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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진수혁은 온몸이 굳어 몸속의 피마저 멈춘 듯 손끝까지 차가워지며 움직이지 못했다.그와 강시연의 시작은 결코 떳떳한 게 아니었다.그날 밤 술과 충동 속에서 벌어진 일이 없었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을 것이고 결혼도 없었을 것이다.마침 그 시기 강씨 가문에도 큰 일이 터졌다.그래서 진수혁은 줄곧 그날 밤은 강시연이 자신을 잡기 위해 일부러 약까지 탄 치밀한 계략이라고 믿어 왔다.‘만약 시연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어떡하지?’진수혁은 더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양손을 꽉 움켜쥔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말해.”유태오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조사한 끝에 당시 약을 탄 직원을 찾았습니다. 그 직원이 말하길 약을 건넨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고 합니다. 사모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사방이 고요해졌다.진수혁은 그대로 굳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머릿속엔 방금 들은 말이 반복되어 맴돌고 있었다.‘시연이가 아니었어. 계획도 속임수도 없었어. 그렇다면 나는 지난 7년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모든 충격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진수혁은 정신이 아찔해졌고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였다.유태오가 재빠르게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진수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저 머릿속에서 강시연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죄악처럼 떠올랐다.그녀의 모든 상처는 그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그때 무심코 아직도 끼워진 결혼반지가 눈에 들어왔다.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 가며 진수혁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그는 떨리는 입술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시연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 줘.”그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또 처절했다....하지만 강시연은 진씨 가문의 변고도 진수혁의 변화도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날 강시연은 한민주의 상담을 막 끝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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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그동안 강시연은 온 마음을 진수혁과 진도현에게 쏟느라 처음 꾸었던 꿈조차 잊고 살았다.그때 옆에 있던 한민주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가는 거예요? 나도 같이 갈래요!”잠시 뒤 세 사람은 호월 별장에 도착했다.강시연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중년 남성이 다급히 달려왔다.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걱정이 가득했다.“강 선생님이십니까?”그는 강시연이 예상보다 젊은 것에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한정훈이 곧바로 소개했다.“이분은 제 사업 파트너 양승재입니다.”강시연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강시연입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인사를 나눈 뒤 양승재는 무거운 얼굴로 세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환자는 제 아들입니다. 두 살때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됐다가 최근에서야 겨우 찾았는데 현재 매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옷장 속에 숨어 지냅니다.”이야기를 들은 강시연은 마음이 무거워졌고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진우야, 밖으로 나오자. 응?”방 안에서 중년 여성이 옷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며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발소리를 들은 그녀는 뒤돌아보더니 팔을 벌려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 짐승처럼 방문 앞을 가로막았다.“여보, 의사 한 분 모셔 왔어. 얼른 비켜봐.”양승재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곧바로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그만해요! 당신이 자꾸 이상한 사람들 데려오니까 진우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거잖아요!”그녀는 강시연 일행을 매섭게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애는 치료 따윈 필요 없어요.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양승재는 머리를 긁적이며 급히 해명했다.“여보, 이번에는 다르다니까. 강 선생님은 강성의 진 교수님의 제자야. 그리고 한 대표 동생도 지금 이 선생님이 직접 치료 중이야.”“맞아요. 시연 언니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갑작스럽게 언급된 한민주가 활기차게 거들었다.하지만 박지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사실 이전에도 심리치료사를 여럿 불러봤지만 아들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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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진우야, 방금 뭐라고 했니? 다시 한번... 엄마한테 말해줄래?”박지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그녀는 지금 눈앞의 모든 것이 꿈일까 두려운 듯했다.양진우의 차가운 손끝을 살짝 잡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곧바로 아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여보, 우리 진우가 엄마라고 불렀어요. 당신도 들었죠?”양승재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아내와 아이를 꼭 껴안았다.세 식구가 서로를 껴안은 모습은 그 자체로도 감동을 자아냈다.그 광경을 본 강시연은 한정훈과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지금 세 사람은 가족만의 시간이 필요했다....잠시 후, 양승재가 아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양진우는 울다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시연 씨!”