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31 - Chapter 1240

1410 Chapters

제1231화

최수빈이 바라는 건 고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것뿐이었다.이 정도 부탁조차 거절할 자격이 주민혁에게 있을까.원래 그는 그녀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든, 무엇을 요구하든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한참 침묵이 이어진 끝에 주민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알겠어. 다 네 말대로 할게.”“그럼 지금 바로 병원 가요.”최수빈이 곧바로 말했다.“너 방금 깨어났잖아.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그냥 나 혼자 다녀올게.”주민혁이 말했다.“끝나고 나면 전화할게.”최수빈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주민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더는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주민혁은 원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몸이 약해진 모습을, 그것도 가장 초라한 순간을 그녀에게 보이는 걸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었다.“알겠어요. 가는 길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요.”주민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비틀거리는 듯한 주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수빈은 가슴 한쪽이 먹먹해져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은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외삼촌 이성민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수빈아, 오늘 병원에 재검받으러 가는데 너도 같이 올래? 지난번에 두통 있다고 했잖아. 온 김에 너도 진료 한번 받아.”순간 눈빛이 흔들리다가 최수빈은 곧장 대답했다.“좋죠, 지금 바로 갈게요.”마침 잘됐다 싶었다. 이 기회에 주민혁의 몸 상태도 좀 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30분 뒤, 최수빈은 이성민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재검이 끝난 뒤, 그녀는 몸이 좀 불편한 척 핑계를 대고 곧장 권우진의 사무실로 향했다.“수빈 씨가 웬일이에요?”권우진은 그녀를 보자 조금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어디 아파요?”“머리가 좀 아파서요. 온 김에 민혁 씨의 상태도 좀 물어보고요.”최수빈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오늘 병원에 왔다던데 이미 만나셨겠죠? 몸 상태가 대체 어느 정도예요?”권우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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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2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방식 때문에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점점 더 멀어졌다는 거죠.”“이제는 저와의 만남을 아주 거부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저와 가까워지려는 것도 아니고요.”최수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제가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부러 계속 저를 밀어내고 있어요. 저도 그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수빈 씨는 이미 그분 마음 안에 있어요.”권우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대표님의 가장 큰 적은 수빈 씨도 아니고, 과거의 일들도 아니에요. 자기 자신이지. 예전에 수빈 씨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아직도 자기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거예요.”권우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억지로 대표님 마음속에 들어가려고 애쓰지 마요. 당장 과거를 내려놓으라고 다그칠 필요도 없어요. 지금 수빈 씨가 할 수 있는 건 그분 곁에 있어 주는 거예요. 시간을 좀 주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그 끝없는 굴레에서 천천히 빠져나올 수 있게 기다려줘요. 제 말 믿어요. 대표님 마음속엔 분명 수빈 씨가 있어요. 수빈 씨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명 자기 마음을 열게 될 거예요.”최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권우진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감정의 문제는 서두른다고 풀리는 게 아니라는 걸.하물며 주민혁처럼 마음속 응어리가 깊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하지만 지금 그의 상태를 보고 있자니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병원을 나온 뒤에도 최수빈은 계속해서 권우진의 말을 곱씹었다.주민혁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으나 지금은 그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었다.일주일 뒤면 07전투기 프로젝트의 극한 환경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연구팀은 남극으로 향해야 했고 프로젝트 총책임자인 주민혁도 직접 팀을 이끌고 가야 했다.남극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혹독한 곳이었다.살을 에는 추위,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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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3화

