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시녀의 생존수칙: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한편 손기욱은 노후작과 함께 큰아버지들을 배웅했다.노후작은 두 집안 형제들이 불평을 늘어놓자 괜히 미안해서 손기욱에게 당숙과 사촌형제들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다. 손기욱은 한참 시달려서야 겨우 아버지의 잔소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매화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시점이었다.그는 저녁식사를 한 후,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다가 갑자기 오늘 못한 일이 생각나서 태복을 불렀다.“연경을 불러오거라.”조태복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이 늦은 밤에 그 아이는 대체 왜….’“나으리, 연경이는 어제 손을 다쳤잖습니까? 아마 며칠 동안은 지압을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은데요.”그 말에 손기욱은 잠시 침목했다.예전에는 고질병도 참을만했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손길에 익숙해져서인지 하루라도 지압을 건너뛰면 몸이 편치 않았다.그러나 손목에 피를 보면서까지 결연하게 팔찌를 빼내던 연경의 모습이 떠오르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어머니 쪽은 어찌 되었는지 한번 가서 보고 와.”그는 노후작과 성난 당숙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여자들 쪽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도자기 조각 위에 무릎을 꿇고 울던 연경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태복은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다.그는 오는 길에 이 일을 어떻게 손기욱에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했다. 조금 전 송학당 시녀로부터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어여쁘던 얼굴이 맞아서 묵사발이 될 지경이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연경 본인이 분수를 모르고 설친 탓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만약 손기욱이 정말 그녀와 정이라도 통한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집안이 혼란스러우면 고통받는 건 그들 같은 하인이었다.그래서 조태복은 연경이 맞은 일만 쏙 빼고 노부인이 크게 노하시여 그녀를 팔아버리려는 것을 송지운 부부가 겨우 사정해서 금수원으로 돌아갔다고만 전했다.“정성들여 준비한 연회가 아수라장이 되고 큰댁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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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소인, 도련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연경은 공허한 얼굴로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고개를 숙이자 목덜미의 데인 흉터가 손유민의 시야에 들어왔다.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어졌는지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곧이어 방으로 돌아온 명월은 문을 닫은 후에 착잡한 시선으로 연경을 바라보았다.어여쁘던 얼굴에는 뻘건 손자국이 진하게 나 있고 입가는 찢어져 처참한 모습이었다. 맑고 투명하던 눈은 생기를 잃은 듯, 공허해 보였다.명월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내가 약을 발라줄게.”“고마워요, 언니.”연경은 멍한 얼굴로 옷을 벗었다.피가 흥건한 목덜미를 본 명월은 비명을 질렀다.“이런! 목까지 데였어? 다른 곳은 데인 데 없어?”연경은 말없이 옷가지를 하나씩 벗었다.“언니, 잔등이 너무 아파요. 혹시 물집이 터졌나요?”명월의 눈에 흉측한 상처가 들어왔다.백옥 같던 연경의 등은 시뻘겋게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좀전에 약을 발랐다면 이 정도로 붉게 변했을 리 없었다.명월은 눈시울을 붉히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서 냄새를 맡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연고를 누가 너에게 발라줬어? 이건 화상약이 아니라 고추를 우린 물이잖아! 정말 너무하네. 얼마나 아팠을까!”그녀는 즉시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와서 상처를 닦아주려 했지만 피부에 따뜻한 물이 닿자 더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연경은 해탈한 얼굴로 명월에게 부탁했다.“언니, 얼음물 좀 가져다주세요.”명월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밖으로 나가 얼음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제서야 화끈거리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연고를 다 바른 후, 연경은 침상에 엎드려 말했다.“고마워요, 언니. 앞으로 꼭 보답할게요.”“바보 같은 소리 마. 네가 무사하기만 하면 돼.”명월은 안쓰러운 눈으로 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너처럼 예쁜 아이가 목에 흉터라도 남으면… 내일 도련님께 가서 약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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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닷새 후, 매화당에서 드디어 연경을 불러주었다.연경은 손수건으로 대충 손등의 흉터를 가렸다. 잔등의 화상은 이제 그다지 아프지 않았지만 목덜미에 물집이 잡힌 부위가 간지럽고 아팠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바늘로 물집을 터뜨렸다.연경은 며칠을 생각했지만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손유민을 넘본 적 없고 옷에서 나온 물건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지만 말로만 해서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저 아이가 연경인가요?”연경은 멍하니 매화당을 들어서다가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전방에 한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일등 시종의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통통한 볼에 굉장히 사랑스러운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연경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 제가 연경입니다. 전에 매화당에 왔을 때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조태복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향란이는 오늘부터 매화당에서 시중을 들 거야. 나으리께서 향란이에게 지압을 가르치라고 명하셨어.”연경은 손에 땀이 났다.