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531 - Chapter 1540

1586 Chapters

제1531화

차 문이 열리고 시후가 막 내리자 율이의 눈이 반짝였다. 율이는 곧장 달려와 작은 얼굴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었다.“시후야!”시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옅게 웃으며 손을 뻗어 율이의 작은 손을 살며시 잡았다.오랜만에 만난 두 아이에게 어색함은 없었다. 오직 반가운 마음만 가득한 것이다.두 아이는 손을 꼭 잡은 채 깡충깡충 뛰어 집 안으로 들어갔고 조잘거리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집 안을 떠들썩하게 채웠다.최수빈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나 짐 좀 챙길게요. 내일 소풍 갈 때 필요한 것들 준비해야 해서요.”그녀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주민혁이 뒤따랐다.“내가 도와줄게.”안방.최수빈은 옷장을 열어 가볍고 편한 외투를 꺼낸 뒤, 아이들이 쓸 작은 담요와 물병, 간식 통까지 하나하나 꺼내 꼼꼼히 정리했다.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마음속의 온기를 모두 담아내는 것만 같았다.주민혁은 문가에 서서 그런 최수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요 며칠 그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 제대로 된 위로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고, 캐묻지도 않았다.대신 그저 묵묵히 곁에 있어 주었다. 그를 돌봐 주고, 감싸 주고, 그가 물러설 곳까지 미리 생각해 두며 모든 것을 다정하게 준비해 주었다.‘난 수빈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졌어. 너무 오랫동안 수빈이를 불안하게 만들었고...’다음 순간, 주민혁이 조용히 다가가 뒤에서 최수빈을 천천히 끌어안았다.그러고는 자신의 가슴을 그녀의 등에 댄 채 팔로 허리를 감쌌다. 힘은 세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다신 놓치고 싶지 않다는 애틋함과 그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손을 멈칫하더니 들고 있던 옷을 가만히 침대 위로 떨어뜨렸다.이윽고 주민혁은 최수빈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지친 기색과 미안함, 그리고 오래도록 감춰 두었던 다정
Read more

제1532화

다음 날 이른 아침.새벽안개가 아직 다 걷히기도 전에 최수빈은 일찍 일어났다.교외의 푸른 산은 얇은 베일에 잠긴 듯했고 공기에는 풀과 흙의 싱그러운 냄새가 가득했다.최수빈은 짐을 모두 챙겨 트렁크에 간식과 과일, 담요, 비상약 상자를 넣었다. 두 아이를 위해 준비한 작은 우비와 장화도 빠뜨리지 않았다.하늘이 잔뜩 흐려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는지라 율이는 노란빛이 도는 작은 우비를 입었다.잔뜩 신이 난 율이는 마당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시후는 한쪽에 조용히 서서 전날 밤 최수빈이 새로 사준 작은 책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주민혁은 오늘 단순한 연회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말끔한 정장을 입었을 때의 날카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전체적으로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다만 미간에 남은 희미한 침울함만은 여전히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남아 있었다.최수빈도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아이들이랑 놀아 주기만 해요. 알았죠?”그러자 주민혁이 시선을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응’하고 대답했다.차는 시내를 벗어나 교외의 산길을 향해 부드럽게 달렸다.가는 내내 두 아이는 뒷좌석에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눴다.율이는 자신의 간식을 시후에게 나눠 주었고 시후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율이에게 건넸다.조용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아이는 율이의 밝은 기운 속에서 조금씩 긴장을 풀며 가끔 옅은 미소도 지었다.룸미러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수빈은 마음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햇빛이 차창을 지나 주민혁의 옆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선명한 윤곽과 곧게 뻗은 콧날은 여전했지만, 눈 밑에 옅게 드리운 그늘은 그가 요 며칠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어제 강지안의 진료소에서 돌아온 뒤, 최수빈 역시 밤새 깊이 잠들지 못했다. 한 번씩 주민혁의 이마를 만져 보고, 또
Read more

