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421 - Chapter 430

604 Chapters

제421화

‘하 이사님처럼 급이 다른 인물을 만난 데다 연락처까지 주고받았다고?’주민혁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와인잔을 입에 댔다.“세상의 모든 자리가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야. 익숙한 관념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지.”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진승우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아 이마를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최수빈은 하승현과 대화를 나눈 뒤 많은 걸 배운 듯 보였다.그러자 주기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젊을 때는 뭐든 부딪쳐봐야 해. 우리 주씨 가문은 착취하는 집안이 아니니까. 네가 바깥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 들었을 때, 나도 기뻤다.”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처음에 네가 우리 주씨 가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고 나섰을 때, 고맙게 생각했어.”그렇다고 해서 최수빈이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걸 붙잡을 사람도 없었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였다.세상이 매정하다고 느껴졌고 운명은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그렇다.예전에는 주민혁을 사랑했었다.주씨 가문을 위해 한 모든 일이 힘들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주기훈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지, 결혼생활에 관여하지는 않았다.“감사합니다, 아버님.”주기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식구끼리 뭘 그렇게 정중하게 굴어. 네가 이 집에 시집온 지도 벌써 5년이지만 우리가 얼굴 마주한 건 몇 번 안 되지. 그래도 넌 주씨 가문의 며느리니까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집안을 대표한다는 걸 항상 잊지 말고 신중하게 움직여라.”최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권력 있는 집안에서는 모든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걸.특히 지금처럼 주기훈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주기훈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한 눈빛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민혁이는 원래 성격이 차가워. 그 아이 옆에 있으면서 많이 힘들었겠지.”이건 물음이 아니었고 그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재차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주변이 떠들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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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2화

“게다가 너희 시아버지가 오늘 한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명백한 신호야. 겁내지 말라는 뜻이지. 네 뒤에 그분이 있다는 걸 알려준 거야. 법이나 규율만 어기지 않는다면 뭐든 도와주겠다는 거지.”최수빈은 당연히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었다.주기훈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답게 원칙을 중시하고 대의를 따르는 사람이었다.그런 태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엄격한 기준이 가정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었다.그게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주씨 가문이 어떻든 간에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주민혁이 아직도 너희가 이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건, 너로서는 주기훈이라는 인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최수빈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나는 더 이상 그 집안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아. 오늘 분명히 아버님이 나를 위해 나섰던 건 맞아. 하지만 그게 나를 위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그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저울이 그분의 마음속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뿐이지.”그건 단지 지금 이 상황에서 입장이 같았기에 주기훈이 최수빈의 편에 섰다는 뜻일 뿐이었다.주기훈 같은 사람은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그녀가 주민혁과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주기훈을 직접 마주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그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육민성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수빈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주기훈 같은 인물은 위치가 높을수록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지. 무심코 던지는 법이 없고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하지만 그 전제는 네가 주씨 가문의 며느리일 때 성립된다는 거지. 이미 이혼했잖아. 그런 사람을 이용하려 드는 건 현명한 수가 아니야.”육민성은 탁자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우리는 우리 실력으로도 충분히 올라설 수 있어. 굳이 누구의 힘을 빌려 쓸 이유도 없고.”송미연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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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3화

“과제 분리가 아주 철저하네.”송미연이 감탄하듯 말했다.결정을 흐리면 결국 상처 입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그래서 최수빈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단호해질 수 있었다.육민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세상에서 제일 깨어있는 사람이야.”그날 밤 셋이서 이야기를 나눈 뒤, 전화를 막 끊은 최수빈이 곧 심종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주씨 가문 창립 기념 행사에서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떴었는데 수빈 씨한테 인사도 못 했네요. 그런데... 수빈 씨가 그 주 대표님 아내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혀 눈치 못 챘는데...]그 메시지에는 놀라워하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놀랄 만도 했다. 아니, 사실상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이번 일로 사교계 전체가 들끓었다.박하린은 공식적으로 ‘상간녀’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고 아무리 그녀가 주민혁과는 남매 같은 사이라고 해명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최수빈은 지그시 입술을 다물었고 예의상 간단하게나마 답장을 보냈다.어쨌든 예전 온천에서 거짓말을 했던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개인적인 이유로 미리 말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심종연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괘씸하게 여긴 건 아니에요. 그냥 놀랐을 뿐이지. 오늘은 일찍 쉬어요.]최수빈은 더 이상 답을 보내지 않았고 휴대폰을 내려둔 뒤, 조용히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더 이상 주씨 가문 일로 머리 싸매는 일은 없었다.다음 날 아침.최수빈과 송미연은 간단히 짐을 챙겨 협력 논의를 할 회사와의 미팅을 위해 출발했다.511연구원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천공연구원 쪽의 다른 과제들 역시 일정대로 차질 없이 나아가야 했다.천공연구원은 단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집중하는 조직이 아니었고 기술팀만 해도 여러 파트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었다.이번 미팅도 제조사 쪽과의 협업 건이었다.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을 잡아 회사 로비에 도착했고 나올 즈음엔 벌써 오후 1,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협의는 매우 순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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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4화

