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541 - Chapter 1550

1586 Chapters

제1541화

그 사람들의 수상한 시선과 조용한 감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네 식구가 심종연의 눈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만 해도, 최수빈은 두려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무서워하지 마.”주민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갑게 식은 손을 꽉 잡았다. 손끝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내가 있잖아. 놈들은 못 들어와. 너희한테 아무 일도 없을 거야.”그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그리고 그 온기가 최수빈의 흔들리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주는 듯했다.“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어.”주민혁은 목소리를 낮추고 현재의 상황을 빠르게 짚어 나갔다.“그 사람들, 그냥 동네 양아치 같은 놈들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미행하는 놈들이야. 움직임도 은밀했고 시선도 정확했어. 목표가 분명했지. 바로 우리 가족이야. 레스토랑에서 바로 움직이지 않은 건 CCTV와 목격자들 때문이었을 거야. 우리가 방심하길 기다렸다가 객실이나 인적 드문 곳에서 덮치려는 거겠지. 심종연은 내가 지금 너와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알아. 그래서 무작정 자기한테 달려들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바로 그걸 이용해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거야.”듣고 있던 최수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몇 번이고 훑고 지나갔다.그녀는 줄곧 심종연이 루안타에서 사라진 뒤, 당분간은 국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들을 찾아내고 다시 손을 뻗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심종연의 교활함과 잔혹함을 최수빈은 너무 얕잡아 보았다.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판을 깔아 두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이 스스로 덫 안으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최수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경찰에 신고할까요? 아니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지금은 나가면 안 돼.”주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고 산길도 험하잖아. 호텔 밖으로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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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2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강지안은 차 안에 앉아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창문을 열어 두었지만, 밤바람으로도 가슴속에 점점 응어리져 가는 화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룸미러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단정했다. 선이 또렷한 눈매에는 쓸데없는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았다. 다만 눈빛만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원래라면 그녀가 지금 이런 상태일 이유가 없었다.며칠 전, 강지안은 이미 모든 절차를 마쳤다.국경없는의사회 지원은 통과되었고 교육도 끝났으며 비자도 나왔고 일정표도 확정되어 있었다.조금만 더 있으면 강지안은 전쟁 지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었다.그녀의 온 청춘이 담긴 이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다.강지안은 의사였다.의대에 처음 들어간 순간부터, 그녀가 뼛속 깊이 새겨 온 신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국경도 편도 없다는 것이었다.그건 순간적으로 충동이 일어 내린 선택이 아닌,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 온 길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정이 확정된 뒤부터 계속 누군가가 뒤에서 강지안을 막고 있었다.항공권이 아무 이유 없이 한 차례 취소됐다.예약해 둔 건강검진센터에서는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다며 그녀의 정보를 찾지 못했다.심지어 친구에게 부탁해 준비해 둔 해외 응급 의약품마저 택배 보관소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니 막힌 모든 절차의 끝에는 결국 한 사람이 있었다.장성훈, 그는 한때 강지안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켰고 그녀의 한마디라면 목숨이라도 걸며 달려들듯 굴었었다.온 세상이 강지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는 당연히 그녀의 뒤에 서 있을 거라 믿을만했다.강지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빛에는 차가운 결심만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장성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시내에서 가장 폐쇄적인 프라이빗 클럽이었다.돈이 있다고 아무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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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3화

몇 년 사이, 장성훈은 예전보다 훨씬 더 차분해졌고 차가워졌으며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예전에는 무의식중에도 늘 강지안을 좇던 눈이, 이제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긴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 단정하고 순한 화장, 밝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조용히 장성훈의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사람처럼 보였다.강지안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장성훈의 약혼녀이자 집안에서 정해 준 상대라고 했다. 만난 지는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은 이미 이 바닥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있었다.강지안이 갑자기 나타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굳어 버렸다.누군가는 몰래 눈빛을 주고받았고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다들 알고 있었다. 강지안과 장성훈이 어떤 사이였는지.그 둘은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보다 가까웠고 십 년 동안 얽히고설키며 생사의 고비까지 함께 넘긴 사이였다.그런데 지금 장성훈은 약혼을 했고 강지안은 이런 자리에 불쑥 들이닥쳤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고 팽팽하게 얼어붙었다.강지안을 본 장성훈은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차갑고 무거운 얼굴로 돌아왔다.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강지안은 방 안 가득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곧장 장성훈 앞으로 걸어갔다.그러더니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똑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차분했지만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장성훈.”그녀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설명해.”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누가 봐도 그녀는 좋은 뜻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다.장성훈은 손끝에 담배를 끼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여긴 왜 왔어요?”“내가 안 왔으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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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4화