려운과의 통화를 끊고도 수화기 너머의 통화 종료음은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그사이 최수빈의 손끝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위험한 결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조금도 망설일 수는 없었다.주민혁의 몸 상태, 그리고 남극이라는 극한의 환경.그 두 가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겁게 짓눌려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려운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최수빈은 확신하고 있었다.오랫동안 주민혁의 곁을 지켜온 그 사람이라면 결국 자신의 뜻을 이해할 것이고 무엇보다 주민혁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할 거라고.예상대로 30분쯤 뒤, 려운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수빈 씨, 모든 절차는 처리해 두었습니다. 연구팀 합류 명단과 남극 출입 자격 등록도 전부 마쳤어요.]최수빈은 그제야 조금 숨을 돌리고 침실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여행 가방을 꺼낸 그녀는 가장 먼저 두꺼운 패딩부터 차곡차곡 넣었다.모두 방풍과 방수 기능이 뛰어난 전문 장비였고 소매와 목 부분의 벨크로 덕분에 찬바람이 스며들 틈도 거의 없었다.짐을 싸다 말고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그녀는 서재 서랍 앞으로 걸어가 작은 약통 하나를 꺼냈다.그 안에는 기침약과 감기약, 동상에 대비한 상비약이 들어 있었고 안정과 수면을 돕는 약도 몇 통 함께 담겨 있었다.주민혁은 늘 생각이 많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곤 했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에 그녀는 그것들까지 챙긴 것이었다.마지막으로는 비타민 몇 통과 압축 비상식량도 가방에 넣었다.짐을 다 꾸리고 나니 창밖은 어느새 해가 질 무렵이었다.최수빈은 소파에 앉아 이혜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결이 되자마자 곧장 말했다.“엄마, 바빠요? 할 말이 있어서요.”“안 바빠. 지금 막 저녁 준비하려던 참이야.”이혜정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나 먼 데 좀 다녀와야 해요. 남극으로 프로젝트 테스트하러 가는데 아마 보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율이가 아직 어려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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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4화

“남극에 가는 거야. 거긴 눈과 얼음이 가득하고 귀여운 펭귄들도 많아.”최수빈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설명했다. 딸이 괜히 걱정할까 봐서였다.“남극?”율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다 곧 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TV에서 봤는데 거기 엄청 춥대요. 옷 꼭 따뜻하게 입고 가요. 감기 걸리면 안 돼요.”말을 마치자마자 율이는 자기 방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무언가를 꼭 쥔 채 다시 뛰어나왔다.“엄마, 이거요!”율이는 보물이라도 꺼내듯 두 개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내가 용돈 모아서 산 거예요!”최수빈은 상자를 받아 조심스럽게 열었다.안에는 보송보송한 분홍색 장갑 두 켤레가 들어 있었다. 손끝에는 작은 눈꽃 자수가 놓여 있었고 같은 디자인의 니트 모자도 두 개도 함께 들어 있었다. 모자 끝에는 작은 털 방울이 달려 있어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최수빈은 다른 한 세트를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이것도 엄마 거야?”“아니요.”율이는 고개를 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아빠 거예요. 남극 엄청 춥다고 했잖아요. 아빠는 몸도 안 좋으니까 따뜻한 장갑이랑 모자 꼭 써야 해요.”순간, 최수빈은 마음이 따뜻해지며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아이가 주민혁까지 챙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동안 주민혁은 일부러 다가가진 않았지만, 늘 무심한 듯 율이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곤 했었다. 거기에 가끔은 함께 블록을 맞추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아마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쌓여 율이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를 진정한 아빠로 받아들인 것이리라.“고마워, 율이야. 엄마도 너무 마음에 들고 아빠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최수빈은 딸을 꼭 끌어안은 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율이 정말 착하고 기특하다.”율이는 엄마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두 팔로 목을 꼭 끌어안았다.“엄마, 빨리 와야 해요. 보고 싶을 거예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엄마, 그런데 그렇게 먼 데 가면... 나쁜 사람 만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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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5화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잔뜩 굳은 주민혁의 턱선을 올려다봤다.“내가 직접 오겠다고 한 거예요.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일은 아니죠.”“려운.”주민혁이 뒤따라오던 비서를 돌아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그러자 려운은 어깨를 움츠린 채 황급히 앞으로 나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대표님, 수빈 씨는 천공 기술팀에서 특별 파견한 정식 구성원입니다. 이번에는 07전투기 프로젝트 극한 환경 테스트 지원 명령을 받고 합류한 거라 모든 절차도 정식으로 밟았고 규정상 아무 문제도 없어요. 저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말끝을 흐리며 그는 몰래 최수빈 쪽을 한번 힐끗 봤다. 그 눈빛에는 난처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출발 전, 최수빈은 일부러 공식 명의로 등록 절차를 진행하라고 당부해 뒀었다. 주민혁이 분명 반대할 걸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주민혁의 가슴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려운은 제멋대로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야. 수빈이가 미리 다 준비해 둔 일이겠지.’그는 다시 복잡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최수빈에게로 돌렸다.“최수빈, 남극이 어떤 곳인지 알면서 이러는 거야? 기온은 상상 이상으로 낮고 시속 8급이 넘는 강풍이 일상처럼 불어. 폭설이 몰아칠 수도 있고 빙하 틈이 언제 생길지도 몰라. 그런데도 왜 꼭 와야 하는데?”“내가 오는 걸 원하지 않는 건 알지만, 난 민혁 씨랑 나란히 가고 싶어요.”최수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07전투기 프로젝트는 민혁 씨만의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나도 처음부터 개발에 참여했다고요. 설계 도면부터 핵심 부품 조정까지 전 과정에 함께했고 성능상의 약점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극한 환경 테스트는 가장 중요한 단계예요. 그러니까 나도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해요.”“그쪽 환경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 넌 극지 적응 훈련도 받은 적 없고 몸 상태에 대한 정밀 점검도 제대로 안 끝났어. 그런 곳에 갈 몸이 아니라고.”주민혁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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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6화