최수빈은 송미연의 말을 듣고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굳이 인수합병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어. 정말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건 스스로 자초한 일일 뿐이겠지.”‘내기 계약’이라는 건,결국 승패가 갈리는 싸움이다.이미 조건에 명시되어 있는 만큼, 그들은 이길 수밖에 없고 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그리고 박하린은 실제로 주상 그룹 창립기념 행사 때 벌어진 일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원래라면 북적였을 이 투자 설명회조차 이름도 생소한 작은 회사들이 듬성듬성 참석한 수준이었다.박하린은 무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묘하게 굳은 표정을 지었지만 억지로라도 미소를 유지하며 제품의 기능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적어도 지금 이 제품만큼은 충분히 혁신적이었고 시장에서도 앞서 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직접 제품을 시연하기 시작했다.규모는 작지만 이 자리에 온 이 작은 회사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게 하고 입소문이 나면 자연히 협력 요청도 따라올 거라 계산한 듯했다.송미연은 반쯤 눈을 가늘게 뜨고 무대 위 제품 설명과 시연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그러다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말이야... 저 시스템 데이터, 어디서 본 듯한데? 저런 기술적 특징들... 너무 낯익지 않아?”최수빈은 말없이 무대 위 시연에 몰입한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정말 익숙했다.이 기술 설계안과 관련된 논문 자료들 전부 자신이 직접 쓴 논문에서 따온 내용이었으니 말이다.“헐, 잠깐만...!”최수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송미연이 갑자기 외쳤다.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최수빈을 돌아봤다.“지금 박하린이... 네 걸 베낀 거야?!”송미연은 곧장 소매를 걷어붙였다.“당장 고소하자. 회사 말아먹게 만들어야지. 아니다, 지금 내가 무대 올라가서 전부 까발릴게.”그녀가 무대로 성큼 나서려는데 최수빈이 팔을 잡았다.“왜 말려? 지금이야말로 따져야 할 때 아니야? 이대로 뻔뻔하게 도용하는 걸 놔둬?도용도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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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5화

최수빈은 미간을 주무르며 진승우를 한번 쳐다봤다.“가끔은 정신과보다 뇌과를 먼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랫동안 멍청하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건 좀 안쓰럽네요.”이 말을 남기고는 송미연의 손을 끌어 밖으로 나갔다.진승우는 코웃음을 치며 그 뒤통수를 바라봤다.도둑이 제 발 저리는 반응쯤으로 여기는 듯한 모양이었다.밖으로 나오자 송미연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대체 뇌라는 게 있기나 한 거야? 그러니까 본인 머리로는 아무것도 못 만들고 맨날 남의 걸 베끼지.”설마 박하린이 자신의 기술까지 베껴갈 줄은 최수빈 역시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사실 논문이라는 건 발표된 이상, 누군가의 참고 자료가 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하지만 최첨단 신기술 시스템의 운영 코드를 통째로 가져간다는 건...최수빈으로서도 도대체 그 소스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의문이었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본격적으로 자료를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고 철저하게 정리해 고소 준비에 들어갔다.송미연의 말에 따르면 이번 표절이 입증되기만 하면 넥스트 테크의 모든 프로젝트는 즉시 중단된다고 했다.회사의 프로젝트가 멈춘다는 건 곧 운영 체인 전체가 마비된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내기 계약의 결과도 분명해질 것이다.최수빈은 틈틈이 경제지 뉴스를 훑어보았다.넥스트 테크의 이번 발표회 내용도 기사화되었지만 댓글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차가웠다.[요즘은 상간녀도 회사 차리는 세상인가? 남의 남편 돈으로 만든 회사라며?][실력 하나 없는 게 자기가 정실인 줄 착각하고 남들까지 속여? 정실부인 타이틀로 얼마나 이득을 봤을까...][저 여자 정체를 모를 사람이 없지. 남매 타령하면서 남의 남편한테 들러붙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원.][이런 여자는 너무 많아. 남자 등에 기대서 사는 거 말이야. 능력도 없으면서 유학파 박사 타이틀? 돈 주면 나도 산다.]하나같이 독하고 날이 선 댓글들로 요즘 세상에서 ‘불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무자비에 가까웠다.‘상간녀’라는 타이틀이 확정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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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6화

