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왕비는 힘겹게 비단 상자를 받아 들고는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붓과 먹, 종이와 벼루를 준비하거라. 편지를 써야겠다.”그녀는 손기욱에게 알려야 했다. 자신은 앞으로 연경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부디 딸만은 살려 달라고,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만은 놓아 달라고 말이다.경성 무안 후작부.손기욱은 연경이 승주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아 들고 짙게 가라앉아 있던 얼굴빛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역시 그랬다. 연경은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편지에는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조태복은 손기욱이 이렇게까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본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제야 크게 안도한 뒤 조심스레 보고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떠돌이 도장이 경성에 들어왔다 합니다. 구사일생 끝에 어렵사리 모셔왔는데 한 번 만나 뵈시겠습니까?”손기욱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또 산속에서 은둔하다가 나온 가짜 도사더냐?”말은 번지르르하고, 껍질만 두껍고, 속은 텅 빈 것들.조태복은 그가 노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을 이었다.“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듣자 하니 대단한 인물이라 합니다. 사람의 전생과 현생을 점칠 수 있다 하더이다.”손기욱은 냉소를 지었다. 이전에 데려왔던 자들 중, 그렇게 말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었던가? 그럼에도 그는 차라리 시간을 허비해 사기꾼을 하나를 더 만날지언정 쉽게 지나치지는 않으려 했다. 그 꿈들이 워낙 생생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조태복은 손기욱이 반대하지 않자 직접 나서 떠돌이 방사를 데리러 갔다.손기욱은 편지를 다시 펼쳐 읽다가 연경이 자신의 서재 책상 아래에도 작은 쪽지를 붙여 두었다고 적어 놓은 대목을 보고는 곧장 매향원으로 향했다.조태복이 사람을 데리고 매화당에 이르렀을 때, 손기욱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경의 작은 서재에 들어갔고 문을 열자마자 평소 늘 위엄을 잃지 않던 후작이 그 귀한 무릎을 굽히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손기욱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