“고작 걱정돼서라는 말 한마디로,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그 말에 약혼녀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해서는, 억울하다는 듯 장성훈을 바라보았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모두가 알고 있었다.강지안은 겉으로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보여도,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그리고 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예전의 장성훈이 강지안을 얼마나 아꼈는지.그야말로 강지안이 무엇을 하든 다 받아 줄 만큼, 지독하게 감싸고 돌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장성훈은 마침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곧게 선 큰 몸이 강지안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짓눌렀다.예전 강지안을 바라볼 때, 장성훈의 눈빛 어딘가에는 늘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 눈빛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냉기만 남아 있었다.“내 일에 이 사람 끌어들이지 마요.”그가 입을 열었다. 첫마디부터 제 곁에 있는 약혼녀를 감싸는 말이었다.순간 심장이 따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픔의 정도가 크진 않았으나 이상할 만큼 깊숙이 남았다.‘정말 달라졌구나.’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성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해 한 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국경없는의사회에는 못 갈 겁니다.”“내가 왜 못 가?”강지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장성훈의 시선을 받아쳤다.“그건 내 직업이고 내 꿈이고 내 인생이야. 너랑은 상관없어. 네가 약혼한 그날부터,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다고.”그녀는 한 글자씩 딱 잘라 말했다.“장성훈, 이제 너한테는 네 약혼녀가 있고 네 가족이 있고, 네 삶이 있어. 내 길에 끼어들지 마. 끼어들 자격도 없으니까. 난 어떤 이유로든 네 간섭을 받을 생각 없어.”그녀는 단호했다.후회 없이 말했고 숨김없이 말했다.하지만 그렇게 말할수록 마음 한구석은 조금씩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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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5화

하지만 결국 강지안의 앞을 가장 잔인하게 가로막고 있던 벽은 장성훈도, 그의 약혼녀도, 세상의 시선도 아니었다.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어릴 때부터 그녀를 아끼고, 지켜 주고, 의대에 가겠다는 고집도 받아 주고, 제멋대로 구는 것까지 눈감아 주며 그녀가 어디든 마음껏 뛰어다니게 해 주었던 바로 그 아버지 말이다.그가 이렇게 단호한 방식으로 그녀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강지안을 건너뛰고 장성훈을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다.장성훈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강지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팽팽하게 조여 있던 마음 한구석이 결국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말이 강지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하지만 어떤 일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끝까지 말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저 혼자 짊어지는 수밖에 없었다.강지안이 마치 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간 사람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무려 십 년 동안, 장성훈은 강지안을 지켜 줬고 감싸 줬고 믿어 줬고 곁에 있어 줬다.그런데 이제 그는 강지안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준 칼을 쥐고 아주 가볍게 찔렀을 뿐인데도 정확히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꿰뚫었다.곁에 있던 약혼녀가 급히 앞으로 다가오더니 강지안을 부축하려는 듯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달랬다.“지안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희는 다 지안 씨를 위해서...”강지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눈빛이었다.그리고 그 한 번의 시선에 약혼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말했잖아요.”강지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놓지 앉은 것이었다.“내 일은, 그쪽이랑 상관없다고.”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보지 않았다.장성훈도, 방 안 가득 굳어 버린 친구들도, 한때는 뼛속까지 익숙했던 이 공간도 보지 않았다.대신 몸을 돌려 등을 곧게 펴고 한 걸음씩 밖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가느다란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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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6화