박하린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두통을 달랬다.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의 평판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는 회사 전체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오늘 아침, 비서에게서 여러 협력사들이 줄줄이 계약을 취소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들의 말로는 주기훈이 압박을 넣었다고 했지만 사실 주기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날 창립기념행사에서 누가 며느리인지만 밝혔고 박하린을 내쫓았을 뿐이었다.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걸 말해주는 셈이었다.이 바닥에서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눈치만 조금 보면, 분위기만 읽을 줄 알면 누구든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지금 이 시점에 넥스트 테크와 협업하겠다고 나서는 쪽은 그야말로 진짜 멍청이일 것이었다.그래서 해지할 수 있는 계약은 죄다 해지됐다.물론 기술력에 관심을 보였던 일부 업체에서는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이익률은 형편없이 낮았다.누가 봐도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하이에나들이었다.박하린은 분노로 인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단 한 번의 창립기념행사 때문에 지금껏 자신이 쏟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줄은 몰랐다.그녀가 공을 들여 개발해 온 신기술마저도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사겠다고 했다.‘대체 다들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결코 값싼 사람이 아니라고.’지쳐버린 얼굴, 힘 빠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엄마... 지금 이 상황에서 제발 저 좀 그만 괴롭혀요. 저도 최선을 다해 해결하려고 한다고요..”조윤미는 주식 그래프가 곤두박질치는 걸 보며 점점 표정을 굳혔다.원래도 회사는 넥스트 테크에 보조금까지 쏟아붓느라 여유 자금이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주가 폭락까지 겹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내가 널 괴롭히는 거라고? 지금 네가 온 집안을 말아먹게 생겼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주민혁한테 얼른 전화해. 혼자 해결 못 하는 거면 약한 척이라도 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거 아냐!”조윤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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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7화

주민혁의 차가운 반응은 오히려 박하린의 마음을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무언가 확신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무의식중에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입술을 살짝 다문 채,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지금 온라인에서 실시간 검색어며 여론이 시끄러운데... 오빠랑 주씨 가문 쪽에는 아무 영향도 없어?”“응?”주민혁은 천천히 서류 한 장을 넘기며 느긋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박하린의 숨이 턱 막혔다.“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넥스트 테크한테는...”눈치 빠른 사람들끼리는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고 주민혁 역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여론 때문에 회사 수익에 타격이 갔다는 말이지?”박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내 기술, 우리 회사...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어.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루머들 때문에 모든 게 망가지게 두고 싶진 않아.”그녀는 절박했다.이번에 못 일어서면 영영 짓눌리게 될 터이니 말이다.지금 무너지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고 박하린은 아직 그 내기 계약을 기억하고 있었다.‘질 수는 있어. 하지만 최수빈한테는 절대 질 수 없지.’“민혁 오빠, 나... 정말 오랫동안 버텼고 노력했어. 이런 터무니없는 루머 때문에 무너지고 싶지 않아.”주민혁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회사가 영향을 받는 건, 네가 사장이기 때문이지.”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제안했다.“그럼 지금 사장직에서 물러나는 건 어때?”직책에서 내려오면 당연히 여론이 회사에 줄 영향도 최소화될 것이었고 여론이 잠잠해진 후에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비용도 적고 손실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하지만 그것은 박하린이 원하지 않는 선택이었기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지금 물러나면 그게 바로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잖아. 오빠도 알면서 그래. 우리 사이, 아무 일도 없었단 거.”그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박하린의 가슴은 더욱더 조여왔다.“...민혁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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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8화

주기훈은 박하린에 대해 내내 그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주민혁 역시 아버지 쪽의 반응을 늘 신경 쓰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이건 내 일이야.”박하린은 순간 말을 멈추고 그의 말이 가진 함의를 곱씹었다.‘내 일’이라 함은 아버지와는 무관한 일이며, 주기훈이 관여하지 못할 문제라는 뜻이었다.이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그냥... 오빠 아버지가 우리 사이에 혹시 오해가 있으실까 봐. 시간 괜찮을 때 식사라도 한 끼 하면서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금 이 관계를 한 걸음 더 내디디려면 더 이상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이쯤에서 확실히 선을 넘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주민혁이 자신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다른 어떤 여자들과도 분명히 달랐다.그가 보여주는 세심한 배려와 행동 하나하나는 분명한 신호였다.지금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호감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이고 뭐가 호감이겠는가?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서는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하지만 주민혁의 행동들, 그 모든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이번 질문도 사실 간접적으로 떠보는 것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였다.“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짧은 말이었지만 박하린의 불안하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았다.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은 그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설명이나 해명 따위가 필요 없는, 당연하고도 명확한 것이라는 뜻이었다.설령 그의 아버지 앞이라 해도 말이다.박하린은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주민혁은 정말로 함께할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사건이 터졌지만 분명히 주민혁은 이 상황을 타개할 준비도 다 되어 있을 것이었다.주민혁과 회사 관련 몇 가지 이야기들을 더 나눴지만, 그는 집중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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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화

