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시녀의 생존수칙: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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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잠시 후, 손기욱의 앞에는 한 어린 시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날 뜨거운 국물을 쏟았던 그 시종이었다.그날 실수 때문에 그녀는 지금 창고로 쫓겨나 허드렛일이나 하는 신세가 되고 녹봉도 삭감 당한 상태였다.“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이 조심성이 없어 하마터면 귀하신 분들이 다칠 뻔하였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그녀는 송학당에서 사실을 말하였지만 돌아오는 건 장씨 어멈의 질책뿐이었다. 윗분들은 모두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날 분명 바닥에는 기름이 쏟아져 있었는데 다시 확인하러 갔을 때는 깔끔한 상태였다.어린 시종은 더 이상 변명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발이 미끄러졌다면서?”손기욱의 싸늘한 물음에 겁에 질린 시종은 울상을 지었다. 조태복은 연경이 어젯밤 베갯머리 송사를 했다고 오해하고 있었기에 오늘 일을 그냥 넘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겁먹지 말고 진실을 말하거라.”태복이 말했다.그제야 시종은 용기를 내어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다시 고했다.손기욱은 듣자마자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조태복을 힐끗 쳐다보고는 향란에게 물었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른대로 고하거라.”손기욱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던 향란은 연경이 반찬을 집다가 실수한 것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국그릇을 든 시종이 미끄러지며 연경에게 국물을 쏟은 경과까지 세세히 설명했다.그러고는 은근히 칭찬해 달라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나으리, 소인은 그날 매사에 조심하며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를지 않았습니다. 노부인께서는 소인의 침착함을 높게 사서 나으리께 보낸 거지요.”그녀는 연경과 비교하면 자신이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었다.그러나 온기 한점 없는 손기욱의 웃음은 그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어리석은 것.”향란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어찌 저를 어리석다 꾸짖으십니까?”“귀빈들이 계실 때는 저택의 시종들끼리 서로 뭉쳐야 하거늘, 타인이 실수를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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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그날은 각자 맡은 일을 하기도 바빠서 아무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송지운은 바짝 긴장한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그녀는 이렇게 큰 죄명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손유민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송지운은 고개를 들고 미소 짓고 있는 손유민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긴장을 추슬렀다.그날 연회에서 일했던 시종들이 모두 불려왔다. 연경도 마찬가지였다.손기욱은 국그릇을 엎지른 시종과 연경을 앞으로 부르고 시종에게 경과를 다시 설명하게 했다.사람들은 찬바람을 맞으며 정원에 서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조태복은 손기욱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큰소리로 말했다.“그날 연회상에서 시중을 들었던 이들은 왼쪽으로 서고 나머지는 오른쪽으로 가거라.”시종들이 줄을 맞춰 서자, 그는 다시 말했다.“너희는 연회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저 아이가 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시종들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손기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둘러보았다.곧이어 그는 몇몇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포착했다.“귀빈을 모시는 연회에서 너희의 일거수일투족은 무안 후작가의 체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곤경에 빠진 동료를 돕기는커녕, 방관하고 심지어 일부러 소란을 조성하기까지 했지. 이는 가주인 내가 아랫사람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기도 하니, 두 달치 녹봉을 삭감하겠다.”노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너만 벌할 수는 없지. 경과를 목격하고도 아무도 증언을 해주려 하지 않으니, 저 아이들도 같이 벌을 받는 게 좋겠구나.”주인에게 두 달치 녹봉을 삭감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시종들은 울상을 지으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잠시 후, 한 시녀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나으리, 소인은 홍영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그때 당시엔 거리가 너무 멀어 부축하고 싶어도 부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곧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증언이 이어졌다.“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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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노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 화색을 띠며 장씨 어멈에게 눈짓했다.“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오거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이 사람 좀 체한 것 같네요.”“눈치도 없는 녀석.”노부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손유민이 송지운과 혼인한지도 어언 반년이 흘렀다. 여태 회임 소식이 없어서 서운하던 차였는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노후작 부부의 신경이 모두 송지운에게 쏠리면서 심문은 중단되었다.그러나 손기욱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그는 제 사람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전장에서도 자신의 부하를 포기한 적이 없었고 후작가로 돌아온 이후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모두가 의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손기욱은 조태복에게 눈치를 주었다.