장성훈은 밖으로 나온 뒤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손가락에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 한 개비를 낀 채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희뿌연 연기가 손끝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가 창밖에서 스며든 찬바람에 금세 흩어졌다.그는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서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 그 안에 어떤 감정이 고여 있는지 쉽게 알아챌 수 없었다.담배는 독하기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목을 조여 올 만큼 매캐한 연기였지만 그는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한 모금, 또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담뱃재가 값비싼 수제 양복 바지 위로 떨어져 작은 검은 자국을 남겼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먼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사람을.휴대폰 화면은 꺼진 채 넓은 책상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메시지도, 전화도 없었다.몇 년째 늘 이런 식이었다.그는 강지안을 원했다. 강지안의 사람, 강지안의 시선, 강지안의 전부가 온전히 제 것이기를 바랐다.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들끓는 사랑만큼은 죽어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 약했다. 너무 쉽게 약점이 되고 너무 쉽게 휘둘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장성훈은 자신의 약점을 남 앞에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강지안 앞에서는 더더욱.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는 더 차갑게 굴었다. 더 강압적으로 더 지독한 소유욕으로 그녀를 옭아맸다.마치 그래야만 틈만 나면 달아나려는 그 여자를 자신이 정해 둔 감옥 안에 단단히 가둘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 손끝을 뜨겁게 지지고 나서야 장성훈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그는 손을 들어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으로 미간을 천천히 눌렀다.담배를 피우면 안 됐다. 특히 강지안이 담배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더욱.하지만 자신을 혐오하는 강지안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가 몰래 의학 서적을 뒤적이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고 먼 곳과 자유, 의사라는 꿈을 향한 갈망을 숨기지 못하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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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7화

“성훈 씨.”민채영은 장성훈의 등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안 들어가? 내가 탕 끓여 왔는데 차 안에 있어.”장성훈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에는 흔들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무슨 일이지?”단 다섯 글자, 예의는 있었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에 가까스로 남아 있던 약혼자라는 관계마저 깨끗하게 밀어내 버렸다.민채영이 손끝에 힘을 주자 품에 안고 있던 코트 자락이 살짝 구겨졌다.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별일은 아니야. 이렇게 늦도록 안 들어가길래 걱정돼서. 밖에 바람도 많이 불고. 그래서 외투 하나 가져왔어.”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 코트를 그의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그러나 장성훈은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틀어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필요 없어.”장성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운 것이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민채영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민망하고 처참했다.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나 그녀는 애써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쉬어. 난 먼저 가볼게.”장성훈은 대답하지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민채영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녀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사무실을 나섰다.문이 조용히 닫히자 사무실 안은 다시 죽은 듯 고요해졌다.장성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굳게 다문 얇은 입술이 차갑고 날 선 선을 그렸다.민채영, 약혼녀.모두 우스운 말이었다.이 혼약은 그저 눈속임에, 귀찮게 달라붙는 여자들을 막아 내고 강지안을 제 곁에 더 안전하게 숨겨 두기 위한 방패에 불과했으니 말이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는 단 한순간도, 아주 조금이라도 민채영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웃을 때 눈매가 곱게 휘고, 눈동자 안에 빛이 가득하던 어린 소녀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다만 장성훈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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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8화

