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11 - Chapter 120

144 Chapters

제111화

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상황을 이해했다.그들이 같은 방을 쓰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박하린은 늘 신혼집에 드나들며 한때 자신과 주민혁이 쓰던 안방에서 버젓이 자고 있었다.이제 둘이 함께 방을 쓰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한 방을 오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최수빈은 시선을 돌리며 방문을 닫아버렸다.그리고 캠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술에 취한 회사 동료들을 방까지 데려다 눕히느라 한참을 바삐 보냈다.그렇게 모두를 챙기고 나니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최수빈이 방으로 돌아와 씻을 준비를 막 하려던 순간, 현관 벨이 울렸다.‘아마 송미연이나 선배겠지?’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갈아입을 옷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문틈 너머 주시후가 갈아입을 옷을 품에 안고 서 있었고 아이의 얼굴에는 은근한 거만함이 비쳤다.“저 좀 씻겨 줘요.”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새엄마가 자신을 씻겨 준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났기 때문에.하지만 최수빈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갔다.“내가 너한테 뭐라도 돼? 내가 왜 널 씻겨줘야 하는 건데?”하지만 주시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아빠랑 엄마는 바쁘니까 못 하지만... 아줌마는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오늘 밤 전 아줌마랑 잘 거예요.”주시후는 굳이 바쁜 부모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최수빈은 냉랭한 표정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그걸 본 주시후는 잽싸게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고 침대에 걸터앉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어서 씻겨 줘요.”“엄마 자리를 빼앗아 산 것도 몇 년이나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줌마는 저한테 보상해야 돼요. 이건 아줌마가 저한테 진 빚이라고요!”어린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날카롭게 최수빈의 가슴 깊숙한 곳을 단칼처럼 베어냈다.그동안 최수빈은 온 마음을 다해 아이를 아끼고 보살폈다.그러나 아이의 눈빛엔 단 한 점의 정조차 남지 않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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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최수빈은 순간, 세상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코웃음을 쳤다.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하게 내뱉을 수 있을까?마치 당연히 자신이 주시후를 책임져야 하고 그 아이를 품어야 한다는 듯이.그럼 연애하며 밤을 즐기는 건 두 사람의 몫이고 아이를 돌보는 건 당연히 자기 몫이라는 건가?최수빈은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살 이유는 없었기에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주민혁 씨,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제가 주시후를 제 아들처럼 여겨야 한다는 거죠? 전 이미 말했어요.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그 말만 남긴 채, 최수빈은 주민혁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섰다.그리고 뒷모습만 남긴 채 떠나는 그녀를 주시후는 코를 훌쩍이며 가만히 바라봤다.‘역시 새엄마는 독한 여자였어.’...다음 날, 최수빈은 호텔에서 짐을 챙긴 뒤 주예린을 데리고 올림피아드 수학 수업에 보내려 준비했다.캐리어를 끌고 나오던 순간 박하린이 주시후를 데리고 나오는 모습과 마주쳤다.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어젯밤 분명히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각각 다른 방에서 나온 듯 연기하고 있었다.최수빈은 금세 눈치를 챘다.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척, 각자 방에서 나온 듯 위장하는 것.‘정말 영악하네.’박하린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좋은 아침이에요. 어제는 제대로 얘기도 못 했네요.”그러고는 뜬금없이 물었다.“천공 연구원에서 일하는 건 어때요?”뜬금없고 기묘한 물음이었다.최수빈은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 걱정해 줄 사이라 생각하지 않았다.지금 이건 여우가 닭의 안부 묻는 격 아닌가?한 마디로 속이 빤히 보였다.무시하려는 최수빈 앞에서 박하린은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갔다.“저도 앞으로 민혁 오빠랑 어깨를 나란히 할 거예요. 민혁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언니를 제 비서로 붙이라고.”