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181 - Chapter 1190

1205 Chapters

제1181화

주민혁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옆으로 늘어진 손은 티 나지 않게 주먹을 꼭 쥔 채로 말이다.한동안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곧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원한다면...”“당연히 원하죠.”잠깐 멈칫한 주민혁은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오래도록 속에서만 굴리던 말들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졌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시선을 내렸다. 손끝이 책상 위 프로젝트 서류를 스치자 목소리는 늘 그랬듯 침착한 톤으로 돌아왔다.“07 프로젝트 후속 테스트는 일정부터 다시 잡아야겠어.”최수빈도 마음을 추스른 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저도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협력사 쪽에서 최종 데이터는 사흘 더 빨리 달라고 하더라고요.”두 사람은 금세 일에 몰입해 기술 파라미터 최적화와 테스트 절차 연결을 논의했다. 조금 전의 미묘한 분위기는 업무 대화에 덮여졌지만 말이 오가는 틈마다 둘의 합이 은근히 느껴졌다.주민혁이 가끔 고개를 들면 최수빈이 진지하게 메모하는 옆얼굴이 보였다.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오후 여섯 시였다.서류를 정리하던 최수빈은 문득 아침에 딸이 했던 말이 떠올렸다.그래서 몸을 돌려 주민혁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 율이가 햄버거 먹으러 가고 싶다고 하던데... 민혁 씨도 같이 갈래요?”노트북을 덮던 주민혁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손끝이 차가운 금속 표면 위에서 몇 초간 그대로 머물렀다.그는 이런 평범한 가족 시간에 좀처럼 끼지 못했다. 특히 최수빈과 헤어져 지낸 지난 몇 년 동안은 율이가 크는 순간들을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그렇게 길게 망설이지 않고 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그래.”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살짝 풀린 최수빈은 얼굴에 진심이 담긴 웃음이 번졌다....차가 최수빈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은 조용했다. 그렇다고 불편한 침묵이 계속됐던 것 아니었다.최수빈은 가끔 율이의 근황을 전했다.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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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2화

집을 나설 때, 율이는 습관처럼 최수빈의 손을 잡으려다가도 시선이 저절로 주민혁에게로 향했다.작은 아이가 망설이는 것을 알아챈 주민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먼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율이의 손은 작고 말랑했다. 아이 특유의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주민혁의 마음도 덜컥 풀어졌다.낯설면서도 포근한 감각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었다.손을 잡힌 율이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금세 표정이 더 환해졌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꽉 되잡았다.가는 내내 율이는 신이 난 새처럼 재잘재잘 떠들었다.주민혁은 묵묵히, 그러나 끝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한두 마디를 물을 뿐인데도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따뜻해졌다.햄버거집에 도착하자 율이는 익숙한 듯 주문대로 달려가 발끝을 들어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고르기 시작했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아빠, 아빠는 뭐 먹고 싶어요?”눈빛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의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율이가 고르면 돼. 아빠는 뭐든 좋아.”주민혁은 아이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최수빈은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율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과 치킨, 에그타르트를 주문하고 주민혁에게는 따뜻한 음료 한 잔과 햄버거 하나를 추가해주었다.자리에 앉자마자 율이는 기다렸다는 듯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케첩에 콕 찍더니 주민혁 앞으로 내밀었다.“아빠, 이거 드세요.”주민혁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곧 바삭한 식감과 케첩의 새콤달콤함이 입안에서 퍼졌다.율이가 만족한 표정을 짓는 걸 보자 주민혁의 입꼬리 역시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그때 율이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봤다.“아빠... 예전에는 저 싫어했어요?”큰 눈동자에 잔뜩 눈치를 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이를 들은 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른 화제를 돌리려는데 주민혁이 조용히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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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3화