박지연은 눈시울을 붉힌 채 강시연에게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우리 진우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연 씨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 뭐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과찬입니다. 저는 단지 심리치료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진우의 상태를 봐서는 앞으로도 꾸준한 치료와 행동 교정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박지연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지금 이것만으로도 큰 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연 씨, 제 아들을 부탁드릴게요. 용성에 계시는 동안 뭐든 필요하신 게 있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별로 크지 않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아는 분들이 좀 있어서 도와드릴 수 있을 거예요.”강시연은 그녀의 손을 다정히 토닥이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평소에 주의하셔야 할 점도 있으니까 잠시 얘기 좀 나누시죠.”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자리를 옮겨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강시연이 설명하고 박지연은 진지하게 듣고 한민주는 그 옆에서 흥미롭게 두 사람을지켜봤다.잠시 후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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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강시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 사람은 왜 날 찾는대?”‘이 시점이라면 심하은이랑 깨 볶으며 지내야 할 때 아닌가?’서아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웃으며 말했다.“후회하나 보지.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지.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해? 버스는 이미 지나갔는데.”강시연의 눈빛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서아름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별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연락했어.”“잘 지내.”강시연은 두 부자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지난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서아름은 그 말에 안도한 듯 숨을 내쉬고 안부를 몇 마디 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화면이 다시 환하게 켜졌다.한 통의 뉴스 알림이었다.[단독! 강성 재벌 2세, 스캔들 전면 부인.]강시연은 멈칫하다 핸드폰 화면을 클릭해 영상을 재생했다.이는 실시간 기자회견 방송이었다.화면 속 진수혁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여전히 당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피로가 역력했고 턱 밑에는 다듬지 못한 수염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일주일 만에 그는 기억 속 모습보다 한층 더 지쳐 보였다.그는 마이크 앞에 서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제 아내와 결혼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는 근거 없는 스캔들로 저와 제 가족을 언급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계속 근거 없는 스캔들을 유포한다면 회사 법무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그때 한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내에 대해 한 번도 공개하지 않으셨죠?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조차 참석하지 않은 걸 보면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진수혁은 잠시 침묵했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그건 제 책임입니다. 제 잘못으로 아내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지 모를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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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기자회견을 마친 진수혁은 곧장 차를 몰아 매영 바로 향했다.곽지훈과 유민재는 이미 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말없이 룸으로 들어선 진수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들자마자 고개를 젖혀 벌컥벌컥 들이켰다.싸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듯 그저 기계적으로 캔을 비우고 또 비우다 세상이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하고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멈췄다.보다 못한 곽지훈이 그의 손에서 맥주 캔을 거칠게 낚아챘다.“수혁이 형, 그만 마셔요.”이미 취기가 오른 진수혁은 저도 모르게 지난번 강시연과 함께 바에서 나와 집까지 걸어갔던 날을 떠올렸다.그날 달빛도 고왔고 그녀도 아름다웠다.‘난 진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시연이는 이미 그날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나 봐. 어쩐지... 그토록 다정했던 말투가 갑자기 변했다 했어.’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지훈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그때 눈치 없는 유민재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수혁이 형, 그냥 한 여자일 뿐이잖아요. 형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대로 여자를 만날 수 있잖아요. 전에 자주 데려왔던 하은이 누나도 저는 괜찮던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수혁이 붉어진 눈으로 유민재를 노려보았다.그 서늘하고 무서운 눈빛에 유민재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진수혁은 고개를 젖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달라. 시연이 같은 여자는 다시 못 찾아.”‘다시는 없을 거야. 돈도 배경도 안 보고 나 자체를 사랑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그 기대를 저버린 건 나야.’진수혁은 손에 든 맥주병을 쥐어짜듯 꽉 움켜쥐었다.손등의 핏줄이 하얗게 떠올랐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가슴 한가운데 깊고 날 선 고통만이 남았다.