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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돌이킬 수 없는: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미친 남자를 마주한 강시연은 애써 차분하게 대처했다.“내가 먼저 진수혁에게 이혼하자고 할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 진수혁에게 이혼 합의서 준비하라고 해요. 그러면 그쪽도 감옥에 가지 않고 백조를 도와줄 수 있으니까.”강시연의 말이 남자를 설득한 듯했다.강시연이 도망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남자는 방을 나와 옆방으로 휴대폰을 찾으러 갔다.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강시연은 조금 안도했다.그녀는 이미 팔찌로 밧줄을 잘랐기에 지금이 도망칠 가장 좋은 기회였다.그러나 강시연이 겨우 벗어나서 밖으로 뛰어나가려던 순간 휴대폰을 가져온 납치범이 돌아왔다.강시연이 도망치려는 것을 본 그는 분노로 눈을 부릅뜨고 이마의 핏줄이 튀어나왔다.“망할 년, 거기 서!”강시연의 심장이 요동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그러다 나일론 플라스틱 천이 깔린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갑자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그곳엔 구멍이 있었다.다행히 2층이었기 때문에 강시연은 물건 더미 위에 떨어졌지만 발목을 삐었고 온몸이 먼지와 흙으로 뒤덮였다.강렬한 생존 본능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절뚝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남자는 분노해 다른 쪽에서 강시연을 막으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튀어나와 남자를 바닥에 제압했다. 진수혁이 사람들을 데리고 도착한 것이었다.“괜찮아?” 진수혁은 빠르게 다가와 코트를 벗어 심하은에게 덮어주고 이내 다정하게 심하은의 밧줄을 풀어주었다.심하은은 크게 놀라 가여운 모습으로 코트로 몸을 감싼 채 조용히 진수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하지만 진수혁은 자연스럽게 피하며 심하은의 손만 잡아 부축했다.“일단 내려가. 구급차 도착했어.”심하은은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진수혁이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의사와 간호사들이 서둘러 다가와 습관적으로 물었다.“안쪽에 다른 부상자가 있나요?”진수혁이 없다고 대답할 때 강시연이 절뚝거리며 옆에서 걸어 나왔다.심하은과 비교하면 그녀는 매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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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녀는 다리만 다쳤을 뿐이지만 심하은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그래서 구급차에 탄 후 심하은은 누워있고 발목 골절인 강시연은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강시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곳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며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와 아들은 강시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그들이 말을 걸려고 해도 강시연이 기회를 주지 않아 분위기가 미묘해졌다.뒤늦게 온 간호사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별생각없이 강시연에게 상태를 물었다.“아가씨, 발목 골절인 것 같은데 가족에게 연락하세요.”예의상 강시연은 눈을 뜨며 간호사에게 대꾸했다.“혼자서도 괜찮아요.”진수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강시연, 대체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야?”진도현도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을 드러냈다.엄마는 너무 철이 없었다.간호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아는 사이에요?”“남편이에요.”“아들이에요.”간호사가 불쑥 말했다.“전 누워계신 여성분이랑 한 가족인 줄 알았어요.”그 말에 미묘한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지며 간호사가 심하은을 슬쩍 흘겨보았다.‘내연녀였구나.’딱 그런 눈빛이었다.심하은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몸이 불편해졌다.그녀는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진수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지했다.“불편하면 그냥 누워 있어. 곧 병원에 도착할 거야.”심하은은 큰 억울함을 당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하지만 간호사님께 제대로 설명하고 싶어.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난... 콜록...”“이모,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아빠 말대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에요.”진도현도 심하은을 감쌌다.“엄마, 얼른 이모 대신 해명해요. 이모가 오해하는 걸 보고만 있어요?”휙.참다못한 간호사가 커튼을 치며 강시연과 맞은편 ‘일가’를 단절시켰다.강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해요.”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머뭇거리자 강시연은 해탈한 듯 고개를 저었다.병원에 도착한 뒤 간호사가 부자에게 말했다.“그쪽 아내와 엄마는 여기 있어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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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 모습을 본 옆에 있던 심하은의 눈동자에 잠깐의 기쁨이 스치다가 곧 사라졌다.그러면서 말은 이렇게 했다.“강시연 씨는 아마 화났을 거야.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한 나 때문에 두 사람까지 피해를 보았네. 몸이 나아지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사과할게.”“됐어.”진수혁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강시연은 쓴맛을 본 후 알아서 그에게 머리를 숙일 거다.진도현도 입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가 드물게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건데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모의 병은 죽을 수도 있지만 엄마는 발을 다친 것뿐이잖아요. 이렇게 간단한 걸 어린 나도 아는데...”진도현의 눈동자가 살짝 붉어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머리를 들고 중얼거렸다.“어쨌든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너무 어리석은 거예요. 난 엄마로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심하은의 눈동자가 살짝 빛나며 부드럽게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됐어, 그런 말 하지 마. 