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지.”...최수빈은 주민혁이 차를 별장 차고에 부드럽게 밀어 넣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심코 조수석 안전벨트 버클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뒷좌석의 율이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졸린 지, 작은 머리가 꾸벅꾸벅 떨어지고 있었다. 입가에는 채 닦지 못한 케첩이 조금 묻어 있었다.주민혁은 먼저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는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만큼 가벼웠다.율이는 몽롱한 눈을 겨우 뜨다가 그가 보이자 순간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했다. 그래서 작은 손으로 장난감 감자튀김을 꼭 움켜쥔 채 아주 작게 말했다.“아빠...”최수빈이 다가가 자연스럽게 딸을 안아 올리며 입가의 침 자국을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많이 졸리지? 올라가서 씻고 바로 자자.”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봤다.“이따가... 신혼집으로 다시 가요?”주민혁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이미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아니. 회사로 가서 처리할 게 좀 있어.”조금 전까지 율이와 밥을 먹느라 휴대폰은 무음으로 해두고 엎어뒀던 탓에 화면에는 업무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율이가 그렇게 바라지 않았다면, 주민혁이 시간을 내서 식사 자리에 함께해주지 않았을 거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일들이 미뤄진 건 아마 그 한 끼 때문일 것이었다.“율이랑 밥 먹느라 일 다 밀린 거예요?”최수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 바쁘면... 내가 도와줄게요. 나도 비슷한 프로젝트는 전에 따라붙어 본 적 있어요.”잠깐 뜸을 들인 뒤, 그녀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늘 그렇게 밤새우면 몸 상해요.”얼마 전만 해도 주민혁은 일주일 내내 회사에 붙어 있다가, 결국 미열을 달고 회의에 나타났다. 얼굴이 창백해서 보는 사람까지 놀랄 정도였다.하지만 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최수빈의 품에 있던 율이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순간 율이는 몸이 살짝 굳었지만 버둥대지는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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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4화

주민혁은 말을 하다 말고 문득 멈췄다. 목소리는 웬일로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이를 본 최수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다급히 되물었다.“왜요? 무슨 꿈을 꿨는데요?”주민혁은 그녀를 올려다봤다. 눈빛에는 쉬이 걷히지 않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너희가 다 사라지는 꿈이었어.”목이 바짝 마른 듯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매번 너무 생생해. 깨어나면 손바닥이 땀으로 다 젖어 있을 정도로.”지난번에는 최수빈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미친 사람처럼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무리 찾아도 병실을 찾을 수 없었다.놀라서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하늘도 밝아오지 않은 새벽이었다.하지만 주민혁은 거의 반사적으로 최수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야 팽팽하게 조여 있던 신경이 겨우 풀렸다.이 말을 들은 최수빈은 온몸이 굳어버리며 피까지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이었다.그녀는 환생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지난 생에서, 그녀와 율이는 끝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은 늘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둔 채 감히 쉽게 들춰보지도 못했었다.‘이 일은 오직 나만 아는 건 줄 알았는데...’그런데 주민혁의 꿈은 너무도 정확하게 최수빈이 가장 두려워하던 지점을 찔러 들어왔다.‘이 사람도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우연일 뿐일까...’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테이블 위의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그냥 꿈일 뿐이에요.”하지만 주민혁은 최수빈을 가만히 바라보며 되물었다.“정말, 그냥 꿈일 뿐일까?”그 역시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랑 율이, 이렇게 멀쩡히 민혁 씨 앞에 있잖아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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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5화

최수빈은 주민혁이 일어나 서류를 정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심코 소파 팔걸이를 손끝으로 쓸었다.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많이 늦었는데... 그냥 오늘은 푹 쉬어요. 일은 잠깐 미뤄도 되잖아요.”이에 주민혁은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한 번 바라보았다.짙게 가라앉은 눈빛이 그대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킬 뿐, 바로 대답지는 않았다.일이라는 게 어디 쉽게 놓을 수 있는 것인가.07 프로젝트는 막바지 핵심 단계였고 심종연이 임하은과 손잡고 뒤에서 계속 압박을 넣고 있었다. 또 협력사에서는 대금 독촉 메일이 줄줄이 쌓여 들어왔다.기술팀도 골치 아픈 파라미터 최적화 문제에 걸려 있었고 결국 결정을 내려줄 사람은 그뿐이었다.그런데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최수빈의 눈빛을 보자 회사로 달려가야 한다는 조급하던 마음이 이상하게도 조금 옅어졌다.문득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이 집에는 율이의 고른 숨소리가 있고 최수빈에게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향이 있고 오래 잊고 살았던 사람 사는 기운이 있었다.텅 빈 사무실에서 차가운 서류와 불빛만 마주하는 것보다 이곳이야말로 잠시라도 경계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 같았다.최수빈도 그의 기운이 달라지는 걸 뚜렷하게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사실 일은 끝이 없잖아요. 내가 도와줄까요? 어차피 07 프로젝트 건이면... 내가 계속 따라붙었잖아요. 흐름도 다 알고 있고.”이 프로젝트가 주민혁에게, 그리고 제노 테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최수빈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주민혁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다.그녀는 더 이상 그의 뒤만 따라다니며 보호받던 사람이 아니었다.지금의 최수빈은 충분히 독립적이고 충분히 단단했고 어쩌면 가장 믿을 만한 같은 편이 될 수 있었다.“안 피곤해?”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민혁이 물었다.율이를 재우던 순간, 잔뜩 피곤해 보이는 최수빈의 눈빛을 그는 분명 봤다. 다만 끝까지 버티고 있을 뿐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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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6화

