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Chapter 71 - Chapter 80

100 Chapters

제71화

청지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깨달았다. 아무리 이경이 검을 잘 쓴다 해도 내공만큼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었건만 무공의 깊이가 이렇게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오히려 그녀에게 보호를 받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청지는 분노를 실어 한 손바닥을 내리쳤고 그 기세에 세 명의 북진군 병사가 그 자리에서 숨이 끊겼다. 곧장 다시 칼을 들어 싸움 속으로 뛰어든 청지는 적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만 같아 불안함을 느꼈다.남은 세 명의 용기군 군사도 쓰러지고 이제 남아 연지를 지키는 이는 청지와 이경, 그리고 문주영과 문한구 단 넷뿐이었다. 모두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중에서도 문한구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문한구는 이미 창백한 얼굴로 이경 곁을 지키고 있었고 점점 적들이 몰려들자 한 번에 두 명을 벤 뒤에 힘이 다 빠져 그대로 쓰러지며 연지 곁에 쓰러졌다.“공주마마, 제발 이 무모함을 거두시옵소서!”문한구는 숨을 몰아쉬며 이경이 자신을 뒤로 밀어 넣고 자신은 오히려 등 뒤를 적에게 드러내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북진군 병사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아무리 베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이미 마음속으로는 희망을 접고 있었으니 절망이 이 밤의 어둠처럼 깊고 무겁게 이들을 짓눌렀다.오랜 시간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던 이경 역시, 마침내 진이 다 빠져 무릎이 꺾였다. 아무리 버텨도, 결국 여인의 몸으로 이 긴 사투를 견디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청지는 두 명을 겨우 베어내며 이경 앞으로 달려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공주마마, 이제 제 뒤로 물러나시옵소서.”이제 이들 가운데 온전히 힘을 쓸 수 있는 이는 청지뿐이었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적을 상대하며 그의 검에도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이제는 한 번 칼을 내질러도 내공이 점점 약해져 예전만큼 위력적인 일격을 내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적을 베어나갔다.이경은 더 이상 버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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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이경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쥐어짜며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산길을 내달렸다.등 뒤로는 수없이 많은 북진군이 거센 기세로 추격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마음을 굳혔다. 이곳에 적을 최대한 끌어들일수록 청지와 연지, 그리고 문주영과 문한구에게 그만큼 더 많은 생존의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온몸이 이미 한계에 이른 줄도 모르고 이경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숲을 헤치고 산허리까지 올랐다.마침내 산봉우리까지 오르자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앞에는 까마득한 절벽, 뒤에는 수백의 적병이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고 있었다.또 한 번, 운명처럼 죽음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 것이다.이경은 잠시 눈을 감고 이제 죽음조차 더는 두렵지 않을 줄 알았건만 막상 이 순간이 닥치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북진군에게 붙잡혀 모욕을 당하며 죽는 것보다는 스스로 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벼랑 끝에는 거센 바람만이 울부짖고 있었다. 혹여 이대로 떨어진다면 다시 스물한 세기,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품었으나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이를 악물고 몸을 내던졌다.짧은 생애 동안 마주했던 수많은 얼굴과 일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쳤다.변함없는 충심으로 자신을 지켜주었던 연지와 비록 버릇없고 고집스럽긴 했지만 끝까지 곁을 지켜준 초아 처음에는 멸시하던 백성들이 점차 마음을 열던 모습, 그리고 끝내 마음속을 가득 메운 그 사내. 처음부터 그녀의 삶을 흔들었던 그 사람, 처음에는 모욕과 증오만을 남겼지만 언제부턴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버린 바로 그 사람.‘다음 생에는 부디,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그 순간,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던 몸이 이내 위로 떠오르는 듯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믿기지 않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니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 남자의 얼굴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눈앞에 나타났다.‘이럴 수가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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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이경은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기절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잠든 것이었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죽을 고비를 넘기고 더 이상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안전 속에 몸을 맡긴 순간, 밀려오는 피곤함이 파도처럼 그녀를 삼켰고 희미한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가만히 안아 말 위에 태우던 감각, 그리고 그 든든한 품이 내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이경은 그 품을 껴안고 마치 어릴 적 혼자였던 밤마다 꼭 끌어안던 곰 인형처럼 얼굴을 그 남자의 가슴에 묻은 채, 차갑고 단단한 갑옷 너머로 전해지는 힘찬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세상 근심 모두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공주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귀가에 익숙한 초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이제야 깨어나셨사옵니다! 