강시연 씨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엄마였으면 좋겠는데?”진도현은 즉시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웅얼거렸다.“난 이모가 좋아요.”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불편한 듯 재채기를 했다.왠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품은 항상 편안하고 따뜻한 한편, 이모의 몸에서는 강렬한 향수 냄새가 나서 그 냄새가 코를 자극해 불편하게 만들었다.진도현은 강시연도 과거에 화장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를 낳은 후에는 그런 것들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몰랐다.심하은은 진도현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기쁨을 느끼며 머리를 들어 진수혁을 바라보았다.“수혁아, 애들은 원래 농담 잘하잖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거지?”그녀의 시선은 남자의 얼굴에 고정된 채 그의 표정에서 어떤 생각이라도 읽으려 했다.예를 들어 도현이 엄마를 바꾼다든지.그런데 이미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던 진수혁이 대충 대답했다.“그럼.”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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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진수혁은 긴 한숨을 쉬며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알겠어. 화내지 마. 오늘 일은 내 실수였어. 사과할게. 앞으로는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몇 걸음 다가서서 강시연의 옆에 앉았다.강시연은 잠시 멈칫했다.기억을 되짚어보면 진수혁이 그녀에게 사과한 것이 처음이었다.하지만...그들에겐 이미 미래가 없었다.강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한 손으로 석고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눌러 통증을 완화하려 했다.진수혁은 주먹으로 솜을 내려치는 듯한 무력감이 느껴지며 머릿속에는 과거의 몇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그때의 강시연은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마음과 눈동자 모두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진수혁의 심장이 느릿하게 뛰었다.더 이상 뭘 하지 않으면 매우 중요한 것이 그의 삶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아직도 아파?”진수혁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강시연의 놀란 시선 속에서 그녀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잡으며 마사지를 시작했다.그는 결심했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과거 그들이 어떻게 시작했든 앞으로는 잘 살아가기로 했다.그녀가 심하은을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 그녀와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강시연은 시선을 내린 채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진지하고 집중된 표정으로 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결혼한 지 7년.임신 중에 입덧으로 고생하며 식사도 못 하고 잠도 못 자던 때, 출산 시 자궁 수축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과 땀이 쏟아지던 때에도 진수혁의 관심과 돌봄을 받은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결심을 굳히고 떠나기로 했을 때야 비로소 뒤늦은 배려를 받는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강시연의 마음은 서서히 차갑게 식었다.어느새 졸음이 몰려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잠들었다.진수혁은 고개를 들어 여자의 평화롭게 잠든 얼굴을 마주했다.희미한 불빛이 쏟아져 내리며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얇은 베일을 씌워 부드러움을 더했다.이때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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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유태오가 문을 나서자마자 계단 입구에 서 있는 강시연이 보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오후 모임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셨어요.”강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데 진수혁이 서재에서 나와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 걔들도 너 보고 싶어 해.”그는 문득 몇 년간 강시연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다행히 지금부터라도 보상하면 아직 늦지 않았다.강시연은 입을 벙긋하며 거절하려다가 입가에 차오른 말을 꾹 삼켰다.‘그래, 그냥 만나자.’오랜 자신의 집념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강시연은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진수혁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진수혁 씨, 제가 알아서 할게요.”진수혁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그 호칭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강시연도 싫었다.차 안의 분위기는 특히나 침울했다.진수혁은 조금 전부터 계속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온몸에서 불쾌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잠시 후 검은색 마이바흐가 병원 정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수혁아, 특별히 마중 나오느라 고생했어.”심하은이 앞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제 일로 강시연 씨가 난처하게 하진 않았지?”말이 끝나자마자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며 차갑고 차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저 화 안 났어요. 걱정 고마워요. 심하은 씨.”심하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강시연? 이 여자가 왜 차에?’“시연이도 우리랑 같이 파티에 참석할 거야.”진수혁이 설명하자 심하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힘을 주자 방금 한 손톱이 부러질 뻔했다.“그렇구나...”그녀는 강시연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내가 계속 수혁이랑 같이 파티에 참석해서 강시연 씨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어요.”‘관심이 없을 리가. 가고 싶지만 초대를 못 받은 거지.’