭐야? 이 급박한 시각에 천공 화살이 작동을 안 한다고? 그럼 세자 저하한테 신호도 못 보내는 거야?’이경은 청지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청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눈빛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이토록 결정적인 순간에 신호 하나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준비가 헛수고가 되는 셈이었다.청지 또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전날까지는 문제없던 화살이었건만 정작 써야 할 때 작동하지 않다니... 이 일을 어찌 해명할 수 있을까. 청지는 끝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이경은 날을 세워 다시금 쏘아붙였다.“지금 낯빛 붉힌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당장 세자한테 연락할 다른 방법은 없느냐?”청지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레 답하였다.“사람을 보내 급히 달리게 하겠습니다. 순조롭다면 향 두 자루 탈 시간 안에는 도착할 수 있사옵니다.”말을 마친 그는 즉시 하인 하나를 불러 말을 찾게 하였다. 하지만 북진군의 눈을 피하고자, 일행은 오래전 말을 놓아 보낸 터였다. 그 후로는 걸어서 길을 이어온 바, 다시 말을 구하려면 우선 말부터 찾아야 했다. 그조차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허나, 지금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이경은 청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그녀는 더욱 침착해졌다.“형제들 데리고 서쪽 샛길로 내려가. 북진 병사들 보이면 서쪽으로 유인하고 없으면 곧장 돌아가.”청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경을 홀로 남겨두고 돌아간다 한들, 윤세현 앞에서 이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비록 병사들이 이경을 달가워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몸 약한 여인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군인 청지가 곁을 비운다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그때, 이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야 연지랑 같이 동쪽으로 빠질 거야. 숨어 있다가 때 봐서 나갈게. 싸우고 피 흘리는 건 너희가 하라고.”그 말은 차가웠지만 오히려 평소답다는 생각에 청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청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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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청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얼굴빛이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머물던 산등성이 위, 작은 불빛이 하나둘 피어오르더니 바람을 타고 금세 거센 불길로 번져갔다. 구공주가 윤세현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대군 전체에 알리기 위해, 이 위험한 방법을 택한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도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너무도 위험했다.역시나, 근처를 순찰하던 북진군 병사들이 불빛을 발견하자마자 산 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여러 부대가 몰려와 산등성이로 치고 올라갔다.“장군님,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문주영은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장군님, 공주마마입니다!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청지는 분을 참지 못해 이를 악물었다.“이런!”하지만 그 분노는 오롯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구공주가 일부러 자신들과 병사들을 멀리 떼어놓은 것을,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경은 모든 위험을 홀로 감당할 각오로, 자신을 미끼 삼아 목숨을 걸었다.“어서 돌아간다! 공주마마를 구해야 한다!”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잔혹하다던 구공주가, 이토록 대의를 위해 몸을 내던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청지는 평생 처음으로 진정 ‘공주’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했다.“서둘러!”가슴이 타들어 가는 초조함에 그는 곧장 경공을 펼쳤다. 뒤따르던 문주영과 문한구는 따라잡지 못했다. 청지는 단숨에 산허리까지 올랐고 그곳에서 마주친 건 용기군 병사들이었다.“장군님!”병사 몇 명이 달려왔고 청지는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너희들에게 공주마마 곁을 지키라 하지 않았더냐? 지금 공주마마는 어디 계시느냐!”병사들은 당황해서 머뭇거리며 답했다.“공주마마께서 저희는 무공이 약해 짐이 될 뿐이라 하시며 내려가라 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물러났는데 설마 직접 산에 불을 놓으실 줄은...”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지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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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이날 벌어진 전투는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초나라 대군이 도착했을 때, 북진군 진영은 이미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진영 곳곳에는 맹독을 품은 뱀과 지네, 독개미, 전갈, 독거미가 득실거렸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기이한 독충들까지 사방에 퍼져 있었다.문정수가 이끄는 한 부대는 군영의 동쪽을 돌아 포위했고 윤세현은 천 기병을 이끌고 진영 북쪽을 굳게 지켰다.뒤이어 도착한 양 부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서쪽에서 포위를 완성하자 북진군은 불 속에 갇힌 쥐나 다름없었다.공격 따위 할 필요도 없었다. 초나라 대군은 모든 퇴로만 단단히 막았고 달아나려는 병사들만 골라 쓰러뜨리면 그만이었다.윤세현은 수년간 전장을 누볐지만 이렇게 손쉽게 승부가 난 전투는 처음이었다.북진군은 모두 합쳐 8만에 달했으나 절반 가까운 병사들이 독에 쓰러져 목숨을 잃었고 남은 자들은 각자 도망치다 초나라군에 의해 차례로 베어졌다.그나마 몇몇만이 간신히 북쪽으로 빠져나갔으나,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이번 싸움에서 초나라 군은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다. 몰락한 북진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패잔병이 되었고 도망친 자들은 다시 북진 땅으로 도망갔다.나머지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 치열했던 전투가 시작된 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세자 저하, 아직 공주마마와 청지를 찾지 못했습니다!”문씨 집안 형제들이 곳곳에 수색대를 보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윤세현의 얼굴은 핏자국과 땀방울로 얼룩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변함없이 서늘했다.그때 한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세자 저하, 산기슭에서 병사를 발견했습니다. 아직 목숨은 붙어 있습니다.”윤세현은 곧바로 말을 돌려 산기슭으로 내달렸다. 문정수도 따라잡으려 했으나 윤세현의 질주는 눈 깜짝할 새, 벌써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산 아래, 심하게 다친 병사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공주마마께서... 부상을 입으신 채, 청지 장군과 함께 동쪽 숲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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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청지는 연지의 배에 깊게 남은 상처를 바라보았다.