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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강시연은 현관에 서서 익숙한 물건들을 바라보았다.시선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며 조용한 작별을 고했다.곧이어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캐리어를 들고 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다.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건 황량한 풍경뿐이었다.이곳에는 강시연 외에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수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시연아, 도착했어?”“네, 방금 도착했어요.”그녀의 답을 들은 진수혁이 잠시 멈칫했다.그는 뭔가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돌렸다.“일이 생겨서 좀 늦어졌어. 도현이랑 바로 갈게.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알았어요.”강시연이 차분히 답할 때 전화기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모,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랑 아빠가 있으니까 나쁜 사람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이모? 지금 심하은과 함께 있는 건가?’강시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전화는 황급히 끊겼다.자정을 한 시간 앞둔 시점 강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어차피 곧 떠날 텐데 마지막 인사 겸, 지난 7년 나에 대한 작별 인사이기도 하니...’밤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강시연이 외투를 여몄지만 찬 기운은 피부 속으로 스며들며 몸을 떨게 했다.밤 11시 59분이 되어도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진수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 반복되는 신호음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했을 때 전화는 연결됐지만 들려온 건 심하은의 목소리였다.“시연 씨, 지금 수혁이도 저도 바쁘거든요?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해요.”강시연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전화를 끊었다.펑, 펑, 펑!그 순간 갑작스럽고 찬란한 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밤하늘에 터지는 불꽃 하나하나가 눈부신 색으로 피어올랐고 캄캄한 하늘은 환히 밝아졌다.강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맑은 눈동자 속엔 찬란한 빛이 그대로 비췄고 강시연은 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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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차갑고 건조한 안내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진수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안과 초조함은 점점 더 거세졌다.그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이마에 핏줄이 떠오르며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강시연! 이쯤 하면 됐잖아. 안 나오면 나 진짜 화낸다!”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정적뿐이었다.늘 침착하고 냉정하던 진수혁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방 한가운데 놓인 종이박스에 멈췄고 그는 마치 홀린 듯 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의 손이 박스에 닿으려는 순간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수혁아, 나 시연 씨 어디 있는지 알아.”진수혁은 곧장 몸을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심하은을 보며 날 선 눈을 번뜩였다.심하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듯 말했다.“오늘 아침에 잠깐 외출했는데 시연 씨가 서아름 씨랑 같이 있는 걸 봤어. 그리고 그 옆에는...”“또 누가 있었는데?”한 걸음 앞으로 다가간 진수혁은 목소리를 높였다.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조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심하은은 어깨를 움찔하고 진수혁의 눈치를 슬쩍 살핀 뒤 고개를 떨궜다.“성... 성규민 씨였어. 네가 화낼까 봐 미리 말 못 했어.”말을 마친 그녀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화면을 넘겼고 사진 한 장을 열어 그에게 내밀었다.“믿지 못하겠으면 이거 봐. 내가 사진도 찍어놨어.”진수혁이 어두워진 눈빛으로 화면을 들여다봤다.사진 속, 도로 옆에서 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서 있었다.서로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고 자세도 다정했다.여자는 흑백의 캐주얼 복장에 긴 흑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려 있었는데 그 뒷모습은 강시연과 몹시 비슷했다.진수혁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몸 주위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쥔 그의 손마디는 새하얗게 질려있었는데 금방이라도 핸드폰을 부숴버릴 것 같았다.그때 심하은이 눈시울을 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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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어차피 전에도 수없이 그랬으니까.’차에 올라탄 진수혁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떨렸다.하지만 마음속에 자리한 불안한 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핸드폰을 꺼내 강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연이, 화 풀어. 어젯밤엔 일이 좀 있어서 못 갔어. 일 좀 정리되면 생일 다시 챙겨줄게.]예상대로 문자는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진수혁이 곧바로 다시 문자를 보냈다.[너 예전부터 나랑 도현이랑 A국 여행 가고 싶다 했잖아. 이번엔 네가 가고 싶은데 어디든 같이 가자.]진수혁은 몰랐지만 아쉽게도 강시연은 이미 그 핸드폰 번호를 해지한 상태였다.만약 그녀가 이 문자를 봤다면 분명 비웃듯 미소 지었을 것이다.‘봐. 사실 다 알고 있었잖아. 그냥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을 뿐...’...정오, 12시 정각.비행기는 활주로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달리다 마침내 용성공항에 멈춰 섰다.강시연은 캐리어를 끌며 북적이는 인파 속에 섞여 공항 로비로 걸어 나왔다.