최수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옆으로 늘어뜨린 손은 저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그녀는 한 번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래, 만약 우리 둘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율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겨우 몇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부모를 잃고 이 세상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는가.탑승 대합실의 소음이 어느새 멀어졌다. 주변 사람들마저 희미한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최수빈은 주민혁의 눈빛에 어린 안타까움과 걱정을 느끼며 속으로 치열한 갈등을 겪었다.한편으로는 그의 곁을 지키며 함께 이 고비를 넘기고 싶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딸을 향한 무거운 걱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두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거세게 부딪치는 것이었다.곁에 서 있던 려운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감도는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주민혁이 왜 걱정하는지도 알겠고 최수빈이 왜 물러서지 않는지도 알기에, 선뜻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었다.흔들리던 눈빛도 서서히 진정되며 결심이 들어선 듯 단호해졌다.“돌아갈 수 없어요.”목소리는 낮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율이는 내 딸이에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누구보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알잖아요. 극한 환경 테스트는 모든 연구팀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거. 안전 데이터도 충분히 확보돼 있으니 큰일이 날 가능성은 없어요. 그리고 딸을 핑계로 날 막으려 하지 마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짜 걱정해야 할 사람은 민혁 씨니까. 내가 안 가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민혁 씨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최수빈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민혁 씨가 허락해도 난 갈 거고 허락하지 않아도 난 갈 거예요. 이 일은 민혁 씨 뜻대로 안 돼요.”주민혁은 온몸이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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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7화

주민혁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그는 고개를 숙인 채 딸이 준비해 준 물건들을 바라봤다. 마음속에서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엉켜 요동쳤다.사실 그는 늘 의도적으로 율이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옆에 앉아 있던 최수빈은 주민혁의 표정 변화를 고스란히 지켜봤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어떤 감정은 결국 스스로 풀어내야 하는 법, 옆에서 무슨 말을 덧붙여도 큰 의미가 없다.그러니 최수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곁에 있어 주며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주는 것뿐이었다.비행기가 중간 경유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연구팀 일행은 계획대로 지정된 호텔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마지막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호텔은 미리 예약돼 있었고 전원이 같은 층에 배정됐다. 관리도 편하고 기밀 자료의 보안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07전투기 프로젝트의 핵심 데이터와 테스트 계획 등 중요한 자료 대부분은 주민혁이 직접 들고 다니는 암호화 하드에 저장돼 있었다.그래서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그 무거운 책임도 함께 따라다녔다.체크인을 마친 뒤.최수빈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기대앉아 테스트 계획서를 넘겼다. 연이은 비행 탓에 몸이 조금 무거웠다.율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고 주민혁의 몸 상태 역시도 신경 쓰였다. 왠지 이번 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최수빈은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마음속에는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주민혁과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는 것 말이다.이렇게 끝없이 미루고 계속 엇갈린 채로 둘 수는 없었다.밤 열 시쯤.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최수빈이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주민혁이 손에 보온팩 하나를 든 채 서 있었다.“먹을 거 좀 가져왔어.”그가 담담하게 말했다.“들어와요.”최수빈이 문을 닫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탁자 앞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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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8화