박하린은 우월한 듯 최수빈을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혹시 천공 연구원에서 일하시는 게 힘들면 언제든 절 찾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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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최수빈은 휴대폰 화면에 뜬 ‘할머니’라는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몇 초간의 정적 끝에 결국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수빈아, 요즘 바쁘지?”“괜찮아요.”“전에야 늘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저녁 먹고 갔는데 요즘은 통 안 오네. 민혁이랑 다퉜니?”최수빈은 차마 사실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할머니는 여전히 주민혁과의 인연을 이어주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엔 이미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벽이 놓여 있었다.최수빈은 대답을 몇 초간의 침묵으로 대신했다.그 기류를 감지한 듯, 할머니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퇴근하고 할머니랑 밥 먹자. 내가 식당 예약하마.”퇴근 후, 간단히 옷매무새를 고쳐 입은 최수빈은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할머니는 이미 와 있었고 그녀를 보자 손짓했다.“왔구나, 앉아.”최수빈이 자리에 앉자 할머니는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먹고 싶은 거 골라 보렴.”하얀 셔츠에 소매를 무심히 걷어 올리고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청순했다.비록 얼굴은 여전히 곱고 단정했지만 예전보다 한결 야윈 티가 났다.할머니는 가만히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여름이라 그래요. 저 원래 여름 되면 좀 빠지잖아요.”“내가 매년 여름을 다 지켜봤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마른 적은 없었는데.”손녀를 지켜봐 온 할머니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요즘 들어 주민혁과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민혁이가 혹시 너한테 못되게 굴어서 속상한 거니?”최수빈은 메뉴를 보다가 메뉴판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두 사람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사이였다.그의 냉담함은 언제나 변함없었다.단지 이제야 최수빈이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을 뿐이고 전생처럼 어리석게 집착한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었다.“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굵은 목소리와 함께 주민혁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를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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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그는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최수빈이 새우를 좋아한다는 건 분명 다른 여자의 취향일 텐데.할머니는 곧장 주민혁을 나무랐다.“네 아내 좀 더 챙기고 아껴라. 맨날 일에만 파묻혀 있지 말고.”주민혁은 묵묵히 마치 모범적인 사위라도 되는 듯 차분히 대답했다.“네.”식사가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할머니가 불현듯 최수빈을 보며 물었다.“수빈아, 영희 3주년 제사도 곧 다가오지? 준비는 하고 있니?”젓가락을 움켜쥐고 있던 최수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외할머니, 허영희.할머니와는 소꿉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평생을 의지한 친한 친구였다.그런 존재를 먼저 떠나보내고 이제 3주년을 맞이한다는 건 최수빈에게도 특별한 의미였다.옛 풍속에 따르면 3주년은 망자의 영혼이 세상과 완전히 이별하고 조상으로 들어서는 때라고 했다.그래서 이전 제사보다 훨씬 더 성대하고 정중하게 치러야 했다.“네, 준비하고 있어요.”오늘 이렇게 자리를 만든 것도 사실은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조례랑 같이 챙겨. 혼자 하려다간 아이들까지 돌봐야 해서 벅찰 거야.”순간, 최수빈의 뇌리에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외할머니 제삿날, 주민혁은 해외 출장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하지만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았다.그건 출장이 아니라 박하린을 만나러 간 거였음을.외할머니는 최수빈의 삶에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녀는 결코 홀로 그날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이번 생에도 주민혁은 어차피 빠질 거라 여겼다.그리고 사실 그와 얽히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식사가 끝난 뒤, 최수빈은 할머니 앞에서 굳이 주민혁과 함께 집으로 가는 연극은 하고 싶지 않았다.“회사에 일이 있어서요. 저 먼저 가야겠어요.”“무슨 일이야? 얘, 넌 수빈이를 못살게 굴고 있는 거니?”할머니의 의심 섞인 시선이 주민혁에게 향했는데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최수빈이 이미 주상 그룹에서 사직한 지 오래라는 것을.