낯선 풍경 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녀는 이제 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예정이었다.그때 등 뒤에서 부드럽고 다정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강 선생님이신가요?”잠시 멈칫한 강시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눈앞의 남자는 큰 키에 균형 잡힌 체격에 은은한 색의 슈트를 차려입고 있어 그 품위가 한층 더 빛나 보였다.그의 눈매엔 따뜻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높은 콧대 위엔 금테 안경이 살짝 내려앉아 있었으며 입가에도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안녕하세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강시연은 곧 평정을 되찾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한정훈의 시선이 그녀의 캐리어로 자연스레 향했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도와주려는 손길이었지만 강시연은 교묘하게 몸을 옆으로 비켜 그의 손길을 피했다.“괜찮습니다. 제가 들 수 있어요.”캐리어를 쥔 강시연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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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몇 분 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쾅 하고 열렸고 방 안에는 은은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시선이 닿은 곳에서 한민주의 앙상하고 떨리는 몸이 보였다.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손에는 날 선 과일칼이 들려있었는데 팔뚝엔 깊고 흉측한 상처가 새로이 생겨 있었다.“민주야!”한정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어떻게든 그녀의 자해를 막으려는 몸짓이었다.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한민주는 겁에 질린 채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고 공포로 뒤덮인 눈동자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그리고 감정이 더욱 격해진 그녀의 손은 미쳐 날뛰듯 움직였고 솟구치듯 흘러내리는 피는 보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때 강시연의 단단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여기서부터는 저한테 맡겨주세요.”한정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더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끝내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강시연은 따뜻하고 단호한 눈빛을 한 채 한민주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세요. 지금은 안전해요. 전 당신을 도우러 온 사람이에요”“나는 아무것도 잘 못 해. 태하 씨가 알면 분명 화낼 거야...”한민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속삭였다.그녀는 자신의 고통 속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강시연은 조심스레 다가가며 한층 더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민주 양, 잘 보세요. 지금 여기에는 태하 씨가 없어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정말?”갑자기 고개를 든 한민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강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과일칼 손잡이를 조심스레 감쌌다.강시연은 차디찬 한민주의 손등 위를 천천히 쓸어주며 따스한 온기를 전하려 애썼다.“자, 저를 따라 천천히 숨 쉬어보세요.”...강시연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한민주의 경직됐던 어깨와 몸이 조금씩 풀어졌고 격앙되었던 감정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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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한정훈은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살짝 밀어 올렸다.렌즈 너머의 눈동자에는 감탄이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람이네.’그때 방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또 폐 끼쳤네.”의사는 이미 한민주의 팔을 치료하고 붕대를 감은 상태였지만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한정훈은 서둘러 그녀 곁으로 다가가 다정히 달랬다.“무슨 소리야. 넌 그냥 아픈 것뿐이야. 그래서 오빠가 좋은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왔잖아.”그 말에 강시연이 곧장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안녕하세요, 민주 양.”한민주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선생님. 한민주입니다.”한민주는 원래도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아이였다.그래서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병을 앓는 와중에도 남을 해치기보다 자신에게 칼을 겨눠 더욱 안타까웠다.강시연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민주 양, 앞으로 최면 치료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그 사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천천히 도와줄게요.”“네. 알겠습니다.”한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받아들였다.한정훈은 원래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 부득이하게 자리를 떴다.그 뒤로 며칠간 강시연은 매일 한민주를 치료하며 지냈고 그녀의 증세는 점점 호전되었다.발작 빈도는 줄어들었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시간도 길어졌다.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가까워졌고 한민주는 강시연을 친언니처럼 따르게 되었다.어느 날 치료를 마친 뒤 창백한 얼굴을 한 한민주가 천천히 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시연 언니, 태하는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뭐든 다 해줬는데 태하는 언제나 날 무시하고 내 마음을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어요. 정말로 날 싫어했다면 애초에 왜 나랑 사귀기로 한 걸까요? 그냥 제 잘못인 걸까요?”강시연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 한민주의 등을 토닥였다.그녀는 한민주가 실컷 울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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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진한그룹 대표 집무실 안, 진수혁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며칠 동안 입찰 건으로 정신없이 바빴는데 드디어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똑똑똑.