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171 - Chapter 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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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1화

수많은 밤을 지나는 동안 주민혁은 늘 같은 꿈을 꿨다. 바로 최수빈과 율이가 죽어 가는 꿈 말이다.그 고통은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살을 파고들었다.주민혁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끝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최수빈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러다 주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내가 데려다줄까?”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나 차 가지고 왔어요.”“그럼 가는 길 조심해.”복잡한 감정을 뒤로한 채 최수빈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분명 할 말은 다 한 것 같았고 서로 간에 얽힌 오해도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았다.그런데도 둘 사이의 거리는 마치 아득히 먼 곳에 서로를 두고 있는 것처럼 끝내 한 발짝도 더 좁혀지지 않았다.최수빈은 가슴이 미어졌다.‘정말, 이제는 불가능한 걸까?’그렇게 최수빈이 별장을 떠나자 주민혁은 그 자리에 굳어 선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인 듯 조여 왔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둔한 통증이 따라붙었다.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요동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끝이 심하게 떨려 손가락을 제대로 펴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은 턱선을 타고 흘렀다. 신경 깊은 곳에서 찌릿찌릿하면서도 익숙한 통증이 치고 올라왔다. 수많은 가느다란 바늘이 한꺼번에 찌르는 것처럼,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결국 주민혁은 비틀거리며 책상 쪽으로 다가가 약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차가운 약병을 손끝으로 막 잡는 순간, 강지안의 말이 떠올랐다.“이렇게 계속 처방 무시하면 나중에는 진짜 신선이 와도 못 살려.”주민혁의 손은 그대로 멈추며 하얗게 질린 손마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강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강지안은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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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2화

“필요 없어.”강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숨 좀 돌리는 시간이었지, 누군가의 통제 아래 얌전히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장성훈은 그 말뜻을 거스르지 않고 말없이 차 앞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타려 했다. 그런데 그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는 순간, 강지안이 갑자기 엑셀을 끝까지 밟았다.차는 화살처럼 튀어 나가며 사라졌고 남은 건 매캐한 배기가스와 흙먼지뿐이었다.장성훈은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고 걱정하는 눈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곧장 주차장 한쪽에 세워 둔 다른 차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따로 마련해둔 예비 차량,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늘 연료를 가득 채워 두는 차가 있었다.곧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려 그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님, 부두 쪽에 일이 좀 터졌습니다. 형님이 와 주셔야...”장성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너희가 처리해.”그는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걸어 강지안이 떠난 방향으로 차를 몰아붙였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까 그 사람이었다.“형님, 그쪽에서... 강지안 씨의 동선이 다 파악돼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부하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뒤에 이어질 말은 차마 끝까지 꺼내지조차 못했다.장성훈은 단번에 표정이 굳었고 주변의 공기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협박이야? 그럼 바로 정리해.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가르쳐야 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네, 형님.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장성훈은 엑셀을 더 세게 밟았다. 그러자 차 속도가 순식간에 한계까지 치솟았다.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긴장한 턱선과 눈동자에 스며든 살기가 드러났다.그는 알고 있었다. 강지안을 노리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강씨 가문은 의학계에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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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3화

강지안은 갑자기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차가 길가에 급히 멈춰 서며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그대로 굳어버린 강지안은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장성훈이... 약혼한다고요?”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한순간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장성훈은 몇 년 동안 늘 그녀의 곁에 있었다. 밤낮없이 지키고 단 한 번도 태도에 흔들림이 없었다.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약혼이라니.“응. 집안끼리 딱 맞아.”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강석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원래 이런 건 굳이 너한테 알릴 필요도 없어.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애초에 성훈이는 내가 네 옆에 붙여 둔 경호원일 뿐이야. 내가 빼고 싶으면 언제든 빼는 거지.”강지안의 속에서는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눌렀다가 문득 피식 코웃음을 쳤다.‘그래. 성훈이의 눈에도 우리 둘 사이의 선이 분명하게 보였겠지. 신분이 다르고 지켜야 할 거리고 확실한 관계...’강지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맞아요. 저랑 상관없는 일이죠. 알아서 하세요.”전화기 너머의 강석우는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목소리가 더 냉랭해졌다.“지안아, 너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철이 없을 거냐? 이제 나이도 다 찼어. 슬슬 결혼도 생각해야지. 믿을 만한 남자랑 결혼해서 자리 잡고 더는 나 걱정시키지 마.”‘또 시작이네.’강지안은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었다.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녀의 인생을 정해 놓고 정작 그녀가 뭘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의대를 간 것도, 곁에 경호원을 붙인 것도, 이제는 심지어 결혼까지...그는 모든 걸 자기 손으로 쥐고 흔들고 싶어 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강지안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전화하신 게 그 얘기 하려고 그런 거면, 저 이만 끊을게요.”강석우가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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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4화