이내 주민혁은 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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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주민혁이 무심하게 그녀를 흘깃 쳐다보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박하린과 통화를 이어갔다.“응, 곧 갈게.”뚝!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시동을 걸었다.“차 세워요.”그러나 최수빈이 단호하게 말했다.주민혁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은 창가에 느슨하게 걸쳐둔 채,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어디로 갈까? 네 자취방?”말투는 태연했고 말 안에 감정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저 내릴 거예요.”하지만 최수빈은 단호했다.“할머니가 널 데려다주라 하셨어.”그 뜻은 명확했다.주민혁이 이렇게 나선 건 애정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할머니의 말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것.차는 곧장 최수빈의 집 앞에 멈췄고 그녀는 미련도 없이 문을 열고 내려섰다.그리고 최수빈이 발을 떼자마자 주민혁은 기다렸다는 듯 차를 몰고 떠났다.멀어지는 엔진 소리에 최수빈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박하린 씨 데리러 가는 게 더 급했겠지. 그럴 거면 애초에 나를 데려다 줄 필요도 없잖아.’...다음 날 아침, 최수빈이 천공 연구원에 들어서자 육민성이 씩씩대며 다가왔다.“어젯밤에 말이야, 주 대표님이 박하린 씨를 데리고 나랑 한 선생님을 만났어.”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지난번 정상회담 때 박하린 씨 수법이 서갑수 씨한테는 통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번엔 아예 직접 데리고 와서 조건을 걸더라고. 밑에서 배우는 걸 허락해 준다면 511 연구원이든 천공 연구원이든 다 몇백억씩 투자를 하겠다고.”육민성의 말투에는 분노가 잔뜩 묻어났다.“결국 실력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맨날 낙하산 탈 궁리만 하지. 그런 주제에 어떻게 선생님 눈에 들겠어?”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아직도 천공 연구원에 들어오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거지. 그리고 조건을 덧붙였어. 만약 들어오면 주 대표님도 받아들이겠다고.”최수빈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지만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박하린을 얼마나 아끼는지.하지만 이제는 돈과 권력을 쏟아부을 정도라니, 솔직히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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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육민성이 그녀의 담담한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봤다.마치 이렇게까지 평온한 게 제정신인가 싶은 듯.“너 진짜 화 안 나?”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미쳐 날뛰었을 일이지만 최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사랑받는 쪽은 언제나 당당하니까.”지난 생에 주민혁의 사랑을 얻겠다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매달렸던 최수빈은 그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지 이제는 뼈저리게 안다.이번 생엔 절대 다시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박하린은 학력도, 실력도 탁월한 인재임엔 분명하다.하지만 이 나라에 인재가 얼마나 많은가.천재라 불려도, 백만 중 하나라 해도, 결국 그 위에는 더 빼어난 사람들이 존재한다.박하린이 국가 무대에 오르고 하준재 앞에서 빛을 발하려면 그 길을 닦아주는 건 결국 주민혁이고 그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그 사실을 알기에 최수빈은 더 이상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천공 시스템이 막 론칭된 뒤, 회사는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로 분주했다.정부는 창업과 신생 기업을 밀어주고 있었고 천공 역시 국가사업에 발맞추어 나아가야 했다.며칠 동안, 최수빈은 연구 논문을 파고들며 기술적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육민성과 기술팀이 함께 아이디어를 교류하자 곳곳에서 번뜩이는 가능성이 튀어나왔다.그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511연구원 프로젝트 총책임, 생각해 본 적 있어? 자리 비워둔 지 꽤 됐어. 선생님께는 내가 얘기해 볼게.”그 말에 최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금 더 실력을 쌓으면 생각해 볼게요.”지금은 공부도, 연구도 더 끌어올려야 한다.무엇보다 주예린.그녀가 511연구원에 들어가면 아이를 돌볼 시간은 사라질 것이다.이번 생엔 일과 아이 중에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한다.“좋은 밥은 늦게 먹어도 맛있는 법이지.”육민성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쉬는 것도 잊지 말고.”그의 말대로 최수빈은 이미 어디서든 탐낼 인재였다.대회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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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이건 누가 봐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짓이었다.