“네, 나랑 오빠는 결국 결혼할 거예요.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지.”이렇게 믿고 있었으니 박하린은 그 누구보다도 눈부시고 성대한 결혼식을 기다릴 수 있었다....다음 날.전날부터 이어진 여론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실시간 검색어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최수빈이 천공에 도착했을 때, 송미연은 여전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뉴스를 읽고 있었다.“왔어?”송미연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제까지만 해도 댓글들이 다 박하린을 욕하더니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 바뀌었네.”최수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박하린은 주민혁의 ‘소중한 사람’이었다.그 정도 여론쯤이야, 주민혁이 알아서 수습할 것이 분명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그녀는 자리에 앉아 데이터를 펼쳐 확인하며 말했다.“댓글 알바들 고용했을 거야. 그래도 사람들은 다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있지 않겠어?”송미연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사실 그녀도 그게 사실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온라인에서 박하린을 두둔하는 글들을 보면 도저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진짜 웃기지 않아? 너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어. 박하린이 소피아에 비길 만하다고? 하, 걔한테 백 년을 줘도 너는 못 따라오지.”이어 몇몇 황당한 댓글들을 읽어주며 투덜댔다.“국가가 박하린을 통해 비상할 거라고? 진짜 걔한테 나라가 맡겨졌으면 벌써 망했지.”최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실력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일수록 그런 식으로 올라가려고 하지.’그러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하고 싶어 한다면 그냥 하게 둬.”이미 권성우 측에서 기술 표절 건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최수빈은 화제를 돌렸다.“우리가 신세계 그룹이랑 협력 중인 정부 프로젝트 2단계, 이제 두 주 차니까 중간보고하러 가야 해. 일정 좀 잡아.”송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연락했어. 그쪽 일정 봤더니 모레가 가장 빠르대. 그래서 내일은 회의부터 잡았어. 그리고 오늘 넥스트 테크가 또다시 설명회를 연다던데? 또 한 번 자금 유치하려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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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0화

진승우의 그 한마디는 애매한 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음량이었고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 말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최수빈한테 대체 왜 그런 조롱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무슨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처럼 구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주상 그룹의 창립기념 행사 이후로 주민혁과 최수빈이 혼인 관계였다는 건 이미 업계 대부분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 상태였고 그 사실은 박하린 역시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오늘처럼 다시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나설 때마다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에는 어딘지 모르게 경계와 의심이 섞여 있었다.마치 모두가 속으로 단정 지은 듯했다.남의 가정을 파탄 낸 그녀는 뻔뻔한 상간녀라고 말이다.“원래 주 대표님 옆자리는 사모님이 않아야 하지 않나?”누군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불만을 토로했다.“어디 감히 저 자리에 앉을 낯짝이 있다고...”그 말들이 들리는 순간, 박하린의 속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제 명패는 여기 있습니다. 정부 쪽에서 지정한 자리니까 불만 있으면 위에 가서 따지세요.”박하린은 날 선 시선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저는 이 자리에 정당하게 앉아 있는 거고 누구의 자리를 뺏은 적도 없습니다. 부부라고 무조건 나란히 앉아야 한다는 규정도 없고요. 저는 주민혁 대표님과 남매 같은 사이이고 친구이며 사업 파트너입니다. 이 자리는 그런 관계에 따라 배치된 거예요.”“그리고 제가 상간녀라는 증거라도 있으신가요?”말끝마다 칼날을 숨기고 있는 것이 더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공개석상에서 이 정도로 날을 세우는 일이 없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이 정도로 대놓고 사람 머리 위에 올라서려 드는데 참을 이유도 없었다.박하린의 눈빛에는 냉기마저 서려 있었다.그 순간, 주민혁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 최수빈 쪽으로 옮겨졌다.그러자 마침 눈이 마주쳤고 그 눈길에는 묘하게 탐색하는 듯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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