현재로서는 손기욱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지압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게 생겼다.“괜찮으면 내 방으로 와서 배워주렴.”향란은 웃으며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연경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매화당은 시종을 많이 두지 않았기에 향란은 손기욱 신변의 유일한 일등 시녀로서 꽤 큰 방을 갖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연경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이곳은 주인의 안방과 통하는 방으로, 일반적으로 통방 시녀들이 사는 곳이었다.연경은 가슴이 콕콕 쑤시며 아파왔지만 말도 못하고 정성 들여 향란을 가르쳤다.물론 자신의 기술을 죄다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다행히 향란은 일을 빨리 배우는 편이 아니라 반 시진을 가르쳐서야 연경이 말한 혈자리를 숙지할 수 있었다.곧이어 밖에서 손기욱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향란은 연경에게 나가라는 듯이 손짓하며 말했다.“나으리께서 돌아오셨으니 너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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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그래서 그녀의 목에 난 흉터를 본 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목은 또 어떻게 된 게야?”연경은 손을 들어 흉터자국을 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무… 물집이 터져서 보기 흉하지요? 괜히 안 좋은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손기욱은 허둥지둥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치우고 옷깃을 열었다.연경은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나으리!”밖에서 안쪽 상황을 살피던 조태복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오며 고했다.“도련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소인이 지금 가서 도련님을 불러올까요?”손기욱은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나가.”조태복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냉랭한 그의 눈빛을 보고 하는 수없이 뒤돌아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손기욱은 고개를 돌려 연경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리 오거라!”연경은 그가 무슨 생각인지도 모른 채, 몸을 움츠리며 그에게 다가갔다.그는 그녀를 끌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 후 문을 닫고 말했다.“목 좀 보여주거라.”연경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연경은 고분고분 손을 내렸다.손기욱은 물집으로 가득 뒤덮인 그녀의 목덜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어쩌다 이리 심하게 데인 거지?”연경은 그가 알고도 이렇게 묻는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모호하게 답했다.“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부주의로 뜨거운 국물에 데었습니다.”“어쩌다가?”연경은 며칠 전에 명월로부터 그녀에게 뜨거운 탕을 엎은 시녀가 송학당 사람이라는 것을 전해들었다. 그러니 손기욱이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소인이 부주의로 다친 겁니다.”손기욱은 기가 차서 웃음만 나왔다.“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연경은 무슨 말로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손기욱은 그녀의 침묵을 고집으로 오해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겉옷을 벗어라!”연경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나으리….”물론 그가 이상한 짓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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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손기욱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연경을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엎드려.”연경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일으켰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손기욱이 차갑게 말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결국 연경은 움찔하고는 순순히 침상에 엎드렸다.방 안은 온도가 따뜻했지만 손기욱의 침상에 누웠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등 뒤에서 장롱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손기욱이 약병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연고를 묻혀 화상을 입은 상처에 발라주었다.그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그녀는 수치심으로 인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연경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무진장 애를 썼다.황제가 하사한 화상고는 어느새 반병이나 축이 났다.그는 세심하게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발라준 후에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여인의 가녀린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연경의 허리는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두 손으로 잀 만하면 부러질 듯한, 버들가지 같은 허리였다.그러다가 시선을 올리자 탐스러운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속도 모르는 연경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엎드려 있었다.잠시 후, 여우털 망토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좀 있다가 옷을 입거라.”연경은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두 손은 어느새 눈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처음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주인을 만나서일까?그녀는 울먹이며 그에게 말했다.“소인을 가엽게 여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대체 어쩌다 다친 게냐?”손기욱은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연경은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고 사실을 고했다.“노부인 생신잔치 때 송학당의 시종이 부주의로 뜨거운 탕이 든 그릇을 소인의 등에 엎었습니다.”“부주의로?”