소인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르시지요. 혹 어딘가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상처가 혹여 아직도 아프진 않으십니까? 이리도 크게 다치셨으니 분명 고통스러우실 터, 부디 두려워 마시옵소서. 곧 낫게 될 것이옵니다. 허나, 혹여 흉터가 남는 건 아닌지... 공주마마께서 어찌하여 이런 고생을 하셔야 하는지, 참으로 가엽습니다. 전쟁이란 본디 사내의 일인데 세자 저하께서 너무하신 게 아닙니까...”이경은 겨우 손을 들어 휘저으며 기운이 없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 헛웃음을 지었다.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더니 초아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연지... 연지는 어디 있느냐?”초아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급히 대답했다.“연지라 하시면... 지금은 방에서 쉬고 있사옵니다. 혹시 불러오라 하시면 소인이 곧장 전하겠나이다...”“아니, 굳이 부르지 말고 그냥 쉬게 해. 쉬고 있다면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마음이 놓이자 이경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초아는 이경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다시 속삭였다.“공주마마께서 연지의 상처를 염려하시는 겁니까? 어찌 이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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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윤세현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전장 한가운데를 뚫고 돌아온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그의 얼굴에는 피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갑옷을 벗고 검은 장포를 입은 모습은 오히려 명문가 자제처럼 단정하고 기품이 넘쳤다.이경은 속으로 괜히 분했다. 아까 초아가 속삭이듯 전해주었다.“궁 안에 소문이 자자하옵니다. 어젯밤 세자 저하께서 참월도를 휘둘러 베어낸 북진군이 천 명은 족히 넘는답니다.”실상은 몇이나 베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작 윤세현은 이렇게 한 점 흐트러짐 없고 자기는 겨우 수십 명 겨우 상대했을 뿐인데 혼이 다 빠져버렸으니 억울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그래도 초아 덕분에 머리도 추스르고 얼굴에 묻은 피도 닦아내어, 창피할 만큼 몰골이 아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세자 저하.”초아가 서둘러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고, 얼굴은 감히 들지도 못한 채,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섰다.윤세현은 인사를 그만두라는 손짓과 함께 곧장 시선을 이경에게로 돌렸다. 언제나 도도하고 기운차던 이경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기운이 다 빠진 듯 침상에 기대 있었다. 강한 척하던 이경의 나약한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이경은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여전히 온몸이 무거워, 눈동자에도 힘이 없었다. 윤세현이 아무 말 없이 그녀 곁에 다가서자 초아는 재빨리 예를 갖추고 조용히 밖으로 물러나 문을 닫았다.방 안에 조용한 적막이 깔렸다. 윤세현은 침상 곁에 잠자코 서 있었고 이경도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길이 너무도 또렷해, 오히려 이경이 더 불편해졌다.그때,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저건... 내 가방...”이경은 힘없이 손을 내밀었으나, 침상에 앉은 채라 닿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칠 뻔했다.바로 그때, 넓은 손이 허공에 그녀를 가볍게 떠받쳐주었다. 고개를 들자 윤세현이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경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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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윤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어지러웠다. 무엇이 그리 불편한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서운함이 가슴 한쪽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이경은 조심스럽게 가방을 가슴에 안고 말했다.“이것들이 모두 사람을 살리는 도구라고 말하면 정말 믿으시겠습니까?”도구 하나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잃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손에 넣은 듯 기쁨이 얼굴에 번졌다. 얼마 전, 침상에 놓인 봉합침과 수술칼을 보고 병사들이 자신이 진정호를 해치려 한다고 오해했던 날, 연행되어 이 가방까지 모두 빼앗겼을 때, 다시는 찾지 못할 줄로만 알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벅찼다.윤세현은 그녀가 손에 쥔 작은 도구들을 잠시 바라보다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네가 이걸로 진 장군을 살렸다는 거냐?”이경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예, 이 도구가 아니었으면 진 장군의 몸에 박힌 화살촉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윤세현은 잠시 눈길을 거두지 않다가 조용히 묻는다.“아직도 화가 나느냐?”이경은 순간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다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제 다 지난 일이니 그리 마음에 두진 않습니다. 괜히 성을 내면 저하 앞에서 괜스레 투정 부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그러나 애써 감추려 해도 살짝 나와 있는 아랫입술이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세현이 잠시 말이 없더니 낮게 중얼거렸다.“미안하다.”이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저하께서 굳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하라면 누구든 그리 했을 겁니다.”윤세현은 더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다, 탁자 위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 침상 곁에 앉았다.이경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저하께서 손수 약을 먹여주시려는 겁니까?”자신도 모르게 농담조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문득 민망함이 밀려왔다. 곧 손을 내밀어 약그릇을 받으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만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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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제가 어찌 그 정도 쓰라림도 견디지 못하겠습니까?”