“일단 약부터 먹어.”강지안은 서둘러 다가가 의료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알약과 미지근한 물을 꺼냈다.주민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물컵을 받아 들고 약을 삼켰다.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잠깐 숨통이 트이는 듯했지만 신경 깊숙한 곳에 박힌 찌릿한 통증은 여전히 집요하게 버티고 있었다.“또 감정 기복이 컸던 거지?”강지안은 맞은편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요즘은 점점 더 조절이 안 돼. 계속 이렇게 가면 지금까지 한 치료 다 물거품 되는 거야.”주민혁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버텼다.그러고서야 쉰 목소리로 말했다.“조절이 안 돼.”그는 자신이 이제는 표정을 숨기는 법쯤은 완벽히 익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최수빈의 앞에만 서면 그 모든 가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억지로 눌러 두었던 감정들,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둔 미련과 걱정이 어느 틈에 거세게 치밀어 올라 그를 덮쳐 버렸다.강지안은 체온계를 거두고 수치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더 굳었다.“전부터 말했지. 널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는 사람한테서 멀어지라고. 예전의 너는 하늘이 무너져도 표정 하나 안 바뀌었어. 늘 담담했고.”곧 주민혁이 눈을 떴다. 눈빛에는 가시지 않는 피로와 자조 섞인 미소가 섞여 있었다.“담담해 보였을 뿐이야.”그는 강지안을 바라보며 낮게 덧붙였다.“너도 알잖아. 내 속내는 진짜로 평온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깊은 밤마다 무너져 내리던 순간들, 홀로 있을 때마다 밀려오던 절망, 우울증에 반복해서 짓눌리던 시간들...그 모든 걸 강지안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이 말을 들자 강지안의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렇게 말해 줘서 다행이네. 난 네가 다 속으로만 삼킬까 봐 제일 무서웠어. 마음속에 전부 묻어 두는 게, 차라리 다 털어놓는 것보다 더 위험하거든.”억눌러 두었다가 결국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환자들을 그녀는 너무 많이 봐 왔다. 때문에 주민혁이 스스로 약한 부분을 꺼내 보이는 건 치료 과정에서 이미 큰 진전이었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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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5화

게다가 이 모든 게 아버지 강석우의 손에서 짜여진 일이라는 사실이 강지안에게는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주민혁은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에 희미한 확신이 스쳤다. 그래서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떠나는 게 싫다면... 한 번 붙잡아 보는 것도 방법이야.”“붙잡아?”강지안은 자조하듯 피식 코웃음을 쳤다.“우리 아빠는 한 번 정한 건 쉽게 안 바꿔. 게다가 장성훈 본인도 약혼에 동의했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붙잡아?”장성훈은 사랑하는 사람이 할 법한 일은 다 해 놓고 정작 그녀에게는 ‘우리 사이에 사랑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거실은 다시 고요해졌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료 가방을 챙겼다.“약은 여기 둘게. 시간 맞춰서 먹고 다음 주에 진료 보러 와. 그리고... 감정 조절 좀 해. 이런 긴급 전화 또 받게 하지 말고.”주민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현관 쪽으로 걸어가던 강지안은 신발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주민혁... 나처럼은 굴지 마. 잃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고.”이 말을 남기고 문을 열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주민혁은 소파에 기대어 문 쪽을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신혼집을 나온 강지안은 운전석 문을 열고 몸을 숙여 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곤 멈칫했다.바로 장성훈, 검은 정장 차림에 소나무처럼 곧게 앉아 있었고 옆얼굴 선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손잡이를 쥔 강지안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었다.“너... 약혼한다며?”장성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감정이라곤 읽히지 않는 시선과 함께 곧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불필요한 설명도, 흔들림도 없었다.“그런 일을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꽤 오랜 세월을 같이 붙어 지냈었다. 그의 일상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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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6화