장성훈은 강지안에게 단 한 번도 어떠한 이름을 주지 않았다.집 앞에 도착한 강지안은 열쇠를 꺼냈다. 그런데 막 열쇠를 자물쇠에 꽂으려는 순간, 따뜻하지만 강한 손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거센 힘이었다.깜짝 놀란 강지안은 온몸이 굳어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그때 어둠 속에서, 낮고 서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강압적인 목소리였다.“움직이지 마요.”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숨결...그 순간 강지안의 온몸에서 피가 식는 듯했다. 장성훈이었다.‘얘가 왜 여기 있는 거지?’강지안은 홱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늪처럼 깊고 어두운 남자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그는 강지안의 등 뒤에 서 있었는데 큰 키와 넓은 어깨가 그녀를 통째로 그림자 속에 가둔 듯했다.장성훈의 한 손은 강지안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이미 문짝을 짚고 있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완전히 막아선 것이다.그가 문을 가로막고 있는 탓에 그녀에게는 제 집 안으로 숨어들 권리조차 없었다.강지안의 마음이 조금씩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눈동자에는 짙은 혐오와 피로가 번졌다.이윽고 그녀는 있는 힘껏 손을 빼내려 하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장성훈, 놔.”“안 놔요.”장성훈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선을 단 한 치도 떼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뜨겁고도 미쳐 있었다. 마치 그녀를 통째로 삼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집착에 가까운 소유욕이 그 안에서 들끓었다.“아가씨. 우리 얘기 좀 해요.”“난 너랑 할 얘기 없어.”강지안은 고개를 돌렸다. 미워하면서도 아픈, 저 얼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비켜. 집에 들어갈 거야.”“집이요?”장성훈이 피식 비웃었다.“여기가 아직도 아가씨가 마음 편히 숨어 있을 수 있는 집이라고 생각해요?”그가 손끝에 힘을 더 주자 강지안의 손목은 찢어질 듯 아팠다.“기어이 그렇게 위험한 곳까지 가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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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9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출국은 안 돼요. 아가씨, 날 더 자극하지 마요.”강지안은 장성훈을 바라보았다.“장성훈. 꺼져.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단 한순간도 보기 싫어. 꺼져!”마지막 두 글자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듯 터져 나왔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절망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장성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섭게 굳었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강지안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마요. 국경없는의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아요?”장성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제발 철 좀 들어요. 몇 살인데 아직도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요? 내가 있는 한, 아가씨는 못 나가요.”말을 마친 그는 거칠게 강지안의 손목을 놓아 버렸다.너무 세게 뿌리쳐진 탓에 강지안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등이 문짝에 세게 부딪혔다.장성훈은 무서울 만큼 복잡한 눈빛으로 강지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고통, 원망, 사랑, 집착, 광기...그 모든 감정이 뒤엉켰다가 끝내 차갑고 사나운 기운으로 가라앉았다.이윽고 장성훈은 몸을 돌리더니 더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모습은 곧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강지안의 손목에서는 그가 남긴 붉은 자국이 저릿저릿한 통증을 몰고 왔다.하지만 강지안은 그것보다 가슴이 만 배는 더 아팠다.왜.대체 왜 그가 자신에게 이래도 되는 걸까.왜 자신은 이렇게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걸까.억울했다.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강지안은 오래도록 울었다. 눈물이 다 마르고 목이 쉴 때까지 울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문을 열고 작고 낡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바깥의 어둠과 냉기가 차단되었다.장성훈이 몰고 온 숨 막히는 압박감도 함께 끊어 낸 듯했다.얼마 후, 강지안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곧장 짐을 싸기 시작했다.간단한 옷가지, 중요한 책 몇 권, 그리고 서랍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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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0화

장성훈, 그 세 글자가 마음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았다.강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을 내리깔고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감췄다.그는 그녀의 경호원이었다.그녀가 열다섯 살이던 해부터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킨 경호원이었다.그렇게 어느새 꼬박 십 년이 흘렀다.십 년이면 작은 묘목도 하늘을 찌를 만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시간이었다.그리고 매일같이 곁을 지키며 생긴 정이 소리 없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심장을 휘감는 덩굴이 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뽑아낼 수도 잘라낼 수도 없었다.건드리기만 해도 아팠다.강지안보다 세 살이 많은 장성훈은 열여덟 살에 강씨 가문으로 들어왔다.그때 그는 막 특수부대에서 전역한 뒤였는데 꼿꼿한 자세는 소나무 같았고 눈빛은 매처럼 날카로웠다.말수는 적었지만 강지안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면 언제나 가장 먼저 나타났다.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장성훈은 한마디 말없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세상의 모든 악의를 제 몸 하나로 막아 내듯 말이다.한밤중 갑자기 고열이 났을 때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병원까지 뛰어갔다.그리고 밤새 병상 곁을 지키며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연회장에서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붙잡혔을 때도 그는 조용히 다가와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 상대를 물러서게 만들었다.강지안이 고집을 부리며 한밤중에 바다를 보러 가겠다고 했을 때도 장성훈은 말없이 차를 몰아 바닷가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러고는 밤새 그녀가 두서없이 털어놓는 속마음을 조용히 들어 주었다.장성훈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행동은 누구보다 빈틈없었다.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고 그에게 그녀의 말은 곧 명령이었다.전에 강지안은 장난처럼 몇 번이고 말하곤 했었다.‘장성훈, 이렇게 계속 내 곁만 따라다니면 평생 네 인생은 없는 거야.’그럴 때마다 장성훈은 눈을 내리깔고 낮고 안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가씨를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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