이경은 매서운 눈길로 윤세현을 바라보았다.응석받이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경은 스스로 약그릇에 입을 대고 남은 약을 단숨에 다 들이켰다. 그러나 약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미간이 점점 더 깊게 찡그려지고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맺혔다. 정말이지, 이렇게 쓴 약은 평생 처음이었다.참으려 해도 결국 한 방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저... 저 운 거 아닙니다! 정말, 이 약이 너무 써서 그런 것뿐입니다.”당황한 이경은 힘도 없는 손으로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 애썼다.이렇게 남 앞에서 더구나 윤세현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창피하게 느껴졌다. 본래 남 앞에서 눈물 보이는 걸 제일 싫어했던 터라, 이 순간이 더욱 견딜 수 없었다.그러는 사이, 머리 위로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조용히 떨어졌다.“허...”이경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윤세현을 바라보았다.‘저 사람이... 웃었어...’생각지 못하게 피어오른 미소는 뜻밖에도 따스했고 그 검은 눈동자에는 이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빛이 맴돌았다. 윤세현이 웃는 얼굴이 이토록 따뜻해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윤세현 역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채 한순간 멈칫했다. 그렇게 웃음짓는 일,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아버지가 전장에서 숨지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진 후로 진심으로 웃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던 그였다.방금 떠오른 미소는 이경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마치 아이처럼 순수하게 다가왔기에 저절로 나왔던 것이다.아직도 이경의 뺨에는 눈물 한 방울이 남아 있었다. 윤세현의 긴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이경의 뺨을 향해 올랐다가 막상 닿기 직전, 그는 곧 손을 거두고 약그릇을 조용히 내려놓았다.그가 일어나는 순간, 방금의 머쓱함과 어색함은 모두 감춰졌다.이경은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침 윤세현도 그녀를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방 안의 공기는 다시금 묘하게 얼어붙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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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윤세현의 말은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이경은 잘 알고 있었다.“알겠습니다, 저하의 약속... 받겠습니다.”세자 저하의 약속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니 어쩌면 황제의 맹세보다도 더 귀한 것일지 모른다.이런 기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냥 넘어갈 리도 없었다.“다만 지금은 당장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언젠가 꼭 필요할 때가 오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윤세현은 짙은 눈썹을 더 깊게 찌푸렸고 분명 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이경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설마 저하께선 누군가에게 진 빚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지금 당장 갚으라고 다그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건 은혜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도질과 다름없지요.”윤세현은 잠시 침묵하다, 이내 조용히 말했다.“그래, 네가 원할 때 말해라.”그렇게 대화는 일단락된 듯했으나 이제 그가 이경에게 휴식을 명하고 돌아갈 때가 아닌가 싶었건만 윤세현은 아무 말도 없이, 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이경은 가슴이 괜스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해야 할 말은 다 했는데도 그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쩐지 당황스럽고 손끝에 조금 남아 있던 힘마저 자기 옷자락만 꼭 움켜쥐는 데 쓸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윤세현이 긴 다리로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이경은 고개를 들 용기도 시선을 마주할 힘도 없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이리 가까이...?’별다른 위협이나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늘의 윤세현은 평소와 달리 적당히 온화하면서도 두 사람 모두 어디서부터 어색해진 건지 모를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드디어 그의 신발 끝이 침상 곁에서 멈췄다. 이경은 심장이 두 배로 빨리 뛰는 것만 같았고 간신히 되찾은 힘마저 손끝으로 자신을 붙잡는 데 쏟을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윤세현이 몸을 굽히며 다가오자 이경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침상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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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진정호는 감사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경의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아, 진정호와 임수연, 그리고 장군부의 병사들은 모두 바깥 병풍에 머물러야 했다.얇은 병풍 너머로도 침상 곁에 우뚝 선 윤세현의 그림자가 또렷이 보였다.임수연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세자 저하께서 우리 공주마마를 이렇게 아끼시는구나.’괜히 자신이 이서영에게 휘둘려 공주와 세자 사이에 오해만 깊어지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었다.“진 장군, 몸은 좀 어떠신가요?”이경은 윤세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진정호가 곧장 무릎을 꿇었고 임수연과 장군부의 병사들도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이경은 잠시 윤세현을 바라보았다. 낯선 세상에 와서 남의 절을 받는 일이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본래 21세기에서 그런 예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였다.