손기욱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그때 당시 그녀는 잔등이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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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뭐가 잘못됐죠? 제가 연경에게 지압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나으리도 승낙하셨단 말입니다!”정곡을 찔린 향란이 언성을 높였다. 사실 그녀가 지압을 자청했지만, 손기욱은 기술이 부족하다 하여 연경에게 배워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손기욱은 듣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들어와!”그 말을 들은 향란은 곧바로 턱을 잔뜩 치켜들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조태복도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와 방 안을 살폈다. 연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실 쪽을 바라보았다.“나으리, 계화떡을 가져왔습니다.”손기욱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계화떡을 힐끗 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저택에 온지 몇 년이나 되었지?”사실 향란은 매화당에 온지 3일밖에 되지 않았다. 손기욱은 워낙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었다.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무안후가 비록 나이는 좀 있어도 외모가 준수하고 체구도 건장해 보이니 그의 통방이 된다면 앞으로 부귀영화는 보장된 셈이었다.향란은 기대를 안고 입을 열었다.“나으리, 소인은 열살에 저택에 들어왔고 올해 열여섯이 되었습니다.”“그럼 6년이나 되었다는 소리인데 아직도 예의 법도를 몰라?”손기욱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너를 매화당에 보낸 건 여기 안주인 행세를 하라고 보낸 게 아니야.”당황한 향란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나으리, 소인은 그런 생각을 품은 적 없습니다.”“태복은 오랜 시간 내 옆을 지킨 내 사람이다. 그의 말도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들을 테냐?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야? 매번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직접 보고할 셈이야?”싸늘한 손기욱의 미소에 향란은 겁에 질려 감히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조태복은 감동한 얼굴로 손기욱의 곁으로 다가가서 섰다.손기욱은 비록 제 사람을 챙기는 사람이지만 향란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녀는 오자마자 노부인께서 자신을 보냈다고 하여 특별한 존재라고 과시하고 다녔다. 아직 통방으로 받아주지도 않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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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손기욱은 못 말린다는 듯이 이마를 탁 하고 쳤다.“널 잊고 있었네.”연경은 담담한 목소리로 고했다.“방에는 사람이 없고 나으리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감히 나가서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습니다.”만약 그녀가 손기욱의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손기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내일 돌아가거라.”연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연경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용기를 냈다.“그럼 오늘 저녁은 소인이 여기서 시중을 들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먼저 앞으로 다가가 그가 입고 있는 망토를 벗겼다.그에게서는 금방 목욕을 마치고 나온 청량한 향이 났다. 망토 밑에는 잠옷 한 벌 걸친 게 전부였다. 몸에 꼭 맞는 잠옷은 그의 건장한 체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손기욱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시선을 내린 손기욱은 빨갛게 물든 연경의 볼을 보고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그는 괜히 당황스러운 마음을 농담식으로 넘겼다.“연지를 발랐느냐?”연경은 흠칫하며 답했다.“아닙니다.”그녀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오늘 어째 노을이 안 진다 했더니 네가 훔쳐왔구나.”손기욱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연경은 불안한 듯 시선을 회피했다. 화상 흉텨는 아직 그대로 있는 상황에 오늘 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연경은 입술을 깨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 배를 쓰다듬었다.너무 수치스러워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겨우 들었는데 손기욱은 피식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이때, 별채로 통하는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나으리, 소인을 부르셨습니까?”향란의 목소리였다.손기욱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굳이 시중을 들 필요 없다.”그는 오후에 그렇게 혼나고도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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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연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자신이 먹다 남은 것을 내어줄 줄 알았는데 그는 아예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일부러 나를 위해 음식을 내오라고 하신 걸까?’그녀는 배가 너무 고팠지만 감히 손기욱의 맞은편에 앉을 용기가 없어 서서 수저를 들었다.손기욱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서서 밥 먹는 건 경양 후작가에서 가르친 예의이냐?”“아닙니다. 감히 나으리 앞에서 앉아서 밥 먹은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손기욱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너와 나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 앉아.”그의 허락을 받은 연경은 순순히 자리에 앉아 손기욱을 위해 차려진 산해진미를 먹기 시작했다.손기욱은 좀처럼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시로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그녀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문득, 오물거리는 그녀의 볼이 참으로 활기 있고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수시로 불안한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재빨리 시선을 회피했다.