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민채영은 이를 악물었다.‘오늘 밤 성공하기만 하면, 성훈 씨가 날 한 번이라도 안아 주기만 하면, 이 자리를 굳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강지안이 기억을 잃었든, 성훈 씨의 보호를 받든 상관없어. 이미 성훈 씨와 몸을 섞은 여자를 상대로는 이길 수 없을 테니까.’민채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슴속 긴장과 속셈을 꾹 눌러 삼키고 얼굴에는 부드럽고도 매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가벼운 걸음으로 장성훈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강지안은 침실 욕실에서 씻고 있을 것이고, 성훈 씨는 분명 밖에서 지키고 있겠지? 마침 잘됐어.’민채영은 그 틈을 파고들 생각이었다.다정하고 배려 깊은 척, 사려 깊은 척 다가가서 강지안이 나오기 전에 그를 유혹해 데려오면 됐다.하지만 침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살짝 열려 있는 문틈으로 봤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소리가 들려왔다. 강지안은 아직 안에 있는 것이었다.‘어? 성훈 씨는 어딨지?’민채영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이내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오히려 잘됐어. 손님방으로 가서 기다리면 되니까.’그렇게 민채영은 몸을 돌려 복도 끝, 장성훈이 자주 머무는 빈 손님방 쪽으로 걸어갔다.손님방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진 채, 민채영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가더니 뒤돌아 문을 닫았다.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어 창밖에서 스며든 희미한 달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곧 그녀는 단번에 장성훈이 막 욕실 문 안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몸에는 검은색 수건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 허리에 느슨하게 묶인 수건 아래로는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상체가 드러나 있었는데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피부 위에 맺혀 달빛 아래 선명한 근육 선을 따라 흘렀다.평소의 그는 늘 말끔한 정장 차림에 차갑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이렇게 흐트러지고 노골적으로 남자의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민채영은 순간 숨이
자존심 강한 모습도, 고집스러운 모습도, 차갑고 도도한 모습도 보았었다.장성훈을 미워하고, 그를 욕하고, 심지어 목숨이 꺼져 가던 모습까지도 보았었다.하지만 약하고, 순진하고, 그런데도 위험할 만큼 아슬아슬한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그는 뿌연 수증기에 젖은 강지안의 피부와 가늘게 떨리는 어깨,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눈빛, 목욕 수건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선까지 또렷이 볼 수 있었다.그녀는 장성훈의 뼛속 깊이 새겨진 사람이었다.십 년 동안 사랑했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자 한밤중 꿈에서조차 감히 손대지 못했던 그리움이고 십 년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 온 마음과 욕망이었다.몸은 이성보다 먼저 반응했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본능적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강지안을 품에 끌어안고, 눈가에 맺힌 물기를 입맞춤으로 닦아 주고, 그동안 눌러 왔던 사랑과 죄책감을 모조리 쏟아 내고 싶었다.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장성훈은 강지안의 눈빛에 어린 낯섦과 두려움, 혼란을 보았다.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그들의 과거도, 얽히고설킨 시간도, 그의 사랑도, 그의 증오도 기억하지 못했다.지금 강지안의 눈에 장성훈은 그저 느닷없이 욕실에 들이닥친 낯선 남자일 뿐이었다.장성훈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흐트러졌던 이성이 순식간에 돌아왔다.그는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더는 볼 수 없었기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남자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이더니 쉰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안 나오시길래 혹시 쓰러진 건 아닌가 걱정돼서...”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조용히 힘을 주어 쥐어졌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속에서 들끓는 욕망과 가슴을 찢는 걱정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강지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었다.왜 장성훈을 보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이렇게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넓은 별장 안이 갑자기 텅 빈 것처럼 고요해졌다.강지안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손끝을 말아쥐었다.기억을 잃은 뒤로, 그녀는 이 거대한 집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분명 화려하고 안락한 공간인데도 정교하게 꾸며진 새장 같았다. 공기마저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장성훈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못한 채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조용히 강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깨어난 뒤로 그는 줄곧 이랬다. 날카로운 발톱을 전부 숨긴 맹수처럼 남은 것은 조심스러운 기색뿐이었다.“위층 방에 욕실이 따로 있어요.”그녀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 그의 목소리를 아주 낮고 부드럽게 했다.“물 온도도 맞춰 뒀으니까 피곤하면 먼저 씻고 쉬어요.”강지안이 고개를 들어 장성훈을 보았다.그 눈빛은 여전히 맑고도 멍했다.요 며칠 그녀는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쳤고, 몸에는 아직 병원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기에 확실히 따뜻한 물로 씻고 싶었다.강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강지안이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성훈은 가슴 한구석이 조용히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아 왔다.강지안은 어릴 적 장성훈의 뒤를 졸졸 따라오며 밝게 웃던, 자존심 강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소녀였다.그리나 그에게 갇힌 뒤에는 차갑고 완고해졌다.걸음 하나하나에 원망과 증오가 배어 있었다.그러다 약물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감정도 남지 않은 듯 텅 비고, 순순하고, 사랑도 미움도 담기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장성훈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손끝으로 무릎을 두드렸다.머릿속에는 강지안이 깨어난 뒤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만 계속 맴돌았다.낯설고, 멀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마치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 말이다....