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전장을 수없이 누빈 청지로서는 이 정도 상처는 지금 즉시 응급처치를 하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쉬어야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무리해서 계속 도망치거나 걸으면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대로 걷는 것 역시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청지는 연지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연지도 청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갈라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끝내 모든 감정이 한마디로 모아졌다.“공주마마를... 꼭 데려가 주세요.”이경은 자신의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고 연지의 상처를 감싸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손목이 꽉 잡혔다. 청지가 단호하게 그녀의 손길을 막아선 것이다.“따라오십시오.”청지는 더 설명하지 않고 이경의 팔을 잡아채더니 바로 숲속 더 깊은 곳으로 이끌고 갔다.“뭐 하는 거야, 당장 놔! 청지, 놓으라고!”이경이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청지는 미리 준비한 듯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뒤쪽에는 북진군이 계속 쫓아오고 있습니다. 연지에게는 더 이상 무리를 시킬 수 없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반드시 공주마마를 무사히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아니, 나는 연지를 두고 혼자 못 간다니까! 놔!”청지는 이경이 이렇게까지 완고할 줄은 몰랐다. 죽어도 동료를 두고 혼자 도망가려 하지 않는 모습에 속이 답답해졌다.마침내 그는 결심을 굳히더니 이경을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업었다.“내려놔! 당장 내려놔, 진짜로! 청지! 지금이라도 안 내려놓으면 가만 안 둬!”이경은 발버둥 치며 소리쳤지만 청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주영, 문한구 그리고 다친 병사 셋과 함께 재빨리 숲속을 빠져나갔다.거꾸로 매달린 채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이경은 애타게 뒤쪽을 바라보았다.연지는 나무에 몸을 의지해 간신히 일어서더니 한 손에 검을 쥐었다.검 끝을 따라 뚝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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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아까 오는 길에 약초를 좀 뜯었어. 효과가 대단하진 않아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이경은 바닥에 주저앉아 방금 전에 떨어뜨린 천 조각을 주워 들고 약초까지 손에 쥐었다. 아까 청지 어깨에 들려 숲속을 내달리던 일도, 연지가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자신을 떠밀던 순간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연지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자 이경이 인상을 찌푸렸다.“연지야, 멍하니 뭐 해? 얼른 누워, 내가 상처 좀 봐줄게.”“공주마마...”연지는 목이 메었다. 가슴 한켠이 시리게 아파,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이 자리에 더 머물면 이경이 위험해질 거라는 걸 뻔히 알았으나, 마음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조금 전 다시 이경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하마터면 남자답지 않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뻔했다.“얼른 누워! 적들 금방 따라온다, 서둘러야 해.”이경이 조심스레 연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상처만 아니었으면 답답한 네 녀석을 그냥 발로 걷어찼을지도 모르는데...’“빨리 누워!”연지는 결국 이경의 말에 순순히 눕고 말았다.이경은 한 번에 연지의 옷을 찢어 상처를 드러냈다. 역시나, 살이 벌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바늘도 실도 시간도 없었고 게다가 응급 도구마저 지난번 장군부에서 모두 잃어버린 뒤였다.“공주마마...”“조용히 있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이경은 약초를 힘껏 비벼 즙을 짜내고 그대로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좀 아플 거야. 참아. 제대로 소독도 못 하니까, 피만 대충 닦고 약 바르고 감아줄 수밖에 없어.”연지는 옆에서 이경의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온통 흙과 피에 얼룩졌는데도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연지는 잠시 손을 들어 이경의 얼굴을 만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낮은 신분의 무사에 불과하니까.“공주마마, 적들이... 정말 곧 따라올 것 같습니다.”“뭘 그리 겁내? 죽으면 다시 환생하면 되지.”이경은 대수롭지 않게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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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이경은 몸을 돌려 수백 명이나 되는 북진군을 정면으로 마주 섰고 또렷한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 곁에는 어느새 용기군 군사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길게 말하지 않았고 이경이 이 자리에 남기로 한 이상, 자신들도 목숨을 내걸 각오였다.“고맙다.”이경이 짧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말했다.청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공주마마, 오히려 제가 고맙죠. 공주마마께서 보여주신 기개와 용기에 저 또한 크게 감복하였사옵니다.”이 말을 하고는 자연스레 그녀를 등 뒤로 보호했다.이경은 대답 대신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섰고 청지가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공주마마, 용맹하신 건 이제 모두가 알았으니 부디 연지 곁으로 돌아가 계시옵소서.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지요.”“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언제나 나뿐이야.”청지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이경, 그저 공주라 불리는 이가 어찌 이렇게 군인다운 기상을 지녔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온몸에서는 용사의 위엄이 뚜렷이 드러났다.찰나와도 같은 그 순간, 이경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에 청지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뜨거운 피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그럼... 공주마마, 저희가 곁에 있겠습니다. 함께 싸우지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수백 명의 북진군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이경은 옆에 누워 있는 연지를 힐끔 보며 말했다.“연지야, 한 번만 더 일어나면 가만 안 둘 거야. 꼼짝 말고 있어.”연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움직이려다가는 진짜 상처가 더 깊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이경을 바라보는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그때 청지가 칼을 한 바퀴 돌려 이경에게 건넸다.“공주마마, 받아주시옵소서.”이경은 날렵하게 검을 받아 쥐었다. 청지가 손바닥을 한 번 내저으니 가장 가까이 다가오던 세 명의 북진군 병사가 그 기운에 맞아 피를 토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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