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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김수희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계속 주시우를 놀렸다.[지금도 문제집 푸는 게 제일 재미있어?]주시우는 곧장 답장을 보내왔다.[문제집 푸는 것도 재밌죠. 하지만 결혼도 꽤 괜찮네요.]많이 바뀐 아들의 모습에 김수희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때 신예린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김수희는 사진을 많이 찍어 주시우에게 보냈다.잠시 뒤, 주시우가 곧바로 100만 원을 보내왔다.“엄마, 수고 좀 해줘요. 이걸로 계산하면 돼요.”하지만 김수희는 그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내 며느리 옷을 내가 사주겠다는데 네가 왜 껴?]주시우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신예린이 어떤 옷을 입든 김수희는 예쁘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러면서 입어본 옷을 모두 계산하려고 했는데 그때 신예린이 김수희의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어머님, 저 두 벌만 살게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김수희는 머뭇거리는 신예린을 보더니 잠깐 생각에 잠기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두 벌만 사자. 예린아, 옷 갈아입고 나와. 계산대에서 기다릴게.”신예린은 의심조차 하지 않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그러자 김수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예린이 방금 입어본 옷 전부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이거 다 계산해 주세요.”계산대에는 직원 둘이 계산을 도와주고 있었다.옆에 있던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옷을 잔뜩 들고 온 김수희를 보더니 눈에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들이 곧 생일이라 이 매장 옷을 몇 번이나 사달라고 조르던 참이었다. 이 매장 옷은 보통 몇만 원 선이었지만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한 건 20만 원이 넘었다. 조금 전 결제를 마치고도 여전히 가슴이 쓰렸다.하지만 김수희가 들고 있는 건 전부 여자 옷이었다.‘저걸 다 사려면 돈이 꽤 들 텐데...’직원들이 아직 계산을 마치지 못했다.그녀는 그 틈을 타 김수희에게 말했다.“요즘 애들은 돈 귀한 줄을 몰라요. 하늘에서 돈이 공짜로 떨어지는 줄 알죠.”처음에 자기한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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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임정희는 씁쓸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신예린이 조심스레 밖으로 걸어 나왔다.김수희는 신예린을 보더니 봉투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기분이 좋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다 사버렸어.”신예린을 위해 산 옷이면서도 혹시라도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 순간 신예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김수희를 덥석 안아 버렸다.갑작스러운 포옹에 김수희는 조금 놀랐지만 곧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별일 아닌데 뭘. 옷 몇 벌 사준 것 가지고 왜 그래.”그러나 신예린이 고마움을 느꼈던 건 단순히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느끼게 된 따스한 ‘엄마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렸다.용기를 내어 김수희를 끌어안은 순간, 신예린은 마음속을 짓누르던 긴장과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김수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한편, 임정희는 화장실에서 나올 때 또다시 매장 앞에서 김수희를 마주쳤다.조금 전, 자신을 창피하게 만든 바로 그 여자였다.임정희는 그녀가 매장을 나서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네가 아무리 잘나봐라. 결국 며느리랑 사이 틀어질 게 뻔한데.’그렇게 속으로 저주를 내뱉던 순간, 익숙한 얼굴이 김수희의 옆에 나타났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로 말이다.임정희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는 다시 확인했다.정말 신예린이었다.‘그럼 저 여자가 시어머니인가?’임정희는 급히 뒤쫓아가며 목소리를 높였다.“예린아!”그때 신예린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지는 듯했지만 곧 김수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임정희는 분명 신예린이 자기 목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신예린은 못 들은 척 그녀를 무시했다.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임정희는 불과 몇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도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엘리베이터 안, 김수희가 물었다.“방금 누가 너 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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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신예린의 목소리에는 애교가 배어 있었다. 꾸며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이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하루 만에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여기서 끝이 아니었다.식사 내내 김수희와 신예린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머리를 어떻게 묶으면 예쁜지, 어느 네일샵이 잘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심지어 김수희는 예전에 임신했을 때 겪었던 일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참, 내가 오일 하나 챙겨왔거든. 배가 점점 불러오면 튼살이 잘 생겨. 이거 바르면 효과 좋아. 3개월 됐으니까 지금부터 쓰면 딱 좋을 거야.”김수희는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 주시우에게 건네주었다.“앞으로 예린이 배에 오일 발라주는 건 네 몫이야.”주시우는 곧바로 받아 들며 미소를 지었다.“네. 고마워요, 엄마.”옆에 있던 신예린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주시우가 배에 오일을 발라주는 상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안 돼. 너무 민망하잖아. 오일은 혼자 발라야지.’