강시연은 미소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심하은도 흥미를 잃었는지 진수혁의 옆에 앉아 차 안에서 계속 그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강시연은 못 본 척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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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룸 안의 분위기는 숨 막힐 듯 어색했다.그 가운데서 강시연은 마치 이 상황과 무관한 사람처럼 잔잔한 얼굴로 조용히 지팡이를 짚고 한쪽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늘 그래왔듯이 진수혁은 당연히 중앙 자리에 앉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망설이다가 결국 강시연 옆에 자리를 잡았다.그 모습을 본 심하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진수혁 쪽으로 따라갔다.“예전부터 형수님 한번 뵙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수혁이 형이 형수님께서 낯가린다고 해서 기회가 없었네요.”유민재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맞장구를 쳤다.“그러니까요, 형수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수혁이 형이 집에만 숨겨놓은 이유가 있었어요.”그때 곽지훈이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아, 생각났어요. 왜 이렇게 낯이 익나 했더니 저희 예전에 만난 적 있었네요.”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고 진수혁도 고개를 돌려 곽지훈을 바라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곧이어 곽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2, 3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 수혁이 형이 술에 잔뜩 취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데려가달라고 연락했었잖아요.”그는 회상에 젖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수혁이 형이 그날 절대 안 간다고 떼를 쓰는데 형수님이 끝까지 달래시더라고요. 물도 떠다 주고 얼굴도 닦아주고... 정말 정성스럽게 챙기셨어요.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부럽더라고요. 나중에 나도 저런 사람 만나야지 싶었죠.”진수혁은 깜짝 놀란 얼굴로 강시연을 바라보았다.‘나는 왜 그날 기억이 없지?’그 순간, 강시연이 했던 지난 노력이 불현듯 떠올랐다.수많은 시간 속에서 강시연은 언제나 그에게 최선을 다했다.진수혁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서서히 일렁거렸다.강시연은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다.그녀는 곽지훈이 말한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하필 그날 생리가 시작돼 몸이 축 늘어지고 기운도 없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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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강시연의 얼굴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진수혁은 줄곧 그날 밤을 그녀의 계략이라 믿어왔다.그녀가 결혼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이다.그래서 그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아무리 설명해도 통하지 않았고 그녀도 지쳐서 결국 해명하는 것조차 포기했다.강시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테이블 위의 술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마시려 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시연이는 다리를 다쳐서 술을 못 마셔. 내가 대신 마실게.”진수혁이 나지막이 말하며 술을 들이켰다.고개를 숙여 강시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유태오가 다시 당시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어쩌면 내가 정말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라.’강시연은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이제 진수혁이 또 왜 이러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그 후로도 모임이 끝날 때까지 진수혁은 몇 차례나 그녀 대신 술을 마셨고 차가운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희미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심하은은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손을 움켜쥐고 있었고 두 눈은 증오로 물들어갔다.“수혁아,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나 좀 데려다줄 수...”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지훈이 먼저 나섰다.“수혁이 형, 형수님이랑 먼저 들어가세요. 하은 누나는 제가 가는 길에 바래다줄게요.”그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엔 몰랐지만 오늘 강시연을 보고 나서야 누가 진짜 진수혁을 아끼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형을 돕는 게 진짜 친구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수혁아, 나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심하은은 일부러 기침하며 약한 척했지만 그간 누구에게나 통하던 그 수법은 오늘따라 전혀 먹히지 않았다.진수혁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곽지훈과 다른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강시연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집으로 향하는 길, 서늘한 밤바람이 불며 그의 정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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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진민정은 팔짱을 끼고 날카로운 눈매로 강시연을 위아래로 훑었다.진수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고개를 숙였고 문득 강시연의 눈동자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마치 이런 모욕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그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고모, 저는 오늘 시연이가 입은 게 예쁘다고 생각해요.”진수혁이 강시연 편을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진민정은 말문이 막혀 헛기침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애초에 그녀가 시비를 거는 상대는 늘 만만한 약자일 뿐이지 이 집안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진수혁에게는 감히 토를 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때 집 안 깊은 곳에서 위압적이고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문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얼른 들어와서 앉아.”진수혁의 어머니, 허자옥이었다.