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놈은 민채영을 매수할 수 있었고 아가씨에게 독을 먹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끔찍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은 저를 의심해도 됩니다. 싫어해도 되고 불안해해도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저 말고는, 목숨까지 걸고 아가씨를 지킬 사람은 없다는 걸요. 민채영? 그 여자는 아가씨가 하루빨리 죽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밖에 있는 경호원과 고용인들? 그 사람들은 돈을 받고 일할 뿐입니다. 심종연의 적들? 그들에겐 각자 목적이 있기에 아가씨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두지는 않을 겁니다. 오직 저뿐이에요. 저 장성훈만이, 진심으로 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가씨를 무사히 살리고 싶은 사람입니다.”“아가씨를 제 곁에 두려는 건 가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제 눈앞에 있어야, 다음 순간 또 누군가 튀어나와 아가씨를 해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별장의 모든 보안 권한을 두 분에게 공개하겠습니다. 언제든 사람을 보내 감시해도 되고 마음대로 확인해도 돼요.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심종연이 잡히기 전까지만, 제가 지킬 수 있는 곳에 아가씨를 두게 해 주십시오. 모든 위험이 사라진 뒤, 아가씨가 떠나고 싶다고 하면 절대 막지 않겠습니다. 아가씨가 평생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저도 영원히 아가씨의 앞에서 사라질 거예요.”그의 말은 솔직했고 무거웠다.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최수빈은 입을 열어 반박하려 했으나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장성훈이 한 말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이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는 개인적인 감정도, 지난 원한도, 믿고 못 믿고의 문제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강지안의 안전이었다.그리고 강지안에게 가장 큰 안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성훈뿐이었다.주민혁은 장성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이번 한 번은 성훈 씨를 믿어보죠. 하지만 오늘 한 말
2층 방.확실히 민채영의 말대로 방은 넓고 밝고 조용했다. 아늑하고 편안하게 꾸며져 있는 것이 필요한 물건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통유리창은 열려 있었다. 살랑이며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강지안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 정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여전히 어딘가 멍했다.장성훈은 그녀의 뒤에 서서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슴 안쪽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번졌다.이곳은 한때 그가 강지안을 가둔 감옥이었다.그녀를 절망 끝까지 몰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죽음만 바라보게 만들었던 곳이자 누군가 그녀에게 독을 먹여 하마터면 영영 떠나보낼 뻔했던 곳이었다.장성훈은 다시는 그녀를 이 아픈 장소로 데려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지안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마음에 안 들면 다른 방으로 옮겨도 돼요.”장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머물기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도 되고요. 말만 하세요.”강지안은 고개를 돌려 장성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여기 좋네요.”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모든 것이 마음 한구석을 텅 비게 만들 뿐이었다.장성훈은 강지안의 맑고 순한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섰다.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강지안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거리에서 멈춰 섰다.“아가씨, 전에...”그 잔인했던 과거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장성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결국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아가씨한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잖아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뭘 하고 싶어 하든 다 괜찮고 어디를 가고 싶다 하든 막지 않을 거예요. 절 보기 싫다고 하면 아가씨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요. 전 그저 아가씨가 무사히, 몸을 잘 회복하기만 바라요.”강지안은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늘
최수빈은 눈을 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한 시간 뒤, 차량 행렬이 천천히 장씨 가문 별장으로 들어섰다.차가 부드럽게 멈춰 서자 장성훈이 먼저 내려 반대쪽으로 돌아가 강지안이 내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그 손길은 마치 그녀가 건드리기만 해도 깨질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천천히. 서두를 필요 없어요.”그가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지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강지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하고 화려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환경은 좋았다.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웠고 정원은 넓었으며 공기도 맑았다.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답답함이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이곳은 한때 네 악몽이었다고, 마치 본능이 강지안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민채영은 이미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연한 색감의 롱 원피스 차림에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딱 알맞은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고 품위 있었으며 흠잡을 데 없이 현명한 안주인의 모습이었다.장성훈이 강지안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민채영의 눈가에 어두운 기색과 불쾌감이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그 순간은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짧았으나 민채영의 속은 이미 뒤집히고 있었다.‘왜? 도대체 왜? 강지안이 기억을 잃었는데도, 왜 성훈 씨는 강지안을 이 집으로 데려오는 거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폐인이나 다름없는데도, 왜 여전히 성훈 씨의 시선은 전부 강지안에게만 향해 있는 거냐고. 명색이 정식 약혼자인 난 왜, 마치 남처럼 서서 자기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조심스럽게 떠받들고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데?’분한 마음에 민채영은 이를 악물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조금도 티를 낼 수 없었다.이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