저녁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날은 이미 어둑해졌다.주차장에서 헤어질 때, 김수희가 신예린을 따뜻하게 끌어안았다.“오늘 정말 즐거웠어. 사실 전부터 언젠가 너랑 같이 쇼핑도 하고 밥도 먹고 싶었어. 그런데 또 혹시나 나랑 잘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 그런데 이제는 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그 말에 신예린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김수희의 품에서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신예린은 조심스레 속마음을 꺼냈다.“저야말로 복 받은 거죠.”주시우의 가족은 원래부터 좋은 사람들이었다. 설령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주시우의 아내가 되었더라도 그 사람에게 똑같은 존중과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이런 사랑이 가득한 집안에 자신이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예린에게는 무엇보다 큰 축복이었다.김수희가 떠나고 난 뒤, 신예린과 주시우도 차에 올랐다.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사이, 주시우는 옆자리에 앉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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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주시우의 손끝이 신예린의 잠옷에 스쳤다.그제야 신예린은 몸을 움찔하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 그의 손을 떨어뜨렸다.‘이렇게 바로 시작한다고? 부끄럽지도 않나 봐.’정색한 얼굴의 주시우를 보자 신예린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먼저 누울게요.”주시우는 손을 거두면서 신예린이 얌전히 침대에 누워 몸을 맡기는 모습을 지켜봤다.조심스레 옷자락을 걷어 올리는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 안이 다 보일까 봐 한껏 신중했다.옷이 살짝씩 젖혀질 때마다 가녀린 허리선이 서서히 드러났다.매끄럽게 이어진 곡선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은은한 조명 아래, 눈처럼 하얀 피부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둥글게 불러온 아랫배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졌고 매끈한 피부 위로 은근한 광택이 번져 눈길을 붙잡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시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그리고 눈빛은 짙게 가라앉았다.아이와 교감하고 싶은 마음도, 신예린과 가까워지려는 바람도 모두 진심이었다. 그래서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오일만 발라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신예린의 모습은 그 이상의 감정을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했다.정작 신예린은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듯했다.주시우는 심호흡을 하고서는 입을 열었다.“시작할게.”신예린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주시우는 오일을 덜어낸 후 손으로 따뜻하게 비비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그 순간, 신예린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방금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주시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배꼽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점점 넓혀가야 한대.”주시우는 전문 마사지사처럼 손을 움직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따뜻한 손바닥이 신예린의 배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정성스럽게 발라진 오일 덕분에 그의 손길은 한층 더 매끄럽고 섬세해졌다.침대에 누워있던 신예린은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너무 민망하잖아...’주시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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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됐다.”주시우의 낮은 목소리가 신예린을 현실로 끌어왔다.갑작스레 몸을 숙인 주시우는 그녀의 불러온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신예린은 너무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곧이어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 엄마 뱃속에서 얌전히 있어. 아빠랑 엄마가 널 기다리고 있단다.”주시우의 목소리는 봄 햇살처럼 따스했다.그 말은 신예린의 마음을 단번에 흔들어 놓았다.콧등이 시큰해지고 눈가가 젖어들자 주시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왜 울어?”그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신예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신예린은 행복 앞에 서면 늘 불안해졌다.‘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마음속 깊은 곳에서조차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했기에 늘 두려움이 따라왔다.혹시 언젠가 주시우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런 두려움이 쌓여, 정작 그의 앞에서는 마음을 다 내어놓지 못했다.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주시우가 다정하게 물음을 건네왔지만 신예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토록 사소한 불안조차 감히 그의 앞에서 꺼내놓을 수 없었다.그녀는 말없이 촉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하지만 신예린의 눈동자는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무언가를 느낀 듯 주시우는 몸을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신예린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둘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주시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눈앞에서 또렷하게 보였다.“아까는 아가한테만 뽀뽀해서 서운했구나.”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울렸다.두 사람의 숨결이 스치자 신예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그럼 보상할 기회를 줄래?”주시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그의 깊은 눈빛은 신예린의 마음을 송두리째 끌어당겼다.