결국 그는 새벽이 다 되도록 바 안에서 술을 퍼부으며 자신을 마비시키다가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뒤에야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를 몽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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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당시 그는 진한 그룹의 실력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망해버린 강씨 가문의 본가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이윽고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며 먼지 섞인 공기가 코끝을 자극했다.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진수혁은 찡그린 얼굴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눈빛에는 실망이 스쳤다.‘역시 여기에는 없네.’하지만 그는 곧바로 돌아서는 대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는 강시연이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거실 벽면 한쪽엔 상장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그 옆에는 크고 작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사진 속 소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사진을 본 진수혁은 문득 결혼 후의 강시연을 떠올렸다.그는 결혼하고 나서 그녀가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난 웃음을 짓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는 어두운 시선으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강시연이 살던 방으로 향했다.겉보기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고 그녀가 언급했던 보물 역시 보이지 않았다.창가 책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일기장을 펼친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6월 12일, 맑음. 오늘 정말 잘생긴 오빠를 만났다. 도도한 사람인지 인사를 해도 무시하더라.][6월 18일, 맑음. 그 사람 이름은 진수혁이었다. 바로 옆집 진씨 가문의 아들이란다.][6월 30일, 흐림. 오늘 길거리에서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날 괴롭혔는데 진수혁이 그 사람을 때려서 쫓아주며 앞으로 날 지켜주겠다고 했다.]...진수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는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7월 15일, 이슬비. 진수혁 옆에 심하은이라는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너무 싫다.]그 뒤로는 전부 그가 얼마나 심하은의 편을 들었는지 그리고 강시연을 얼마나 외면했는지에 대한 기록뿐이었다.진수혁은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막 페이지로 손을 넘겼다.[3월 14일, 흐림. 드디어 진수혁과 결혼하게 됐다. 나를 조금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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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서아름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진수혁 씨, 당신이 시연이한테 다른 여자들한테 쏟은 관심의 반이라도 줬다면 시연이는 절대 그렇게 실망해서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그 말을 남긴 뒤 서아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진수혁이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다른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안녕하세요, 도현이 아버님 되시죠?”진수혁이 아직 대답도 하기 전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도현이가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랑 싸웠어요. 시간 괜찮으실 때 한 번 와주세요.”“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진수혁은 정신을 차리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그가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 진도현은 구석에 외롭게 서 있었다.작은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이마에는 크게 부어오른 혹이 눈에 띄었다.진수혁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재빠르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야?”진도현은 작은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그는 억울한 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마지한이 엄마가 나쁜 여자래요. 하지만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엄마는 나한테 동화책도 읽어주고 목도리도 떠주고 잠도 재워줘요.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또 다른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지난번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온 건 예쁜 누나였잖아. 무대에서도 춤췄잖아. 너희 엄마는 아줌마라서 창피해서 안 데려온 거 아니야?”마지한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멍이 여러 군데 들어 있었다.“함부로 말하지 마!”두 눈을 부릅뜨고 다시 달려들 진도현의 기세에 진수혁이 재빨리 아이를 끌어안았다.아이는 단단한 아빠의 품에 안기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흐윽... 아빠. 나 이제 이모 싫어요. 엄마... 엄마 보고 싶어요.”옆에 있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부부 사이가 어떻게 되었든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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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나... 나...”심하은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냥... 그냥 평범한 채소 볶음인데 땅콩 소스를 좀 넣었어.”진수혁이 이를 악물었다.“도현이는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뭐?”몸이 순간 휘청였고 심하은은 눈가가 붉게 물든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몰랐어...”그러나 이미 진도현을 안고 황급히 집을 나서 차에 올라탄 진수혁은 액셀을 세차게 밟고 병원으로 내달렸다.심하은이 부리나케 뒤쫓아 나왔지만 눈에 들어온 건 이미 사라져가는 차량의 뒷모습과 흩날리는 먼지뿐이었다.병원.진도현은 응급처치를 마치고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긴 속눈썹 끝에는 아직 눈물이 매달려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엄마...”무슨 꿈을 꾸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중얼거렸다.