제1533화

‘그냥 이렇게, 계속 이렇게만 지낼 수 있다면 좋겠다.’최수빈은 주민혁이 당장 완전히 낫기를 바라지 않았다. 모든 원한을 곧바로 내려놓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가끔 이렇게라도 긴장을 풀고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조금이나마 느꼈으면 했다.하지만 날씨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옅은 안개가 끼어 있을 뿐이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이다.순식간에 바람이 거세졌고 나뭇잎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멀리서는 희미한 천둥소리까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최수빈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비 오겠어요. 일단 내려가요. 비 피할 곳부터 찾자고요.”주민혁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곧 그가 막 입을 열어 모두 내려가자고 하려던 순간, 콩알만 한 빗방울이 갑자기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빗방울은 나뭇잎 위로, 돌계단 위로, 우산 위로 사납게 쏟아졌다. 소리는 급하고도 거셌다.십여 초도 지나지 않아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몇 방울 흩뿌리던 비가 곧장 폭우로 변한 것이다.시야는 금세 빗물에 흐려졌고 바람은 비를 휘감아 사람 몸 위로 들이쳤다. 기온도 갑자기 뚝 떨어졌다.“빨리 비를 피해야 해!”주민혁은 곧바로 외투를 벗어 율이와 시후의 머리 위에 씌웠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한 아이씩 감싸 보호하며 옆쪽에 조금이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산 벽 아래로 급히 몸을 옮겼다.최수빈도 얼른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쳤지만 비바람이 너무 거셌는지라 우산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흔들렸고 제대로 막아 주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작 1분 만에 네 사람의 몸은 절반 이상 젖어 버렸다.최수빈은 추위에 몸을 살짝 떨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걱정한 것은 아이들과 주민혁이었다.그의 몸은 아직 다 낫지 않았고 우울증 역시 이런 일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거나 정서적으로 다시 자극되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겁을 먹은 율이는 최수빈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시후도 입술을 꼭 다
Read more

제1534화

“난 올라가서 확인해 볼게.”주민혁은 마치 바로 옆을 잠깐 둘러보고 오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 사람이 여기 온 적이 있다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거야.”“안 돼요!”최수빈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민혁 씨, 지금 날씨가 어떤지 안 보여요? 폭우에 산길은 미끄럽고 시야도 안 좋아요. 이런 데를 혼자 올라가겠다고요? 너무 위험하잖아요!”“내가 알아서 할게.”“뭘 알아서 해요?”최수빈은 다급함에 눈시울까지 붉어졌다.“민혁 씨 상처도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지안 씨가 그랬잖아요. 무리하면 안 되고, 자극받아도 안 되고 비 맞으면서 뛰어다니면 더더욱 안 된다고요. 잊었어요? 우리 오늘 쉬러 나온 거예요. 사람 쫓으러 온 게 아니라!”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세게 붙잡더니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힘을 주었다.“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정말 뭐가 있다 해도 비 그친 뒤에, 경찰 불러서 다시 오면 되잖아요. 다음에 다시 와요. 네? 오늘은 그냥 평범한 소풍이었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자고요.”그녀는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심종연이 또 한 번 달아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최수빈이 두려운 것은, 겨우 조금 나아진 눈앞의 남자가 다시 집착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주민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미안함도 있었고 안쓰러워하는 기색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끝내 눌러지지 않는 집착이었다.“최수빈.”목소리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러웠다.“이건 기회야.”“난 그게 기회인지 아닌지 상관없어요!”최수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내가 아는 건 하나에요. 지금 민혁 씨는 가면 안 된다는 거. 그럴 몸 상태도 안 되고 날씨도 안 돼요! 민혁 씨, 나를 봐서라도, 율이랑 시후를 봐서라도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지 않으면 안 돼요?”옆에 있던 율이는 어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겁을 먹고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나 무서워요...
Read more

제1535화

‘이제 됐어,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해. 원한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고 단서는 다시 찾으면 되잖아. 심종연도 다시 쫓으면 돼.’하지만 그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마저 잃어버린다면, 설령 온 세상을 이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었다.온 세상이 하얗게 흐려져 있었다.길고 긴 몇 초가 마치 한 세기처럼 느껴졌다.마침내, 주민혁은 천천히 들어 올렸던 발을 거두었다.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더 이상 산 위쪽을 바라보지 않고 한 걸음씩 최수빈의 곁으로 돌아왔다.이윽고 그가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꼭 감쌌다. 제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 주려는 듯했다.낮게 쉰 목소리, 그 안에서는 지친 기색과 함께 어렵게 마음을 접은 흔적이 느껴졌다.“...일단 호텔로 돌아가자.”최수빈이 홱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은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눈물이 빗물과 섞여 함께 흘러내렸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주민혁은 몸을 숙여 한 팔로 율이를 안아 들더니 다른 손으로 시후의 손을 잡았다. 그런 다음 최수빈은 제 곁에 바짝 붙여 비바람을 막아 주며, 세 사람을 데리고 천천히 산 아래 차로 내려갔다.비바람은 여전히 거셌고 산길은 미끄러웠다.하지만 이번에 주민혁은 단 한 번도 산 위를 돌아보지 않았다.그의 세상은 더 이상 추적과 원한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품 안의 사람과 곁의 아이들, 그리고 그가 무사히 돌아가야만 하는 집이 있었다.차창 밖으로는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차 안은 조용했지만 따뜻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곁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은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이들과 그녀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주민혁의 손등 위에 올렸다.그러자 이번에 그는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살며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산 비가 아무리 거세도 사람 마음속의 온기까지 꺼뜨릴 수는 없었다.집착이 아무리 깊어도
Read more