차갑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코끝에 은은한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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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욕실에서 나온 주시우의 몸에서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침대 위의 신예린은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으며 이미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주시우는 그녀가 분명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주시우는 한동안 침대 곁에 서 있다가 몸의 냉기가 조금 가신 뒤에야 이불을 들추고 자리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신예린을 끌어안자 품에 안긴 작은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떨렸다.“추워?”주시우는 방금 찬물로 샤워한 탓에 전해진 냉기가 신예린을 놀라게 한 줄 알았다.“아... 아니에요.”신예린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사실은 주시우의 손길이 너무 의식돼 얼굴이 화끈거렸다.신예린은 주시우가 그런 일을 했던 손으로 자신을 안는다는 게 왠지 부끄럽고 어색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마치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참... 난 왜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거야...’신예린은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신예린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지자 주시우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더는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주시우 역시 방금 단순한 입맞춤만으로도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주시우도 너무 민망해서 당황했지만 욕실에서 찬물로 몸을 식히자 욕망이 조금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 열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오히려 신예린을 향한 욕망은 분명히 신예린을 좋아한다는 마음의 증거였다. 다만 주시우는 여전히 그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그러자 신예린이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게 아니에요.”“그럼 뭐가 아니란 말이야?”주시우가 시선을 낮추자 신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했다.“저도... 그냥 들은 말인데... 그런 걸 참는 게 힘들다고 해서요.”신예린은 거의 속삭이듯 내뱉는 말이었지만 주시우는 바로 이해했다.“그래서... 우리 그냥 앞으로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키스 같은 거...”신예린은 부끄러워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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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병원을 한 바퀴 돌아봤지만 앉을 자리는 이미 가득 차 있었기에 결국 두 사람은 복도 한쪽에 나란히 서서 의사가 이름을 부르길 기다렸다.오가는 임산부들을 바라보던 신예린은 문득 어제 김수희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미소를 눈치챈 주시우가 고개를 돌려 의아한 듯한 시선을 보냈다.신예린은 목소리를 낮췄다.“어제 어머님께서 교수님의 어릴 적 얘기를 좀 해 주셨어요. 그땐 다들 교수님이 혹시 너무 일찍 연애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서른 될 때까지도 결혼 소식이 없어서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면서요. 이제는 진짜 늦둥이 보신 거죠.”주시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도대체 어머니는 왜 그런 얘기까지 다 하셨을까.”“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어요.”입가에 옅은 미소를 번진 채 주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정할 게 있어. 첫째, 난 아직 스물아홉이고 이미 아내도 있으니까 서른 되기 전에 아이가 태어날 거야. 둘째, 설령 서른이 넘더라도 그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게 늦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 남자는 여자를 따라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려. 서른이면 정신적으로도 더 단단해지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있어야 가족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뜻밖의 진지한 대답에 신예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요즘 부모들이 자식들 빨리 결혼하라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신예린의 동창 중에는 벌써 집안에서 혼인 이야기가 오가는 친구들도 있었다.하지만 겨우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인생이 뭔지도 모른 채 서둘러 결혼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그런 생각을 하자 신예린은 괜히 머쓱해졌다.“저... 저는 너무 성급했나 봐요.”그날 밤, 신예린은 깊이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주시우와 결혼을 선택했었다.운이 좋게도 상대가 주시우였으니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진흙탕 같은 결혼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주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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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주시우가 자리를 뜨고 난 뒤, 신예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차례가 오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가늠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시우가 다시 돌아왔고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래 서 있어서 힘들지 않아?”“아직은 괜찮아요.”신예린은 솔직히 대답했고 배가 아직 많이 불러오지 않았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아까 봤던 임산부는 이미 배가 한참 나왔는데도 품에 또 한 아이를 안고 있었다.그때 경호원 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고 신예린은 그들이 곧장 대기석에 앉아 있던 몇몇 남자들에게 다가가는 걸 지켜봤다.