주민혁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곳에 멈췄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임하은 쪽에서 손을 쓴 것 같아.”잠시 말을 멈춘 그는 다시 덧붙였다.“어제 협력사 명의로 기술자들을 보내서 테스트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어. 그때는 그냥 정기 점검 같은 거라 생각해서 별생각 없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지.”최수빈은 자책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하은이 가만있을 리 없다는 걸 진작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벌써 데이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니...’“네 탓 아니야.”주민혁은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저쪽은 성과를 서두르느라 수단을 가리지 않을 거야. 그래도 지금 알아챘으니 아직 늦지는 않았어.”그는 백업 데이터를 불러와 비교 분석을 시작했다.“다행히 미리 백업을 여러 겹으로 해놨어. 조작된 지점만 찾아서 파라미터를 다시 맞추면 돼.”최수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에 합류했다. 그녀는 능숙하게 프로그램을 조작해 테스트 로그를 불러오고 의심스러운 데이터를 하나씩 추려냈다.두 사람은 가끔 짧게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사고의 흐름은 놀라울 만큼 맞아떨어졌다. 한쪽이 방안을 꺼내면, 다른 쪽은 이미 그다음 해결책까지 짚어내곤 한 것이다.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 어느새 밤이 더 깊어졌지만 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환했다.최수빈은 시큰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표정의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아직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래서 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라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밀었다.“물 좀 마시고 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그런데 컵을 받는 순간, 주민혁의 손끝에 최수빈의 손가락에 스쳤다. 미세하게 차가운 온도가 전해지자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물을 한 모금 삼키자 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며 메마른 느낌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거의 다 됐어.”주민혁이 컵을 내려놓으며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말했다.“조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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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7화

주민혁은 몇 초간 말이 없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이번만큼은 정말로 마음에 새긴 대답이었다.주민혁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최수빈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창가로 가 그의 차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지난 생에서 남겨졌던 후회가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한때 잃어버렸던 것들도 다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주민혁의 차가 최수빈이 사는 별장 단지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그는 건물 아래에 익숙한 흰색 세단 한 대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육민성이 트렁크에서 포장도 고급스러운 쇼핑백 몇 개를 꺼내 들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여유롭고 자연스러웠다.‘여기서 육민성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주민혁은 차에서 내렸다. 검은 정장이 그의 체형을 더 반듯하게 잡아줬고 아침 햇살이 눈매에 내려앉아 평소의 차가운 분위기가 조금 덜해졌다.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육민성은 주민혁을 보자 잠깐 놀란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곧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주 대표님, 웬일이십니까. 이런 데서 다 보네요.”말투가 묘하게 비아냥대고 있었다. 주민혁도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육민성이 최수빈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주민혁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그리고 자신이 없던 시간 동안 육민성이 최수빈과 율이의 곁을 지켜왔다는 것도, 그 마음과 수고를 주민혁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때문에 상대의 가시 돋친 말을 굳이 받아치지 않고 대신 시선을 육민성의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옮겼다.“그동안 수빈이랑... 우리 율이 챙겨줘서 고마워요.”담담하고 짧은 한마디였지만,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이 떨어진 듯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단번에 흔들어놓았다.이윽고 쇼핑백 손잡이를 쥔 육민성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그 말의 무게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감사라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최수빈이 이미 주민혁을 받아들였다는 말 없는 선언이었다.육민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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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8화

육민성은 휴대폰을 꺼내 미리 써 둔 안부 문자를 지웠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면 놓아주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지도 몰랐다.최수빈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율이가 온전한 가정을 갖게 되는 것, 이는 마침표를 찍는 셈이었다.한편, 계단에서는 주민혁이 쇼핑백을 든 채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가방 안에서는 장난감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났고 달콤한 과자 향도 은은하게 퍼졌다. 최수빈과 율이를 향한 육민성의 마음, 군더더기 없이 맑고 진심 어린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들이었다.열쇠로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율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최수빈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율이는 분홍색 공주 드레스를 입은 채 거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곰인형을 꼭 쥐고 있었다.“아빠!”아빠를 보자 율이는 눈빛을 반짝 빛내더니 신나게 달려와 품에 와락 안겼다.주민혁은 쇼핑백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딸을 받아 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품에 착 붙으며 은근한 분유 향이 스치자 그 순간 긴장했던 주민혁의 몸도 거짓말처럼 풀렸다.“천천히 뛰어. 넘어지겠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최수빈도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나왔다가 주민혁이 들고 온 쇼핑백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건... 뭐예요?”“육 대표님이 두고 갔어. 율이 장난감이랑 네가 좋아하는 간식들이래.”주민혁은 쇼핑백을 건네며 아래에서 육민성을 마주친 이야기를 담담히 전했다.최수빈은 가방을 받아 열어봤다. 안에는 정말로 그녀가 좋아하는 과자가 담겨 있었고 최신 레고 세트도 하나 들어 있었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율이가 떼를 쓰며 갖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제품이었다.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더니 고마움도 미안함도 한꺼번에 뒤섞였다.“전화해서 고맙다고 말할까...”휴대폰을 꺼낸 최수빈은 손끝을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지금 육민성의 기분이 어떨지 그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 전화는 오히려 그를 더 힘들게 만들지도 몰랐다.“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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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9화