하지만 강지안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장성훈에게도 그의 삶이 있고, 언젠가 자신 곁을 떠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걸.장성훈이 고개를 돌려 강지안을 깊게 내려다봤다.“아가씨, 저는 그저 아가씨의 경호원입니다.”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잠긴 듯했다.“아가씨의 안전을 보장하는 게 제 임무예요. 약혼하더라도 아가씨가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시는 대로 달려가겠습니다. 이 목숨도... 아가씨의 겁니다.”강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이게 고백이랑 뭐가 다르지?’하지만 이건 이상하게도 고백이 아니었다.장성훈은 강지안에게 충분한 안전이라는 걸 보장해줬고 강지안도 알았다. 그의 목숨은 자신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하지만 딱 그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강지안은 자신이 아무리 말해도 장성훈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차 안이 조용해졌다.강지안은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더는 그를 보고 싶지도, 실랑이하고 싶지도 않았다.가슴 한가운데가 뭔가로 꽉 막힌 듯 답답해서 숨이 턱 막혔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목소리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지만 한층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였다.“운전해. 진료실로 데려다줘.”장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그렇게 차는 주민혁의 신혼집을 천천히 빠져나와 진료실 쪽으로 향했다.차 안은 여전히 말이 없이 공기가 굳어 버린 것처럼 숨 막히게 정적만 흘렀다.창밖으로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자 강지안의 마음은 점점 더 엉망으로 뒤엉켰다.자신이 장성훈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존하는 건지, 익숙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밖의 무엇인지...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가 약혼하고 자신을 떠날 거라는 생각만 하면 이유 없이 속이 쓰리고 아팠다.차는 곧 강지안의 개인 진료실 앞에 멈췄다.강지안은 문을 열고 내리며 뒤돌아보지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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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7화

장성훈은 잠깐 굳어 섰다. 강지안이 이런 말을 꺼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아가씨, 장난치지 마세요.”몇 년 동안, 장성훈은 늘 경호원이라는 자리에서 강지안의 곁을 지키며 선을 넘지 않겠다는 듯 철저히 예를 갖춰 왔다. 단 한 번도 규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강지안은 그 말을 듣고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목욕가운 끈이 절반쯤 미끄러지며 매끈한 쇄골이 드러났다.“이제 보니까... 너도 그렇게까지 내 말 잘 듣는 건 아니네.”그녀는 오랜 시간 쌓인 정이 있으니 설령 의리 때문이라도 조금쯤은 망설이거나 흔들릴 줄 알았다.하지만 장성훈의 눈에는 거부감과 거리를 두는 듯한 기색만 가득했다. 마치 막무가내로 떼쓰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말이다.“꺼져.”두 글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떨어졌다.이를 들은 장성훈은 시선을 내리깔더니 뒤돌아보지도, 변명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돌아서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안은 목욕가운을 세게 움켜쥐었다. 분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이 세게 들썩였다.따뜻한 수증기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바로 이러한 행동이 남자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강지안이 뭘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장성훈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냉담한 것이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다.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이렇게 서툴고 우스운 방식으로 떠보았는데도 장성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본능적인 거절과 회피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강지안은 천천히 침대 끝에 앉았다. 목욕가운이 더 흘러내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장성훈과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순간들이 떠올랐다. 깊은 밤 말없이 건네던 따뜻한 우유,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단단한 등, 가끔 그녀를 바라볼 때 스쳐 지나가던 다정한 눈빛...때마다 강지안을 흔들어 놓던 그 순간들이 결국은 전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장성훈이 그녀에게 잘해 준 건 처음부터 끝까지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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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8화

“들어오세요.”문 안쪽에서 주민혁의 차분하고도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그의 냉담한 얼굴이 그려질 정도였다.최수빈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주민혁은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곧 그녀는 일부러 물었다.“방금까지 바빴어요?”주민혁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봤다.그러더니 손에 쥔 펜을 내려놓고 몸을 살짝 뒤로 기대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바쁘진 않았어. 방금 임하은을 내보냈고.”너무도 담담했다.“둘 사이가 꽤 좋아 보이던데요.”주민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임하은은 협력 담당으로 플라잉 테크를 대표해 왔던 거야. 오늘은 07 프로젝트 협력 세부 조건을 논의하러 왔던 것뿐이고. 그게 전부야.”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그는 원래 이런 자잘한 디테일까지 굳이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부러 떠보듯 물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예전에 있었던 오해도 주민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사실 일부러 방치해뒀을뿐이었다.이내 그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그쪽에서 너한테 막말을 했으면 굳이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어.”그는 임하은이 어떤 사람인지도, 최수빈이 지금 뭘 생각하는지도 이미 꿰뚫고 있는 게 분명했다.최수빈은 옅게 웃어 보였다.“예전에도 이렇게 말해줬다면... 우리 사이에 오해가 그렇게 많진 않았을 텐데요.”그러자 주민혁이 잠깐 멈칫했다.“미안.”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놓쳐버린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거죠.”그리고 화제를 돌렸다.“유원과학 연구개발팀 쪽에서 왔어요. 곧 회의 일정 잡아서 같이 논의해요.”주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최수빈은 다시 물었다.“임하은 씨... 심 대표님이랑 손잡았어요?”주민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딱히 놀랄 일도 아니지. 임명규는 집에 갇혀 있고 임하은은 아버지를 구해야 하는데 다른 길이 없잖아. 그러니 눈앞의 줄이라도 잡으려고, 결국 호랑이랑 손을 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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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9화