잠시 후, 밖에서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향란의 목소리였다.“나으리, 다 드셨습니까?”연경은 재빨리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손기욱은 앉아서 계속 먹으라고 손짓하고는 불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거두는 건 내일 하거라!”향란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로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연경은 겁에 질린 눈으로 향란의 방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손기욱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으니까 먹어.”그는 전장을 누비며 겁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자신이, 이제는 자신의 침실에 몰래 시녀를 숨겨두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웃기게 느껴졌다.그러나 연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아직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귀하신 후작 나으리께서 일개 시녀를 몰래 방에 숨겨둘 이유가 없었다.그는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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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향란의 방 반대편에는 침실과 이어진 욕실이 있었다.연경은 안으로 들어가 찬물로 대충 몸을 씻고는 기대를 안고 침실로 돌아갔다.내실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연경은 침상 가까이 다가가서 주변을 살폈다. 상 위에 있던 그릇들은 이미 거두어간 후였다. 식탁 옆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나무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손기욱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연경은 조심스레 이불 안으로 들어가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수시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손기욱은 연경이 졸고 있을 때에야 서책을 내려놓고 침상으로 다가왔다.그녀는 번쩍 눈을 뜨고 몽롱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뭘 해야 하지?’그러나 그녀가 뭘 하기도 전에 손기욱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침상까지 너에게 양보해야겠느냐?”연경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조금전에 일부러 풀어헤친 겉옷이 어깨까지 흘러내려오며 하얗고 둥근 어깨가 드러났다.그녀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불안에 떨며 고개를 숙였다.“소인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나으리….”“누가 사죄가 필요하댔어?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내일은 녹두떡이랑 팥떡, 콩떡이 먹고 싶으니 준비하거라.”말을 마친 손기욱은 턱으로 나무통을 가리키고는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옷을 다시 여며주었다.연경은 전혀 관심 없는 그의 태도에 기가 꺾여 한숨을 내쉬었다.옷을 제대로 입고 나무통에 다가가니 녹두와 팥, 그리고 콩이 가득 차 있었고 옆에는 빈 그릇이 놓여 있었다.‘이 밤중에 이걸 다 골라내라고?’연경은 눈앞이 아찔해졌다.침상을 덥혀드리겠다는 그 말을 한 순간, 손기욱은 이미 그녀의 속셈을 간파한 것 같았다.콩 고르기는 그가 주는 경고였다.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에 그녀는 말없이 쪼그려 앉아 원망 한마디 없이 일을 시작했다.새삼 차갑고 고결한 그의 눈에 드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손기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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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밤새 우울한 마음으로 콩을 골라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나무통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손기욱이 줬던 여우털 망토가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침상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문밖에서 조태복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경은 골라낸 콩 그릇을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조태복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빤히 살피다가 조용히 나가라고 눈짓했다.밤새 뜬눈으로 새운 탓에 그의 안색이 연경보다 더 초췌했다.연경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말했다.“나으리께서 아침에 떡을 만들라 명하셨습니다.”걸음을 멈춘 조태복은 한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금수원 사람들이 네가 밤새 안 돌아간 것을 알면 어찌 대답할지는 생각해 봤어? 넌 작은 마님 신변의 시종이야. 만약 노부인께서 네가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것을 아시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연경은 시선을 아래에 둔 채 조용히 답했다.“태복님의 말씀은 저도 잘 알아요. 허나 나으리께서….”조태복은 이를 갈며 호통쳤다.“그러니까 눈치 있게 네가 거절했어야지! 나랑 정원 뒤편에 있는 창고로 가자. 어제 내가 밤새 그곳을 청소했는데 나중에 네가 닦은 거라고 해.”연경은 싸늘하게 자신을 거절하던 손기욱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조용히 조태복을 따라 창고로 갔다.한편 잠에서 깬 손기욱은 나무통 옆에 있어야 할 연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인상을 찌푸렸다.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태복은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상위에 어젯밤 갈아 놓은 이불을 본 순간, 태복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가가서 이불을 품에 안았다.“많이 한가하느냐?”“소인이 가져가서 깨끗이 빨겠습니다.”“그럴 필요 없으니 내려놔.”말을 마친 손기욱은 턱짓으로 침상을 가리켰다.조태복은 하는 수 없이 이불을 들고 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풍성한 아침상이 차려졌지만 손기욱은 수저를 드는 대신 태복을 불렀다.“그 아이는?”태복은 손에 땀을 쥐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으리, 소리 낮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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