제1536화

주민혁은 한참 동안 시후를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이리 와.”그가 시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내 옆으로 와.”최수빈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주민혁이 아이를 몰아붙이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는 그저 답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음속에 계속 걸려 있던 가시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뽑아내고 싶은 것뿐이었다.시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작은 몸이 좌석 사이를 조심조심 지나 주민혁의 곁으로 옮겨 갔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옆에 살며시 앉았고 불안한 듯 작은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쥐었다.주민혁은 비에 흠뻑 젖은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마음이 약해졌다.‘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렸네...’철이 들어도 너무 들어서 오히려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아이는 무슨 일이 생기면 무서워하거나 응석을 부리는 게 먼저가 아니라, 자신을 탓하고, 몸을 움츠리고, 어른들에게 폐가 될까 봐 눈치를 봤다.주민혁은 손을 뻗어 먼저 자신이 입고 있던 반쯤 젖은 외투를 벗었다.그리고 시후의 어깨 위에 가만히 걸쳐 주었다. 그렇게 작은 몸을 외투 안에 감싸 주고 나서야 주민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종연 아빠가 널 여기 데려온 적 있다고 했지?”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언제쯤이었어?”주민혁의 말투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웠다.“기억나? 아주 오래전이야, 아니면 최근이야?”“오래... 엄청 오래전이었어요.”시후가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떠올렸다.“그때는... 그 사람이 아직 안 갔을 때였어요.”앞좌석에 앉아 있던 최수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렇다면 심종연이 아직 국내에 있었고 완전히 종적을 감추기 전의 일이라는 뜻이었다.다시 말해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산속에 판을 깔아 두고 몸을 숨길 곳까지 마련해 두었다는 뜻이었다.주민혁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그때 널 데리고 와서 뭘 했어?”그
Read more

제1537화

그건 성이 아니라 심종연의 은신처였다.몸을 숨기고 다시 판을 짜고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해 둔 그의 소굴이었다.주민혁의 숨결이 아주 희미하게 무거워졌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도 조용히 말려 들어갔다.오래도록 찾아 헤맸다끈질기게 뒤쫓았다.루안타에서 은산시까지, 드러난 곳에서 어둠 속까지...심종연은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줄 알았다.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멀리 도망친 게 아니었다. 줄곧 은산시 외곽에 있던 것이었다.바로 이 숲속에, 누구도 떠올리지 못할 ‘성’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나 판다고, 그중에서도 이 굴이 가장 깊고 가장 위험했다.최수빈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곁에 있는 남자의 감정이 다시 조금씩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억지로 눌러 두었던 집착과 불안, 분노와 미련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그래서 하마터면 말을 끊고 화제를 돌려 시후에게 더는 말하지 말라고 할 뻔했다.하지만 그 순간, 주민혁이 먼저 자신을 붙잡았다.그 성이 정확히 어느 방향에 있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었다.어떻게 들어가는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기가 있는지, 공범이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캐묻지 않았다.주민혁은 그저 시후를 바라볼 뿐이었다.진지하면서도 어딘가 겁먹은 아이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가 꽉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은 전례 없이 부드러웠다.“무서워하지 마.”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시후가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그 성... 나쁜 사람들 있는 곳이에요?”주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대신 아이를 조금 더 제 곁으로 끌어당겨 율이와 함께 품 안에 감싸 안듯 보호했다.“맞아.”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하지만 아빠가 있잖아. 아빠가 너희 지킬 거야. 다시는 누구도 널 데려가게 두지 않을 거야.
Read more