율이는 죽을 먹으면서도 자꾸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였다.‘아빠가 정말 내 곁에 있는 거야? 내가 바라던 일이 진짜가 된 거야? 더 이상 아빠의 대답을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번에는 아빠가... 정말로 나를 좋아해주실까...’율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밥만 먹었다.그런데 바로 그때였다.주민혁의 휴대폰에서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임하은이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이 증거로 최수빈 씨를 이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어요.]순식간에 눈빛이 가라앉으며 주민혁은 손가락을 움직여 첨부 파일을 열었다.안에는 ‘증거’라며 꾸민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최수빈이 당시 대회 심사위원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내용의 조작된 은행 이체 내역, 그리고 앞뒤를 잘라낸 채팅 기록 몇 줄...마치 최수빈이 누군가와 심사위원 매수와 박하린을 함정에 빠뜨릴 방법을 상의한 것처럼 보이는 대화였다.심지어 증인 진술서까지 있었다. 서명란에는 당시 대회 스태프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찍혀 있었고 내용은 최수빈의 수상작이 부정으로 얻어진 결과라는 쪽으로 못 박고 있었다.주민혁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임하은이 어떤 수를 쓰는 사람인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임명규는 높은 자리에서 오래 버텨온 만큼 가장 잘하는 게 판을 뒤집고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임하은은 그런 걸 곁에서 보고 자랐으니 그대로 배웠을 게 뻔했다.조금만 판을 짜고 이익에 넘어갈 사람 몇 명만 구해 거짓말을 얹고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증거를 만들어 붙이면, 남의 인생에 씻기지 않을 오명을 씌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임하은이 이제 와서 옛일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이 일을 빌미로 최수빈의 평판을 완전히 박살 내겠다는 것이었다.항공우주 분야에서 연구 과정에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건 치명적이다. 한 번 사실로 굳어지면 최수빈은 정말로 이 바닥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터였다.주민혁은 메시지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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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0화

최수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쥐고는 이를 악물듯 말했다.“임명규 씨는 이미 연금된 상태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임하은 씨는 아직도 아버지 대신 나서서 자멸하려는 걸까요?”‘이런 거로 날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순진하네.’당시 대회에서 최수빈은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기술 파라미터 하나하나, 코드 한 줄 한 줄까지 전부 밤을 새워가며 직접 쌓아 올린 결과였으니 말이다.박하린이 떨어진 건 작품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임하은이 굳이 그 일을 다시 들춰낸 건, 결국 궁지에 몰려 발악하는 거였다. 최수빈을 망가뜨려 심종연이 갈 길을 닦아주고 동시에 임씨 가문의 판을 망쳐놓은 그녀에게 복수하려는 속셈인 것이다.주민혁은 그녀의 차분한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섭지 않아?”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증거’가 세상에 퍼지면 나중에 누명을 벗는다 해도 평판에 오점이 남을 수 있었다.항공우주 분야는 원래 개인의 윤리와 신뢰를 특히 엄격하게 본다. 게다가 소문과 험담은 실제적인 피해보다 더 잔인할 때가 많았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민혁 씨는 늘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내가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그거, 날 너무 사람을 얕보는 거예요.”주민혁은 순간 말을 잃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현재 최수빈은 이 업계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남자들 투성이인 항공우주판에서 제힘으로 자리를 잡았고 실력으로 전국 대회 금상까지 따냈으니 말이다.그녀는 원래도 단단했고 영리했고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결단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그런데도 주민혁은 습관처럼 최수빈을 모든 비바람에서 떼어놓고 싶어 했다.너무 많은 모략을 겪으며 사람 마음이 얼마나 비열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더더욱 더 좋은 것, 더 안전한 것만 최수빈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가 더러운 싸움에 발을 들일 필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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