유태오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정리된 입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하지만 나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어딘가 머뭇대는 눈치였다.진수혁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그제야 유태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 인터넷에 또 대표님과 심하은 씨의 스캔들이 퍼졌습니다. 정리할까요?”예전 같았으면 진수혁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것이었지만 여전히 강시연에게서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혹시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걸까?’진수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법무팀에 연락해서 정식으로 대응하라고 해. 더 이상 내 스캔들 기사 따위 보고 싶지 않아.”유태오가 놀라워하자 진수혁이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유태오가 고개를 저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아닙니다. 단지 대표님께서 이제야 사모님의 소중함을 알아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진수혁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유태오는 감회에 젖은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예전에 대표님 위장이 안 좋으셔서 사내 식당 음식도 못 드셨잖아요. 그때 사모님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시락을 싸 오셨습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늘 정성스럽게 직접 만들어서요.”진수혁이 쥐고 있던 펜 끝이 종이에 번졌다.‘어쩐지 밖에서는 그런 맛이 안 나더라니... 다 시연이가 직접 만든 거였어?’“그걸 왜 이제야 말해?”복잡한 눈빛을 한 진수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유태오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사모님이 얘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표님이 자신이 만든 음식인 걸 알면 더더욱 입도 안 대실 것 같다고요.”그 말이 떨어지자 사무실 안엔 정적만이 감돌았다.진수혁은 뭐라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멘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강시연을 향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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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도대체 어디서 그녀를 찾아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은 진수혁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그 순간 서아름의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강시연의 절친이니 시연이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겠지.’진수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떨이에서 튄 담뱃재가 셔츠에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진수혁은 운전대에 손을 꽉 쥐고는 기억을 더듬어 곧장 서아름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약 삼십 분 후, 딩동 하며 벨 소리가 울렸다.서아름은 배달 음식이 온 줄 알고 문을 열었다가 눈앞에 선 사람을 보고 순간 굳어버렸다.그녀는 한 번도 이런 진수혁을 본 적이 없었다.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눈, 셔츠 한 귀퉁이에 그을린 담뱃재 자국까지 그야말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진수혁은 말없이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강시연, 여기 있는 거 알아. 너 고양이 좋아하잖아. 집에서 키우면 돼. 심하은은 싫어했지? 이제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게. 나랑 같이 집에만 가자. 그러면 앞으로 네 말은 뭐든 다 들을게. 나와. 응? 우리 얘기 좀 하자.”...그는 거실부터 주방, 안방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강시연은 어디에도 없었다.“이제 미친 짓은 그만하지 그래요?”서아름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진수혁은 그대로 굳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시연이 어디 있어? 제발 알려줘.”서아름은 조소를 머금은 입꼬리를 올렸다.“떠난 지 며칠째인데 이제야 발견한 거예요?”“그럴 리 없어!”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한 진수혁이 반사적으로 외쳤다.그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또한 그 행동들로 인해 강시연이 속상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우리 도현이는 어쩌지?’“도현이는 아직 어려.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도현이를 두고 떠나겠어?”진수혁의 중얼거림에 서아름은 짜증 섞인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진도현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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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시연이가 당신한테 남긴 게 있다고 했어요. 직접 가서 보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사람이란 참 어리석네. 있을 땐 소중한 줄 모르고 잃고 나서야 후회하니 말이야.’쾅!문 닫히는 소리가 밤공기 속에 무겁게 울렸다.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옷깃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듯 멍하니 현관 앞에 서 있었다.‘시연이가 나한테 무언가를 남겼다고?’순간 머릿속에 한 상자가 스쳐 지나갔다.진수혁은 번뜩 정신을 차려 황급히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2층 방으로 달려갔다.며칠 전에 이미 봐야 했던 박스였다.하지만 자꾸만 미뤄지고 이런저런 일에 치여 이제야 열게 된 것이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혼 합의서였다.위의 글씨가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왔다.충격에 휩싸인 진수혁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다.‘이혼? 시연이가 나랑 이혼한다고?’그는 지금까지 강시연이 그냥 삐진 거라고 잠시 마음을 정리하려고 떨어져 있는 거라고만 생각하며 조금만 달래고 진심을 보이면 돌아올 거라 믿었다.