“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임산부를 위한 자리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보안 직원이 정중하게 말하자 불만 가득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빈자리가 생기자 많은 임산부가 배를 감싸며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종아리를 주무르며 안도의 숨을 쉬는 이도 있었고 아이를 안은 채 힘겹게 서 있던 임산부 역시 자리에 털썩 앉아 아이를 달랬다.신예린은 어쩐지 예감이 들어 곁눈질로 주시우를 바라봤다.주시우는 태연한 얼굴로 벽에 붙은 의료 민원 신고 전화 안내문을 가리켰다.“맞아. 내가 신고한 거야.”신예린은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주시우가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앉을래?”하지만 마침 다른 임산부가 다가오는 걸 본 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괜찮아요. 다른 분들이 앉으셔야죠. 게다가 이제 곧 우리 차례잖아요.”주시우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의사의 부름을 받고 신예린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초음파 탐촉자가 배 위에 닿자 리듬감 있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쿵... 쿵... 쿵...”“들어봐. 아기 심장 소리야.”옆에 서 있던 주시우가 속삭이자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화면에 고정됐다. 작은 몸짓과 희미한 이목구비가 선명히 보였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흐릿하게만 들리던 심장 박동은 이번에는 힘차고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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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송지유가 신예린이 얹어 놓은 손을 홱 치우며 킥킥 웃었다.“정말 신기해. 네가 벌써 임신 4개월 차라니... 그런데 겉으로는 전혀 티가 안 나잖아. 교수님이랑 매일 붙어 다니면서도 아무도 눈치 못 챘다니 놀라워.”“방금 산부인과 다녀왔는데 다 정상이라 했어.”신예린이 담담히 대답했다.“아휴, 너희 아기는 효자네. 임신해도 티도 안 나고 엄마 고생도 안 시키고. 나도 나중에 임신하면 너처럼 살만 안 쪘으면 좋겠어. 인터넷 보니까 어떤 사람은 수십 킬로씩 찐다더라.”“그건 체질 따라 다르지.”신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찡그리며 덧붙였다.“사실 나도 좀 쪘어. 내 얼굴 보면 알잖아.”그러더니 신예린은 자기 얼굴을 쑥 들이밀며 보여 주었다.신예린의 피부는 여전히 곱고 윤기가 돌았고 오히려 건강하게 가꿔서인지 희고 매끈한 살결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아, 안 되겠다. 너무 만져보고 싶어.’순간적으로 충동이 치밀어 오른 송지유는 손을 뻗어 신예린의 볼을 꼬집듯 문질렀다.“...”신예린은 벌컥 송지유를 째려봤다.‘쳐다보기만 해도 민망한데 감히 손까지 대다니...’송지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이제는 이런 것도 주 교수님밖에 못하는 거야? 내가 하면 안 돼?”‘도대체 얘는 왜 하필 그런 말만 골라 하는 건지...’신예린은 얼굴이 벌게져서 잽싸게 펜으로 송지유의 팔을 툭툭 치며 혼내기 시작했고 송지유는 낄낄대며 도망치듯 피하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다음 수업이 주 교수님 강의잖아? 내가 가서 네가 날 괴롭혔다고 말해 버릴 거야. 그러면 교수님도 네 본색을 알게 되겠지.”잠시 뒤, 교실.강단 위에 선 주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강의실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한가운데 서 있는 송지유는 속으로 뼈저리게 후회했다.‘내가 괜히 신예린한테 괴롭힘당하고 어쩌고 떠들었지... 이런 분위기에서 지적당할 줄은 몰랐잖아...’옆자리의 신예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책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웃음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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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저녁 무렵, 신예린은 살금살금 주시우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 앉아 있던 신예린은 주시우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았고 그 시선을 눈치챈 주시우가 운전대를 잡은 채 무심히 물었다.“왜 그렇게 날 쳐다봐?”신예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교수님을 보면... 마치 전혀 다른 교수님이 두 명 있는 것 같아요.”뜻밖의 말에 주시우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두 명이라니? 무슨 뜻이야?”“수업할 때랑 평소랑 모습이 많이 달라요.”“어떻게 다르다는 거야?”신예린은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다.“수업할 땐 좀... 무서워요.”주시우의 눈빛이 스치듯 흔들렸다.“내가 너를 질문에 세워서 대답하게 해서 그런가?”신예린은 고개를 저었고 주시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조용히 말했다.“학생을 일으켜 세워서 답을 시키는 건 결국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거야. 네 친구도 그렇잖아? 졸거나 딴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그러자 신예린은 얼른 송지유를 감싸고 돌았다.“지유는 원래 공부에 약해요.”“그럼 의대랑은 맞지 않아.”“...”주시우의 너무 단호한 말에 신예린은 말문이 막혔다.“다른 전공이라면 자기 혼자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의학은 달라. 공부하는 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야. 언젠가 맡게 될 환자들을 위해서기도 하지. 난 점수보다 태도를 더 중요하게 봐. 할 수 있느냐보다 하려는 의지가 있느냐가 먼저야.”마침 신호등이 붉게 바뀌었고 주시우는 신예린을 곧게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예린아, 의사는 한 사람의 생명, 아니 몇몇 가족의 삶까지도 책임지는 직업이야. 넌 반드시 좋은 의사가 돼야 해.”그 말은 훗날 신예린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붙드는 힘이 되어 주었다.“네.”신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집에 돌아오자 주시우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했고 신예린은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를 걷어 옷장에 가지런히 접어 넣었다. 나란히 놓인 옷가지들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성취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신예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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