“남극 환경은 수빈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해. 거기 가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자기 자신부터 지켜. 나 신경 쓰지 말고.”최수빈이 고개를 들었다.“우린 같이 온 거잖아요. 그럼 같이 돌아가야죠. 자꾸 나 밀어내려고 하지 마요.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일이든 감당할 각오는 이미 했어요.”그러자 주민혁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어두운 눈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밥 다 먹고 얼른 쉬어.”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런 다음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주민혁은 문 앞에서 한 번 멈춰 서서 다시 그녀를 돌아봤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네.”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방을 나서자 방문이 조용히 닫히며 안에는 다시금 적막이 내려앉았다.최수빈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음식들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할 말은 충분히 다 했으니 주민혁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다만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뿐이었다.문을 나선 주민혁은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암호화된 하드는 침대 옆 금고 안에 있었다. 그는 금고를 열어 자료를 확인한 뒤에야 침대에 몸을 눕혔다.손에는 율이가 건네준 장갑이 들려 있었는데 주민혁은 그걸 가만히 품에 끌어안았다.눈을 감자 이상하게도 더 이상 춥지 않았다.끝없이 어둡기만 하던 세상 속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든 것 같았다.더는 그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었다.행복은 아직 조금 더 멀리 있는 것이었다.다음 날 아침, 연구팀은 예정대로 출발했고 비행기는 다시 이륙해 남극을 향해 날아갔다.최수빈은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옆에는 주민혁이 앉아 있었다.“돌아가면... 율이 데리고 놀이공원 가자. 제일 먹고 싶어 하던 아이스크림도 사주고.”침묵을 깨며 주민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해볼게.”이를 들은 최수빈의 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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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9화

탐사 기지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바깥의 혹독한 추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기지 내부는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복도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벽면에는 각종 극지 환경 데이터와 도표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직원들은 이미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주민혁이 들어서자 모두가 곧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눈빛에는 뚜렷한 경외심이 어려 있었다.“주 대표님, 수빈 씨. 방은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2층 서쪽에 있는데 전망도 좋고 업무 소통하시기에도 편하실 거예요.”탐사 기지 책임자인 장병욱은 쉰이 넘은 중년 남자였다.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거칠기까지 했다.이런 곳에서 오래 버틴다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주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생 많으셨습니다.”그러고는 최수빈을 돌아봤다.“넌 먼저 방에 가서 짐 정리해. 30분 뒤에 회의실에서 짧게 회의를 할 거야. 테스트 역할 분담이랑 안전 수칙부터 정리해야 하니까.”“네.”최수빈은 키카드를 받아 들었다.그런 다음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는 주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길고 반듯한 몸, 문득 그가 전보다 많이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도 허리는 꼿꼿한 것이 사람들 앞에만 서면 그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괜히 마음 한쪽에 불안함이 스며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에 붙잡힐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곧장 최수빈은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방은 크지 않았지만 필요한 건 다 갖춰져 있었다. 난방도 잘 들어왔고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한눈에 들어왔다.최수빈은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율이가 준 장갑과 모자를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그다음에는 챙겨 온 약과 테스트 장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노트북을 든 채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서는 연구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상석에 앉은 주민혁의 앞에는 테스트 계획안과 극지 기상 자료가 펼쳐져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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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0화

“그럼 이제 다시 테스트 절차를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장병욱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주민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테스트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합니다. 대신 최수빈 씨는 철수해야 해요.”순간 모두의 시선이 최수빈에게 쏠렸다. 최수빈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하지만 주민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곧장 회의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나만 따로 빠질 이유 없어요. 철수할 필요도 없고요.”최수빈이 먼저 말했다.주민혁은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미 준비해뒀어. 장성훈 씨가 널 데리고 근처 도시로 이동할 거야. 거기서 한랭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다시 돌아오면 돼. 여긴 너무 위험하잖아. 굳이 여기 남아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어.”최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곧바로 거절하려 했지만 주민혁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무거운 감정이 가득 담긴 눈빛에 목소리도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최수빈, 우리의 목숨까지 함께 걸 수는 없어. 우리에게는 율이가 있잖아.”그 한마디가 찬물처럼 그녀를 덮치더니 입 밖으로 쏟아내려던 반박의 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주민혁만 바라봤다. 마음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였고 결국은 율이를 위해서이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혼자 빠져나가라고 하면, 그와 다른 팀원들만 위험한 곳에 남겨두고 가라고 하면 도저히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넌 율이 엄마야.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주민혁이 낮게 말했다.“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다른 팀원들은 다 극지 환경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야. 하지만 넌 아니잖아. 여기 남아 있는 건 너무 위험해.”그 말은 무겁게 가슴을 내리쳤다.주민혁은 끝까지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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