“어제 연경이가 반찬 시중을 들 때 왜 실수를 하였는지 본 사람이 있느냐?”노부인은 아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불쾌한 듯, 표정이 굳었다.“이 일은 여기까지 하고 넘어가자꾸나. 연경 저 아이는 억울해할 것도 없어.”손기욱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고작 지압 몇 번 받았다고 이리도 챙겨주는 거니? 향란이는 내 사람들 중에 가장 지압을 잘하는 아이였어. 앞으로는 향란이한테 지압을 시키고 연경이는 다시 매화당으로 부르지도 말거라.”손기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왭니까?”노부인이 장씨 어멈에게 눈짓하자 장씨 어멈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나으리께서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저 아이는 본디 작은 마님이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시종이고 일만 잘하면 작은 마님은 통방으로까지 시켜줄 생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쎄 몰래 도련님에게 꼬리를 치고 다녔답니다. 너무 괘씸해서 노부인께서도 그날 화를 많이 내셨지요! 뜨거운 국물에 데도 싼 아이입니다!”“저 애가 뭘 몰래 간직하고 있었다고?”“도련님이 쓴 시를 몰래 소장하고 있었다니깐요! 그것도 도련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버린 종이조각을 말입니다. 소인이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수건도 기가 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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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그녀는 노부인과 송지운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손기욱은 달랐다. 어젯밤 매화당에 묵고 가게 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그 역시 그녀가 억울함을 당했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손기욱만 자기 편으로 만든다면 어떻게든 결백을 증명할 여지가 있었다.그러나 연회 당일날은 화상의 통증 때문에 뭔가를 주장할 여력도 없는 상태였다.게다가 노부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부덕한 하인으로 몰아세웠고 다음날 결백을 증명하려 했을 때, 손수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이로써 명확해진 점은, 노부인은 절대 한낱 시종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연경은 이미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손기욱 때문에 다시 희망을 보았다.그녀는 어떻게든 손기욱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그만 자신을 믿어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송학닥을 거의 나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손유민 부부가 손기욱에게 예를 행하는 사이, 연경은 기대를 안고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그러나 손기욱은 전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싸늘하게 지나쳐갔다.차갑게 식은 그 표정은 예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연경은 당혹스러웠다.그러나 손유민 부부도 곁에 있으니 입을 열 수도 없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향란은 재차 그녀를 매화당으로 불러 지압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지만 손기욱은 나타나지 않았다.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이유도 없게 되자 그녀는 매화당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마침 입구에서 손기욱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연경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그에게 예를 행했다.“나으리, 돌아오셨습니까?”손기욱은 담담히 그녀를 훑어보고는 꾸중하듯 물었다.“금수원 시종이 금수원에서 일을 하지 않고 여긴 왜 왔어?”“그게 아니오라….”연경은 순식간에 찬물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뒤에 있던 향란이 다급히 고했다.“나으리, 연경이가 지압을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술을 배우고 싶어 제가 불렀습니다. 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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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송지운은 갑갑한 마음에 옷을 갈아입겠다는 핑계로 내실로 들어갔다.지연은 손유민의 눈길을 받고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내실로 들어갔다.“작은 마님, 뭐가 그렇게 속상하십니까? 뒤에서 마님 몰래 밀회를 즐기는 것보다 차라리 대놓고 서재로 불러 일을 시키는 게 낫지 않습니까?”송지운은 화장대 앞에 앉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경양 후작을 닮아 약간 긴 얼굴형에 센 인상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눈썹도 진해서 평소에 계속 다듬어주어야 했다.연경은 외모로만 따지면 모든 방면에서 그녀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런 애가 작정하고 유혹한다면 과연 손유민이 넘어가지 않을까?송지운은 짜증스럽게 화장함을 닫았다.“여우 같은 년! 천한 몸종 주제에 어디 넘보지 말 것을 넘봐?”지연은 괜히 자신이 찔리는 기분이었지만 주인이 자신이 아닌 연경을 욕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다가가서 주인의 어깨를 주물렀다.“화 푸세요, 작은 마님. 지난번에 친정에 가셨을 적에 부인도 참을성을 기르고 회임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 하셨잖습니까. 현재 후작가에는 아이가 태어난 적 없고 만약에 작은 마님께서 회임이라도 하시면 노부인께서 얼마나 마님을 예뻐하시겠어요.”혼인한지 반년이 넘도록 회임 소식이 없자, 매번 친정에 돌아갈 때면 그녀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그리고 그녀 자신도 손유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작은 마님은 비록 경양 후작가의 딸이긴 하지만 혼인하였으니 부군을 하늘로 모시는 게 당연하지요. 지금 마님께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도련님뿐입니다. 전에 연경이 마당을 쓸 때도 그렇고 어제 송학당에서도 도련님은 작은 마님의 편에 서주셨잖아요? 도련님께 중요한 사람은 정실인 마님뿐이에요. 굳이 하찮은 시종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순간의 충동일 뿐이고 도련님은 언제까지나 마님을 옹호하실 겁니다. 만약 미천한 시종 때문에 도련님과 사이가 멀어진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 아닌가요?”송지운은 그 말에 감명받았다.