“정말 그 아이를... 아예 손 놓고 모른 척할 거예요?”사실 최수빈은 늘 마음에 걸렸다.주시후가 아무리 버릇없어도 결국은 아이이지 않은가.그런데 지금은 심종연 같은 사람 곁에 붙어 있으니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주민혁은 표정이 차분한 것이 이 일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는 듯했다.남자가 담담히 말했다.“남자애 교육은 어릴 때부터 잡아야 해. 평범한 엄격함으로도 달라지지 않고, 남이 이간질하는 거에 넘어가서 옳고 그름도 못 가린다면... 지금 방식의 교육이 애초에 효과가 없다는 뜻이야. 겉으로는 우리 앞에서 얌전한 척해도 뒤에서는 결국 못된 면이 튀어나오게 돼. 어릴 때부터 너무 호화롭게만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컸잖아. 기본 성향에도 결함이 있는데 계속 감싸고만 돌면 벽에 부딪혀 볼 기회도 없어. 그렇게 가치관이랑 성격이 굳어버리면 나중에는 더 고치기 어려워.”이에 몸이 순간 굳더니 최수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민혁을 바라보았다.“그럼... 민혁 씨는 일부러 그 애를 고생시키려고 한 거예요? 일부러 심 대표님한테 붙게 내버려 둔 거고?”최수빈은 그저 주민혁이 바빠서 주시후를 돌볼 시간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다.그런데 이게 다 계산된 선택이었다니, 그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너무 매정하다고 느껴졌다.주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일부러가 아니라... 선택이야. 심종연이 입양하겠다고 나섰는데 우리가 막을 수는 없었어. 억지로 곁에 붙잡아 둬서 계속 버릇없게 만드는 것보단 차라리 겪을 건 겪게 하는 게 낫다고 봤지. 그 과정에서 단련이 되고 사람 속이 얼마나 험한지도 배우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법을 익힌다면...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어.”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 한복판이 뭔가로 꽉 막힌 듯 답답했다.주민혁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아이가 알 수 없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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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0화

“심종연은 주씨 가문 자체를 당장 손에 넣지 않아도 돼. 자기 친아들인 주시후가 앞으로 상속받으면 결국 그게 곧 자기 몫이 될 테니까. 그러면 나도 계속 주씨 가문을 운영할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이득만 챙기면 되는 거지.”너무나 끔찍한 나머지 최수빈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주기훈과 심종연의 꿍꿍이는 상상 이상으로 깊고 교활했다.그러니 이해가 갔다. 주기훈이 왜 그렇게 주시후를 예뻐했는지.심지어 ‘주시후가 주씨 가문 친자가 아니다’라는 얘기가 터졌을 때도, 그가 크게 분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납득할만했다.주민혁을 둘러싼 모든 건 허상이고 전부 연기였다.“그러니까 너는 이 일로 너무 마음 쓰지 마. 심종연은 자기 친아들한테만큼은 함부로 하진 않을 거야.”그러면서도 주민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다만... 그런 인간은 친아들조차도 협상 카드로 쓰지. 앞으로도 뭔들 못하겠어.”최수빈은 말문이 막혔다. 그저 너무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알고 보니 이 오랜 세월 동안, 모두가 체스판 위의 말이었다.주민혁이 이어 말했다.“아버지는 자기 신분상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이 절대 드러나면 안 돼. 안정적인 결혼 생활이 곧 안정적인 정치 생활과도 직결되니까. 이게 폭로되면, 우리 엄마는 분명 이혼하려고 할 텐데 아버지는 그걸 원치 않아. 그래서 심종연이랑 오래전부터 이런 계획을 짜뒀던 거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무도 모르게... 주씨 가문의 재산을 결국 자기가 주려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한 거야.”자신의 친아버지가 자신까지 계산 안에 넣고 움직였다는 사실이, 주민혁은 참으로 우스웠다.그는 주씨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었고 가정이 무너지지 않게 버텼다.그런데 결국 그 모든 게 누군가가 짜 놓은 판이었던 것이다.똑같이 친아들인데도 주기훈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최수빈은 주먹을 꼭 쥔 채 주민혁을 바라봤다.그가 이 모든 걸 알게 됐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걸 몇 년이나 혼자 삼키며 버텼을지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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