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한눈에 봐도 만만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그녀는 강시연을 차갑게 힐끗 보며 목소리에 노골적인 불만을 실었다.“도현이가 다 얘기했다. 밥도 안 하고 피아노 연습도 같이 안 한다며? 도대체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하는 거야?”허자옥은 애초부터 강시연이라는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었다.뜻밖의 임신이 아니었다면 허자옥은 절대 강시연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며느리는 집안도 배경도 교양도 부족한 강시연이 아니라 적어도 진씨 가문과 맞먹는 재력과 품위를 가진 명문가의 딸이었다.강시연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답했다.“도현이는 제가 만든 밥을 싫어해요. 피아노 연습할 때 제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신경 쓰인다고 해서요. 제가 같이 있으면 방해만 된다고 하더라고요.”그녀의 말투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예전엔 진수혁을 생각해 꾹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니 이제 진씨 집안의 눈치 따위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허자옥은 그녀가 순순히 반성하기는커녕 되레 말대꾸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녀는 탁자 위를 손가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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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강시연은 핸드폰 화면에 뜬 하은이라는 이름을 봤지만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전화를 받아 든 진수혁은 뭔가 대화를 나누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강시연을 바라보았다.“가봐요. 저는 택시 타고 가면 돼요.”강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부드럽게 말했다.진수혁의 입술이 떨렸다.“돌아와서 설명해 줄게.”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급히 돌아서 사라졌다.이런 장면은 과거에도 수없이 반복됐다.다른 여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그녀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떠나버리는 남편은 강시연에게 이미 익숙했고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도로변에서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강시연은 진도현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남은 짐들을 정리했다.텅 빈 듯한 별장 안은 유독 쓸쓸하게 느껴졌다.용성으로 가져갈 짐은 이미 정리해 뒀고 지금 남은 것들은 모두 그녀가 진수혁과 진도현을 위해 정성 들여 마련했던 물건들이었다.강시연은 고요한 눈빛으로 오래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청천사까지 찾아가 절하며 정성껏 빌어온 평안을 바라는 부적, 명인에게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우며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완성한 세 사람의 캐릭터 인형 장식,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바느질해 만든 진도현이 좋아하는 슈퍼히어로가 그려진 니트...하지만 그런 것들은 언제나 외면당했고 결국 구석에 방치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강시연은 그것들을 모두 박스에 차곡차곡 담았다.그 어떤 것도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이제 그녀가 떠난 후 그것들을 어떻게 하든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그때 현관문이 갑자기 열리며 진도현이 작은 책가방을 메고 들어왔고 손목에는 작은 스마트워치가 반짝였다.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이모, 아빠 말로는 쓰러졌다고 하던데 많이 아파요?”거실에 있던 강시연을 발견한 진도현은 말끝을 흐리며 손목에 대고 말했다.“괜찮다면 다행이네요. 저 집에 도착해서 이만 끊을게요.”전화를 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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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진도현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진수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진도현은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피아노도 같이 안 치고 학교 다녀왔을 때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리고 엄마가 직접 떠준 니트도 버렸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그런 생각 하지 마. 엄마는 지금 우리한테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흥. 그럴 줄 알았어요. 엄마는 완전 소심한 사람이에요!”진도현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죽이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엄마가 화를 풀어요?”진수혁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내일 엄마 생일이잖아. 직접 선물 하나 만들어 줘 봐.”진도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그러면 엄마가 예전처럼 돌아올까요?”진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는 강수연이 오래전부터 꿈꾸던 생일날의 프러포즈를 계획 중이었다.전례 없는 불꽃놀이로 무대를 꾸미고 진심을 전할 준비를 해두었다.기분이 좋아진 진도현이 활짝 웃으며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알겠어요.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식탁에는 따뜻한 밥과 반찬이 놓여있었고 분위기는 조용하지만 오랜만에 평화로웠다.진도현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흰 종이에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무심코 시선을 돌린 강시연은 종이 위로 화목하게 그려진 두 어른과 한 아이를 발견했다.진도현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깜짝 놀라 몸으로 종이를 가리며 외쳤다.“보지 마요!”강시연은 금세 시선을 거두었고 말없이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섰다.강성에 머물 시간은 이틀밖에 안 남았기에 그녀는 옛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해가 지고 노을이 도시를 금빛으로 물들일 무렵 강시연은 마지막 친구의 집을 나선 뒤 무심결에 진도현이 다니는 유치원 앞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행사가 있는 날이었는지 유치원 앞에는 부모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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