“네 말이 맞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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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연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빠른 걸음으로 손유민을 따라갔다.손유민은 드디어 어렵게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그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몇 번 꾸중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꾹 참은 덕분에 그와 함께 외출할 기회를 얻은 거라고 생각했다.손유민은 폐하의 수렵대회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손기욱에게 잘 보여야했다.그러나 이미 게으름이 몸에 밴 그는 한 시진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수시로 연경에게 시선을 주었다.초라한 옷차림도 그녀의 고운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손유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리 와서 먹 좀 갈아.”연경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얇은 옷깃 사이로 흉한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손유민은 예리하게 그것을 발견하고 주변의 멀쩡한 살갗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어쩌다가 이리 심하게 데였어? 내가 준 연고는 바르고 있는 거지?”연경은 목을 살짝 움츠리며 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잘 바르고 있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하얗고 고운 손으로 부드럽게 먹을 갈기 시작했다.손유민은 그 예쁜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미리 경계하고 있던 연경은 순식간에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도련님, 여긴 서재입니다. 보는 눈이 많아요.”손유민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네가 내 글씨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어. 사실 네가 나한테 달라고 했으면 널 위해 시도 지어줄 수 있었는데 말이다.”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연경은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애절하게 말했다.“도련님, 그건 소인이 소장한 물건이 아닙니다.”그러나 그녀의 그런 해명은 손유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틈타 부드럽고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그러던 그의 눈에 손목에 가득 돋은 빨간 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목덜미에도 두드러기가 가득했다.그는 화들짝 놀라며 추궁하듯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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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연경에게 저택을 나갈 기회는 그리 자주 주어지지 않았다. 경성 지리를 모르기에 길에서 물어물어 한 시진을 가서야 겨우 편벽한 곳에 있는 백초당을 찾을 수 있었다.이곳의 주인이 서주행이라는 것은 태복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서주행은 기분에 따라 진료를 봐주니 좋은 의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백초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연경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상 서주행은 근래 계속 백초당에 틀어박혀 있었다.사고를 친 이후로 그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집안에서 쫓아낸 상황이었다. 게다가 다리까지 부러져서 바깥을 나돌 수 없으니 이참에 얌전히 백초당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면서 따분함을 느낄 때만 백성들을 위해 진료를 봐주었다.연경의 목소리를 들은 서주행은 익숙한 목소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심부름꾼이 한창 밖에서 성가신 듯 사람들을 내쫓고 있었다. 최근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구경꾼이고 진심으로 진찰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연경은 간절한 목소리로 심부름꾼에게 애원했다.서주행은 연경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이런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당장 들어오라고 해.”연경은 서주행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서 의원님? 의원님이 왜 여기에….”“기욱이가 보내서 왔어? 왜? 그 독한 말본새 때문에 칼이라도 맞았나?”서주행은 연경을 매화당 시녀로 여기고 있었다.연경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런 불길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늘 온 목적을 말했다.“오해세요, 의원님. 소인이 몸이 안 좋아서 찾아온 거에요.”서주행은 돌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안 후작부 근처에 인제당이 있지 않나? 왜 굳이 이 먼 백초당까지 걸어왔어? 혹시 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먼 길 걸어서 찾아온 건 아니고?”그는 돌탁자에 턱을 괸 채로 흥미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자칫 경박하게 들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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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그럴 순 없어요. 소인이 직접 내겠습니다.”연경이 손사래를 치던 찰나, 마당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불현듯 탁자로 뛰어올랐다. 녀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서주행은 혀를 차며 능글맞게 말했다.“저 녀석도 주인 닮아서 미인을 좋아하나 봐.”지난번 취옥헌에서도 그의 유쾌한 입담을 경험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내가 환자를 받을 때 늘 하는 버릇이 있는데, 완치 전엔 진료비를 안 받거든. 나아진 다음에 한번 와.”시녀의 처지를 잘 아는 서주행은 터무니없는 핑계로 연경을 돌려보냈다.떠나기 전, 연경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발진 원인을 못 찾고 계속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서주행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러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먹는 걸 가려서 먹어.” 그러고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난 아픈 미인보다는 생기 넘치는 미인이 더 좋거든.”