“그럼 해외 쪽이라도 알아봐요. 제작만 가능하다면 다음 길은 저희가 열 수 있으니까.”최수빈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렇게 말하자 이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해외 발주는 비용이 훨씬 크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주민혁이 조윤미의 회사에 거액을 투자하며 판을 기울이는 건 막을 수 없는 일.그렇다면 수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것뿐이었다....외할머니의 제삿날이 다가오자 최수빈은 분주하게 준비를 이어갔다.틈틈이 해외 제작사와도 연락했고 다행히 조건에 맞는 곳에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그 와중에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제사 준비 상황을 꼼꼼히 묻고 빠뜨린 게 없는지 다시금 당부하려는 뜻으로.“제가 준비 잘하고 있어요.”최수빈이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할머니는 안심하며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할머니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시선은 자연스레 옆 탁자 위 사진으로 옮겨갔다.사진 속의 노인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할머니는 떨리는 손끝으로 액자 표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벌써 네가 떠난 지도 3년이 되는구나.”머릿속에는 친구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들이 하나둘 되살아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민혁이랑 수빈이... 사이좋게 지내게 좀 지켜줘. 요즘 둘이 자꾸 틀어지네.”한편, 최수빈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정 속에 잠까지 설쳤다.이혜정은 아무리 주민혁을 찾으려 해도 번번이 려운이 전화를 받으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마치 고의적으로 프로젝트를 막아서는 듯했다.밤새 마음이 무거워 잠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결국 다음 날 아침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상대는 받지 않았다.사실 이제 와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주민혁이 자기 전화를 외면하는 게 일상에 가까웠으니까.그럼에도 공식 절차는 멈출 수 없다.이혜정은 계속해 제작사와 접촉했고 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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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최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주민혁의 회사를 박하린은 언제든 막힘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그건 지난번 방문에서도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비서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흥미를 잃은 듯,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내뱉었다.“뭘 그리 잘난 척하세요?”그 말만 남기고 그는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최수빈은 회의실에서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렸다.기다리다 지쳐 감각이 무뎌질 쯤, 마침 려운이 나타났다.“대표님은 박하린 씨랑 프로젝트 회의 중이세요. 제가 비서님 한테 전하라 했는데 모르셨나요?”려운의 말에 최수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스스로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와서 빈정대기만 하고 정작 중요한 건 말도 안 해줬구나.’려운은 최수빈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정식 아내임에도 남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보다 큰 건 경멸이었다.‘대표님을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썼다고 했지? 결국 박하린 씨 자리를 빼앗았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러니 지금 저 꼴이 난 거지.’그런 시선이 눈빛에 스며들어 겉으로는 공손했지만 속마음은 다 드러나고 있었다.신세계 그룹에서 나와 나온 뒤에도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역시나 받지 않았다.‘아예 나를 일부러 피하는 건가.’이제 와서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다.그렇지만 프로젝트 세부 사항은 반드시 그가 결재해야 했다.만나야 하는 상황인데 이처럼 고의로 외면하는 건 분명 의도적이었다.생각 끝에 최수빈은 일찍 퇴근해 주예린의 하원 시간에 맞춰 유치원 앞으로 갔다.혹시 주민혁이 아이를 데리러 올 수도 있으니까.그 사이 휴대폰을 열어 뉴스를 보던 그녀의 시선이 한 기사에 꽂혔다.[CEO 주민혁, 여자 친구 회사 프로젝트 준공식 참석.]손가락이 멈추고 기사를 누른 순간, 화면 속에 담긴 장면은 가혹했다.주민혁과 박하린이 나란히 서서 지창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된 리본을 함께 자르고 있었다.