제1538화

이번에는 가족을 먼저 안전하게 두고 모든 준비를 끝낸 뒤에야 한 걸음씩, 차분하고 확실하게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최수빈은 백미러 너머로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너무 오랫동안 주민혁의 위에 쏟아지던 폭우도 어쩌면 이제 곧 그칠지 몰랐다....차가 호텔 입구에 멈췄을 때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빗줄기는 차 지붕과 바닥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끊임없는 소리를 쏟아 냈다.먼저 차에서 내린 주민혁은 우산을 펼쳐 최수빈과 두 아이를 품 안으로 감싸듯 보호하며 빠른 걸음으로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따뜻한 노란 조명이 정면에서 쏟아졌다. 난방기에서 나오는 훈기가 비에 흠뻑 젖은 몸을 감싸며 산속에서 묻어온 한기를 조금씩 밀어냈다.그런데도 최수빈은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여전히 주민혁의 몸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그의 젖은 옷은 아직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고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를 맞은 데다 정서적으로 크게 흔들린 탓인지 얼굴빛도 조금 창백했다.하지만 그 눈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덮쳐 올 위험에 대비하는 짐승처럼 말이다.그 모습을 본 최수빈은 마음이 아파 손을 뻗어 주민혁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일단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 아직 몸도...”“밥부터 먹자.”주민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최수빈의 말을 끊었다.“애들 배고플 거야.”율이와 시후는 실제로 오래전부터 배가 고픈 상태였다. 산길에서 폭우를 맞고 놀란 마음까지 겹친 탓에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최수빈은 더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라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민혁을 따라 호텔 안쪽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이 호텔은 교외에 얼마 없는 조용하고,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고급 리조트 호텔이었다.원래는 그녀가 마음을 달래고 잠시라도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Read more

제1539화

주민혁의 말투는 자연스러웠다.평범한 가족이 외식하러 나온 것처럼 메뉴판을 들어 최수빈에게 건넸고 움직임도 차분했다. 겉으로는 조금의 긴장한 티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최수빈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놓인 그의 손이 이미 조용히 말려 들어가 있다는 것을.그리고 그의 몸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아주 미세하게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시선은 메뉴판에 머문 듯했지만 실제로는 레스토랑 안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이상한 낌새가 있는 몇 테이블의 사소한 동작까지 전부 그의 눈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그 사람들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한 테이블에는 남자 둘이 앉아 있었다. 어두운색 외투를 입은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으로 대화를 나누는 척하고 있었으나 휴대폰 화면은 계속 꺼져 있었다.그들의 신경은 온통 주민혁네 테이블에 쏠려 있었다.다른 한 테이블에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연인 같았으나 음식을 한가득 주문해 놓고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고개를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선은 정확히 최수빈과 아이들 쪽을 훑고 지나갔다.가까이 오지도, 말을 걸지도, 무언가를 시도하지도 않았다.어둠 속에 몸을 숨긴 늑대처럼,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는 듯이 그저 그렇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런 말 없는 감시는 직접적인 협박보다 더 섬뜩했다.율이는 아직 어려서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지 못했다. 그저 분위기가 조금 답답하다고 느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우리 언제 밥 먹어요?”하지만 시후는 율이보다 훨씬 예민했다.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불안과 혼란을 겪어서인지 주변의 악의와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나이답지 않게 예리했다.시후는 말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작은 손은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고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시선은 무심코 낯선 사람들 쪽을 스쳤고 눈빛 깊은 곳에는 티가 나지 않을 만큼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
Read more

제1540화

최수빈은 자신이 다치는 건 두렵지 않았다.두려운 건, 곁에 있는 두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일이었다.그리고 겨우 조금 안정된 주민혁이 정서적으로 다시 자극받아 무너져 버리는 일이었다.그때, 테이블 아래에서 주민혁의 발끝이 최수빈의 발끝을 가볍게 건드렸다.이건 두 사람이 미리 정해 둔 신호였다.최수빈의 심장이 순식간에 목 끝까지 치솟았다.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들지 않았고 미리 약속한 대로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율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목소리는 최대한 다정하고 자연스럽게 했다.“율이, 시후야. 우리 배부르니까 이제 방에 가서 만화 볼까?”율이의 눈이 반짝 밝아졌다.“좋아요!”시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불편한 곳을 떠난다는 걸 알아차린 듯, 작은 몸에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주민혁도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움직임이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것이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얼마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인 뒤 한쪽 팔로 율이를 안아 올렸다. 또 다른 손으로는 시후의 손을 잡았다.그렇게 두 아이를 자신의 몸 앞으로 단단히 세워 보호막처럼 감싼 것이다.최수빈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의 가방을 챙기고 주민혁의 곁에 바짝 붙었다.그 모든 과정에서 두 사람은 조금도 허둥대지 않았다.뛰지도 않았고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경계하는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그저 저녁을 다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부부처럼,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게 행동했다.하지만 그들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살얼음판을 내딛고 있는 것 같았다.그들이 몸을 돌린 순간, 수상한 테이블들에서도 곧바로 움직임이 일었다.휴대폰을 보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그들의 뒷모습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연인인 척하던 남녀도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몸이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운 것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올 준비를 하
Read more
PREV
1
...
152153154155156
...
15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