진수혁은 병상 곁에 앉아 얼굴에 짙은 근심을 띠고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병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심하은은 다급히 달려와 문가에 멈춰 서더니 죄책감 가득한 눈으로 두 부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수혁아, 나 정말 몰랐어. 도현이가 땅콩 못 먹는다는 거... 난...”말을 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내 잠기기 시작했고 눈물마저 흘러내렸다.마침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진도현은 눈앞의 심하은이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분명히 ‘이모, 울지 마요’ 하고 다가가 토닥였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진도현은 고개를 돌려 진수혁을 바라보며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나 엄마 보고 싶어요.”심하은은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 원망을 담은 눈빛이 반짝하고 사라졌다.진수혁은 그런 그녀를 끝내 외면한 채 마음 한구석이 찢어지는 아픔을 억누르며진도현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그러고는 무겁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엄마 꼭 찾아낼 수 있을 거야.”...그 시각, 강시연 일행은 이미 양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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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 어느덧 1년이 흘렀다.“대표님, 오늘 회의용 서류입니다.”“응, 거기 두고 나가.”사무실 안은 유난히 무거운 기류로 가득했다.유태오는 책상 너머 무표정한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강시연이 떠난 뒤, 진수혁은 완전히 일벌레가 되어버렸다.밤낮없이, 때로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일에 몰두했고 그 모든 건 자신을 마비시키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유태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벌써 이틀째 밤새셨습니다. 잠깐이라도 쉬시는 게...”그러나 진수혁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안 피곤해.”그 집은 아직도 곳곳에 강시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눈만 감으면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손에 있는 펜을 쥐는 힘이 점점 강해졌고 억눌러왔던 그리움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딱 1년, 그녀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그렇게 잔인하게 그녀는 진수혁과 진도현을 버리고 떠났다.유태오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용성에 최면 치료 잘하는 심리상담사가 있다는 얘기 들었어요. 요즘도 계속 불면이시면... 한번 상담이라도 받아보시는 게...”말이 씨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모님 찾기도 전에 먼저 쓰러지십니다.”진수혁은 아무 대꾸도 없었지만 잠시 멈칫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집.별장 안은 적막했고 거실에는 불도 켜지지 않았다.진수혁은 곧장 2층 불이 켜진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진도현이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게 보였다.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두 명의 어른이 한 아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보기만 해도 따뜻한 한 장면이었다.하지만 휴지통은 이미 구겨진 종이로 가득 찼다.수없이 그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린 그림들, 진도현은 이번에도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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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심하은은 그 모습을 보더니 주저 없이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 두 사람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비행기가 이륙했다.용성과 강성은 거리가 제법 되는 곳이라 최소 세 시간에서 네 시간은 족히 걸렸다.한편, 같은 시각.“시연 언니, 택배 왔어요!”한민주가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고 강시연에게 달려왔다.1년간의 심리 치료 끝에 한민주는 이제 거의 재발도 하지 않았고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도 대부분 사라진 듯했다.강시연은 상자를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고마워. 무거웠을 텐데.”하지만 한민주는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요즘 언니 전국구 인기쟁이잖아요. 환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언니 보겠다고 찾아오고... 덕분에 쇼핑도 같이 못 가고 나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강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다들 급한 상황이라... 마음 놓고 방치할 수가 없어.”“알아요, 알아. 장난이에요.”한민주는 혀를 쏙 내밀며 웃어 보였다.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시연아, 내가 보낸 택배 받았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호두과자야. 그 집은 강성에서만 팔거든.”서아름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시연의 눈가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고마워. 진짜 오랜만에 그 집 맛 생각났었는데.”“그 두 부자 아직도 널 찾는 거 같아. 당분간은 조심하고 강성에는 당연히 들어가지 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보내줄게.”서아름이 진지하게 조언하고 강시연이 막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자, 여기 모이세요. 간식 가져왔습니다.”일을 마친 한정훈이 근처를 지나다 잠시 들러 티타임을 위해 간식을 사 온 것이었다.“자, 시연 씨가 좋아하는 망고 요구르트 스무디. 당도는 70% 맞췄고... 나 기억 잘했죠?”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음료 한 잔을 건넸고 그 저음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통화 중인 핸드폰 너머로도 들려왔다.서아름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강시연! 지금 뭐야! 분위기 심상치 않은데?!”“설마... 용성에서 널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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