‘내가 회사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계속 박하린 씨 곁에 서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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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외삼촌의 꾸짖는 듯한 말에 최수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그는 아직, 그녀와 주민혁이 이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결혼 초,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그녀는 늘 좋은 소식만 전했다.모두가 주씨 가문에서 최수빈이 잘 지내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무엇보다도 주씨 가문에는 원금영이 든든히 버티고 있었으니 누구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외삼촌은 병세가 심각했다.이런 때,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간 충격을 주고 마는 건 뻔했다.그래서 최수빈은 대답을 피해 갔다.사실 주민혁은 원래부터 그녀 집안일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지난번 할머니가 직접 식당을 잡아 외할머니 제사를 언급했을 때도 그는 분명 알고 있었지만 애써 피했다.외할머니가 생전에 계셨을 때만 겨우 형식적으로 얼굴을 비추었을 뿐, 돌아가신 뒤로는 단 한 번도 온 적 없었다.“우선 제물부터 차리죠.”최수빈은 화제를 돌리며 제단 앞을 향했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르신 오셨습니다.”구십이 넘은 어르신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천천히 걸어왔다.손에는 외할머니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과자와 닭고기가 들려 있었다.최수빈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 맞았다.“할머니.”원금영은 빙그레 웃으며 손에 든 음식을 건넸다.“이거 제단에 올려라. 영희가 생전에 참 좋아했지. 일부러 새벽같이 일어나 만들었단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구나.”“할머니의 정성을 알면 외할머니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이혜정과 이성민도 나와 인사를 나누었고 오랜만의 상봉이라 이런저런 안부가 오갔다.그러나 이성민의 시선은 자꾸만 대문 쪽으로 향했다.오늘 주씨 가문에서 온 사람은 오직 원금영 혼자였다.할머니는 그런 이성민을 보며 말했다.“민혁이가 곧 올 거야. 기다려 보자꾸나.”이성민은 콧소리를 내며 대꾸를 삼켰다.‘사위랍시고 제사에도 무심하다니.’이혜정은 사정을 알기에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했다.“우선 제단부터 차립시다.”그때 어린 주예린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저도 엄마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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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최수빈의 모든 일은 언제나 박하린보다 중요하지 않았다.곧 원금영은 최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네가 전화했을 때 뭐라고 했니?”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낮게 답했다.“바쁘다고 했어요.”이성민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돈을 그렇게 벌고도 아직 남았나? 이토록 중요한 날에도 바쁘다니.”최수빈은 입을 다물었다.주민혁은 바쁜 게 아니었다.단지 자신이 그의 눈에 전혀 비치지 않을 뿐.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그녀는 주민혁에게 있어 존재조차 중요하지 않았다.원금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외삼촌의 비난 앞에서 그녀는 억지로 좋은 말을 했지만 이내 직접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받지도 않았다.그래서 원금영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제사를 막 시작하려던 순간, 최진식이 안으로 들어오며 빈정거렸다.“이렇게 중요한 날인데 아무도 나한테 알리질 않네?”이혜정의 눈빛은 순간 싸늘해졌고 최수빈은 아버지를 본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어머니 앞에 섰다.“여긴 아빠를 맞이할 자리가 아니에요.”그의 방문은 뻔했다.이혜정이 쥐고 있는 동비 그룹을 두고 쉽게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밖에서는 조윤미라는 여자를 데려다 첩으로 삼아놓고 한편으로는 이혜정을 붙들고 이혼도 미루었다.그리고 조윤미의 딸, 박하린은 바로 최수빈의 결혼을 흔든 불청객이었다.딸이건 어머니건, 남의 가정을 파고드는 건 똑같았다.최진식은 굳은 얼굴로 낮게 꾸짖었다.“네 눈에 어른이고 뭐고 없어? 나는 네 아버지다. 네 외할머니 기일에 내가 오는 게 잘못됐어?”사업가라면 크고 작건 원래 아내와의 체면은 지키기 마련이었다.최진식은 그런 체면 때문에라도 제사에 얼굴을 내밀었다.하지만 주민혁은 아예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애초에 이 결혼을 존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최수빈은 그제야 깨달았다.세상에서 가장 추한 건, 자존심을 잃은 인간의 얼굴이라는 걸.이혜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서려 하자 이성민이 팔을 붙잡았다.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말했다.“이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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