연경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네요.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서주행이 이상함을 느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얼마 후, 심부름꾼이 불평하며 다가오더니 그에게 물었다. “요즘 장사도 안 되는데, 진찰비는 왜 안 받으셨습니까?”서주행은 그런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누가 안 받는다고 했어? 무안 후작네 장부에 적어둬!”이틀 후, 연경은 다시 오지 않았다.삼일 째, 손기욱이 찾아와 서주행을 주루로 끌고 갔다.한 사람은 위풍당당하게 걷고 한 사람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으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하필이면 손기욱은 맨 위층이 경치가 좋다며 위층을 고집했다.서주행은 숨을 헐떡이며 투덜댔다.“그 시종한테 말 좀 걸었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일이야?”"시종 누구?"서주행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연경이라는 아이 말이야. 어찌 그리 어여쁜 아이를 홀로 진찰을 내보낼 수 있어?”손기욱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라고 한소리 하려던 때, 옆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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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손기욱은 해명 대신, 음산한 눈빛으로 서주행을 노려보며 되물었다.“살 맛이 안 난다는 말은 또 뭐야?”서주행은 이미 손기욱을 통해 그가 약에 취해 연경을 품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주행은 연경이 손기욱의 통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손유민 일당의 말을 들었을 때 더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연경이 백초당을 찾아간 날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그날 걔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냥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식으로 들리더라고. 너는 내 성격 알잖아. 그 애가 상실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건 내 의술에 대한 도전이야! 내가 진찰해 줬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소문이 나는 건 싫다고!”“남의 부인에게 미련 버리지 못한 네가 명성을 신경 써? 신경 써서 지켜야 할 명성은 있고?”손기욱은 가소롭다는 듯이 서주행을 흘겼다.그는 연경이 이 지경이 된 건 불행을 자초한 거라서 연민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서주행은 냉담하게 혀를 찼다.“너 혓바닥에 독이라도 발랐더냐?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연경이란 아이는 언젠간 나무에 목 매달지도 몰라!”손기욱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그 애 얘기는 그만해!”서주행도 지지 않고 맞섰다.“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신분이 미천한 시종이라고 관심을 줄 가치도 없다는 거야? 시종 목숨도 목숨이야!”손기욱은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전쟁을 겪으며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연경 얘기가 나오면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와 딱히 상관없는 사람 때문에 네가 나한테 이렇게 소리를 지를 일이야?”“매정한 자식!”서주행이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그는 시종 목숨을 개미 목숨으로 보는 부류가 가장 싫었다.연경은 착하고 어여쁜 사람이고 그런 미인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서주행은 홧김에 벌떡 일어서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손기욱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고는 조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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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태복이 찾아온 까닭을 설명하자 송지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버님께선 아직 모르시나 본데 연경이는 지난 번 일 이후로 앓아 누웠네. 만약 아버님께 안 좋은 병이라도 옮기면 낭패 아니겠는가.”조태복은 그 말을 듣고 잠깐 고민하다가 매화당으로 돌아가 사실을 고했다.손기욱은 찬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내가 이 집안에서 참으로 만만한 존재인가 보구나. 시종 하나 불러오기가 이리도 힘들다니!”조태복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그는 울상을 지으며 답했다.“소인이 가서 정말 걷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어디 시종 따위가 주인의 명을 거슬러요? 숨만 붙어 있으면 바로 끌고 와서 시중을 들게 하겠습니다!”손기욱은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그리하여 태복은 또 금수원을 찾아가서 연경을 침상에서 끌어내린 후, 그녀를 끌고 매화당으로 갔다.그녀의 손등에 가득한 뻘건 두드러기와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복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손기욱은 피폐한 연경의 모습을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의원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가 뭐야!”“소인은 기력이 없습니다. 찾아가는 길에 쓰러질까 봐 두려워요.”송지운은 그녀가 음양 실조라는 진단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연경이 더러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송학당이나 매화당에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시종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송지운이 연경을 위해 의원을 불러줄 리가 없었다. 치료를 하려면 연경이 혼자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손기욱은 자포자기한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서주행의 부탁이 떠올라 태복을 시켜 그녀를 백초당으로 보내게 했다.물론 그는 따라가지 않았다.수치도 모르는 천한 시종 따위를 위해 친히 백초당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서주행의 바닥까지 추락한 명성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죽든 말든 관심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한 시진 후, 홀로 매화당으로 돌아온 태복이 고했다.“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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