진수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와의 끝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눈빛에 참담한 고통이 스친 진수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혼 합의서를 들어 올려 찢었다.찌익.종이를 찢는 소리가 방 안에 고요하게 퍼졌다.그와 동시에 상자 안의 다른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두 개의 평안을 바라는 부적.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진수혁의 머릿속으로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그날 강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달려왔다.무릎은 어디서 다쳤는지 작은 상처가 있었고 피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프지도 않은지 맑은 눈동자에 기대를 품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수혁 씨, 이거 도현이랑 수혁 씨 거예요. 청천사 가서 간신히 받아온 거예요. 고승이 축원해 줬으니까 꼭 지니고 다녀요. 알았죠?”‘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미신 같이 쓸데없는 걸 믿는 건 너밖에 없어.”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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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진수혁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에 겨우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내려온 그는 힘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예전엔 조용해서 좋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지금은 숨 막히게 외로웠고 이 고요함이 이제는 처절하게 견디기 힘들었다.‘그 수많은 낮과 밤 동안 시연이는 이 집 안에서 말없이 앉아 나와 도현이를 기다렸겠지.’어느덧 밤이 지나고 창밖에서 햇살이 비쳤다.진수혁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탁자 위 재떨이에는 꺼진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그때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적막이 깨졌다.“수혁아, 이게 무슨 일이야?”문을 열고 들어선 심하은은 진수혁의 몰골을 보곤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녀는 곧장 눈치를 살피며 집안을 둘러보았고 강시연의 기척이 없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하... 드디어 그 여자를 내쫓았구나. 아, 긴긴 나날들이었다.’심하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7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드디어 그 여자를 밀어냈다는 사실에 짜릿함이 일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얼굴엔 근심 가득한 표정을 덧씌웠다.슬쩍 허벅지를 꼬집자 눈가엔 순식간에 물기가 맺혔고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로 성큼성큼 진수혁에게 다가갔다.“수혁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수혁의 어깨에 올리려 했지만 진수혁은 고개를 홱 돌리며 몸을 피했다.심하은의 손끝이 허공에 멈추며 허무하게 떨렸다.“혼자 있고 싶어.”진수혁의 목소리는 쉰 듯 낮고 탁했다.심하은은 물러서지 않았다.‘지금이야말로 내가 자리 잡을 최고의 타이밍이야.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그때 현관에서 맑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나 일찍 왔어요.”진도현이 손에 곰돌이 모양의 수제 쿠키 상자를 들고 방방 뛰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아직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도현이는 심하은을 보며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이모도 여기 있었네요?”진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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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진도현은 심하은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그리고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아빠, 엄마가 나 버린 거예요?”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진도현의 말에 진수혁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태오 삼촌한테 엄마 찾으러 가달라고 했어. 우리 엄마한테 가서 사과하고 꼭 다시 데려오자. 알았지?”그 말은 진도현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되뇌는 간절한 주문이기도 했다.저택은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로 가라앉아 있었다.진도현은 한참을 울다가 결국 지쳐 잠들었다.진수혁은 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에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심하은은 연이어 거절당하고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아까 진도현이 손을 뿌리치며 생긴 자국을 일부러 드러내며 눈물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수혁아, 여기가 너무 아파.”진수혁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유태오가 급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대표님, 새로운 소식입니다.”진수혁은 심하은을 제쳐두고 단숨에 그에게 다가갔다.“시연이 어디 있어? 빨리 말해..”하지만 유태오는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행방은 누군가가 일부러 지운 것 같습니다. 전문가 손을 탄 흔적이 보여요. 현재로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심하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사모님께서 닷새 전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 출국했다고 합니다. 그 사이 누군가 공항에서 사모님을 봤다고 합니다.”닷새 전은 바로 강시연의 생일이었다.그날 진수혁은 심하은의 열성팬에게 습격당해 정신을 잃었고 약속했던 자정의 불꽃놀이도 함께하지 못했다.진수혁은 고개를 홱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하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날 시연이를 봤다고 하지 않았어? 시연이랑 서아름이랑 성규민이 함께 있었다고 했잖아.”강시연은 공항에 있었기에 심하은의 말은 성립되지 않았다.“그... 그게...”심하은은 말끝을 흐리며 두 걸음 물러섰다.그녀의 눈빛은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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