윤세현은 이경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고 바깥을 향해 또렷하게 말했다.“공주께서는 이런 의식은 좋아하지 않으시니 모두 일어나라.”하지만 진정호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만 더욱 깊이 숙였다.“공주마마의 은혜로 목숨을 건져 이 자리에 다시 섰으니 공주마마는 제게 둘도 없는 은인이십니다. 이 무릎 꿇음이야말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 여깁니다.”임수연 역시 머리를 바닥에 붙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공주마마, 지난날 소인이 사람을 잘못 믿어 공주마마를 오해하고 원망만 품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나이다.”병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목소리를 모았다.“저희가 죄를 지었으니 부디 벌을 내리시옵소서!”감사의 인사와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이경은 자연스레 윤세현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선 자신보다 윤세현이 훨씬 노련할 터였다.윤세현은 이경과 시선을 맞추고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들 모두 네게 무례했던 자들이니 네가 벌을 내린다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이경은 일부러 그의 눈을 피하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저하께서도 저를 오해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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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윤세현은 그날 진정호의 부상을 걱정하느라, 현장에 있던 여자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그 탓에 이서영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경을 모함할 때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흘려보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일이 컸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임수연은 윤세현의 분노에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끝내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그날 이서영 현주님이 모두 앞에서 감히 공주마마께 이런 더러운 누명을 씌웠사옵니다. 저 역시 어리석게도 그 일에 가담했던 죄인입니다. 다만, 간절히 바라는 건... 앞으로는 부디 공주마마께서 받으신 누명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사실 세간에 떠도는 좋지 않은 소문들, 많은 것이 일부러 누가 만든 헛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경은 지난날의 자신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의 이경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윤세현은 한동안 묵묵히 침묵하다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렸다.'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귀로만 듣고 판단해 왔구나...'특히 혼례날, 비록 이경이 약을 썼던 일에 분노했으나 정작 그날 이경은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고 있었다.“이제 알겠으니 그만 나가 봐.”윤세현이 조용히 손을 내저었다. 임수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를 조아린 뒤 조용히 퇴장했다.그녀는 이 기회를 빌려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구공주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의 무지와 오해를 마음 깊이 뉘우칠 뿐이었다.임수연과 초아가 모두 나간 뒤, 방 안에는 다시 이경과 윤세현만이 남았다. 침묵이 흘렀으나 이번에는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만이 감돌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이경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옵니다. 오해든 누명이든, 세상을 살다 보면 흔히 겪는 일 아니겠사옵니까. 다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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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아직 문을 나서기도 전에 윤세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방 안에서는 이경과 초아의 목소리가 은근히 새어 나왔다.“공주마마, 세자 저하께서는 공주님의 지아비이시옵니다. 어찌 좋아하지 않으실 수 있단 말씀이옵니까?”“지아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옛날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뭘 했는지도 잘 모르고 혼례를 올렸던 거야. 정작 그때 일은 나도 흐릿하게밖에 기억이 안 나.”이경의 목소리에는 오히려 장난기 어린 웃음이 묻어 있었고 듣는 이가 민망할 만큼 아무런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젠 머리도 말짱해졌거든.”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게다가 성질 고약하고 말도 고운 데가 하나 없는 그 남자보다는 내 수술칼이 백 번은 더 귀엽다.”이때 복도 끝에서 음식이 한가득 담긴 쟁반을 든 문정수가 멈춰 섰다. 그의 앞에 선 윤세현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잔뜩 구겨져 있었다.“저하...”“너 혼자 들어가.”윤세현은 차갑게 한마디만 남기고 이번에는 정말로 자리를 떴다.문정수는 어쩔 수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윤세현은 곱게 말하는 성격은 아니어도 이경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이렇게 직접 부엌까지 가서 음식까지 챙겨왔건만 이경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 했다.‘둘이 혼례까지 치른 사이인데 싫은 게 말이 되나? 세자 저하 말고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지?’결국 문정수는 복도를 따라 방 앞으로 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문을 연 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문 장군님이 직접...”“사실은 우리 저하께서...”문정수는 말끝을 흐리다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 부디 잘 전해드리게.”그는 음식을 건네고 조용히 물러섰다.초아는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웃으며 말했다.“공주마마, 방금 먹고 싶다 하신 걸 누가 들었는지 이렇게 바로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한편, 이서영은 지방관의 관저에 머무르고 있었다.장군부에서는 더 이상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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